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1. 31. 11:27

민주노동당이 2월 3일 당대회를 앞두고 갈등과 논란이 최정점에 이르고 있다. 심상정 비대위는 당대회 안건집을 공개하고 일명 ‘쇄신안’을 자신의 신임여부와 연계시켰다. 같은 당 노회찬 의원은 쇄신안에 대한 적극 지지 입장을 밝히며, 부결될 시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탈당까지 시사한 셈이다.


쇄신안의 핵심 내용은 소위 일심회 관련자 제명 건, 북핵 문제에 대한 입장, 당내 패권주의에 대한 해결책 등이다. 다른 내용들은 이미 다양한 곳에서 논쟁이 붙고 있으니 여기서 특별히 거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격렬한 논쟁 과정에서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정파등록제다.


정파 양성화를 위해 등록한 정파에게 인센티브 부여


정파 등록제는 그동안 평등파로 분류되는 몇 몇 정파에서 꾸준하게 요구해온 것이다. 쇄신안은 이를 전면 도입할 것을 밝혔다. 정파등록제는 당내 정파가 자기 정파의 구성원과 입장을 중앙당에 등록하고 정파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정파를 등록하게 되면 선거출마자 명단을 공개하고 당 외부 활동과 발언 규제 등의 의무가 부여된다. 당은 정파등록에 동참한 정파에게 당 공간을 사용하게 하고 당 매체 사용을 허용하는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정파에 대한 지원은 당규로 정하는 것으로 제안되어 있다.


또한, 이 단계가 지나면 등록된 정파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등록하지 않은 정파에 대해 패널티를 부여할 계획이다. 물론 이는 앞의 단계를 시행해보고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연 정파등록제가 진보정당이라 자부하는 민주노동당의 내부 민주주의를 도모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정파등록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히려 당내 민주주의를 역행시킬 것이다.


기존 정파의 기득권을 보장하고 일반 당원 참여 막아


첫째, 정파등록제는 기존 정파의 패권과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동시에 일반 당원의 참여를 오히려 가로막는 방식이다. 아마도 심상정 비대위는 현재 당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파들의 공개 활동을 유도하면, 일반 당원들이 각 정파의 노선과 정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 선택이 가능하리라 본 것 같다. 다시 말해 ‘누가 어떤 정파에 속해 있는지’ 당원들이 판단할 수만 있다면 정파 간의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실질적인 당운영을 정파활동에 별다른 관심도 정보도 없는 대다수 일반당원을 배제하고 기존 정파들만의 잔치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이미 현실은 그렇게 되었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지구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중앙으로 단위가 올라갈수록 특정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당원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 당원과 국민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 요구하는 혁신은 ‘이미 그런 현실’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파에 소속되지 않으면 당운영에 참여할 수 없는 바로 그 현실을 바꾸는 것이 민주노동당 내부민주주의 구현의 혁신방향이다.


그러나 정파등록제는 이런 요구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등록된 정파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은 반대로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당원에겐 패널티다. 만약 정파와 무관한 일반 당원이 당운영에 참여하고 싶다면 기존 정파에 기웃거리며 어떤 정파의 줄이라도 잡아야 한다. 정파에 소속된 당원과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당원은 당 공간 사용과 당 매체 사용에 있어서 출발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기존 정파의 기득권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당 내부에 또 다른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정치꾼들이 기성 정당에 공천자리 하나 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확신은 없다.


정파활동을 하지 않는 당원활동가를 잠재적 범죄 대상으로


둘째, 정파등록제 2단계에서 명시된 미등록 정파에 대한 패널티 조치는 당원을 잠재적 범죄대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도대체 ‘정파’의 기준이 무엇인가? 자주파니 평등파니, 내부의 인천이니 울산이니, 전진이니 자율과 연대니 하는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정파를 규정하는 것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기존 정파의 기득권 유지며, 혁신의 대상들이다.


미등록 정파에 대한 패널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일반당원이 당활동을 할 때 이 당원이 혹여 특정정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새로운 정파를 만든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감시에야 한다. 만일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패널티를 부여할텐가? 공정한 감시가 없다면 미등록 정파에 대한 패널티는 표적징계가 되고, 공정한 감시를 진행한다면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당원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역시 당활동에 의욕이 있는 무정파 당원이 택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은 가장 마음에 드는 특정 정파에 소속되는 것이다. 기존 정파 수장들의 권력이 기성 정치권의 보스정치처럼 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나친가?


민주적 토론이 차단 된 민주주의 혁신안?


마지막으로, 정파등록제 도입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토론 부재를 지적할 수 있다. 글쓴이가 위에서 지적한 내용들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글쓴이에게 정파등록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검토되고 수정되고 보완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러나 쇄신안 자체를 비대위 신임과 연계시켜 못 박고, 당내에서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쇄신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탈당까지 시사하는 마당에 민주적인 토론은 기대할 수 없다. ‘토론은 보장하나 결론은 바뀔 수 없다’는 고압적 자세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기우인가?

 

지금 민주노동당의 최대 혁신 과제는 일반 당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몇 몇 정파활동가들의 의지대로 당이 운영되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비대위 쇄신안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의제에 대한 이견도 ‘정파적’으로 규정하고, 문제해결도 ‘정파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진정한 내부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실험이 필요


민주주의는 어떤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내린다는 동일성의 원칙을 기본으로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참여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하는 것이지만, 규모가 확장되고 의제가 다양화되면서 이는 점차 어렵게 됐다. 이런 규모의 확장과 의제의 다양성은 불가피하게 ‘위임’정치를 낳는다. 대의원이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진보적인 위임정치에서는 위임받은 사람들이 항상 대중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 위임받은 자의 결정이 위임한 사람들과 다를 때, 대중이 이를 규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면 진보적 위임정치는 보수적 위임정치, 즉 소수의 과두제적 인사들에게 모든 권한이 완전히 위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진보적 위임, 진보적 대중 통제를 위한 노력들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람이 유권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활동하는 자유위임원칙에 맞서 철저하게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되는 명령위임원칙이 제기되었고, 지역 단위에서 소규모 총회의 결정권을 부여한 직접민주주의(총회)가 구현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에서 지역 단위의 총회는 성사가 어렵고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또한 심각한 갈등을 유발한 쟁점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배심원제를 응용한 시민의회가 제안되기도 했다. 여론조사를 확률비례추첨으로 진행하듯, 대중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추첨을 통해 깊이 있는 토론과 논쟁이 가능한 소규모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추앙받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심지어 행정관까지도 추첨으로 뽑았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참여율이 높았기 때문에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여성과 노예가 제외된 제한된 민주주의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평등하고 민주적인 권리부여가 높은 참여율을 낳았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파 간의 다툼이나, 정파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 공개하는 따위가 아니다. 지금 내홍을 겪고 있는 민주노동당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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