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2. 2. 24. 22:55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목적지는 같지만 출발점과 과정은 다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불교신문이 마련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교리적 근거와 차이」에 대한 공개 담론은 두 다른 전통의 수행법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개진된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논의는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지엽적인 논의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서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을 교학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간화선 수행자들은 간화선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지만 위빠사나는 낮은 단계의 소승불교 수행법이라고 폄하한다. 반대로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지만 간화선은 중국 송대(宋代)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체계화시킨 종파불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린다.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는 두 수행 전통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잘못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각자 나름대로 그 교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매우 훌륭한 수행법임을 먼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수행법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 과정을 거친 거의 완벽한 수행법임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어떤 지엽적인 문제만 갖고 두 수행법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타당성을 획득하겠지만, 전체적인 차별성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관계는 단순히 수행법의 차이로만 한정시킬 수 없다. 두 다른 전통의 교학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간화선은 대승불교 사상을 기초로 중국이라는 문화적․역사적 배경에서 체계화된 수행법이다. 반면 위빠사나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의 교리와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우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점부터 살펴보자.

 

첫째,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인간 이해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간화선은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래 부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닦아야 할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온갖 번뇌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그 번뇌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번뇌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 간화선은 급진적 수행법(rapid progress)이고, 위빠사나는 점진적 수행법(gradual progress)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간화선은 돈오(頓悟)에 역점을 두고 있고, 위빠사나는 점수(漸修)에 역점을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은 위빠사나도 돈오라고 말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한결같이 점차적 수행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청정도론󰡕에 제시한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과 팔리 맛지마 니까야의 󰡔마읍대경(馬邑大經)󰡕에 나오는 17단계의 수행과정 등이다.

 

셋째, 간화선은 직관적 수행법이고, 위빠사나는 분석적 수행법이다. 간화선에서는 분석에 의한 분별지를 낮추어 보고, 직관에 의한 무분별지를 최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빠사나(vipassanā)는 그 어원 자체가 ‘분석해서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사물의 특성인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간화선 위기는 수행법 자체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분석적 교육을 받고 자란 현대인들에게 화두에 대한 의문, 즉 대의심이 발로되지 않는데 있다고 본다. 이것이 간화선을 위기로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넷째, 간화선은 깨달음을 중시하고, 위빠사나는 닦음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간화선은 마지막 단계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중간 단계는 거의 무시된다. 오랜 수행을 하고도 별 진전이 없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힘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반면 위빠사나는 닦음 자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닦는 만큼의 이익을 얻는다.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의 근거를 들지 않더라도 수행한 만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나아지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위빠사나의 가장 큰 장점이다. 최근 서양과 우리나라에서 위빠사나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처럼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전혀 다른 교학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의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모습으로 변질되기 이전의 순수한 조사선(祖師禪)과 남방선(南方禪)은 둘 모두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관겸수(止觀兼修)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법은 계․정․혜 삼학(三學)의 체계와도 일치하는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다.

 

그리고 남방선에서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원리를 꿰뚫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한다. 조사선에서는 상(常)․낙(樂)․아(我)․정(淨)이라는 역설적인 언표로 표현된 동일한 원리를 깨달아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또한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모두 마음 챙김을 중요시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를테면 간화선의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인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단(大疑團)과 위빠사나의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 등의 오근(五根) 혹은 오력(五力)은 말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의 수행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그 교학적 근거가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목적지는 같지만 출발점은 다르다. 이처럼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각자 고유한 수행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 특징을 최대한 살리도록 장려하는 것이 오히려 불교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화선만이 한국불교의 전통선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선의 본질에서도 벗어난 잘못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그 보다는 현재의 간화선 수행자와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잘못된 수행관을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 중에는 불성(佛性)사상과 무아(無我)사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참나(眞我)를 찾는 것이 간화선인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간화선의 힌두화를 의미하는데, 역대의 눈밝은 선지식들이 누누이 경계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유통되고 있는 위빠사나는 미얀마 마하시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수행법은 초기경전에 근거한 전통적인 수행법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테크닉(기교)을 중시하는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수행으로 잘못 정착되고 있는데, 이러한 기교 위주의 위빠사나 수행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두 다른 전통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수행법이다. 따라서 어느 수행법이 더욱 좋다는 식의 주장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또한 상호간에 남의 수행법을 비하하거나 폄하하여 서로 적대시하는 풍조도 한국불교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차라리 차별성을 부각시켜 드러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내어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도록 제시해 두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두 수행법의 장점만을 취하여 하나의 수행법으로 만들겠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간화선도 죽이고 위빠사나도 죽이는 꼴이 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라 할지라도 이론과 실천 혹은 교리와 수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수행법 가운데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 수행하기를 권한다. 그러면 결국 동일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불교신문》제2018호, 2004년 3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