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적위연 2012. 7. 18. 16:03

 

강유는 본래 양주지방의 유력한 호족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가 촉으로 투항한 이후 중용된 점에는 이와같은 신분적 장점이 크게 작용했다. 양주지방의 유력 호족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위나라 입장에서는 수많은 지방 호족 가운데 한명일 뿐이다. 그렇지만 약소국인 촉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제갈량은 1차 북벌과정에서 강유의 투항이 있자 그를 즉시 중용하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강유의 투항 직후에 그를 크게 칭찬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선전했다. 강유의 투항 얼마 후, 그에게 중호보병의 훈련을 맡기고 유선을 만나게 했는데 중호보병이란 경성을 지키는 부대다. 당시 강유가 위나라에서 누리던 지위와 영향력을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파격적인 대우였음에 분명하다. 강유가 조예와의 개인면담을 꿈꿀수나 있었겠는가. 강유는 이 후에도 거칠 것 없는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촉나라의 마지막 신권통치자에 이르게 되니 이는 강유가 계속 위나라에 머물러 있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본래 투항자를 후대하고 예우하는 것은 적국의 인사를 회유하고 동요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촉나라와 같은 약소국의 경우라면 응당 적극적으로 취해야만 되는 방법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곽순이란 자에 의해 비의가 살해당하는 일에서 볼 수 있듯이 너무 과도하게 사용됨으로 인해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말해 강유를 지나치게 중용한 것 역시 촉나라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약소국인 촉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강유는 능력에 비해 너무 과분한 위치에 있었다.

 

 강유의 경우, 국내에서 다소간의 논쟁이 있어왔는데 그 쟁점 가운데 한가지는 촉나라 멸망의 책임과 관련된 것이었다. 강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강유를 단순한 일개 무장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오히려 강유에 대한 명백한 폄하이다. 강유는 이전 글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녹상서사를 부여받은 인물로서 제갈량 - 장완 - 비의로 이어지는 촉나라의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나타난 신권통치자 4인방 중 마지막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가 단지 일개 무장에 불과하다면 비의 사후 강유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수많은 북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일개 무장이 어떻게 유비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한중의 독한중 방위체제를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어째서 강유는 이전의 신권통치자들과는 달리 내정을 도외시한채 외정에만 힘을 쏟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강유대에 이르러 내정과 외정이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제갈량 시대에는 유선은 꼭두각시 황제였을 뿐이다.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하는 과정에서도 모든 정사를 본인이 처리했으며 유선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유선은 마음대로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사실상 연금되었다 보아도 무방했다. 유선이 어렸는가? 그렇지 않다. 손권이 몇살이었는가? 손책은 어떠했는가? 고종은 20살때 대원군을 밀치고 친정을 시작했다. 유선은 어땠는가? 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평생토록 정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진정으로 유비에게 충성하고 유선에게 충성했다면 그럴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조서조차도 제갈량이 대신 써서 반포했을 정도다. 유선이 결코 적지 않은 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20살 안팎의 유선에게 그정도의 능력도 없었다는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유선에게 조서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고 제갈량이 대신 써서 처리한다는 것은 황제권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제갈량이 사관을 두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유선은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다. 모든 정사를 제갈량이 처리했으므로 사관을 둘 이유도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것은 앞으로도 유선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자신이 모든것을 처리할 의도였음에 분명하다. 실제로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유선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았다. 유선은 당연히 제갈량이 싫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유비의 유언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사실 그럴수밖에 없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유선은 제갈량이 죽었을 때, 그에게 문상을 가는 것을 금하고, 제사지내는 것도 제지했던 것이다. 정말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다면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이와같은 상황에서 제갈량 사후 장완이나 비의, 강유등을 내세워 신권통치를 계속 해나간 것은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일로서 결코 유선의 본의가 아니었다. 실제로 제갈량 사후 유선은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켜나간다. 장완 시대에는 장완에게 북벌의 전략적 틀을 마련해줄 정도였는데(내용을 보자면 유선의 포부와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제갈량 시절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강유시대에 이르러 외정을 강유에게 전담시키고 자신은 내정을 맡는 2원적 체제로까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환관의 두각을 꼽을 수 있다. 환관은 본래 황제의 개인 노예이다. 따라서 황제권이 약하다면 환관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환관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당연히 황제권이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강유는 내정에 간섭한 일이 없으며, 내정을 문란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환관 황호 또한 외정에 간섭한 적이 없음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강유에게 내정의 책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면죄부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외정에서의 실패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강유는 크게 3가지의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다. 첫번째 잘못은 잦은 외정의 실패다. 강유는 외정을 여러번 시행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초기에 몇차례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이는 위나라의 변방을 어지럽히고 약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뒤로 갈수록 그러한 가시적인 성과는 고사하고 병력의 큰 손실마저 입게 되었다. 종합하자면 잦은 북벌의 실패로 국력을 소모하고 많은 병력까지 잃었다. 결국 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는데,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부정적인 조류가 다름아닌 군부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장익). 그리고 이것이 학자(초주), 조정대신(제갈첨), 기타 여러 인물들을 통해 비난여론으로 확산되어 강유를 실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마저 일어나게 된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황호의 농간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 감정적으로 접근한 결과이다. 당시 강유의 공과를 따져볼 때 이러한 실각 논의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황호가 염우의 로비를 받고 움직인 것 또한 당시 강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편승한 것으로 결코 황호가 주도한 것이라 볼 수 없다. 감정적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 당시 강유의 공과를 유념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강유는 좌천되거나 실각되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는건가? 더구나 어떠한 모함을 통한 것이 아니라 그 공과를 따져본 결과로 실각논의가 있은 것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강유에 대한 실각논의가 아니라 그러한 대대적인 실각논의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한 유선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갈첨과 동궐이 평상서사에 임명된 기록이 있는데 앞선 비의편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그동안 단 한명의 녹상서사만을 두었던 촉이었기에 상당한 궁금증을 자아냈던 부분이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대규모의 실각논의에 대해 부담을 느낀 유선이 강유를 계속 지지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러한 인사조치를 취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곧이어 촉이 바로 멸망해버렸기에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강유가 저지른 두번째 잘못은 위나라의 남침에 대한 대비가 미흡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262년 답중으로 이동한 강유는 위나라가 대규모 남침을 준비중임을 간파하고 유선에게 한중에 지원병력을 보낼 것을 건의하지만 황호의 농간으로 이 소식이 전달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점이 두군데서 발견된다. 첫째는 황호의 움직임이다. 황호는 여지껏 외정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직전에 벌어진 강유 실각논의도 황호가 여론에 편승한 것으로 황호의 적극적 움직임이라 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유선은 그런 집단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유를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호가 갑자기 외정과 관련된 강유의 보고를 중간에 가로채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둘째는 강유의 움직임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유는 이미 위나라의 침략이 있기 1년 전부터 위의 남침이 있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계속 답중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 강유는 위나라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지체없이 답중을 버리고 한중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한중은 위나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록과 같이 정말로 강유가 위나라의 침공 의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응당 한중으로 이동해서 방어준비를 했어야 옳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답중에서 멍청하게 있다가 저항한번 못해보고 한중과 답중을 모두 잃고, 결국 촉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멍청한 일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유선이 허락하지 않아 이동을 못했다고 볼 수도 있을까? 하지막 기록에서는 강유가 한중에 증원병력을 보낼 것만을 요구했을 뿐, 본인이 답중의 근거지를 한중으로 옮기려 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강유가 저지른 세번째 잘못은 한중의 방어 시스템을 고친데에 있다. 원래 한중의 방어시스템은 유비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기본 요지는 한중의 각 요새처에 병력을 집결시켜 적의 진입을 사전 차단시키는데 있다. 한중 자체가 갖는 천험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이 시스템은 위연 - 오일 - 왕평 - ? - 호제까지 이어지는 독한중이라는 촉나라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단 한차례도 뚫리는 일이 없었다. 특히 왕평의 대에는 3배가 넘는 위의 침략을 막아내는 등 철저하게 한중을 수비해냈던 방어시스템이다. 그런데 강유는 이 방어 체제를 변경시킨다. 한중 각 요새처에 주둔중인 군대를 대거 철수시켜서 적군을 한중 깊숙히 끌어들여 격파하는 체제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이게 될 경우, 단 한번에 격파하지 못할 경우 국력이 열악한 촉군의 입장에서 한중을 재탈환하는것에는 무리가 따른다는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단 한차례도 뚤리지 않는 철벽의 방어벽을 자랑하던 한중이 단 한차례의 저항도 못한채 위나라의 수중에 떨어졌고, 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검각에서 농성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심각한 전략적 미스였다. 공격시에 획기적인. 그리고 다소 모험적인 작전이 수행되는 것은 안정된 적의 수비를 깨뜨리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비시에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심지를 걸고 모험을 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이미 검증된 안정된 방어 시스템을 불안하고 모험적인 시스템으로 바꾸다니 말이다. 방어는 방어의 역할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국력이 열악한 입장에서 국력이 월등한 적을 깊숙히 끌어들이는 모험을 왜 한 것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혹자는 황호의 농간이 없이 강유의 요청에 따라 지원군이 미리 당도했다면 달라졌을것이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회의적이다. 강유가 변경한 시스템은 한중이 갖는 천험의 요지라는 지형적 이점을 상당부분 스스로 포기하는 작전이다. 얼마의 병력이 더해진다고 해서 종회의 군대를 막아내고 이미 한중 깊숙이 들어온 위나라 군대를 다시 격퇴할 역량이 촉나라에 있었을까? 단언컨데 그런 역량이 없었다. 그런 역량이 있었다면 촉나라가 그렇게 망했겠는가?

 

이상의 글에서 느껴지듯이 나는 강유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촉 멸망의 큰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책임자는 유선이다. 제갈량의 시대에 촉이 망했다면 유선에게는 상당부분 면죄부가 적용될 수 있었지만 강유대에 이르러서는 유선은 진정환 황제의 모습이었다. 유선은 절대로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본다. 그가 장완에게 북벌의 전략을 밝힌 내용만으로도 그점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유선은 왜 강유를 실각시키지 않았던 것일까?

 

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본인은 진수의 기록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진수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촉의 멸망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료부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사실의 누락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조작인지는 내 주제로는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지만 확실히 매끄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나의 무지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강유의 두번째 잘못을 언급하면서 말했던 두가지 의문점인 '왜 강유는 적의 공격을 알고 있음에도 멍청하게 답중에 있었던 걸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을까? 왜 하필 답중인가?'와 '왜 여태 가만히 있던 황호가 갑자기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일까? 유선은 강유를 실각시키지 않음으로 그에 대한 지지를 계속 나타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황호는 그렇게 무리하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외정에 간섭햇던 것일까' 와 같은 점들이 그렇다. 여기에 한가지 추가하자면 '왜 유선은 강유를 실각시키지 않았던 걸까'이다. 유선은 절대로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본다. 그가 장완에게 북벌의 전략을 밝힌 내용만으로도 그점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나는 촉나라 신료들이 유선의 황권이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으리라 본다. 전통적인 황제에 의한 통치보다는 신권통치가 귀족들이 바라는 통치형태에 더 가까웠을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촉나라 멸망의 책임을 신하들의 책임이 아닌 무능한 황제와 환관에게 돌리려고 무리하게 왜곡한 것은 아니었을까?

 

p.s - 앞서 제갈량의 후계자 그 두번째 이야기였던 비의편에서는 세번째 이야기인 강유를 다루면서 촉나라 내부적인 문제를 다루겠다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점은 다음 유선에 관한 글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p.s - 오랜만의 글인데 아주 병맛이군요;;

 

2012년 07월 18일

작성자 : 무적위연

음 한가지만 말씀드리자면, 강유가 바꾼 방어체제가 잘못된 방어체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유의 방어체제는 간단히 말하면 청야전술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며, 역습까지도 가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강유가 맡은 시기에는 위나라와 촉나라의 국력이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한중에서 틀어막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죠.
강유가 그 점을 가장 극명하게 느낀게 적도 전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촉군을 격파하고 서질을 잡아 죽였으며, 옹주자사 왕경의 부대를 완전히 격파해버리는 등, 위의 서부방면군을 완전 격멸시켜버립니다.
그 상태에서도 강유는 위의 옹주를 집어삼키는데 실패하게 되죠. 강유가 가지고 있던 소수 병력 (2만여 정도)의 한계와 위의 물량 때문이었죠.
더군다나 그 뒤에 있었던 강유의 유일한 패배 - 단곡 전투 - 의 경험 역시 북벌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고 방어 전술을 수정한게 아닌가 합니다.
상대방의 병력을 끌어들여 격멸, 후퇴하는 적군을 따라 추격하며 이삭줍기. 가장 이상적인 방어전략이기도 하고, 전술적인 측면에서 위군보다 우위에 있던 강유에게는 (성공만 한다면)확실한 승리를 보장해주는 방법이었죠.
문제는 이를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던 촉군이 강유의 지시와는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따로 놀아버리는 상황이 발생한겁니다.
여기까지 들어가면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저랑 관점이 다른게.

우선 유선과 제갈량의 관계 그리고 환관에 대한 시각적 부분인거 같습니다

촉은 대내외적으로 한을 계승한다고 표방하였고 그 정치 체계또한 한과 유사하게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의 가장큰 문제중에 하나가 바로 내부의 우환 환관입니다
시스템을 유지 계승을 함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바꿔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죠.
물론 그것이 제갈량 장완 비의라는 특출난 인재가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지만 그러한 인재가 없을때에는 병폐가 반복될수 밖에 없고 촉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줬죠

황제권이 강했을때 환관도 힘을 키운다라고 하셨는데 전한 시기부터 한말의 혼란기까지 황제권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상관없이 환관은 그 힘과 영향력이 있었죠.

즉 위에 유선의 황제권 강화에 대한 증거로 제시했던 환관세력의 대두는 그 인과 관계가 빈약하다고 할수 밖에 없죠

또한 제갈량과 유선의 관계 또한 너무 삐딱하게 보시는게 아닌가 싶네요.

제갈량이 유선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로인해서 유선이 제갈량을 미웠했다라는게 좀 너무 나갔다라고 생각하는게.

물론 제갈량이 촉의 행정관 군권을 전부 가지고 행사한것은 분명하지만 유선이 권력의 야망이 있었다면 제갈량 사후 전면적으로 나섰을 것입니다.

장완과 비의에게 행정권을 일임하는 형태가 아닌 본인이 정면에 서고 장완과 비의로 하여금 서포트를 하게 해주면서 본인의 정치력을 행사 하는것이 야망과 능력을 가진 자로써 당연한 수순입니다

물론 촉의 정치체계가 왕족에게 권력을 배제 시키는 입헌군주체계일수도 있겠지만 후에 유선이 앞으로 나오게 되는걸 보면 꼭 그렇게 보여지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드리자면 귀찮게 골머리 썩히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아지는데 알아서 잘하는 사람있고 실제로 시켜보니 잘하네? 신경안쓰이게 니네가 잘좀 해라. 라는 식의 방치형태인거죠

실제로 제갈량이후 장완과 비의 동윤까지 인재가 있을때는 굳이 유선이 대놓고 앞으로 나온케이스는 드뭅니다.

형식적인 제가 정도로 그치는 거죠.

그뒤에 가뜩이나 변방에 인재풀이 작은 곳에서 인재가 고갈되면서 황제권이 앞으로 나서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