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산에서 살리라~

고려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이씨려 (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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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 여행/발길따라~

2021. 11. 22.

 

 

무량산과 용궐산 산행을 마치고나서 들러봤다. 귀미마을 어귀에 있는 비각과 정자다. 마을 안쪽에는 남원 양씨 종택과 귀문각이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거기까지 돌아볼 수는 없었다. 남원 양씨(楊氏) 종택에는 보물 제725호가 있다고 한다.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

 

비각의 비석에 선명한 글씨로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라 음각돼 있다.  

 

 

 

비각 옆에 '열부숙인이씨사적비(烈婦淑人李氏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1377년 양수생의 부인 이씨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자 친정 부모는 당시 풍습대로 수년에 걸쳐 개가를 권유했다. 이씨부인은 개가를 거절하고, 유복자 양사보(楊思輔)를 등에 업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합격증인 홍패(시아버지 양이시는 공민왕 4년, 남편 양수생은 우왕 2년에 문과시에 합격)를 가슴에 품고, 파주에서 시댁이 있는 남원까지 천 리 먼길을 내려왔다. 


남원에 내려온 얼마 후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침입이 있자, 이씨부인은 순창 쪽으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남원부 대산면에 위치한 비홍치 고갯마루에 올랐다. 사방 산의 정기를 살피는데, 서북쪽 순창 구악산(무량산)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비홍치’는 기러기를 날려 보내는 고갯마루라는 지명이다.


이씨부인은 비홍치에서 버드나무 세 가지를 꺾어 나무오리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첫 번째로 날려 보낸 나무오리는 적성면 운림리 농소막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동계면 구미리(龜尾里) 녹갈암(鹿渴岩)으로, 또 한 마리는 인계면 마흘리에 떨어졌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세 마리 나무 기러기를 살펴보고, 구미리 녹갈암 터는 내 자손이 대대로 복록을 누릴 터로다 하며,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다.


이와 같은 택지법은 고려시대에 사찰 터를 택할 때 쓰는 술법이었다고 한다. 이씨부인의 택지에 따라 농소막에는 그녀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구미리는 자손들이 복록을 누릴 생거지지(生居之地)가 되었으며, 마흘리는 인계면의 명당으로 길지(吉地)가 되었다. 이씨부인은 부귀영화를 누릴 땅보다 자손들이 백세 되도록 복록을 누릴 곳에 터를 잡았다. 녹갈암은 구미리의 주산인 무량산(구악산)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곳이다. 그 기운이 남원양씨의 종택을 이루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부인의 행실을 알게 된 세조가 1467년(세조13) 정려를 내려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비와 정려각은 이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다. 현존 건물은 1850년(철종 1)에 중건한 것이다. 구미리 마을 입구에 그 정려가 자리하고 있다. 대체로 효자 열부의 정려는 부모 봉양이 우선적인 가치 기준이지만, 이씨부인은 정절과 자손 번창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려를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출처 : 열린순창>


양수생(楊首生)

본관은 남원(南原). 증조할아버지는 양윤보(楊允保), 할아버지는 양서령(楊瑞齡), 아버지는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과 지신사(知申事)를 지낸 양이시(楊以時)이다. 처는 열부로 정려된 이씨이며, 아들은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입향한 양사보이다. 1376년(우왕 2년)에 종사랑 장복직장(從事郞 掌服直長)으로서 문과 을과 제2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양수생이 받은 홍패는 보물 제725호로, 현재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에 포함되어 국립 전주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가 34㎝며 세로가 65㎝로 조선 시대의 교지에 비하여 조금 작은 편이다. 양수생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역임한 뒤 1377년(우왕 4) 요절하였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귀화정(龜華亭)

 

 

좌측부터 '야은양공만식송덕비', '학사양순규송덕비', '남원양씨종중문서보호각 입구' 비석 

 

구미장수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