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6. 4. 15:12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한 시민이 1일 밤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경찰들과 대치를 벌이며 '폭력경찰 국민심판','독재정권 타도'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미국산쇠고기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20여 년 전처럼 독재타도 구호가 등장하고, 거짓말처럼 시민들은 경찰 군홧발에 피를 흘렸다. 운전자들은 지지 경적을 울렸고, 인터넷에서 시위를 보던 시민들은 먹을 것을 사다 날랐다. 물대포로 인해 추위에 떨던 이들을 지켜보던 몇몇은 자기 옷 벗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듯 추락해 친정부 성향의 <조선일보> 여론조사에서마저 21.2%에 머물렀다. '고시철회 협상무효'라는 상당히 온건했던 구호는 어느새 '독재정권타도'로 바뀌었다. 문제제기 수준의 시위가 어느새 반정부시위로 진화한 것이다. 

 

100일 만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선 직전, 많은 학자들이 이명박 정권에서는 국민저항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이토록 빠른 시간에, 이토록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공포감?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양상은 정부의 어떤 개별적인 정책 하나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쇠고기 협상 문제가 계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99도의 끓는 물에 1도의 열을 가한 촉매에 불과하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인내심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쇠고기 재협상이 이루어지더라도 민심회복은 불가능하다.

 

새 정부가 백일 동안 한 일들

 

정권의 행태가 국민의 불만을 폭발시킨 사유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어 몰입식 교육, 강부자·고소영 내각, 임기 남은 공기업 수장들의 사직 압박, 우호적 언론만을 위한 프레스 프렌들리…. 연일 터져 나오는 청와대 소식에서 읽을 수 있는 공통점은 국민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권위적 태도'다. 여기에 쇠고기 협상 과정의 밀실행정과 여론의 반발에 대응하는 정부의 오만이 국민의 인내심에 불을 붙였다.

 

국민들이 그를 주저 없이 '독재'라 칭하는 이유는, '우리'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100일 동안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무지한 백성과 똑똑한 정부'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과도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정권의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지 '몰라서 그런 것'일 뿐이다.

 

국민과의 '소통' 부재와 '설득' 실패를 반성한다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자신의 주장이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일 뿐, 그 역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다. 설득은 토론이나 합의와 달리 자신의 주장을 교정할 가능성을 배제한 채 상대방의 입장변화만을 요구한다. 

 

촛불시위에 대한 반응도 유사하다. 평화로운 문제제기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 정도의 소극적 반응도 아니고 초장부터 '배후'와 '불법'을 운운했다. 황당해진 것은 국민이다. 어이없는 정권의 반응에 분노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민심은 왜 거리로 나섰나?

 

  
▲ 기습행진한 거리 시위대 1일 오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모인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재협상 요구 집회 참가자들이 미국 대사관을 거쳐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앞까지 행진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안홍기
촛불시위

국민들이 처음부터 대정부 항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시위 현장에 몇몇 반정부 슬로건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지엽적일 뿐이었다. 장관고시 이전까지만 해도, 핵심 주장은 '고시철회'와 '재협상 촉구'였다.

 

애초 국민들은 각종 인터넷 서명과 여론전, 그리고 국회 청문회 같은 제도적 수단에 기대를 걸었다. 탄핵을 불사하겠다고 했고, 주머니 돈을 모아 광고를 게시했으며, 그 재미없는 국회 청문회에 환호했다. 만일 이 지점에서 정부가 전향적인, 아니 정상적인 민주정권의 입장 정도만 피력했더라도 거리 항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부 시절 재개된 쇠고기 수입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국민들이 반발했었다. 30개월 미만도 신뢰할 수 없다는 항의였다. 그러나 지금은 쇠고기 협상을 무효화 하거나 미국산 쇠고기를 아예 수입금지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단지 몇 가지 독소조항에 대한 재협상과 노무현 정권 수준의 쇠고기 수입이다. 이 요구가 관철되었다면 시민사회는 20개월령 미만과 30개월령 미만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분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재협상이 거론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국민 분열을 막았다. 협상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스스로 파악해보기보다 반대논리 개발에만 몰두했고, 촛불시위로 표출된 민심을 수용하기보다 배후·좌익·불법 등의 단어를 고장 난 라디오처럼 되풀이 했다. 대국민 사과 메시지는 '노련하게 관철시키지 못해 송구하다'로 읽혔고, 장관 고시 강행은 '항의해봐다 소용없다'는, '해볼 테면 해봐라'는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드러낸 100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한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이명박 정부 100일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기이기도 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사회 내의 갈등표출이 정당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정당은 이런 갈등을 조절하는 가운데 권력창출을 목표로 삼게 된다. 사회적 다양성을 의회 내로 축소시킴으로써 효율적 정책결정을 보장토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저 투표율 제한도, 최소 득표율 제한도 없는 한국 선거구조 아래에서는, 지난 18대 총선 결과가 보여주듯 과반도 안 되는 사람만이 투표해 과반도 득표 못한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10명 중 2명 정도가 지지한 사람도 당선이 가능하고, 최소 2명의 신념에 따라 10명 모두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국민이 대표자들의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열어 놓았다. 국민투표·소환·발안으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 요소는 항쟁으로 분출될 국민 불만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제도들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겐 그와 같은 권리가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행정 권력과 의회 다수당이 같은 단점 정부 아래에서는 국민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독재와 조우한다.

 

이명박 정부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이라도 최소한의 민주정권다운 면모를 갖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독재정권처럼 각종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억압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백 일의 모습에서 전자의 희망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87년 6월과 오늘, 달라진 민주주의

 

이처럼 정부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국민저항을 이끌어 낸 실질적인 원인이다. 지금의 국민저항을 87년 6월 항쟁과 비교하는 것도, 둘 다 민주주의의 최대 위기상황을 국민저항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다.

 

87년 6월 항쟁은 명백히 절차적 민주주의의 복원에 대한 요구였다. 국민은 대통령을 스스로 뽑기를 원했다. 그뿐이다. 이러한 최소주의적 요구는 소위 '운동권'만이 아닌 폭넓은 시민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최소주의적 요구는 그 목표가 성공했음에도 독재의 연장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이명박 정권은 체육관에서 뽑히지도 않았고, 선거과정에 불법과 폭력을 개입시키지도 않았음에도 국민들은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변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어떻게 당선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권인가'가 민주정권을 가르는 핵심 기준으로 변화한 것이다. 국민의 민주의식은 '절차'를 넘어 '내용'으로 향하고 있다.

 

국민에게서 대안을 찾을 때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촉구하는 26차 촛불문화제가 2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리고 있다.
ⓒ 권우성
촛불문화제

남은 것은 어떤 내용의 미래를 요구할 것 인가의 문제다. 이제 국민은 취임 100일 동안의 이명박에 대한 반대를 넘어 취임 100일 이후, 혹은 이명박 이후의 민주주의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저항만으로 끝나는 운동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당선도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보다 '어떤 현실을 반대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우리 정치 한계의 결과물이다. 국민은 노무현식 정치를 반대하기 위해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미래와 국민이 원하는 미래는 달랐다.

 

쇠고기 문제가 아니더라도 각종 민영화·한반도 대운하·한미 FTA 등 국민의사에 반하는 일방적 국가운영이 예고되어 있다. 이런 모든 의제에 대해 쇠고기 문제와 같은 국민저항으로 대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적인 정책을 막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운영의 총적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정책 대안까지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이는 세금이나 후원금을 받는 정당과 전문단체가 해야 할 일이다. 다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 어떤 대한민국을 원하는 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과연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보수화의 방향이 맞는 것인지, 새로운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과 견주어 비판할 일이다.

 

어려운 과제이나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촛불시위를 보라. 자발성과 순수성, 그리고 헌신성을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국민들은 날마다 풍자와 위트가 넘치는 창의적인 시위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새로운 대안 또한 이들의 역동적인 창의력을 바탕으로 구현될 수 있다. 이토록 역동적인 정치참여의 열정을 단순한 반대 시위로만 남겨두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이명박 정권 취임 100일을 맞는 오늘, 슬프지만 뜨겁다. 한 때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는 냉소가 등장했으나, 국민이 원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없는 밥'이 아니라 '밥도 먹여주는 민주주의'였음이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는커녕 광우병 걱정에 밥도 못 먹게 만든 이명박 정부는 '밥 먹는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취임 100일을 맞는 시점에 국민이 기대하는 마지막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