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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삐리 2012. 8. 12. 22:30

[펌]올림픽, 정신

 

 


 

 

 

 

 

 

인종차별 반대 퍼포먼스를 펼치는 카를로스(오른쪽),토미 스미스,피터 노먼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기 쉬운 분야는 단연 스포츠다. 그리고 스포츠라면 역시 인류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이다. 60년대 초반 힘을 모으기 시작한 블랙파워 운동이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였다.
무하마드 알리가 징집을 거부하며 미국 정부와 두려움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던 1967년 미국의 흑인 선수들은 ‘인간의 권리를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 OPHR)’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당초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스포츠를 통해 국내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어떤 거짓으로 국제사회에 선전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단체에 소속된 대부분의 흑인들은 다른 탈출구가 없이 올림픽 출전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평생을 살아온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올림픽 보이콧이 쉽게 결정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렇다고 투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회 이틀째 남자 200m 금메달리스트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 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검은 장갑을 끼고 검은 양말에 운동화를 신지 않은 채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순간 그들은 고개를 떨구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높이 쳐들었다. 마치 나찌식의 경례를 하는 것처럼.


검은 장갑과 검은 양말은 ‘블랙파워’의 상징이었다. 또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은 미국에서 가해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린치와 흑인들이 안고 있는 빈곤 문제를 표현한 것이었다.


처음 영문도 모르고 단상에 올랐던 호주의 백인 단거리 선수 피터 노먼도 즉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관중석으로 달려가 OPHR을 응원하는 관중들로부터 배지를 받아 자신의 가슴에 달고 시상대로 돌아왔다. 100마디 웅변보다 더 강한 동참의 표시였다.


이를 바라본 미국 사회의 시선은 냉담했다. 시상식이 치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메달을 박탈당했고 올림픽 선수촌에서도 쫓겨났다. 미국 언론들은 올림픽 정신을 훼손시켰다고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미국 올림픽 단원 가운데 그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전원 백인들에다가 전원 하버드대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인으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지위와 평등한 권리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미국 올림픽 단원의 일원으로 우리의 팀메이트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리기 위해 한 행동에 지지를 표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선수들의 반응도 크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400m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와이어미아 타이어스는 “내 금메달을 존 카를로스와 토미 스미스에게 바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럼 그토록 물의를 빚은 OPHR이 올림픽에 앞서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세 가지를 요구했다.

당시 미국 올림픽 위원장인 에이브리 브런디지의 퇴진이 그 중 하나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데지아의 올림픽 출전 금지도 그 안에 포함됐다. 브런디지는 소문난 백인우월주의자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데지아는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국가였다.


그리고 그들이 내건 또 하나의 목표가 바로 무하마드 알리의 복권이었다. 전세계에 미국의 인종차별을 알리고 미국의 베트남전을 반대한 알리를 다시 세계 챔피언을 인정하고 그에게 다시 복싱을 계속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 OPHR이 내건 세 번째 조건이었다.


비록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정부와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음에도 알리는 이미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올림픽에서도 반전과 인류 평등을 상징하는 심볼이 돼 있었던 것이다.



반면 멕시코시티 올림픽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 두 명의 흑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존 카를로스나 토미 스미스와는 반대의 편에 서 있었다.



한 명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4관왕에 오르며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제시 오웬스고 한 명은 평생의 알리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던 조지 포먼이다.

오웬스는 어떤 면에서는 존 카를로스와 토미 스미스의 선배다. 단순히 육상선수로서 선배가 아니라 그들이 겪은 아픔은 30년 전 더욱 모질게 겪은 선배다. 올림픽 육상 4관왕이 됐지만 미국에 돌아온 오웬스는 일자리도 잡지 못했고 돈을 벌기 위해 경주마와 달리기를 하는 등 어렵게 생존해야 했다.


그런 오웬스의 역할은 브런디지의 명령을 받고 OPHR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회에 앞서 OPHR소속 선수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기도 했다. 오웬스는 흑인선수들이 저항의 표시로 신고 있던 검은 양말에 대해 혈액순화에 좋지 않으니 벗으라고 말해 반발을 샀고 결국 그는 자신을 가장 존경해야 할 선수들로부터 모임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조지 포먼은 당시 올림픽 복싱에서 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그는 결승전에 앞서 선수 소개를 할 때 작은 성조기를 들고 링에 올랐다. 바로 브런디지와 미국 사회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더구나 포먼은 존 카를로스와 토미 스미스와 같은 흑인이었으니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던 미국에게 포먼의 그런 모습은 천군마와 다름 아니었다.


물론 포먼이 성조기를 들고 링에 오른 건 카를로스와 스미스가 검은 장갑을 끼고 시상대에 오른 것처럼 정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포먼 자신의 표현처럼 자신이 어느 나라 국적인지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성조기를 들고 링에 오른 포먼의 모습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해석됐다.


게다가 카를로스와 스미스로 대표되던 OPHR은 알리의 복권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포먼과 알리의 운명은 이미 그 때부터 엇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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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나는 베트콩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

 

 

세계 스포츠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정치적 표현 행위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당시 미국 육상 선수들의 검은 선서였다. 남자 200m 금메달리스트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 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검은 장갑을 끼고 검은 양말에 운동화를 신지 않은 채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순간 그들은 고개를 떨구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높이 쳐들었다. 검은 장갑과 검은 양말은 ‘블랙파워’의 상징이었다.

미국의 흑인선수들의 검은 선서에 동참한 호주의 백인 선수

이미 미국의 흑인 스포츠 선수들은 1967년 ‘인간의 권리를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60년대 내내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흑인 인권 운동이 스포츠 영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화제를 모았던 것은 같이 시상대에서 오른 호주의 백인 육상선수 피터 노먼이 즉석에서 그들의 정치적 행위에 동참하여, 흑인 인권을 상징하는 뱃지를 달았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선수촌에서 쫒겨나고 메달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함께 올림픽에 참여한 미국의 백인선수들마저 “자연인으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지위와 평등한 권리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미국 올림픽 단원의 일원으로 우리의 팀메이트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리기 위해 한 행동에 지지를 표시한다”고 지지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선수들 내에서는 큰 지지를 받았다.

이들이 내세웠던 것은 당시 최고의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복권이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 베트남 전의 참전을 거부하여 미국에서 복싱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에 알리는 반전 평화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알리, “나는 베트콩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

알리가 징집을 거부한 이유는 “나는 베트콩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I ain’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였다. 알리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미국 내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차별을 받고 있는데, 최소한 베트콩들은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군지도 모를 저 멀리 있는 베트콩들과 싸우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등의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에 미국 정부와 알리의 후원그룹들을 중재안을 찾기 시작했다. 과거 2차 대전 때 당시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가 했던 것처럼 군입대는 하되, 후방에서 시범 경기만을 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제대하는 방안이었다.

미국 정부에게나 알리에게나 서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적당한 절충안이었다. 미국 주류 사회의 공적으로 지탄받던 알리로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복싱 훈련도 계속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목숨을 건 전장에 나서질 않아도 됐다.

그러나 알리는 이마저 거부했다. 결국 알리의 후원그룹인 ‘루이빌 스폰서링 그룹’의 담당 변호사는 “알리의 군 입대 거부는 단순히 고생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라며 그의 협상 거부를 최종 확인했다.

점차 정부의 압력이 거세지자 알리는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국내에서 흑인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로 하여금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나. 만약 내가 군대에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천200만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당장 내 스스로 입대할 것이다. 나는 알라신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내 신념을 지키는 한 나는 잃을 게 없다. 우리 흑인들은 이미 (노예로 끌려온 지)4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알리는 징역 5년 형과 벌금 1만달러를 부과받아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어준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 자리에서도 내려와야 했다. 알리는 “나는 결코 백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 명의 검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명의 검둥이. 백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검둥이 말이다.”라며 결의를 다진다.

미국의 흑인 스포츠 스타의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알리와 대비되는 선수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사례이다. 재키 로빈슨은 UCLA를 졸업하고 군대를 장교로 복역한 흑인 엘리트였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이 뛸려면 야구 실력 이외에 인내력과 의식을 갖추어야 했었다. 이에 가장 적격이 재키 로빈슨이었고, 그는 LA다저스에 입단하게 된다.

로빈슨이 경기장에 들어서면 백인 관중들은 로빈슨을 야유했고 상대 선수는 틈만 나면 로빈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가 안타를 치고 슬라이딩을 하면 수비를 하는 척 하면서 사정없이 스파이크로 로빈슨의 발을 밟았고 툭하면 빈볼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다저스의 팀동료들조차도 로빈슨을 내쫓아야 한다는 탄원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야구 실력으로 차츰 홈팬과 동료선수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는 상대 선수들이 모두 ‘검둥이’라는 단어를 합창하기 시작했고 로빈슨은 또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는 자선전에서 당시 심정을 “배트를 집어 던지고 필라델피아 더그아웃으로 돌진해 백인 한 놈을 잡아 분노의 주먹을 날리고 그냥 사라질 수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미 로빈슨의 실력을 인정한 다저스의 백인선수들이 먼저 필리델피아의 덕아웃으로 달려들어 그들의 야유를 중단시켰다.

1949년에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한 백인 우월 단체가 ‘경기 도중 로빈슨을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이에 다저스 주장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모두가 로빈슨의 등 번호 42번을 입고 나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키 로빈슨이 은퇴한 이후 이 등 번호 42번은 전 구단으로부터 영구결번이 되고, 재키로빈슨 데이 때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선수 누구라도 42번을 달게 하고 있다. 로빈슨의 소속팀이었던 다저스 선수들은 모두 42번을 달고 나온다. 로빈슨은 은튀한 뒤 흑인인권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자주 하곤 했다.

“내게 명예의 전당행 티켓과 미국의 일등시민이 될 티켓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 흑인 모두가 미국의 일등시민이 될 수 있는 티켓을 달라고 하겠다.”

무하마드 알리와 재키 로빈슨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스포츠 내에서 훌륭히 인권운동을 성공시켰다. 알리는 훗날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보복 공격을 지지하는 대사가 되어 미국과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을 설득을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가 반대한 베트남 전쟁과 달리 9.11 테러는 엄연한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었고, 흑인과 이슬람교도 역시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숙연해지는 마음~ 귀중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영상에 오류가 있네요. 피터 노만 선수가 은메달이죠.
글 잘읽고 갑니다.

일요일은 어떻게들 지내시는지요 전 뒹굴뒹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