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그림.

손우정 2008. 2. 19. 10:51

공공성의 경제학 : 자유주의 대 진보적 공공성

(*이글은 "비평" 2007년 11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임)

조원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이 주요한 화두가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외환위기 이후 금융, 교육, 의료, 철도․전력 공기업 개혁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시장중심주의가 기조로 되어왔는데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가 이를 저지하고 대안을 제시할 때 핵심근거를 종종 공공성에서 구했다.

둘째는 시장이 경제와 사회로 확대․강화되자 성공한 집단과 실패한 집단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는데, 그것은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 명암을 달리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혼율, 자살률, 출산율, 가계재무 신용상태, 총수요 등에서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특정집단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성원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면에서 시장과 공공이익이 배치되는 것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시민들의 공공이익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공공성(commonality),’ 또는 ‘공공이익(public interest),’ ‘공동선(common good)’이라는 개념이 좋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자유무역, 자유시장이 확대․심화되면 공공성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가? 위축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진보적 가치의 중심으로 공공성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과연 그런지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공공성의 개념을 부인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공성 개념을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적극 수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운동은 자유주의적 공공성 개념과 진보적 입장에서의 공공성의 개념적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주도적으로 현실상황과 발전수준에 맞추어 그 내용과 목표를 고도화할 수 있어야 한다.


1. 공공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입장

먼저 자유주의의 입장을 보자.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조인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이 시장을 통해 이기적으로 자기이익만을 열심히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국부도 증진되어 전 사회의 이익이 극대화된다. 즉 개인이익의 극대화가 결과적으로 공공적 이익도 극대화시킨다.

사익과 공익은 구분되지 않으며 공익이란 사익의 총합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 통상적인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개인이익의 총합 이외에 어떤 더 고차적인 사회적, 공공적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시장 근처에 건달과 사기꾼들이 많게 되면 개인의 경제행위는 위축될 것이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치안과 재산권 보호가 모든 시장참여자(경제주체)의 공동적 관심사이며, 따라서 공동선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국가의 공공서비스는 한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개의 이익을 위해 구입하는 다른 일반재화나 서비스와 특별히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세금으로 경찰 서비스를 받는 것은 각자 돈 내고 점심 한 끼를 식당에서 사는 것과 비교하여 다른 국민과 함께 <공동으로> 그 서비스를 구매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개인에 우선하여 지속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라는 의미는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이론을 보면서 이 점을 살펴보자.


2. 공유지의 비극

자유주의 사상이 시장이 어떻게 사익을 극대화한다고 주장하는지는 하딘(Hardin)이라는 자유주의 학자가 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딘은 주인이 없거나 접근이 자유로운 공유지는 반드시 과다 이용되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유지인 경우에는 그 이용자가 100원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는 대가로 100원의 추가이익이 나오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원을 최적으로 이용한다.

이른바 한계비용=한계수익의 원칙 또는 효율성의 원칙이 작동하여 적절한 정도로 이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유지가 아닌 자기 목장에서 소 10마리를 키우다가 11마리로 늘렸을 때 추가한 1마리의 수익은 여전히 100원인데 비용이 110원이라면 당연히 10마리만 키울 것이다.

이에 반해 공유지의 경우에는 이 원칙이 파괴되어 과다 이용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유지의 이용에 지불되는 비용 100원을 사용자 본인이 아닌 공중이 지불하기 때문이다. 가령 공유지인 공원 혹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릴 경우 그 비용은 지방납세자가 공동 부담하는 것이지 쓰레기를 버린 특정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즉 공유지의 사용에 따른 비용은 상당 정도 타인에게 전가되므로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 쓰레기를 버린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는 일리 있는 생각이다. 사유재산과 시장이 있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좋은 예로 오늘날 득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사고를 더욱 확장하여, 돈을 주고 거래되는 자원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자원도 없는 세계, 즉 오직 사유재산과 그것의 거래시장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유토피아로서 묘사한다. 그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에서 모든 개인의 이익(그런데 그것은 정의상 그 자체로서 공공이익과 동일하다)은 극대화된다.

이렇듯,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공공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사적 이익의 총합으로서만 이해한다. 한미 FTA 협상의 경우에도 이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한미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국익(즉 공공성)의 증대란, 한미 FTA를 통해 사유재산권 원칙과 자유시장 원칙을 완전하게 관철시키게 되면 사유재산을 가진 자들과 그 시장참여자들의 사적 이익의 총합이 증대한다는 뜻이지, 사적 이익을 넘어선 어떤 더 높은 차원의 유익한 사회적 효과가 발생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만큼이나 자유시장 교리를 철두철미하게 신봉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한미 FTA의 정당성과 유용성은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에 대한 성스러운 신앙고백의 차원이며, 따라서 그것을 실사구시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한미 FTA의 예상 기대효과에 대한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학자들, 국책연구소들의 준비가 그토록 빈약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시장실패

물론 모든 자유주의 경제학이 시장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실패’라는 개념을 갖고 시장을 통해 사익이 극대화되지 않는 경우를 인정한다. 예를 통해 시장실패가 어떤 개념인지 알아보자.

어떤 사람이 정원에 예쁜 꽃을 가꾸는 경우 이 꽃은 그 사람뿐 아니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후생을 증대시킬 것이다. 즉 이른바 소비의 ‘외부경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공짜로 좋은 꽃을 보아서 즐거워할지 모르지만 이 집 정원의 꽃은 사실 동네사람들이 원하는 만큼보다 적게, 또는 덜 멋지게 공급된다.

왜냐하면 정원관리 비용은 집 주인만 내고 있으므로 그는 동네사람 전체의 후생(행복감)까지 고려하여 최고로 멋진 정원을 연출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원을 가꾸어본 사람이면 잘 알지만 그것이 오죽 돈이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인가?

그래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우에 구청이나 지방자치단체가 공원을 만들어 세금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세금으로 조성되고 관리되는 공공서비스가 더 효율적일 수 있음이 인정되는 ‘예외적인’ 경우는 이처럼 외부효과가 있는 경우뿐 아니라 자연독점, 재화의 비경합성이 존재하는 경우, 정보의 비대칭성과 불확실성이 심각한 경우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결론이 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그렇게 투박한 학설이 아니다!). 외부효과나 기타 시장실패의 경우에도 다시금 그 외부효과를 시장화할 수만 있다면 여전히 시장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미묘한 주장을 위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만약 꽃의 주인이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특별히 비용을 들이지 않고 징수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 사람의 정원은 더욱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할 것이다. 즉 외부효과로 인해 과소 공급되던 꽃이 이제 외부효과에 대한 시장이 만들어짐으로써(어려운 표현으로 외부효과를 내부화함으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공급될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은 코즈라는 사람이 정립한 코즈의 정리(Coase theorem)이다. 너무 간단한 이론으로 노벨상까지 받았으니 신기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겠으나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관람료 징수에 비용이 많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십중팔구 이런 관람료를 징수하려는 사람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로 대가를 지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나는 당신 정원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더구나 당신 정원의 꽃은 예쁘거나 마음을 즐겁게 하지도 않았다”고 우길 것이며, 심지어는 “당신 꽃 때문에 마음이 오히려 울적해졌다고 그 피해를 보상하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되고 동네 각자 집에는 보잘 것없는 소박한 정원이 유지될 것이다. 이럴 경우 자유주의 경제학은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면서 본래 자리로 돌아온다. 즉, 구청에서 멋진 공원을 조성하여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고 대신 지방세로 그 비용을 충당하면 이웃끼리 얼굴 붉히는 일도 없고 만사형통이라는 결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중지한 지점에서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전개했으면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에서 있을 법한 시나리오를 항상 좋은 쪽으로만 전개하고 멈추는 나쁜 습관이 있는데 우리는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항상 끝부분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세상에는 별 괴상한 사람이 많은 법이니 어떤 동네 주민은 꽃이 아니라 길을 마주한 앞 정원에 혐오감을 주는 괴기스러운 조각을 설치해놓고 사람들이 항의하면 “내 정원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버틸지 모른다. 이때는 거꾸로 이 길을 자주 지나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오히려 돈을 지불하여 이를 막는 것이 하루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데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E. K. 헌트라는 경제학자는 시장경제가 이렇게 고통의 극대화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조장할 수도 있음을 보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조화로운 작용을 보이고자 한 A. 스미스를 패러디하여 ‘보이지 않는 발(invisible foot)’의 폭력을 지적하였다. 사실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은 어느 나라나 있고 이들이 파는 ‘상품’이란 폭력과 공포 그 자체이다.

이 패러디는 무의미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시장의 작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필요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를 이 예를 통해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타인에게 명백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주는 행위(malign action)는 개인의 자유에서 배제하여 이런 행위의 만연에 의한 사회적 부조화/갈등의 격화를 제거하려면, 시장행위자 이외에 어떤 제3의 강제력이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란 극단적 자유주의가 주장하듯 일체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탄생하고 또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가의 사려 깊은 규정과 강제를 통해 성립한다.


4.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한 자유주의적 공공성 확대 운동의 예

2000년 16대 총선과정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전국 1천여 개 단체가 연대하여 ‘총선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부패ㆍ무능 정치인 낙선운동을 펼쳐 86명의 대상자 중 59명을 낙선시킨 바 있다. 이것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의 공급주체인 권력담당자들을 더 잘 선별할 수 있도록 정치적 환경을 개선한 것으로서, 그 자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한 것을 의미한다. 환경단체가 기업의 오염행위를 감시하고, 시민단체가 공공기관의 비리를 감시하는 활동, 소비자 권익침해를 고발하는 활동, 인권과 관련된 활동 등등은 모두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소액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치는 소액주주운동은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케인스주의, 또는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은 금융자본을 일정하게 억제하고 그들의 권리 특히 재산권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이 공익이라고 생각해왔다. 소액주주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기존의 사고에 반기를 든 것으로서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재벌개혁과 관련하여 이 운동이 전개되었고 재벌개혁은 과거 개발독재(중상주의)적 잔재를 제거하자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적이다. 그러나 재벌개혁의 수단으로 동원된 소액주주운동은 신자유주의적 공공성이지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권익운동이 아니며 더구나 진보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반동적이라면 그만큼 소액주주운동도 반동적 운동인 것이다. 이런 운동이 한때 진보단체의 공익운동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비극이기 이전에 희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철도․전력의 민영화 반대 운동에서 이들 서비스의 공공성을 근거로 제시한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전기를 예로 들어보자.

전기는 거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네트워크산업이고 모든 산업과 개인생활에서 전기는 단 1초도 공급이 중단되면 안 되는 필수재 중의 필수재이다. 또한 가격에 증대한다고 다른 대체수단을 찾기 힘든 면에서(즉 소비의 가격탄력성이 낮기 때문에) 전력회사가 투자를 의도적으로 감소시키면 가격이 폭등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지역에 여러 회사가 경쟁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독점적이다. 이런 것을 자연독점산업이라 하고 민간에 맡긴다고 독점의 폐해가 덜하다는 보장도 없다. 국가안보에도 영향을 주는 중요한 기간산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공성이 큰 이들 네트워크산업은 민영화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전형적인 자유주의 공공성에 해당한다. 그 자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격이 특별히 진보적인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민주노총에서 가끔 주장한 사회공공성 강화운동, 사회연대전략 등에는 상당 정도 종교적 나눔정신과 자유주의적 공공성 개념이 농후하게 배어 있다.



5. 자유주의적 공공성을 넘어선 진정한 공공성의 내용과 의제

진보적 정치경제학에서는 시장의 작동이 단지 예외적으로 사익의 극대화를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보지 않고 생산(부차적으로 소비)의 사회성으로 인해 시장은 거대하고 체계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다고 본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심화시키고 이것과 사적 성격의 모순을 강화한다고 본다. 생활의 불안정과 빈곤, 환경파괴, 실업, 지역불균등 발전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문제가 사회적 불안정과 정치적 대립을 낳고 자본주의체제 유지에 궁극적 책임과 권한을 가진 국가를 통한 공공성의 확대를 통해 해결을 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확보된 공공성은 사회성의 증대를 해결하는 자본주의적 형태라는 한계는 있지만 동시에 미래 대안사회의 원리를 많건 적건 내포한다.

따라서 공공성에 관한 진보적 의제는 무엇보다 이러한 비용을 사회화하자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선은 방어적,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요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은 공평한 것인데 시장원칙을 무효화시키는 복지 강화정책은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고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는 바로 이러한 논리를 깨야 하며 자본주의 질서유지를 위해, 하다못해 시장유연성을 재고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함을 지적해야 한다.

나아가 정치적 힘이 결집된다면 보다 공세적으로 공공성을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화가 더욱 진전되는 현시점에서 사회적 안전망과 <보편적 복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단지 시장실패자에 대한 보호(선별적 복지)를 넘어 일정범위에서 시장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성장과 복지를 선순환하도록 만들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공세적으로 주장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북구모델이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

둘째는 진보적 공공성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장이 억압하는 무한히 가치 있는 인간의 심성과 행위, 그리고 그 결과 발휘되는 사회적 효과를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가 야기하는 소외의 만연과 소비의 내용적 빈곤을 넘어서기 위해 공공의 영역이 강화되어야 함을 보여야 한다. 인간과 인간 간의 올바른 ‘관계’ 및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 자체가 발생시키는 효과를 강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진보적인 내용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위에서 즐겨 사용한 정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필자가 몇 년 전 1년을 살다 온 영국의 옥스퍼드 근처에는 그림 속 풍경보다 아름다운 마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온 마을이 꽃으로 가득하고 담장 하나도 옆집과 어울리게 하려고 신경을 쓰는데, 그 결과 향기 나고 그림 같은 마을환경이 만들어진다.

꽃피는 6월이 오면 집집마다 봄 내 가꾼 정원을 공개하는 행사가 여러 마을에서 펼쳐진다. 나도 이곳에 사는 영국 교수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여러 집을 순례했는데 이때 어떤 집들은 자기 집 정원의 꽃을 보러온 사람들에서 약간의 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돈을 자기수익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자선단체에 기부한다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차원 높은 공공이익이며 공공성이다. 즉 서로에 대한 배려가 승수효과를 발휘하여 모두가 10배 더 행복해지는 것 말이다. 이런 태도가 가져오는 객관적 효과를 직접 확인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고, 이러한 마음은 자신들이 보지도 못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받은 약간의 찻값 수익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6. 한국사회의 각박한 현실과 공공성의 위축

옥스퍼드에서 느낀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처럼 인구의 절반이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살고, 더구나 이 ‘성냥갑’을 나서게 되면 여러 사람들이 교류하는 ‘광장’이라고는 전혀 없는 생활환경과 극명히 대비된다. 하기야 인터넷의 발달로 가상공간에서 엄청난 교류의 장이 창출되고 있고 이 점에서는 단연 우리나라가 세계 으뜸이라고 하지만,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에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는 공공의 장이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두가 사적 이익 추구에만 광분하고 있고 생활공간은 편리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의 생활공간이 어우러지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공공적 효과를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괴기스런 콘크리트 숲 속에서 각박한 이기심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도로 포장률이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것은 세계적 기준으로 보자면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차 다니기 편한 것이고 인도가 없어 지금도 길, 특히 시골길에서는 차도 옆으로 걸어가다가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인도가 차도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 나라에는 여전히 생소한 일로 되어 있다. 돈으로 표시되는 경제적 성과에만 매달리다 보니 편리함과 비용절감, 속도만이 문제로 된 결과이다. 이러니 사람들의 심성은 더욱 각박해지고 공격적으로 되며, 외국인이 자주 지적하듯 평소에도 약간 화난 표정을 한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세계 30위정도 하는 한국 사람들이 행복지수에서는 세계 102번째라는 보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 자유주의 학자들과 보수적 이데올로그들은 교육의 사유화, 시장화, 개방화를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데, 그들의 주장대로 이 나라에서 교육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만드는 순간 수요자(학부모)와 공급자(학교) 모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일류대학 입학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학생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 것이다.

진보진영이 교육의 공공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육이 가진 내재적 공공성 때문이다. 즉 학교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 간의 비이기적, 비시장적 교류, 인간적 교류를 통해 지적․정서적 소통과 대화의 소양을 연마하는 곳이다. 이를 통해 장차 사려 깊고 책임 있는 시민(citizen), 즉 공인(public personality)을 양성하는 것이다.

교육이 시장판이 되면 이러한 일차적 임무는 사라질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대학입시라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가치는 사실 설 땅이 좁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공교육을 사설학원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리는 것, 이를 위해 교육투자를 늘리자는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입시자율화하거나 수준별 학습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마련이다(현격한 수준 차이 하에서는 모두를 만족하는 학습내실을 기할 수 없으므로). 특수목적고를 늘리자는 논리도 나온다. 평등권을 위해, 입시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평준화를 유지하자는 주장은 여기서 밀리게 마련이다.

왜? 과거 고등학교입시가 있었을 때 가난한 집 자녀도 좋은 고등학교 들어가면 학교교육의 질,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경쟁으로 과외 없이도 일류대 많이 간 것이 사실이고 논리적으로도 그런 상황이 충분히 예상된다. 오히려 평준화 폐지가 기회를 공평하게 한다는 이상한 사태가 도사리는 것이다.

입시과열? 입시가 없어도 학생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과외로 찌들어 있는데 더 이상 과열되기야 하겠는가? 필자가 평준화 폐지론자라서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공공성의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적 공공성에서 크게 나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


7. 공익성과 국가공동체의 역할

사익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아무래도 공공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국가가, 따라서 정치권 및 시민사회가 주도하고 격려해야 한다. 국가는 시장이 공급하지 않는 공적 사회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거나, 시장에 위탁할 경우에도 시장에서의 사익추구를 적절하게 억제하여 공공이익이 창달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 등 유럽에서는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보존주택(listed house)으로 등록되면 지방정부의 허가 없이는 그 집의 문짝 하나도 집주인 맘대로 교체할 수 없다. 관절염을 앓아 낡은 문을 열기 힘들어하던 노인 한 분이 그것을 편리한 현대식 문으로 교체했다가 지방정부로부터 수백만 원에 해당하는 벌금과 함께 원상회복 명령을 받은 일이 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한국사회 같으면 “내가 내 집도 마음대로 못 하냐”며 항의가 빗발쳤을 터인데, 영국에서는 조용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자신은 그 집을 잠시 사용하고 떠나지만 앞으로 수많은 다음 세대가 그 집에서 생활하고 그것의 미적 가치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공공이익의 관점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8. 비공공적 국가권력과 진보의 과제

우리나라의 국가는 과거 경제성장과 개발을 선도했고 지금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하게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시장화, 개방화에 앞장선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권력은 중앙정부가 되었건 지방정부가 되었건, 진정한 공공성의 창달을 위한 노력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따라서 진정한 공공성의 가치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반국민들은 개방과 세계화, 시장원리의 강화만이 살길이라는 보수언론과 시장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도무지 어떤 입장과 논리를 가지고 반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오늘날 진보의 핵심가치가 공공성이라는 주장은 이런 상황에 비추어 전적으로 타당하다. 국가권력을 사익지상주의 시장주의세력에 계속 맡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국가는 유럽의 높은 미학적 공공성은 차치하고라도 국가의 기본책무인 자연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필자는 여름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학교당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짧은 메일을 ‘일방적으로’ 통보받는다.

수해 이재민 구호를 위한 성금 모금 알림 공문입니다. 8월 급여에서 0.7퍼센트 공제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총무처장.

우리가 국가에 대해 분노하고 그 공공성을 배가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주요한 공공선이 된다.


<첨언>
공공성은 사적이익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사적이익 조차 위축시키는 상황
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되는 개념이다. 진보적 공공성은 사적이익과 공공성의 대립이 사라지는 상태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그러나 강제로 사적이익을 억압함으로써 공공성을 확장하려해서는 안 된다. 과거 국가사회주의의 실패가 주는 교훈이다. 일반원칙으로 보자면 수량화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회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사적 이익이 공동체의 번영에 의존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공공성은 강화되어 가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