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8. 9. 24. 13:40

 노무현 전 대통령과 신자유주의


미국 발 금융위기로 국제적인 공황사태가 올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미 공황은 와 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추종했던 이들은 그들이 이상적 모델로 하늘 같이 믿고 따랐던 미국에서 벌어진 사태를 목격하면서 이미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다. ‘시장이 모든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각종 규제철폐와 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정부와 여당은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선언하고 있는 미 부시 대통령이나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까?

  

이런 가운데 최근 ‘민주주의 2.0’이라는 토론 사이트를 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때문이라고 주장해 다시 한번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1994년 김영삼 전대통령이 ‘세계화’를 선언하고,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자유주의 개혁정부나 보수정부나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으로 불릴만한 정책을 펼쳐왔다. 노무현 정부 또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한미 FTA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은 ‘왜곡된 시장주의’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시장 강자로부터의 자유까지 추구했던 ‘공정한 시장주의자’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2006년 3월에는 이미 그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선언한 바 있다. 그 때와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 공정한 시장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여전한 믿음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발’이 사회적 약차를 걷어차 버리게 되는 필연적 결과를 마치 별개의 문제인 양 다룬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로 차별성을 부여하기여 여념이 없지만, 최소한 경제정책 기조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많은 진보개혁세력들이 우려했던 이유는 노무현 정부의 단점(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그대로 되풀이되고, 상대적 장점(개혁성)은 전면 후퇴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고, 이것은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적중하고 있다.


국가의 개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냐가 문제


보수언론 조차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언을 점치는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국가의 개입’인 듯하다. 미국 또한, 초대형 모기지 업체인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에 이어 AIG 지분인수, 부실채권 정리를 위한 정부기구 설립 움직임 등 경제에 대한 직접 개입의 색체를 뚜렷이 하면서, 신자유주의 이상모델로서 자신을 추종했던 이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살 궁리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 국가가 개입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흔히 제기되는 국가와 시장 간의 관계문제에서는 하나의 중요한 주체가 빠져 있다. 바로 국민, 즉 주권의 소재 여부다. 민주주의 체제라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대신해 시장에 개입하고, 시장은 노동과정과 임금, 상품 등으로 국민의 생활에 개입하는 순환과정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개발독재체제나, 민주화세력이 집권을 했다던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부체제에서도 국가에 대한 국민의 통제는 ‘선거’를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 역시 ‘정치적 시장’에서 선출된 엘리트들 간의 경쟁이라는 범위로 제한되어 있었고, 국민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소비자로만 규정됐다. 따라서 다양한 거버넌스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등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국민의 의사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고, 대신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가득 찬 엘리트관료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국민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국가의 역할 확대는 이명박 정부의 지난 6개월에서 보여주듯이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 국가보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라기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소통의 힘은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사회 신자유주의에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만든 ‘민주주의 2.0’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세력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꼭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없을뿐더러 ‘소통’이 부족한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를 현재에 끼워 넣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위기를 기준으로 과거의 자신을 재구성하는 태도는 아무런 발전적 지평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지난 5월 2일부터 시작된,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촛불이 던진 민주주의의 의미가 2004년 대통령 탄핵을 반대했던 딱 그 수준으로의 회귀만을 의미한다면, 폭락하는 주가지수를 바라보는 만큼이나 허무할 것이다.

  

자신의 실책이 있었다면 떳떳하게 인정함이 옳다. 민주주의에서 소통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기 위함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반성해야,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더 높은 단계로의 진출이 가능하다. 소통을 통해 불붙은 촛불 또한, 이명박 정부를 지지했던 ‘선거실패’에 대한 시민들의 반성이 동반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글 잘 일독했습니다. 예전에 전국노동자정치협회(약칭 노정협;http://lmagit.jinbo.net/ ; 급진적 사회주의 단체 들 중 하나)에서 기관지 노동자정치신문(약칭 노정신)에 '이명박, 노무현의 보다 거침없는 계승자!(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64)'라는 기사가 개제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국가냐 하는 것은 이미 맑스 - 레닌 주의자들 사이에선 꽤 오래 논의된 일로 노동자 계급의 국가와 자본가 국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자율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국가를 거부하지만 즉각 철폐 주장은 상대적으로 드문 상황이고 자본 부문을 견제할 수 있는 노동자 계급국가를 중간 기착지로 삼는 점에서 앞의 주류 사회주의 진영과의 차이점은 현대에와서 더 적어진 것이죠. 방법론 적에서 노동자국가기구사용 VS 노동자자치기구 사용정도? 또 다른 기사는 동일 출처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자본주의 국가는 무엇인가?(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11)' 와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사실 국가의 개입과 불개입의 대립은 자본가 국가라는 측면에서의 문제만 있는 것이고 이는 개선된 세상 정도의 의미에서 멈추지요... 이 점에서 어떤 국가라는 의제 참 중요하지요...

한가지 더 여기저기서 10년 전 후퇴니 파시즘이니 하는 말들은 무성하지만 현상이라는 코끼리(레이코프식으로 언급하자면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라고 말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영화명 웩더독이 더 적절할 듯 해도요.)를 쳐다봐서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처럼요... 얼마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간의 설전도 생각나게 하는데 위 글 작성시점에서는 2개월 후고 제가 작성하는 댓글에서는 3주정도 지난 뒤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안 했으면 합니다. 김규항씨(http://www.gyuhang.net )의 지적도 있지만 방향에 따라서는 혼선을 유발하는 언어라고 합니다.
헉...어느 새 긴 댓글을...ㅎㅎ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