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비평

손우정 2009. 6. 27. 14:11

후안무치한 정치엘리트들, 목 졸리는 민주주의
[주장] 지금 필요한 것은 단독국회가 아닌 '광장'
09.06.25 11:47 ㅣ최종 업데이트 09.06.25 11:50 손우정 (roots96)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로 23일 오후 국회사무처 직원들이 제283회 임시국회 개원을 알리는 벽보를 국회 정문 앞에 게시하고 있다.
ⓒ 남소연
국회 집회 공고

 

오래가는 살얼음판이다. 지난해 촛불시위 이후 정부와 시민사회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화해와 타협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권도 재격돌할 태세다. 한나라당은 23일, 친박연대와 무소속 의원 등 177명의 서명을 모아 단독국회 소집에 나섰다.

 

이에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우리 스스로 행동하는 양심을 자처하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할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고, 민주당 의원 18명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통하는 중앙홀을 점거한 채 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원내 정당 최초로 '이명박 정권 퇴진'을 공식 방침으로 결정한 민주노동당 등 야4당은 오는 28일 부산지역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정부 투쟁에 나설 계획이다.

 

바야흐로 정국은 26일로 예정된 단독국회 개원을 앞두고 정면충돌을 향해 가고 있다. 얼마 전 설치를 완료한 국회 내 CCTV는 야당의 실력저지를 '채증'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이런 갈등의 핵심에는 미디어법과 여론조사 문제가 있다. 지난 2월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미디어법 처리를 "여론수렴 후 표결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한나라당이 여론조사를 거부하면서 합의 사항 중 하나인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여당은 결국 국회파행을 감수한 단독국회 소집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한나라당의 여론수렴 거부와 단독국회 정당화 논리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여론조사를 받아들이지 않은 명분은 단순하다. 국민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구성했는데, 국회가 해야 할 일을 여론조사로 결정하면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지난 18일 "정책에 관한 여론조사는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미디어법은 국회의원들도 정확하게 모르는 이가 많아, 국회의 고유한 입법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도 정확하게 모르는 법안을 왜 국회에서 강행 처리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한나라당은 이런 논리를 단독국회 소집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22일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170석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국민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으며,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며 부르짖었고, 박희태 대표는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가 국민의 뜻을 받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여론조사로 표출된 국민의 의사보다 선거에서 확인된 국민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도 거들고 나섰다. 그는 21일 리얼미터 보도자료를 통해 "인간이 지닌 이기적 본성" 때문에 "여론조사에 의한 정책 결정이 항상 합리적일 수 없으며",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한 경우, 일반 국민의 의견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디어법의 경우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공부한 이택수 대표 자신도 국민위원회의 위원들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문가 위원회에서 결론 내리지 못한 문제를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국민에게 정책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스스로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다. 

 

물론 여론조사 만능주의를 우려하는 주장에는 새겨들을 만한 측면이 있다. 여론조사는 국민들의 단순한 선호를 모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쟁점 법안을 심도 깊게 토론한 후 정책을 결정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국민투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심의가 없는 동원투표(plebiscite) 방식은 시민들의 선입견을 강화하고 집단화하며 생활세계의 권력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뿐 아니라, 엘리트들이 이를 쉽게 조작할 수 있어 의제를 통제하는 자가 의도한 대로 결과가 산출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이들이 미디어법 강행통과를 한나라당의 장기집권 포석이라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론이 바로 의제를 통제하는 핵심 권력이기 때문이다.

 

국민 뜻을 묻는 것은 입법권 침해인가?

 

  
민주당 의원들이 24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이명박 대통령 사과와 단독국회 철회를 요구하며 이틀째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
ⓒ 남소연
민주당 로텐더홀 점거

물론 한나라당이 여론조사를 거부한 것이 이런 '심의 부재'의 한계에 대한 걱정 때문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이 다수당이 되었으므로 모든 것을 다수당의 의도대로 관철하는 것이 선거를 통해 표출된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연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는가?

 

본래 민주주의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린다는 '자기 결정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지배받는 사람이 곧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떠올리는 것은, 비록 여자와 노예는 제외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도시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다루어야할 의제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도시국가처럼 모든 이들이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효율성의 문제' 때문이지, 정치엘리트들의 의사가 국민전체의 의사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최종 권한은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매우 제한된 대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도, 최고의 법규범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을 승인할 권한을 국민에게 부여하는 것은 주권의 소재가 최종적으로는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국회의 입법과정도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대의제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 입법절차를 밟을 수 있는 것은 추정적 국민의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정적 국민의사는 국민이 자신의 이익을 옳게 인식한다면 마땅히 가져야 되고 또 갖게 될 의사나, 공공복리를 실현하는 의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보다 확실한 것은 '경험적 국민의사'다. 경험적 국민의사란, 국민 모두 국가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때 형성되는 것으로, 국민투표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의사다. 그럼에도 국회가 항상 경험적 국민의사를 바탕으로 입법활동을 펼치지 않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법률에 대한 국민의사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법안이 국가적 이슈가 되고 국회 내에서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의사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 국회의 입법활동은 국민의사를 추정해 진행하지만, 국민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는데도 정치엘리트의 무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물론 일반 국민의 정치적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민들도 때로는 자기 개인 이익에 근거한 투표행위를 하며, 왜곡된 정보와 감언이설에 속아 오판을 내리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중을 웅변술과 수사학으로 현혹하고, 대중은 이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플라톤은 민주제를 폭군 정치 다음으로 나쁜 제도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의 결정이 틀렸다는 평가는 '사후'적으로만 가능하다. 누구나 어떤 결과가 벌어지기 전에는 자신의 주장이 '가장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주장을 '대중을 현혹하는 선동'이라고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에 대해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배타적인 엘리트주의나 독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사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결정에 개입한 모든 사람이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는 비록 가장 이상적인 길은 아닐지라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며, 한 국가의 민주주의의 질은 그 나라 국민들의 민주의식에 달려 있다.

 

국민의 오판 가능성을 어렵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미 국민들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특정 후보에게 도장을 찍은 자기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국민들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독재는 바로 정부와 국회의 '정치독점'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와 장광근 사무총장이 23일 오전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나란히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 남소연
안상수

따라서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결정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국민의 의사가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과 일부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귀족은 '선출직 공무원', 즉 대통령과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며, 현대판 귀족주의가 바로 경직된 대의제의 근간인 정치적 엘리트주의다.

 

집은 건축 전문가가 짓고, 프로그램은 컴퓨터 전문가가 짜며, 옷은 전문디자이너가 만들듯이 정치도 전문가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보는 '엘리트주의'는 정치를 소수의 독점물로만 보는 귀족주의적 사고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과거의 귀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지위를 5년마다 한 번씩 갱신 받아야 한다는 점뿐이다.

 

우리가 국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차단된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모든 국민이 '정치적인 것'을 향유할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다원적 정치활동을 통해서만이 국회의원들이 추정적 국민의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기자회견을 하다가도 '정치적 구호'가 나오면 연행하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사에는 광장을 불허하고, 정치집회는 사전에 차단하고, 교사는 정치적 관심을 가지거나 이를 시국선언으로 표명해서는 안 되고, 정치적 의도를 따지기 위해 사생활 침해까지 감행할 수 있다는 이른바 '비판 언론'들의 주장들이 횡행하고 있다. 총칼을 앞세워야만 독재가 아니다. 국민에게 있어야 할 정치를 빼앗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정치독점'을 의도하는 행위가 바로 독재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한나라당이나 자칭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사회적 갈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매번 의견이 나뉘는 것을 목격한다. 첨예한 갈등을 낳는 의제들은 대부분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선택할 것인가? 우리 체제가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은 국가차원의 중대한 결정의 선택권이 분명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이처럼, 세부적인 기술적 문제를 제외한다면 평범한 국민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할 때만 작동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부인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멀어지고 독재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독국회가 아닌 '광장'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 등 야 4당의 서울시당이 24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 앞에서 광장조례개정 서울시민캠페인단 발족 및 서명시작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광장 조례는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ㆍ시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며 "조례 개정을 통해 시민들이 서울광장을 사용할 권리를 되찾겠다"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광장조례개정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최소한의 민주주의라도 들먹이고 싶다면 자신들의 특권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여론조사의 민주적 취약성을 개선하고 싶다면 오히려 광장을 열어야 한다. 즉각적인 선호만 모아내는 여론조사, 더 나아가 국민투표의 한계는 광장을 통해 국민 간의 '소통과 심의'를 보장할 때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지, 광장을 막고 국회를 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국민주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주 거론하는 공공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님비현상이나 이기주의적 견해는 국회에는 없고 시민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령 국회의원들이 뛰어낸 덕이 있어서 사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소위 '혐오 시설' 설치는 해당 주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주민들이 확인할 수 없는 은밀한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지역 주민에게 혐오시설을 강제하는 것이 정말 민주적인가? 오히려, 정말 어느 지역도 해당시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통해 광장에서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민주적이지 않은가?

 

공공적 갈등을 민주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은 모든 개인이 철저하게 자기 이해만을 앞세우는 이기적 존재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가 2007년 하남시 시장 소환운동을 "여론에 의해 시장의 소신 있는 정책이 묻혀버린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또한, 전문가나 정치엘리트는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리고, 지역 주민은 항상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 아래서나 가능한 진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촛불시위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 누가 협소한 이익을 앞세우고 있는지, 누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광장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개인적 이해가 공공성에 대한 관심으로 연계되었기에 가능했다. 

 

국민들이 모여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청취하고,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나가며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옳은 판단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민주적 공론장' 없이 가능하지 않다. 지금 열어야 할 것은 국회가 아니라 광장이다.

 

국민들이 미디어법의 세세한 내용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 법안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정부여당의 태도에서 '광장 없는 허구적 민주주의', '국민과 괴리된 다수당의 정치독점'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광장 없는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일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정말 국민을 피곤하게 만드는 정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