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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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 갤러리 ♣/충청남도

2011. 5. 6.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부친의 개화사상으로 근대적 사고 키우며 성장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 지주였다.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를 떠나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