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2. 15. 13:07

정파를 넘어 내부 민주주의로

- 추첨 등 다양한 실험 시도해야 - 

 

 

최근 민주노동당의 갈등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정파의 ‘패권주의’를 입에 올렸다. 그러나 패권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나, 이를 혁신하겠다는 쪽이나 내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은 찾아볼 수 없다. 대안이라고 제시되는 것은 기존 정파의 기득권을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일반 당원의 참여를 가로막을 수 있는 ‘정파등록제’ 정도다.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진보정당에서 벌어지는 이런 논쟁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다시한번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진보세력의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근본적인 제도적 대안을 ‘모색’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위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내부 민주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기에 앞서, 우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 민주주의란 지배받는 자가 직접 지배한다는 동일성의 원칙을 전제로 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되는 민주주의의 전제는 매우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제외하고 특수한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모두 모여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규모의 문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는 ‘위임권력’을 창출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용되는 제도가 ‘선거’다. 먼저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와 동의어처럼 사고하고 있는 ‘선거'는 정말 민주적일까?

 

선거는 민주적인가?


원래 선거는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주고, 그 중에서도 특수한 능력(무엇보다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당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으로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을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지나며 선거권이 확대되고 후보에게 요구되던 재산 자격 요건이 사라지자 선거를 통한 대의권력이 민주정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신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모든 성인들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와 전적으로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선거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성격도 있지만 불평등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선거는 사회적 다수를 정치적 소수로, 사회적 소수를 정치적 다수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사회적 다수파에 대한 사회적 소수파의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의 일치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과연 ‘선출’되는 사람은 ‘선출’한 사람보다 뛰어난가?


선출된 대표는 선출하는 사람과는 사회적으로 다른 탁월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은 대의민주주의의 암묵적 전제였다. 선거는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출마)과, 유권자들의 후보들에 대한 선택(선거)이다.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몇몇 언어에서 똑같은 형용사가 탁월한 사람과 선택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후보자가 탁월하다는 것은 투표자들이 처해 있는 선택 상황에서 나온 것이지 실제 후보자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능력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서열화 된 학벌체계에 의존하거나 짧은 시간 제공되는 토론회(그것도 직접 관람하는 사람들에 한에서)에서 힌트를 얻어야 할 뿐이다.


어떤 후보자가 탁월한 가는 후보의 강령이나 정책, 즉 공약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공약은 후보의 능력을 드러내기보다 유권자의 가치에 맞춰 제시된 것일 뿐, 이후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공약은 단지 유권자의 선택에만 영향을 미친다. 돌아보라. 과연, 오늘날 ‘선출된 사람들’이 ‘선출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탁월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실제 투표행위는 탁월한 개인을 뽑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특정 후보가 감정적으로 더 좋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투표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후보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는 이유로 투표할 수도 있다. 즉 국민들은 갖가지 기준으로, 편파적으로 후보를 평가한다.


또한, 만일 선거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선거보다 ‘시험’이 더 훌륭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선거는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선거는 또한, 모든 후보자가 동일한 입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공직 기능을 담당하고자 하는 후보자들 중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소위 나머지 사람들보다 선호되는 사람이다.


선거운동은 ‘유명하다’고 표현되는 특정 행태의 탁월성이 갖는 이익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도화되었다. 다시 말해 미리 유명한 사람과 경쟁하는 덜 유명한, 혹은 이름 없는 후보를 위해 일정기간 동안 자신을 투표자들 앞에 노출시킬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유명인의 이점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남보다 잘 알려진 유명인은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에서도 일종의 선거 운동을 하는 반면, 다른 후보가 뛰어난 특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실제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주목을 끌기 어렵다. 

    

또한, 남보다 잘 알려진 어떤 개인과 선거에서 경쟁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보를 의식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용을 요구한다. 선거공영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일정 액수의 기탁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유한 사람이 가지는 이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미 유명한 사람과 무명 후보자에게 같은 금액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평등한 선거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선거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은 국민 다수의 권한을 위임하는 문제에서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선거’가 보편화되었어도 과거 귀족정과 같이 특수한 사회계급과 계층의 지배가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최소한의 통제(국민투표, 소환, 발안 등)가 보장되지 않은 완전한 위임민주주의 체제에서 비록 성격이 전혀 다른 정치세력이 격렬하게 경쟁하더라도, 일반 국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은 해결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대안들


그렇다면 이런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다운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가장 많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위임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를 제도화 하는 것이다. 흔히 대의민주제를 보완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적 기제로 알려져 있는 국민투표, 소환, 발안제가 대표적인 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위원회나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로의 참여예산제, 또는 노동자경영참가제 처럼 구성원이 의사결정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행정 집행에 까지 직접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가장 직접정치원칙에 부합하는 제도적 보완책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의미하는 ‘심의(deliberation)’과정만 제대로 보장된다면 최선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대안은 소규모의 정치체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모가 커지면 위임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물론 이렇게 등장하는 위임문제는 앞의 국민투표·소환·발안 기제를 통해 보완할 수 있지만, 심의 가능한 직접참여로 위임권력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에서 볼 때는 부족한 점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사체 민주주의가 제기되기도 한다. 결사체 민주주의는 개인, 가족, 국가, 시장, 자연 공동체와 구분되는 자발성에 기초한 사회집단으로서, 개인이나 가족을 국가에 연결시켜 주는 매개 조직인 결사체를 통한 자치(self-governance)를 제일의 사회질서 원리로 강조하는 것이다. 결사체 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은 공적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의 심의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대표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특정 결사체에 속하지 않은 개인은 의견표출의 기회가 줄어들게 되고, 사회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결사체를 통해 국가차원의 공적 문제결정에 개입하게 되면, 결사체 그 자체가 내부의 과두제적 경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사체 민주주의는 결사체 간의 경쟁과 투쟁이 격렬해질 때에도 소외될 수 있는 국민의 정치적 대표성은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진보정당의 내부 민주주의를 ‘정파등록제’ 따위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위와 같은 대안들은 지금의 엘리트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주의에 가까운 제도적 대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다 근본적인 제도적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바로 추첨을 민주주의에 적용하는 것이다.


추첨은 비과학적인가?


추첨을 민주주의의 제도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은 추첨의 비과학성에 대한 문제다. 과연 그런가?


추첨은 이미 우리가 매우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으로 국민전체의 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 추첨의 대표적 사례인 사회통계의 경우, 양적연구방법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최근에는 대략 2%오차로 선거 결과 등을 추정한다. 이제 여론조사 담당자들은 약 9천만 명이나 되는 유권자들의 행위를 추정하기 위해 불과 2천명만 면접하면 된다.

 

적은 수의 표본으로 전체 모집단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표본이 모집단과 동일한 변이를 갖게 하는 확률표집(probability sampling) 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확률표집은 모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표본에 추첨될 가능성이 동일한 경우에 표본은 그것이 추출된 모집단을 대표한다는 것을 원리로 한다. 이런 방식은 표본에 선정된 사람들이 그들이 선택한 모집단에 비춰 전형적이지도 않고 대표적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어긋남’(bias)을 줄여준다.

  

물론 추출된 표본은 모집단을 완벽하게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통계기법이 점차 발달해 오면서 여론조사 등에 이용되는 표본추출 방법이 모집단의 특성을 어느 정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특히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대표자와 비교해 확률표집되는 표본이 모집단을 더욱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가 확률표집과 같은 통계적 방식을 통해 국민을 특성을 반영하는 대표를 추려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들의 의사가 어느 정도 국민전체의 의사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즉, 이들은 ‘국민전체의 축소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민전체의 축소판을 의사결정의 주요 주체로 인정해야 하는가?


구성원(국민과 당원)의 의사가 최종 의사결정이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성원)의 심의적인 의사가 최종 결정과정에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지배와 피지배의 범위가 합치되는 동일성의 원칙을 핵심원리로 한다면, 당연히 어떤 중요한 국가적 문제의 최종 판단권은 국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서 구성된 대표에게만 권한을 주는 것은 리더십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잘 작동되지 않을 때 국민이 개입할 경로를 보장하지 않는다.

  

현재 행정부와 의회, 의회 내의 다양한 정당들이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과 공전을 경험할 때, 이런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단위는 헌법재판소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들의 갈등을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헌법재판소가 최종 판단하도록 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국민주권의 심각한 왜곡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최종 심판자는 헌법 전문가가 아니라 국민이어야 한다.

  

‘토론’없는 투표보다 토론이 보장된 의사결정이 더 민주적


물론 이런 사회적 갈등을 국민이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추첨을 통한 위임권력이 아니라 ‘국민투표’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규모를 축소해 한자리에 모아놔야 하는 것은 단순한 선호집락이 아닌 심도 있는 논의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입장을 청취하여 자기 입장을 수정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심의가 없는 동원투표(plebiscite) 방식은 시민들의 선입견을 강화하고 집단화하며, 생활세계의 권력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뿐 아니라, 엘리트들이 이를 쉽게 조작할 수 있어 의제를 통제하는 자가 의도한 대로 결과가 산출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심의 과정이 보장되면 다양한 상징조작과 정보 왜곡으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어떤 중요한 투표를 앞두게 되면 자연스레 심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심의는 국민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균형 있게 제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투표를 시행하기 전에 구성원 모두에게 관련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다 발전된 표본추출 방식을 통해 선출한 대의체계가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는 대표성이 있다면, 이 내부의 심의를 통해 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이는 어떤 정치성향을 가졌건 엘리트중심의 논의과정이 될 수밖에 없는 입법기관이나 행정기관에 비해 훨씬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게 된다.

  

누구나 통치할 수 있다는 민주적 이상에 가장 부합


추첨을 통한 위임권력의 창출은 선발과정의 민주적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 추첨을 통해 위임권력을 선출한다는 것은 이 방식 자체가 이해관계의 표명·결집·확인이라는 과정과 무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선출된 개개인이 애초부터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표·대의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현실 상황에서 중대한 변화다.

  

물론 아주 우연하게도 추첨을 통해 선출된 개인이 어떤 이해관계에 속해 있는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우연적 경우는 일정 시간 후 추첨을 통해 다시 위임권력이 구성되기 때문에 지속되지 않으며 항상 어떤 이해관계에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선거에 비해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런 이해관계를 가진 대표자들은 전체 위임권력 내에서 다수를 차지할 확률이 거의 없다.

  

통계방식을 통해 ‘모두가 선출될 동등한 기회’를 부여 받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재산, 혹은 사회적 평판을 요구한 선거에 비해 지배와 피지배의 일치라는 동일성의 원칙에 부합한다. 특별한 리더십이나 전문가적 능력은 행정 권력이나 관료의 충원에는 필요한 조건인지는 몰라도, 모든 위임권력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대중을 중심에 둔 건전한 정당·정파 간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정치에서 제도의 여백을 메우는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 리더십의 집단적 형태는 정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 날의 정당은 국민을 중심에 둔 리더십을 구현하기보다 대중을 대상화하고 내부그룹의 특수이익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정치도구로 전락했다.

  

대중을 중심에 두지 않는 활동 경향은 진보정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정파냐를 떠나 여전히 세력화된 파당의 이해관계와 의사에 따라 운영되며, 일반 구성원은 조직의 중요한 문제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는 각 분파가 내부의 격렬한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반 구성원들에 대해 호소할 동기가 부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대부분 기존 세력관계에 따라 선출된 정파구성원의 숫자 싸움으로 귀결되는 제도 내에서는 이미 ‘심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출석비율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에 심의는 ‘설득’ 기능을 상실한 요식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일반 당원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으니 그들을 설득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구성원을 대표하는 추첨 방식을 통해 주요 의사결정주체가 구성되면, 각 파당의 경쟁은 평범한 보통 구성원의 의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모든 경쟁은 상대 정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상적인 정치활동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일반 구성원들 또한 각 조직의 ‘관객’이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 ‘주체’가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추첨이 보장하는 동등한 당첨기회와 이렇게 부여된 위임권한의 빈번한 교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소외 때문


앞에서 논의한 제도적 대안들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을, 혹은 내부 구성원을 운영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구성원의 ‘참여의지’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앞의 논의는 말뿐인 대안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평범한 구성원’의 일반적 습성이 아니라 엘리트민주주의의 결과물이다. 엘리트주의자들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사라지는 이유를 엘리트, 전문가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보통국민은 정치와 같은 골치 아픈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편안하게 사회생활을 즐기면 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국민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오히려 경계하고 나쁜 현상으로 간주한다.


황당하지 않은가?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정치‘꾼’들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스스로 그것을 바꿀 제도적 경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냉소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반대로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이 느끼는 문제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정치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높아진다.


선출된 리더십과 추첨된 민주권력의 결합으로 내부 민주주의를


추첨제도는 모든 선거 권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형성된 정치적 리더십과 추첨을 통해 형성된 국민권력을 결합하려는 시도다. 전문성이 민주성의 심의를 받는 것, 혹은 민주성이 전문성의 도움을 받는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추첨을 통한 민주권력의 창출을 당장 국가수준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보적 조직 수준에서 실험해 볼 수는 있다. 이 경우, 추첨을 통한 민주권력은 대표자나 전문적 간부가 아닌, 이들의 활동을 승인하고 함께 토론하는 ‘대의원’수준에서 출발할 수 있다.


보통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대의원대회 조차 이미 조직화된 정파별로 할당된(물론 선거라는 절차를 거친) 대의원끼리 참여하는 것이, 평범한 구성원을 우연적 요소로 선출하여 검토하게 하는 것보다 민주적인가? 전반적인 도입이 어렵다면 시범적으로 몇 개의 단체에서 적용해보고 문제점을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은 어떤 결정으로 영향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방향에서 꾸준하게 모색되어야 한다. 영향 받는 사람들의 관심과 아무 상관없는 싸움질보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건설적 논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