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4. 1. 09:28

앞의 글에서 참여예산제, 계획입안, 가두회의, 꼬뮨 등 주민자치권력을 향한 다양한 시도를 살펴봤다. 비교적 성공적인 주민자치운동의 공통점은 외국의 성공사례를 기계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현실에 맞는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새롭게 재창조해냈다는 것이다.


이제 위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과 과제를 남기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주민자치운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짚어보고, 지역에서의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 우리가 풀어 가야할 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검토해 본다.


1. 주민자치운동의 시사점


① 위와 아래의 결합; 강한 의지를 가진 정치세력 창출과 풀뿌리 운동 조직의 활성화


앞의 글에서 거론한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다양한 풀뿌리 조직의 활성화가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도입되어도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풀뿌리 조직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면 제도는 보기 좋은 장식으로만 남게 된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참여예산제를 도입한 많은 도시와 나라들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제도가 관료엘리트들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점을 볼 때, 동일한 제도가 동일한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민자치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을 가진 풀뿌리 자치조직이 없다면, 참여예산제는 오히려 민주적 작동방식에 회의를 품게 만드는 독일 수 있다.


그러나 풀뿌리 조직의 힘만으로 주민자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어떤 사례들도 단지 풀뿌리 조직만의 힘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성공사례들에는 풀뿌리 조직과 함께 한 정치세력의 자치단체 집권과 능동적 의지가 있었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노동자당과 켈라라 주의 맑스주의인도공산당,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PSUV는 풀뿌리 자치조직들과 함께 주민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부에노스아이리스의 가두시위는 정치권력 획득에 대한 문제를 등한시하고 운동을 통한 지역자치에만 매몰되면서 결국 초기의 변혁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세계적으로 권력 자체에 대한 반감을 유지한 채 자치운동을 펼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운동 확산에만 기여했을 뿐 대안의 실현으로까지 나간 사례는 거의 없다.


우리의 경우도, 적지 않은 풀뿌리 운동단체들이 한편으로 국가와 시장이라는 권력에, 다른 한편으로 지역 내 토호권력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국가나 지방 차원의 권력 장악에 대해서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가, 혹은 자치단체는 억압적 권력으로만 규정되기 때문에 지역운동은 국가의 힘을 ‘방어’하는 데 머무르는 자기 제한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권력’을 교정하지 않고서 자기 방어적 운동으로 대안체제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도다. 주민자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권력 약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갖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 권력을 넘겨줄 수 있는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 다만 주민자치를 위한 국가의 힘은 행정수반의 하향식 명령체계를 바탕으로 한 형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힘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문제는 무조건적인 국가권력 약화가 아니라, 어떤 국가권력이냐에 있다.


② 대안적 운동은 대중의 힘으로


대체로 사회적 소수세력인 진보는 현 체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집권한 이후에만 대안 구상이 본격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을 잡아야 권력행사에 대한 고민이 구체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전문화된 저항’과 ‘아마추어적 대안’이라는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오히려 진보의 집권을 저해하는 역설적 상황을 낳는다. 진보세력 스스로도 ‘도전자’의 시각에만 안주하려 했고, 문제해결은 당대의 집권자에게 떠 넘겼다.


우리만 이런 것은 아니다. 브라질과 인도 등의 사례에서도 주민자치 제도가 실시되기 이전 운동단체들은 구체적인 대안을 구현하려 하기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를 공격하는 투쟁만을 강조했다. 물론 이런 형태의 투쟁이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주민자치를 지향하는 제도가 도입된 이후, 이런 경향은 달라졌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어디에 도로를 놓을지, 어디에 예산을 투입할지, 어떻게 대책을 세울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도전자의 시각에서 집권자의 시각으로 옮겨간 것이다. 


어느 국내 정치학자는 운동은 문제제기적이고, 정당은 문제해결적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운동보다 정당정치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대안적 운동, 문제해결적 운동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세력이 자신의 역량을 넘어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운동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안은 그 분야의 가장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대중에게 맡기면 해결될 수 있다. 참여예산제라는 아이디어가 대중의 머리에서 나왔듯이 자신의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한다면 대중은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사색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점을 체험하는 순간 대안적 의식화는 급진전된다.


③ 주도전략; 하나를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지방재정을 주민이 참여해서 편성한다고 해서, 이 분야를 넘어선 근본적 사회 변화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분야의 성과를 그 영역에만 국한된 제한적 성과로 볼 것이 아니라 ‘주도전략(strategic initiatives)’의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주도전략이란 주의 깊게 선택한 한 가지 쟁점을 자기들의 뜻대로 변화시킴으로써 다른 많은 영역의 쟁점에까지 자동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주의 깊게 조직된 공안사건이 단순히 해당 사안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반북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어몰입식 교육, 한반도 운하 등 개별적으로 보이는 쟁점들을 어떤 정치세력이 어떤 전략으로 주도성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든 부분의 쟁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참여예산제도 마찬가지다. 참여예산제는 과연 관료엘리트들만의 행정과 주민이 스스로 결정하는 행정 중 어떤 것이 효과적이냐에 대한 주도전략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참여예산제 등을 통해 주민 스스로 자기 공동체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 이는 다른 영역에까지 확산된다.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학교 교장 선출이나 주택입주 순위를 결정하는 데 주민들이 개입하는 것은 참여예산제의 주도전략을 통해 사회운영의 기본 원리를 바꾼 사례다.


우리의 경우, 참여예산제와 같은 기제를 대학사회에 적용시켜 보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학생참여예산제 같은 형태다. 학생들은 자기 학교 예산 정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총회 등에서 예산의 우선순위를 비롯해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고, 학교 측과 등록금 책정을 포함한 예산의 사용, 학교의 민주적 운영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이다.


이는 허황된 구상이 아니다. 90년대 중반 국가의 학생운동 탄압으로 자치활동이 무력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비록 학칙으로까지 재정되지는 않았어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대학마다 존재했다. 학생들은 등록금 책정 등 학교운영에 참여할 권한을 얻음으로써 이에 동반하는 책임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주도전략’은 폭력적 경제정책의 운영방식을 사회 곳곳에도 침투시켰다. 정치와 모든 단체의 운영방식도 소수의 선택받은 엘리트에 의해 좌지우지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등록금 협상은 제대로 된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마저도 아무런 결정권도, 강제력도 없다. 이제 신자유주의적 주도전략에 맞선 새로운 민주적 주도전략이 필요할 때다.


2. 주민자치를 위한 과제


그러나 정치를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나라 그 지역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개입하는 민주적 자치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는 한계라기보다 대안 정치를 모색하는 이들이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① 공동체의식이 생기기 어려운 거주지·근무지 분리, 과노동 문제


먼저,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사례들은 산업화가 충분하게 진행된 선진 자본주의라기보다 이제 막 근대화에 접어든 시기에 있었다. 지역자치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까지 지역 공동체의식이 파괴되기 전이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도시화와 산업화의 와중에 전개된 대규모의 인구이동은 도시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온전히 구성하지도 못한 채 거주공간과 작업공간의 괴리를 가져왔다. 한국 도시 지역에서 대부분의 지역 자치는 거주지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영세 자영업 집단이나 부녀회, 혹은 새마을운동회나 바르게살기 국민운동본부 같은 관변적 성격을 가진 단체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총선을 앞둔 현 시점에서 언론사마다 진행하는 대규모 여론조사에서 남성 노동자의 응답률보다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이나 자영업자의 응답률이 월등이 높은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보수적 관변 단체나 지역 토호를 배제하고서는 지역자치를 꿈꿀 수도 없다는 풀뿌리 단체들의 자조 섞인 푸념도 지역이 일반노동자들에게는 단순히 잠자는 공간 이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수준의 과노동(overwork)은 노동자들이 지역 정치에 더욱 관심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가 2007년 6월 7일 발표한 “2004~2005년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 비율’은 49.5%로 폐루(50.9%)에 이어 세계 2위다.


잔업과 야근, 철야뿐만 아니라 각종 회식과 승진을 위한 자기계발에 열중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역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 자기 지역 정치보다 매스컴 등을 통해 오히려 접근이 쉬운 국가수준의 정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는 지역단위의 문제 또한 국가차원, 혹은 세계 차원의 대안과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이 가능한 구조적 조건은 지역의 힘만으로는 형성할 수 없다.


② 지방재원 문제


참여예산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할 때, 한국 지방자치의 재정적 수준이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비판이 종종 등장한다. 지방자치단체의 60% 정도가 자치단체의 수입만으로는 인건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열악한 재정여건에서 참여예산제 등의 제도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열악한 재정상황에 처한 지역에서는 참여예산제도가 역효과를 본 사례도 적지 않다. 브라질의 경우에도 외채상환의 부담이 시 정부에게까지 넘어오자, 예산배분은 ‘어떤 복지를 우선 추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서 먼저 삭감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참여예산제가 ‘가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제도’라는 비판까지도 등장했다.


실제 2002년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외채상환을 위해 총예산의 48% 수준으로 인건비를 삭감하면서 대규모 해고와 쟁의를 유발시켰다. 이런 측면은 결국 참여예산제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던 공무원 노조 등을 자극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노동자당이 권력을 빼앗기는 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브라질은 1988년 연방헌법 개헌을 통해 연방, 주, 연방특구, 시에 따라 세수권을 배분하도록 해 자동차세와 판매세, 서비스세금같은 연방세금과 주세금의 일정 부분을 시로 넘기고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을 높일 수 있는 법적 수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지방단체는 지방세 부과의 재량권이 부족하며 많은 부분을 조정교부금과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 2008년 전국 지자체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53.9%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지방재정 수준이 참여예산제를 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인가는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지방세·세외수입·지방교부세 등 지자체 재정수입 가운데 특정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재원 비중을 뜻하는 ‘재정자주도’는 전국 평균 79.5% 수준이다. 즉 각 지자체가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은 총 예산의 80%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예산제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브라질 등의 사례에 비추어 봐도 열악한 수준은 아니다. 지방의원들이 외유성 해외 연수나 의정비 인상으로 지방재원을 물 쓰듯 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문제는 지방재정의 규모라기보다 오히려 지방정권과 주민 스스로의 의지 문제라고 봐야 한다.


다만, 많은 부분을 조정교부금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브라질의 사례처럼 1년 전부터 미리 예산의 사용범위를 확정하기 어렵고, 예산편성의 기간도 매우 짧을 수밖에 없다. 짧은 예산 편성 기간은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민주적 토론을 위해 들어가는 시간을 축소시킬 수 있다. 지방자치의 제도적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대안을 찾아야할 과제다. 


③ 참여의 딜레마


모든 주민을 참여 대상으로 할 때, 반드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주민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단순한 선호를 묻는 ‘투표’방식에 비해 직접 참여를 요구하는 방식은 참여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대표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과연 투표보다 소수의 사람이 참여하는 방식이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 결정보다 우위에 놓일 수 있는가?


물론 개인이 직접 공론장에 참여하여 다양한 주장을 경청할 기회를 갖는 것은 투표보다 민주적이다. ‘자기 입장을 교정할 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단순히 ‘무엇이 좋으냐’를 통계적으로 산출하는 투표는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장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의 견해와 근거를 통해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부여되어야 한다. 서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집단적인 토론, 공론장이 내재하고 있는 민주적 힘이다.


토론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수많은 국민투표를 통해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잘 구현된 나라로 알려진 스위스에서도 강력한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사례는 흔하다. 20세기 초에 스위스 모델을 도입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거액의 홍보비를 감당할 수 있는 쪽이 주민투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이 외에도 독재자가 단순 투표를 통해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한 사례는 무수하다. 우리의 경우만 보더라도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토론 없는 민주주의’의 명백한 한계를 말해준다. 총선을 앞둔 지금 시점에도 투표의 결과와 국민의 실질적 요구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투표가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모여서 의견을 나눌 기회를 부여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가장 효율적인 보완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민자치권력은 주민을 직접 공론장으로 불러내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물론 사회 격변기나 개인의 이해가 걸린 사활적 의제가 등장하면 주민참여는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진보적 단체의 총회는 이루어지기 어려워도 재개발지역의 조합 총회 참가율은 90%가 넘는 이유는 공동의 의제가 개인의 이익과 얼마나 부합하느냐의 차이다.


또한, 새로운 제도를 통해 주민의 민주의식이 발전할 수도 있다. 나의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면, 참여의식은 높아진다. 거꾸로 말하면, 현재 참여에 수동적인 대중은 자신의 참여가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참여를 통해서도 별다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참여예산제의 경우에도 주민에게 예산권을 부여하자 참여율은 계속 높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초기의 이런 역동성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무임승차의 딜레마(free-rider’s dilemma)’도 여전히 문제다. 무임승차의 문제를 막는 방법으로 참여자에 대한 인센티브나 불참자에 대한 패널티를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는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참여는 권리라기보다 강제가 된다. 참여의 딜레마다.


이런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참여 범위를 최대한 축소하여 공동체적 협력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은 집단은 큰 집단보다 더 협동적이다. 집단의 규모가 작을수록 익명성 뒤에 숨기가 쉽지 않으며 개인이 집단에 공헌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논의 공간은 결정권이 확실히 보장된 참여를 유도할 수는 있어도 결정이 미치는 효력의 범위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남긴다. 세분화된 단위 사이의 의견조율이 더 필요해 지는 등 의사결정의 효율성도 문제다. 이 때문에 일상적인 활동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에게 맡기고, 이들이 대중의 의견과 어긋난 결정을 내렸을 때 언제든지 쉽게 통제 가능한 제도를 마련하는 쪽이 낫다는 의견도 있다.


아직까지 기성 정치인과 관료엘리트들에 대한 반감이 직접적인 참여 의지로 나타나기보다 정치적 냉소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대중의 참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의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이는 진보를 자처한 각종 단체들의 내부운영방식에도 해당된다. 우리 국민 중 그래도 사회참여 의지가 높은 쪽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 진보단체 회원들도 참여에 소극적인 것이 단지 회원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런 회원들에게도 별다른 결정권을 부여하지 않고 소수의 간부들이 정치무대를 독점해서인지는 되새겨 봐야할 문제다.



이제까지 우리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를 비롯하여 켈라라 주의 계획입안 캠페인, 부에노스아이리스 가두회의, 베네수엘라 민중자치 권력 등을 통해 주민자치의 대안적 모델을 검토했다. 다양한 제도들은 그것이 구현되는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런 사례를 관통하는 핵심은 대중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이들을 정치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의지였다. 비록 대중의 선택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교정능력을 발휘해 어떤 기성정치세력도 풀지 못한 과제를 보란 듯이 해결해 나갔다.


지방자치가 주민 없는 단체들만의 자치로 전락해 버린 채 중앙 정치의 축소판으로만 기능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도 진정한 주민권력은 주민의 힘을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만, 외국의 성공사례를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현황과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