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7. 17. 14:59
제헌 60주년. 이제는 평일이 되어버린 7월 17일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촛불시위 때문이다. 헌법 제1조를 노래하는 목소리가 광장을 뒤덮고, 저마다 국민주권을 내세워 대통령에게 헌법준수를 요구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4년 대통령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 등 굵직굵직한 국가적 의제들도 대부분 헌법 문제로 귀결됐다.

정치권에서도 헌법문제, 개헌문제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해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론을 끄집어 낸 이후, 18대 국회에서도 개헌을 이슈로 내건 국회 연구단체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에 과반에 가까운 146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도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국민 의사를 국가운영에 반영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의 투입을 전제한 개헌론이 활발해지고 있고, 전경련과 보수단체 등에서도 개헌에 관련한 입장을 속속 제기하고 있다.

우리 헌정사에는 1948년 헌법을 제정한 이후 총 9차례 개헌이 있었다. 우리 개헌의 역사에는 국민을 배제한 정치세력이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헌법을 마음껏 유린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헌정 6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지난 개헌사의 간략한 흐름을 짚어보고, 오늘 우리에게 개헌이 주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제헌헌법, 우익이 만든 사회주의적 헌법?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1948년 2.7구국투쟁과 제주도 4.3항쟁 등 해방 후 남과 북의 분단을 막고자 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지면서 좌절되기 시작한다.

제헌의회는 곧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는데, 당초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킨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이승만의 대통령제 고집과 한민당의 돌연한 입장변화로 대통령제가 채택되었다. 또한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인민’이라는 용어는 좌익세력이 선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민으로 대체됐다.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은 내전(civil war)선언과 같았다. 제헌헌법 제4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해 북에 들어선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뒤이어 제정된 북한헌법에는 제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시다”고 명시해 한반도는 두 개의 주권을 표방한 세력이 공존하는 내전 상황을 공식화 했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84조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가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본으로 삼으며,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밝혔다. 제85조에서 광물자원 등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할 것을 밝혔고, 제87조에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며,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둘 것을 밝히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제헌헌법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한 위헌이다.

국민의 권리의무를 밝힌 제2장에서는 제15조에 재산권 행사를 공공복리에 적합하게 행사하도록 제한했으며, 제18조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의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한에서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런 조항이 포함된 것은 일제시기 경험과 당시의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 때문에 자본주의 사적 소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동의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헌법에 어떤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과 현실에서 그 조항이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은 규정이 폐기될 때까지 실현을 위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본권, 자연법적 천부인권, 저항권 등의 이념이 부재했으며, 대통령의 긴급권에 아무런 제동·견제장치를 두지도 않았다. 실제 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이후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의 탄생과 반공체제의 구축

1948년 4.3항쟁과 뒤이은 여순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1948년 12월 1일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법률’이라는 모순된 지위를 누리며 제헌헌법의 긍정적인 요소를 무력화시킨 동시에 반공우익세력의 권력창출과 유지를 위해 악용되어온 대표적인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공포된 날부터 곧장 집행되기 시작해 6일 동안 서울에서만 100건의 영장이 발부되었다.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으로 11만8,621명이 검거되었으며, 당시 검사가 기소한 전체 사건의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것이었다.

1949년 12월 19일 법률 85호로 공포된 개정 국가보안법은 더욱 확고한 반공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선언이었다. 법정 최고형을 무기에서 사형으로 높이고, 미수죄를 신설하였으며, 심급을 단심제로 전환했다. 또한 전향을 유도하기 위한 보도구금제의 시행과 보도소의 설치, 그리고 소급효를 인정했다. 반공이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친북을 주장하거나 평화통일을 외치면 생명까지도 위협받아야 하는 극단적 반공독재체제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유지되고 재생산됐다.

1차 개헌, 의회정치의 무력화

전쟁을 틈타 권력 강화를 꾀하던 이승만은 1951년 11월 30일 임기연장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143대 19라는 압도적 차이로 부결되고 말았다.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열린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이승만의 대한국민당은 물론 이승만과 대립하고 있었던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 또한 대패했기 때문이다.

민국당은 1952년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이승만은 이에 맞서 다시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하는 동시에 1952년 5월 26일 부산을 비롯한 경남과 전남북 23개 시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6.25 전쟁 발발에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상황에서도 선포하지 않았던 비상계엄을 개헌 때문에 선포한 것이다.

그날 아침 47명의 의원을 태운 국회 통근버스가 헌병대 본부로 끌려갔고, 이 중 10여명의 의원들이 국제공산당과 연계됐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김성수 부통령이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던지고 이종찬 참모총장이 계엄군 파견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일어났고, 여기에 이승만의 집권을 연장해주되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절차에 입각하도록 만들려는 미국 측의 의도가 맞물려 ‘발췌개헌안’이라는 절충안이 마련됐다. 발췌개헌안은 국회의원을 강제로 납치하여 열린 국회에서 1952년 7월 7일 테러단체의 위협 하에 기립 표결로 강행통과 됐다.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것은 당시 ‘반(反) 이승만’ 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국회의 세력관계로 볼 때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방식으로는 임기 연장이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는 전시상황과 국가보안법체제라는 특수 상황이 맞물려 경찰과 특무대, 여당과 사회단체 등이 주동이 되어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항상 직선을 통해 집권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할 일반 민중은 전쟁 상황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최고통치권자는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일종의 의회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우익청년단인 족청을 중심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자유당을 창당한 이승만은 1952년 8월 전쟁의 포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통령에 재선된다. 자유당은 1954년 5월 3대 국회선거에서 재석 203석 중 114석을 차지하여 과반을 확보했고, 3선 개헌을 목표로 무소속 67명 중 34명을 회유 입당시켜 2/3선인 136석을 확보하는 등 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했다.

2차 개헌, 사사오입과 정치의 코미디화

이승만의 권력욕은 멈추지 않았다. 1954년 11월 27일, 재임에 국한되는 대통령 임기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그 적용을 배제하려는 2차 개헌이 추진된다. 이 개헌안은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무효 1표, 기권 6표, 결석 1표로 개헌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1인 136명에 1표 부족해 부결로 선언되었으나, 203명의 2/3는 135.333....이므로 사사오입의 원칙에 따라 135명이 3분의 2라는 억지 주장으로 가결된 것으로 수정, 결의됐다. 정치가 코미디가 된 순간이다.

2차 개헌은 대통령 임기조항만이 아니라 모두 30개 조항에 걸쳐 수정, 삭제, 증보가 이루어졌다. 그중 분단체제를 상징하고 있는 영토조항은 개정헌법 제7조 2항에 “국회 가결을 거친 후 국민투표에 부하여 민의원 의원선거권자 3분의 2 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개정을 보다 더 어렵게 했다. 반공독재체제는 분단체제와 함께 더욱 강화됐다.

4월 혁명과 3, 4차 개헌

이승만의 막가파식 국정운영은 결국 4.19 혁명을 낳았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정 수단을 동원한 1960년 3.15 선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린 민중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4월혁명은 헌정사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대통령이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음에도 혁명의 성과를 기성 정치세력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혁명을 이끌어나갈 주체역량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계속 주도할 만한 인물들은 해방 이후 이념대립과 한국전쟁, 전쟁 이후의 반공독재체제 아래에서 대부분 희생되었다. 그나마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조봉암과 진보정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잔류세력이 만든 혁신정당은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

4월혁명 이후에도 허정 과도정부의 주요 인사는 모두 자유당이 주도하는 의회에서 임명되었고, 국회해산이 먼저냐 개헌이 먼저냐의 논란 속에서 결국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통과되었다. 물론 4월혁명의 영향으로 독재체제는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독자적으로 조직되는 선거인단에서 선출하는 내용과, 정당보호조항이 신설됐다. 또한 기본권 제한조항이 철폐되었고, 신문·정당 등의 허가제도 폐지됐으며, 국가보안법에서 언론조항이 삭제됐다.

그러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가 멈추지 않자, 결국 같은 해 11월 29일, 3.15 부정선거 주동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와 시민학살책임자 처벌, 이승만 정권 하에서 부정축재자에 대한 재산국고환수조치 등을 담은 소급입법의 근거 규정 마련을 위해 부칙을 삽입한 4차 개헌이 이루어진다.

5차 개헌, 악용된 국민투표

4월 혁명의 성과를 무력화시킨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군정 기간 동안 ‘반공법’을 제정하고 진보인사를 처형하는 등 폭압통치체제를 이어나갔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4월혁명의 성과 중 하나였던 1960년 헌법은 비상조치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됐다.

극도로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했던 쿠데타 세력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의 최우선 순위로 한다고 천명하는 동시에 국민투표법을 제정해 우리 헌정사 최초로 국민투표에 의한 개헌을 추진했다. 쿠데타 세력은 개헌 국민투표가 진행되기 불과 12일 전인 12월 5일에야 경비계엄을 해제했고, 12월 17일 개헌안을 확정했다. 새 헌법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정보 습득이 불가능했음은 물론이다.

극도의 억압체제 아래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의 참여나 국민들 간의 자유로운 토론과 심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악용된 국민투표는 이후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국민투표에 대한 거부감을 안겨 주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마련된 5차 개헌 헌법에서는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는 임기 4년의 대통령제가 복원되었고, 지방자치를 제거해 중앙권력을 강화했다.

정치권의 참여가 배제된 상황에서 주로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5차 개헌안은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나 인권 규정이 존재했지만, 정당설립을 규제하고 정당추천제, 의원후보제 등을 채택하여 실질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2월 31일 공포된 정당법은 제1당에게 무조건 비례대표의석의 과반수를 줌으로써 정권안정을 꾀했다. 1963년 11월에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체 투표수의 33.5퍼센트만을 득표했음에도 74.8퍼센트의 국회의석을 가져갔으며, 군인들이 정치를 지배하는 군사주의 정권으로 나아갔다.

6차 개헌, 3선 개헌안

박정희의 권력욕은 5차 개헌안에 명시된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대통령 임기안에 만족할 수 없었다. 3차까지 연임할 수 있도록 하는 개헌안에 반대하는 야당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는 사이,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28분 불도 켜지 않은 상황에서 122명 여당의원은 만장일치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국민투표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군사정권은 역술인과 무당, 사이비 신흥종교 집단까지 동원해 박정희를 칭송했다. 당시 공화당 의장인 윤치영은 ‘반만년 이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박정희의 대통령 연임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고 떠들어 댔고, 어용언론과 학자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결국 3선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65.1퍼센트의 찬성으로 가결, 확정되었다.

7차 개헌, 유신정권의 탄생

1971년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당시 야당후보인 김대중은 539만 표를 획득해 634만 표를 획득한 박정희보다 불과 95만 표가 적었다. 박정희는 선거 막바지에 “나에게 마지막이 될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신임해 준다면 유능한 후계인물을 육성하겠다”며 읍소할 수밖에 없었고,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흑색선전물을 대량살포하는 등 온갖 부정선거 의혹이 일었다.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도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고했다. 박정희의 공화당이 131석, 신민당이 89석을 획득했으나 야당은 서울의 19개 선거구에서 18석을, 32개 도시의 64개 선거구 중에서 47석을 획득했다. 관권·금권·선심공세에 부정선거 의혹을 감안한다면, 박정희 정권은 이미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생시위가 계속되고, 각종 사회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는 특별선언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새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였고,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투표가 치러져 11월 21일 이른바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1/3과 대법원장, 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법률안거부권을 안겨주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은 바로 대통령이었고, 당연하게도 대통령의 연임제한은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퍼센트의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8차 개헌, 신군부세력의 집권

결국 집권욕에 불타던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는 운명을 맞았다. 독재자가 사라지자 잠시 새로운 민주화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 이런 열망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박정희를 추종하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광주 항쟁의 유혈진압 등 무력을 앞세운 집권계획을 차근차근 수행하다가 1980년 10월 27일 제8차 개헌으로 완결했다.

8차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한 것이지만, 여전히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유지했다. 여전히 군부에 의한 폭압적 독재체제가 유지된 것은 물론이다. 전두환 독재를 정당화한 8차 개헌안은 7년 뒤 6월 항쟁이라는 국민의 힘으로 철퇴를 맞게 된다.

9차 개헌, 6월 항쟁과 수동혁명

87년 제9차 개헌 헌법은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정치권력이 아닌 국민의 힘으로 개헌을 강제한 사례다. 직선제 도입을 요구하는 국민들은 6월항쟁이 정점에 달한 6월 26일,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에서 150만 명이 행진과 시위에 참여했다. 주요 대도시의 시위는 경찰의 완강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이 동나고 경찰병력이 부족하여 시위 군중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는가 하면, 곳곳에서 전경이 무장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국민의 저항에 대한 정권의 대응은 ‘수동혁명’이었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대중들이 정치·경제제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국가권력을 재조직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지배세력은 대항세력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측면을 가진다.

물론 정권이 처음부터 수동혁명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군부는 최소한 6월 19일까지 국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계엄선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릴리 주한미대사는 레이건 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해 수동혁명을 관철시켰고, 이것의 핵심 내용은 이른바 6.29 선언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수동혁명 계획은 적중했다. 이후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은 6월항쟁에 참여한 일반 국민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고립된 채 전개되었고, 야당은 개헌 협상 테이블로 등을 돌렸다. 재야 운동세력은 합의점 없는 후보전술로 빠져들면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제9차 개헌안은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직선제를 포함한 다양한 민주적 조치를 포함시켰지만, 국민의 참여는 배제된 채 철저히 정치권만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졌다. 국민의 요구보다 정치적 타협에 무게가 실렸음은 물론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새로운 개헌논의의 초점이 된 5년 단임제의 경우도, 집권당인 민정당의 6년 단임안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염두에 둔 통일민주당의 4년 중임안을 절충해 마련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87년 헌법은 국민의 열망이 정치권력에 의해 ‘걸러진 채’ 통과되었다. 이런 군부의 수동혁명과 정치권력에게 헌법제정 권리를 빼앗기고 후보전술을 둘러싼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의 한계는 노태우로 말을 갈아탄 군부세력의 집권 연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헌정 60년사의 교훈, 새로운 국민과 새로운 헌법

우리 헌정 60년사를 되짚어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 개헌을 요구한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헌법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총 9회의 개헌 중 4월 혁명 이후 3, 4차 개헌과 6월 항쟁 이후 9차 개헌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지만 국가운영에서 민주적 성격을 가져온 사례들이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개헌은 집권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추진했던 것으로,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는 데 헌법이 악용되었을 뿐이다.

둘째, 제헌헌법을 포함한 9차례의 개헌에서 헌법의 내용을 만드는 과정에 국민은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국민주권 조항은 과거 1조와 2조로 나뉘어 있던 것을 1조에 모아놓은 것을 제외하면 제헌헌법부터 변치 않은 국가운영 원리였지만, 헌법 구성과정에서 국민의견을 수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었으며, 오로지 정치인들이나 전문 학자들의 손에서 국가운영의 모든 원리와 규범이 결정되었다.

이런 헌법제정과정의 국민배제는 국민에게 헌법이 크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만든 동시에, 존재하는 헌법 내용조차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식적 문구로 전락시켰다. 국가운영에는 국민 의사보다 통치권자의 의사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지금도 정치권에서는 개헌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민이 요구하는 ‘헌법 제1조’의 실질화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 헌정 60년사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국민을 배제한 정치인들만의 개헌 논의가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을 외면한 현 주류 정치세력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국민 역시 민주적 개헌을 가져온 동력은 정권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힘이었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 2008년 7월 17일, 개헌 60년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1961년 3.15 선거는 에서 1961년이 아니고 1960년 입니다.
아...친히 블로그에도 오셔서 지적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