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6. 27. 09:33
  
10일 밤 미국산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촉구 및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대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이 태극기를 펼쳐들고 세종로네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100만 촛불대행진

 

국민다수 의견을 표출하는 시위로도 근본적인 정부 입장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많은 시민들이 모여 쇠고기 재협상을 외쳐도 정부는 26일 고시를 강행했다. 게다가 '국민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했던 이명박 정부는 조직화된 운동권과 일반 시민을 분리해서 대응하겠다며 강경대응 방침을 피력했다.

 

한때 대통령을 견제하려는 듯 보였던 한나라당도 본색을 드러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다행히 촛불집회도 어제의 경우 10퍼센트 정도는 시민이고 나머지는 프로들"이라며 "허무맹랑한 괴담이 난무하고 퍼 나르고 해서 국민 여론을 오도하는 경향이 있기에 인터넷 대책팀이 적극 활동해 달라"고 주문했다. 보수언론도 포털사이트 등에 적극적으로 댓글 삭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 정부와 여당의 눈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은 국민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학자들도 촛불시위를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촛불시위에서 보여진 거리시위가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긍정적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민주주의 발전 전망을 둘러싼 입장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 주목되는 것이 얼마 전 퇴임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주장이다. 최장집 교수는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냉철한 분석으로 많은 이들의 시각을 넓혀준 대표적인 진보학자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취약해진 원인을 '허약한 정당체제'에서 찾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한 '제도적 실천'을 강조해왔다.

 

보수학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촛불시위의 긍정성을 인정하면서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고민하는 데 비해, 최장집 교수는 촛불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한다. 여기서는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 촛불시위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 본다. 여러 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택한 이유는 그가 한국 민주주의 논쟁에 차지하는 중요성과 영향력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실천', 지금은 정당체계를 바로잡을 때?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16일 오후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긴급토론회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최장집

우선 최장집 교수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로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의미는 "인민의 자기통치" 즉 어떤 결정으로 인해 영향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일치시키는 통치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런 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하는 '인민주권' 원리는 선험적 지식일 뿐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인민에게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화한 가운데, 인민주권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갈등을 공식적인 대표 체계 내에 포함시켜 갈등을 제도화하는 '제도적 실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 정당체제는 사회의 부분적 갈등만을 포함하고 있는 '허약한 체제'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이 제도화될 수 있는 정당체계를 바로잡지 않고서, 비제도적 방식인 운동에만 의존하는 것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촛불시위는 선발투수가 될 수 없는 '구원투수'일 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그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최 교수가 주장하는 대의 민주주의론과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론은 직접민주주의다.

 

직접민주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인민의 자기 지배'를 민주주의 원칙으로 이해한다. 즉 최 교수와 같은 진보적 대의민주주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인민주권 가치를 지향하는 데 머물지만,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인민주권적 가치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대표제, 혹은 대리제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대표자를 통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혹은 인민, people)의 직접 정치다.

 

물론 어느 입장에 서있느냐와 상관없이 의제의 복잡성·다양성과 규모의 확대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불가피한 위임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유권자의 의사에서 자유로운 반면,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 대리자는 항상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국민투표나 국민소환에 부정적이지만,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선출된 대표에 대한 국민 통제를 중요시 여긴다. 최장집 교수가 대통령 소환제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의 대의 민주주의론에서 기인하는 시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완전한가? '선거 실패'의 가능성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대의제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대통령 소환제의 도입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국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을 강화하고 발전시켜 해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선거 실패'다. 보통선거권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선거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멀어진다.

 

첫 번째, 선거는 지배받는 사람이 지배해야 한다는 원칙,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동일성의 원칙과 어긋난다. 선거는 항상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을 뽑는데 이용됐다. 오늘날 그것은 조직력을 보유한 자, 선거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로 제한될 수 있다. 뽑는 사람은 민주화되었으되, 뽑히는 사람은 아직까지 '특별한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대의제는 민주정과 귀족정에 한 발씩 걸치고 있다.

 

원로 헌법학자인 국순옥 교수가 대의제를 "지배와 피지배를 계급적 수준에서 재생산하는, 즉 사회적 다수파를 정치적 소수파로, 그리고 사회적 소수파를 정치적 다수파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회적 다수파에 대한 사회적 소수파의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한된 선거기간 동안 후보자의 정치견해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약을 제시하고 검증할 수 있는 메니페스토 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당선자가 선거 시기에 제출한 공약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어떤 제재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공약하지 않은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제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쇠고기 수입과 경부운하 공약이 한나라당에서 빠져 있지만, 이를 통해 어떤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 상황이 잘 보여준다.

 

따라서 유권자가 선택한 후보가, 사실은 그들이 기대했던 후보가 아니었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선거 실패'다. 그러나 국민에겐 실패한 선거를 사후에 교정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 소비자가 상품을 잘못 구입했을 때, 즉 '소비 실패' 시에는 교환과 환불, 혹은 리콜(recall)의 권리가 있지만, 잘못 선택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어떤 권한도 없다.

 

'선거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국민소환제(recall)와 같은 최소한의 보완장치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최 교수가, 인민 주권적 가치를 어떻게 지향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선출된 대표자의 '책임의 원리'인데, 이는 그가 강조하는 '제도적 실천'이라기보다 확인하기 모호한 '지도자의 자세' 같은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지도자가 책임을 갖고 반응해야 한다면, 그 국민의 여론과 의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국민의사가 투입될 경로를 차단한 채,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인 결사체'에만 의존하는 것은 '선거실패'로 창출된 의회권력만 중요시하고, '조직되지 않은' 일반 국민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지금처럼 특정 정치세력이 압도적 비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회체계 아래에서 '정당정치', '제도적 실천'만을 강조해서는 현 상황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최 교수가 정당의 발전과 강화라는 원론적 입장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에 철저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사에서도 증명되듯이, 정당과 의회체계의 발전은 항상 거리정치, 비제도적인 국민의사가 분출된 결과로서 강제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거리정치를 '낭만주의적 정치관'을 확산시켜 '반정치주의적 정치관'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관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참여적이며,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제18대 국회의원선거일인 지난 4월 9일 오전 서울 공덕동 어린이집에 마련된 공덕동제6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유성호
18대총선

 

운동정치의 한계는 대의제의 한계

 

최 교수는 최근 운동정치의 한계로 다섯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찬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형성하거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여러 대안들을 조정하여 결정을 끌어내는 데 지난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도 이와 유사한데, 운동은 여러 이슈를 다투는 과정에서 각 이슈들 간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위계적으로 배열하고, 이에 기초해 정책 추구를 일상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면 타당한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최 교수가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 역할을 할 정당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혹여, 그런 정당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연 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연히 좋은 정당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은 최장집 교수나 촛불시위 참가자나 마찬가지다. 운동이 문제해결의 몫까지 떠안으려 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법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계를 인정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할까?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문제해결의 몫까지 최대한 시도해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최 교수가 지적한 운동의 세 번째 한계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이 일상화된다는 문제고, 네 번째 한계는 운동의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두 가지 문제는 어찌 보면 상호 모순적이다. 장기 지속할 수 없는 운동이 이명박 정부의 임기 내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이 일상화된다는 문제를 운동의 한계로 돌릴 수는 없다. 최 교수의 주장처럼 정당체계가 하루아침에 발전되지 않는 한, 불가피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특정한 정치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18대 국회체제에서 이런 갈등은 일상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운동의 한계라기보다 '선거 실패'의 한계, 대의제의 한계다.

 

진짜 문제는 운동이 장기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촛불 시위도 60일이 넘어서면서 육체적·정신적 피로감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정당을 바로 세우면 해결될 문제지만, 그런 가능성이 최소 4년 이내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결 방안은 촛불시위와 같은 거리정치의 가능성을 통치권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으로 해결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통치자의 자의적인 정치행위에 대해 언제든 지금과 같은 광범위한 국민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분명한 성과를 남겨야 하며, 거리 시위의 부분적 제도화, 즉 국민투표나 소환제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최 교수가 마지막으로 지적한 문제는 운동을 통해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며, 이는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운동의 한계로 보기는 어렵다. 시민사회 간 갈등을 유도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치권력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 보수언론은 국민에 반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조직해 냄으로써 '국민들 간의 갈등'으로 전환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정부가 이런 인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새로 신설된 시민사회비서관에 대표적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인 홍진표를 내정하려 했던 것에서 드러났다. 비록 다양한 반발 속에 개혁적인 인물로 교체되었지만, '교육'을 통한 반북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인식해 대학생과 교사 조직화에 힘써 왔고, 다양한 사회 의제에 개입하는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 적극 개입해 온 뉴라이트 사무총장을 시민사회비서관에 임명하려 했다는 시도만으로도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비단 운동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출산의 진통을 겪어야 하듯, 일시적인 사회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대의제의 한계 속에 주권의 원리를 가둬놓을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제도화된 권력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한 방법은 최 교수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라 보았던 바로 그 제도들이다.

 

  
촛불시위대의 청와대 방향 진입을 막기 위해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 바리케이트 앞으로 11일 새벽 일부 시민들이 스티로폼 연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자유발언을 진행하고 있다.
ⓒ 남소연
스티로폼

 

거리정치를 발전시킬 민주적 리더십 형성을 형성해야

 

운동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거리정치에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일일테다. 현재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리더십은 지도와 복종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 리더십과는 전혀 다르다. 대중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고 조절하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의 초기 형태다.

 

전통적으로 운동에서 리더십이 필요했던 이유는 참여자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계적인 지휘체계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운동을 이끄는 자가 모든 행위에 대해 일반 구성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면 엄청난 시간이 낭비라고 보았고, 미헬스의 주장처럼 민주주의는 여유 없이 투쟁하고 있는 조직에겐 사치인 것 같았다.

 

그러나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정한 지도부가 구축되지 않으며, 새로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지도부가 바뀐다. 시위에서 역할 조정은 순환적(rotate)이었고, 특정 이슈에 가장 적절한 조직이나 개인이 시위를 이끈다. 리더십이 점차 탈개인화되면서도 사안에 따라 전문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집단역학(Group Dynamic) 리더십에 가깝다. 리더 개인의 특성과 자질보다 참가자들의 요구를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개인이나 조직이 리더로서 자격을 습득하는 것이다. 리더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위 과정에서 창출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은 정당 리더십 속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당 리더십 형성을 위해 투입되어야 할 것들이다. 진보와 보수 정당을 막론하고 내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한국 정당체제는, 자신의 리더십을 촛불에 강요하기보다 촛불에서 드러난 역동적 리더십을 흡수하고 발전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은 아직까지 '저항의 동원'이라는 비교적 손쉬운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만, 정체된 국가와의 대치국면을 돌파하는 데에도 적절한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다중 리더십을 적절하게 중재할 통합적 리더십의 부족은 지난 6월 10일 시위에서 소위 명박산성을 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쟁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장기간의 토론과 합의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항의 표출만으로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형태의 합의도출 과정이 적절한지는 심사숙고해야 할 지점이다. 합법과 불법, 폭력과 비폭력 같은 지루한 논쟁은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지만, 이 지점에만 한없이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이 이런 '내부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촛불이 풀어야할 과제다.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정당이 사회적 갈등 해결에 전혀 역할을 못하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거리 정치는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저지선이다. 국민의 직접행동이 좋은 것이냐, 정당을 통해 매개되는 것이 좋은 것이냐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 이상은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된 바 없으며, 그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대의제'를 기반으로 하는 철저한 위임 민주주의 체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최 교수의 민주주의론은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는 시대를 적중했지만, 08년 6월의 거리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민주적 정당체계도 국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결국 정당을 통한 제도적 실천은, 거리시위를 대체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거리시위의 결과물로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오마이뉴스, 새사연 홈피 동시게재 글

* 사진 편집: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