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두레 묵상

정의구현사제단 2009. 10. 7. 23:16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이 쓰는 주일 묵상입니다.

 

빛두레 묵상글 보기

 http://www.sajedan.org/board/?b_id=9

 

 

 

 

 

 

 

 

 

 

도대체 당신들이 어떤 정의를 구현한다는 건가요. 김일성, 김정일이 북한 주민의 피를 빨고 있는 악이 아닙니까. 도대체 북한 보다 더 악한 체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무슨 정의를 말합니까. 악의 편이 오히려 말로는 정의를 떠드는 걸 흔히 봅니다. 이제 스스로 겸허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빛두레 묵상

정의구현사제단 2009. 9. 25. 15:47

 

 

 

   <제950호 연중 제26주일> 편가름과 포용 

글쓴이 : 최훈 신부 
“최가입니다.”
우리는 소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간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거창할 것은 없고 그냥 배낭하나 메고 여기저기 속 편하게 떠돌아다니곤 한다. 그러다 마을 어귀에서 어르신이라도 만나면 정중히 인사하고 동네가 편안해 보인다느니 개울물이 맑다느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발길을 돌리곤 한다. 그런데 가끔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성씨가 뭐요?”하고 물어오시는 어르신도 계시다. 그리고 “최가입니다.”하고 말씀드렸는데 우연히 성씨라도 같은 경우엔 아주 친근하게 대해 주실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반대로 성씨가 같지 않으면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같은 성씨, 같은 고향, 같은 학교, 같은 군대. 서로를 강하게 묶어주는 끈이 된다. 그러나 그것에 속하지 않으면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이상 가까워지기 어려운 벽을 만난듯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신부들 사이에서도 출신본당에 대한 애정이 너무 맹목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때도 있다. 같은 편인가 아닌가에 대한 구별은 사람을 단순하게 한다. 내 사람이면 신경을 써주고 내 사람이 아니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런 편가르기가 익숙해지면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 편인가가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런 편가르기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너는 내 사람이냐? 아니냐?’ 더 나아가 ‘너는 내 사람을 받아들이겠느냐? 내치겠느냐?’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편가름은 사람을 화끈하고 선이 분명하며 ‘어리석게’ 한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병으로 시름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편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거기서 포용은 구색 갖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도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버린다. 힘을 조작하고 부풀리고 왜곡하려는 유혹은 공동체를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의 장으로 만든다. 그래야 힘을 통제하기 쉽기 때문일까? 그 힘이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이거늘…. 그래서 이 시대 인간의 어리석음이 더 깊이 저려온다.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코 9,40)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포용이 더 깊이 그리워진다. 비전이 없는 지도자는 편가르기로 조직을 유지하려고 한다. 편가르기는 결국 자기 안에 다양한 모습의 조직을 이끌 어떤 비전도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색깔을 분명히 하고 그 색깔만 데리고 가겠다는 아집이 아닐까? 비전이 있는 사람은 그 비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포용하고 움직이며 공동체를 일치시키고 나아갈 길을 열어간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정구사에 속하지 않았으면 모두 불구사입니까?
사회정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신부님 자신이
편가르기에 일익을 담당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추기경께 "골수 반공주의자"라고 매도한것은 남을 판단하고
편을 가르는 전형적인 행태였습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을 저버린 행패입니다.

 
 
 

빛두레 묵상

정의구현사제단 2009. 9. 20. 20:11

 

 

 

 

  <제949호 연중 제25주일> 순교자를 찾아

 

글쓴이 : 정진국 신부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기고서 자동차를 팔아버리고 이른바 오토바이를 사버렸다. 배달용․택배용 바이크는 왠지 품위가 없어 보이고, 고속주행이 가능한 일명 알차(레플리카라 불리는 경주형)는 다루기가 버겁고, 할리로 대표되는 묵직한 녀석은 지를 돈이 없어 중고지만 튀는 디자인에 희소성 있는 이탈리아제 500cc 스쿠터를 지르고 말았다.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이 생기자 바리바리 짐을 챙겨 지난 5월 전국일주를 떠났다. 12박 13일! 절반은 성지순례로, 절반은 관광모드로 길을 떠나며 들린 성지를 열거해 보자. 한티, 배티, 미리내, 남양 성모성지, 공세리, 구합덕, 갈매못, 나바위, 풍남문, 전주 숲정이, 치명자산, 전동성당, 전주 서천교(조윤호 요셉 순교지), 그리고 제주의 성지들.

거룩한 순교자들의 성지를 찾는 발걸음이었으니 경건함이 가득해야 하지만 좋아하는 바이크를 타고 떠나는 길이었기에 오히려 가벼운 흥분과 설렘이 더 컸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나며 순례지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때로는 너무 초라한 성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때로는 과하다 싶도록 꾸며지고 커져 버린 성지와 그곳에서 만난 일부 행락객처럼 보이는 신자들의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삶의 흔적과 목숨마저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그분들의 열정적 신앙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9월 순교자 성월의 중심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교우들이 전국의 성지를 찾고 순례하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특별한 은총과 성인들의 전구를 청할 것이다. 그러나 올해도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곳, 제법 이름이 알려진 순교성인들의 성지(만)를 찾을 것이다. 교통이 불편해 접근하기 어려운 곳, 제대로 된 편의시설과 기반이 부족한 곳, 무엇보다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분들이거나 그리 유명(?)하지 못한 분들의 성지는 이 순례의 대목에도 소외될 것이다.

이미 가난한 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교회의 문턱은 충분히 높아지지 않았는가! 같은 교구에서조차 인기 있는 본당과 그렇지 못한 본당이 뚜렷이 구분되고 교구와 교구사이에도 벽은 높아만 가는데 어찌 성지와 순교자 사이에도 그 시설과 지명도에 따른 차별과 소외가 없으랴.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바로 내 탓, 내 큰 탓이었음을.

그래, 이번에는 새롭게 성지순례를 떠나보자, 좀 소외되고 볼품없는 곳으로, 이름 없는 순교자,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위대한 순교자를 찾아 바이크 시동을 걸어보자.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살육하는 북한체제를 비판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 정의를 말해선 안된다. 당신들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국정원은 뭐하나??이 빨갱이들 안잡아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