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단 기도회/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미사

정의구현사제단 2015. 10. 17. 18:35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245차 미사

 

때_ 2015.10.9.금.16시

곳_ 쌍용차 평택공장 앞

 

 

 

주눅 든 신앙과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

 

  강론 : 김인국 신부(청주교구 성모성심성당)

 

 

누구의 노동이든,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사람을 갉아먹는 지루하고 답답한 노역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는 당당하고 기꺼운 봉사가 되게 해주시라는 지향으로, 특히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7년간의 투쟁 그리고 김득중 씨 단식 40일에 담긴 절절한 소망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노동자를 비인간화 시키는 경제모델을 거부하라, 맞서라, 싸워라하신 교종의 말씀에 호응하신 여러분이십니다. 무엇보다 너희는 단식을 선포하고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모아 주님께 부르짖어라”(오늘 독서본문) 하신 말씀에 호응하신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7년째 싸우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방금 인도에서 돌아오신 원정대 형제들, 여독은 풀리셨는지요.

무엇보다 40일 단식의 주인공이신 김득중 지부장님, 고맙습니다.

지부장님의 부인 되시는 배은경 님. 큰 아드님 선택, 작은 아드님 건엽 그리고 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가족과 동지들의 찢어지고 타들어가는 속을 우리는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느님, 어서 추수하소서!

 

예수님 생애에서 광야의 단식 40일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였듯이 김득중 지부장님 단식 40일을 계기로 쌍용차 해고노동자 모두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엘 예언자가 주님의 날이 가까왔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 정녕 그 날이 가까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 낫을 들어 사람의 역사를 수확하시는 하느님! 쭉정이든 알곡이든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거두어들이시는 하느님! 쭉정이 된 자들은 활활 태워 깨끗이 없애소서! 알곡이 된 자들은 살뜰히 곳간에 모아들이소서! 요엘에게 내리셨던 약속을 어서 빨리 이루어 주소서!

 

옥쇄파업이 한참이던 2009년을 생각하면 참 아득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디서 무얼 하셨나요? 저는 용산 남일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처음 들렀습니다. 여러분, 용산 참사가 도대체 언제 일이었습니까. 그런데 우리 쌍용차 형제들이 여태껏 이러고 있습니다. 7년째 이러면 알아줄까 저러면 알아줄까, 안 해 본 것 없이 얼마나 괴롭고 외로우셨습니까. 그런데 쌍용차 해고 노동자 여러분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구약성경의 대목이 있습니다. “나의 종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겪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그를 찌르고 쓰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싸우시는 노동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줄곧 얻어터지고 철철 피 흘려주신 예수님 고맙습니다. 오늘까지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투는 주눅 든 우리들의 신앙과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입니다.

 

오늘 저희가 드리는 이 미사는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고 그저 위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질긴 투혼을 저희 마음에 나누어 담음으로써 저희도 일어서려는 다짐의 자리입니다.

 

 

 

80년 광주와 2009년 쌍용차

 

여러분, 힘들더라도 200984일과 5일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서 파업을 진압하던 날을 다시 한 번 떠올려 주십시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 쌍용차 노동자들을 진압하던 지옥의 칼날이 오늘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뇌리에 새겨진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쓰러진 노동자들을 특공대가 에워싸고 폭행하던 그 장면 말입니다. 그것은 흡사 80년 광주 공수부대의 만행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광주에 비할 수 있냐고 할 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 이상입니다. 1979년 부마항쟁에서 경찰이 들고 나온 진압봉의 길이는 60센티였습니다. 이듬해 광주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어났을 때 군인들의 진압봉은 80센티미터로 늘어났습니다. 20센티 연장이 가져온 타격력은 가히 살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쌍용차 사람들이 일어났을 때 진압봉은 얼마였습니까. 일 미터가 넘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를 이뤘다고 자화자찬하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살벌한 세상에서 7년을 싸우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초인적인 투쟁이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드립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칼끝이 우리들을 겨누고 있습니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노사정대타협? 가소롭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가 반반씩 물러나서 양보하는 타협으로 해결될 문제입니까? 지금은 대타협 정도가 아니라 대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며칠 전 복지부가 발표한 자살 사망자 수가 최근 5년 동안 7만 명이 넘습니다. 이라크 전쟁 사망자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수를 합한 것 보다 훨씬 많은 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은 총성만 울리지 않을 뿐 전쟁의 나날인 것입니다.

 

 

 

다 걸고 싸우자

 

김득중 씨가 40일째 꼬박 굶고 있는 오늘 아침에도 저는 밥을 챙겨 먹었습니다. 무엇을 하겠다고 꼬박꼬박 세 끼를 챙기는가? 미안하고 송구스럽습니다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리는 남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곡기를 채웁니다. 그래서 먹었다면 다 함께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에서,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하는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수익률 백 프로를 이루었을까요? 그것은 다 걸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올인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런 질책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를 받아서 하나를 고스란히 반납함으로써 주인에게 손톱만큼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무서운 꾸중을 들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이 낡은 세상 한 가운데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루려 하십니다. 그런데 겁쟁이들과 자신의 안위만을 찾는 사람들과는 도무지 하느님이 이루려는 새 것을 도모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새 세상은 오로지 7년을 싸우고도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 40일 온통 굶고도 눈에서 광채가 나는 사람들,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고 한방에 모든 것을 털어 넣으며, 전부를 쏟아 붓는 사람들, 최종적인 결단 속에 과감히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나라는 성공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하며 잠시 기도해 주십시오.

 

 

 

 

 

 

단식 40일째의 김득중 지부장 모습.

 

 

  돌아온 인도 원정 투쟁단.

 

 
 
 

사제단 기도회/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미사

정의구현사제단 2015. 10. 5. 16:09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

 

때_ 2015.10.9.금.16시
곳_ 쌍용차 평택공장 앞
(1부_ 미사, 2부_ 문화제)

 

 

 

29번째 죽음을 막고자 그리고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곡기를 끊고 무기한 단식 농성 중인 쌍용차 김득중 지부장

오는 10월9일 금요일 단식 40일째를 맞이합니다.

 

“조금만 더 힘을 보태준다면

조금만 더 함께 해준다면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공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단식 34일차 때에 쌍용차 김득중 지부장의 호소)


예수님도 고통스러워했던 단식 40일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고통을 보내고 있는 쌍용차 김득중 지부장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해고자들의 고통을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며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우리의 기도와 연대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공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함께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9일은 하루 동조 단식이며, 버스비가 남을 경우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단 기도회/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미사

정의구현사제단 2015. 9. 8. 23:41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쌍용차 사태의 원만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

 

2015.09.08.화.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 앞

주최 : 수원교구 평택지구 사제단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강론 : 최재철 신부(수원교구 비전동성당)

 

 

상처 극복을 위해서, 한 번은 상처와 마주쳐야 한다. 상처가 끔찍할수록 꽁꽁 감추는 일은 위험하다. 억눌린 상처가 인생 전체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간 걸리더라도 설사 고통을 다시 겪게 되더라도 한 번은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유배된 상처가 저절로 낫는 일은 없다. 동굴에 틀어박힌 유배된 상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그 사람이 못났거나 잘못된 운명을 타고 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를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중에서. 작가 배르벨 바르데츠키

 

 

평택은 큰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고 있는 도시입니다. 대추리가 그랬고, 쌍용차가 그랬습니다. 아니 쌍용차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는 많은 평택시민들은 그 상처를 외면하려합니다. 팽성 대추리 주민들을 외면하려 했고, 노동자와 가족들 자살과 심장마비 등으로 죽은 28명의 생명을 애써 외면하려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 일까요? 마음이 편해질까요? 지지부진한 노··사 교섭,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교섭의 진척을 이루고자 단식에 나선 김득중 지부장의 단식이 9일째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를 바라보며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마음이 무지하게 불편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평택시민들은 자신들의 곁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굳이 내 출근길에 보이지도 않는 일들을 찾아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같은 평택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미사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신 다음, 되물으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두 문장은 언뜻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는 어디까지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고 말씀하신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성전에서 일을 하는데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서 애써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가는 그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멀리 돌아가 지나갔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고 십일조내고 하는 것들로 마치 정기 적금을 붓듯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원한 생명의 티켓을 따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시작되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시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입니다. 복음의 끝부분 결론에 결국 이렇게 나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는 것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도 되새기고자 합니다. “저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아닌,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저는 평택에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추론할 수 있는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저는 신학적으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수도 있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노동자였을 수도 있고,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며 일꾼을 고용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큰 사업장을 이끌며 노동자들을 학대하거나 마음대로 짜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노동조합을 하며 고용주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보다 못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다시 갑질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쥐꼬리만 한 수입으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을 어떻게 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청백리일수도 있고, 탐관오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 넓은 사람일 수도 있고, 주변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밥그릇만을 챙기기에 바쁘거나 군소리 없이 일해서 진급이나 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갖은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눈감고 그 자리를 회피해서 마음 편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핑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강도를 만나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고, 사지로 내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조건을 따져서 이웃이 되어주거나, 착한 사람 내가 친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하고, 그것은 우리의 상처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요, 평택시민들의 문제요, 대한민국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