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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 ロィ 2006. 5. 11. 15:29
일본 천황가는 백제의 후예인가?
[한국사 바로읽기 연중기획18] 순타태자와 사아군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경계해야

 

사(史)라는 낮은 신분 콤플렉스 극복 수단…

현재의 일본 천황인 아키히토가 “환무(桓武, 재위 781~806)라는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는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일월드컵 개막식을 앞두고, 일본 천황의 방한을 실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발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발언 이후 우리나라의 유력한 일간지들은 앞 다퉈 일본 천황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두 면에 걸쳐서 이 사실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 발언을 계기로 일본의 천황가가 백제왕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식으로 논의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먼저 발언의 근거가 된 속일본기라는 사료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고, 또한 그러한 주장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 지배 정당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공동의 조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의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논의일 수 있다.

백제 의자왕의 후손 가문인 백제왕씨의 신사.

 

백제 의자왕의 후손 가문인 백제왕씨의 신사.

 

순타는 어디서 죽었나

이제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의 근거가 된 사료를 보기로 하자. 속일본기 환무 보구(寶龜) 8년 12월조에는 황태부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이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고야신립이 다름 아닌 환무의 어머니이며, 원래의 성은 화사(和史)다.
 
이 기사 속에서 신립의 조상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황태부인이었던 고야신립을 황태후로 추존하면서,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河伯)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되어 낳았으며, 황태후는 바로 그 후손이라고 했다. 그래서 황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고 했다.

만약 속일본기의 기사만 존재했다면, 고야신립이 무령왕의 태자 순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순타태자에 관한 기록은 속일본기보다 100년 가까이 일찍 성립된 일본서기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도읍지 경도를 살펴보는 환무천황.

 

새로운 도읍지 경도를 살펴보는 환무천황.

일본서기 계체기(繼體紀) 8년조에는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제의 왕은 무령왕이었으므로, 순타는 무령왕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순타가 고야신립의 가계와 연결된다는 기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순타가 백제에서 죽었는지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죽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의 이 무렵의 기사에서는 백제의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순타태자가 죽은 것은 백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어서 일본서기 무열기(武烈紀) 6년조에서는 백제국이 마나군(麻那君)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는데, 천황이 백제가 오랫동안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고 하여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 4월에 다시 백제왕은 사아군(斯我君)을 보내어 조를 바치고 따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전에 보낸 사신 마나라는 자는 백제국주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삼아 사아를 보내어 조정을 받들고자 합니다”고 했다. 드디어 자식을 두었는데 법사군(法斯君)이라고 하며, 이가 왜군(倭君)의 조상이라고 했다.

환무천황의 모후 고야신립의 무덤.

 

환무천황의 모후 고야신립의 무덤.

 

사아군 그리고 법사군

일본서기에 보이는 왜군(倭君)이라는 가계를 신립의 화사(和史)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은 일본서기 계체 7년 8월조에 보이는 백제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는 기사 속의 순타(속일본기 등에서는 純陀)와 왜군(倭君)의 시조전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아군(斯我君)과 법사군(法斯君)의 전승 속의 두 인물 중 어느 한 사람을 동일인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가령 ‘순타=사아군’이라는 전제 위에서 다시 ‘왜군=화사’라고 이해해야만 신립은 무령왕의 후손이 될 수 있다.

우선 순타가 사아군일 수 있는가하는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이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름뿐만 아니라, 사아군이 순타태자라고 볼 수 있는 근거들이 부족하다. 만약 순타가 왜군의 시조였다면 왜 태자라는 구체적으로 사실을 명기하지 않고 그냥 군(君)이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시조전승인 경우에는 없는 사실로 부풀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백제의 태자임이 명백하다면 그렇게 밝히지 않고 골족이라고만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군’이라고 한 경우에는 태자가 아닌 일반 왕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생각되는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의자왕의 아들인 풍장을 백제군(百濟君)이라고 한 것에 알 수 있듯이, ‘군’은 백제의 왕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풍장은 백제의 태자는 아니었다.

두 번째로 과연 순타태자가 죽었다는 기사를 사아군(斯我君)의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사아군에 관한 기사는 이른바 일본서기의 시조전승으로 일본측에 남아있던 자료 혹은 씨족이 진상한 본기(本記)와 같은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순타태자에 관한 기사는 훙(‘薨)’이라는 용어로 미루어 볼 때, 백제계 자료인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환무천황건도 1100년을 기념하여 세운 평안신궁.

 

환무천황건도 1100년을 기념하여 세운 평안신궁.

 

일반적으로 천자의 죽음을 붕(崩), 제후의 죽음을 훙(薨)이라고 했을 때, 일본측의 기록이라면 백제의 태자를 제후로 인정할 수가 없다. 실제로 ‘훙’은 백제왕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백제에서는 왕의 죽음을 붕(崩)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무령왕 묘지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가 왕의 죽음을 ‘붕’이라고 했다면, 태자의 죽음은 ‘훙’에 해당한다. 아마도 백제본기의 원자료에서는 왕의 죽음을 ‘붕’, 태자의 죽음을 ‘훙’이라고 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일본서기에 실리는 단계에서 ‘붕’을 ‘훙’으로 개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훙’이라고 되어있던 순타태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훙’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면, 순타태자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백제측 사료 최종적으로는 백제본기를 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군이라고 불린 집안에서 올린 사료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순타태자가 ‘훙’하였다고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추측에 불과하지만, 고야신립과 사촌 간이라고 생각되는 화조신가마려(和朝臣家麻呂)의 훙전에서도 그 조상이 백제국인(百濟國人)이라고만 하고, 순타태자나 무령왕을 언급하지 않을 점에서도 화사(和史) 집안이 과연 무령왕과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를 의심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추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순타태자에 대한 기록과 사아군에 대한 기록은 계통을 달리하는 것인 셈이고, 순타태자의 죽음은 백제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순타태자가 514년에 백제에서 죽었다면 법사군(法斯君)이 왜에 남아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사아군을 백제왕의 골족 즉 일족이라고만 하고 태자라고 하지 않은 점이나, 순타태자가 백제에서 죽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사아군이 곧 순타태자일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왜군(倭君)과 화사(和史)

이제 법사군을 시조로 하는 왜군(倭君)과 고야신립의 집안인 화사(和史)가 과연 동일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왜(倭)와 화(和)는 양쪽 다 ‘야마토’라고 읽으므로 글자의 차이가 있을 뿐 뜻으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성(姓)인 군(君)과 사(史) 사이에는 적지 않은 격차가 존재한다.

군(君)은 원래 해당지역의 집단의 장을 부르는 호칭, 경칭에서 발전한 가장 시원적인 성(姓)의 하나다. 처음에는 상하존비의 의미는 없었으나, 야마토정권의 통일 이후, 직업 세습과 조정 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성(姓)으로 서열을 정하게 된다. 즉 야마토정권의 수장이 성(姓)의 여탈권을 장악하고, 조정 내에서 씨의 직업 지위 가격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성(姓)이 공인되고 제도화했다. 그 중에서도 군(君), 신(臣), 련(連), 직(直), 조(造), 수(首)의 여섯 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군(君)은 실제로는 전통적인 재지수장들이 천황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원래 친족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계보가 조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 사(史)는 문서의 작성이나 장부 정리를 맡은 실무적인 관인층을 뜻한다. 주로 창고에 보관된 물품을 정리하거나 세금에 관한 장부를 기록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다. 재지수장층 내지는 외국의 왕족들에게 부여된 군이라는 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속일본기가 편찬되는 시기에 오면 군(君)과 사(史)의 격차는 현저히 좁혀진다. 왜냐하면, 중앙정부의 관인들을 우대하면서, 원래 지방호족을 중심으로 사여되었던 군(君)은 점차 그 위상이 내려앉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는, 군(君)은 중앙에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지방에서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던 유력호족을 비롯하여, 신들의 계보를 통해 천황가와 연결된다고 내세우는 천황가와 대등한 세력이었다. 또 사(史)와 비교해 볼 때, 군(君)은 군사정벌의 장군, 외교사절 중의 사신 등 사(史)가 맡을 수 없는 중책들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객관적으로도 조신(朝臣) -> 군(君) -> 사(史) 서열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왜군과 화사가 동일한 가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양신의 자손

환무의 어머니인 신립(新笠)이 백제계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무령왕의 태자인 순타의 후손인지는 의문이다. 순타태자와 사아군을 동일한 인물도 보기도 어렵고, 왜군과 화사가 같은 집안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무의 모계가 무령왕 나아가서는 주몽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후대로 갈수록 점점 분명해진다.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환무천황 측이 그러한 사실을 거듭 주장한 이유는, 史라고 하는 낮은 신분이었던 가계를 모계를 가지고 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모계가 한반도의 태양신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자신은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태양신의 계보를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천조대신을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중국 황제처럼 보편적인 태양신이라고 할 수 있는 호천상제를 그것도 교야(交野)라고 하는 백제왕씨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제사지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당시 관행에 비추어 모계 혈통이 백제계라고 하는 것은 왕이 되는 데 결코 긍정적인 요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환무는 자기 모계가 비록 일본의 천황가는 아니지만 백제왕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의자왕의 직계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왕씨(百濟王氏)를 자신의 외척이라고 했고 또 그들을 우대했다. 뿐만 아니라 백제왕씨 가문의 여러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혈통적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약력

60년 경북 의성 출생.

82년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84년 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석사ㆍ박사 과정 졸업.

95년 교토대 일본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 겸 박물관장

 

*저서

한국고대사, 일본고대사,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전근대한일관계사(공저), 전통사회의 이해(공저), 논문으로는 환무천황의 모계는 무령왕의 후손인가, 왕인의 논어 천자문 일본 전수설에 대한 재검토, 화랑세기에 대한 통계적 접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