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알아볼까!!!/역사스페셜자료

행복지기 2009. 12. 8. 19:51

역사스페셜

 

 

고구려 고분벽화 - 북녘땅 고구려 고분벽화, 무엇을 그렸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고구려 고분을 찾았던 일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역사스페셜에선 고구려에 대해 몇 차례 방송하면서 고분을 함께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을 계기로 일반의 관심이 아주 높아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구려 고분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내부에 그려진 벽화가 규모나 수준에 있어서 세계 최고로 손꼽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엔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한정해서, 그중에서도 북한에 있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수많은 고분을 남겼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도 무려 2만여기나 됩니다. 대부분은 초기 수도였던 이곳 압록강 부근 '집안'과 후기 수도였던 여기 '평양' 부근에 밀집해 있습니다. 그중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95기인데, 3분의 2가 넘는 70여기가 북한땅 평양 인근과 황해도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런 만큼 이 시간엔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테마는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하는 것입니다.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고분,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널길이 나온다. 그 뒤로 두 개의 방이 있는 복잡한 구조다. 벽면은 온통 그림으로 빼곡하다. 앞방 벽면에 그려진 이 사람이 무덤의 주인이다. 높은 관리들이 썼던 관을 쓰고 있다. 그 위쪽으로 주인공에 대한 기록인 묘지명이 보인다. 주인공의 이름은 진, 유주자사란 벼슬을 지냈고, 광개토대왕 시절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永樂18-408). 진의 옆쪽으론 유주에 속했던 13군의 태수들이 하례를 올리고 있다. 생전의 모습을 담은 이런 벽화를 인물풍속도라고 한다. 고구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전호태 교수

"벽의 그림은 그 생활과 관련된 아주 구체적인 표현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당시 귀족들이 사랑채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또는 안채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을 때 그 의문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이 벽면마다 구분되어서 표현돼 있다는 것."

앞방 입구인 이곳은 대문, 주인이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앞방은 사랑채일 것이다. 그 뒤쪽, 관을 놓았던 널방은 안채를 옮겨놓은 듯하다. 벽엔 살림집의 면모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창고다. 통풍을 고려해 바닥에서 조금 떨어져 지었다. 집 안에 정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쪽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도 있다. 꽤나 큰 마당이 있었을 것이다. 마구간과 외양간도 있다. 말이나 소는 고구려의 귀한 가축이었다. 주인공이 행차하는 그림엔 수레가 등장한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는 고구려 귀족들의 교통수단이었다
.

김용만 박사

"수레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외출용 수레도 있지만 짐차라든가 여성용 수레도 따로 있다. 특히 짐차 수레의 활용을 보면 고구려가 매우 상업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에는 큰 시장도 있었고, 조양쪽에는 거대한 국제시장도 갖고 있었다. 특히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던 장안성 외성지역에는 도로 유적들이 있다. 큰 도로에는 여섯 개의 큰 수레가 동시에 다닐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수레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에……"


다른 고분의 벽화를 보면, 집 안에 차고가 있다. 그만큼 수레를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차고 옆으로 고기간이 눈에 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육식을 즐겼다. 우물 우물도 있는데, 추를 이용해 물을 길어 올리도록 돼있다. 생활의 지혜가 엿보인다. 방앗간엔 디딜방아가 있다. 고구려의 주식은 쌀과 조였다. 부엌의 화덕 위엔 큼지막한 시루가 놓여있는데,여기에 곡류를 쪄서 먹었던 것이다. 다른 벽화엔 집 전체 모양을 그린 전각도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귀족의 집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 봤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바깥채가 있다. 여기에 주인의 사랑채와 시종들이 기거하는 행랑채가 있었을 것이다. 들어가 중문을 지나면 안채다. 안채엔 잘 가꿔진 정원이 있고, 마구간과 외양간이 들어서 있다. 말이나 소를 놓아둔 만큼 이렇게 구석진 자리를 택했을 것이다. 그 옆에 창고가 있다. 사다리로 올라가게 돼있다. 이 밖에도 살림을 위한 여러 건물이 있었고, 이런 안채 한 가운데서 귀족부부가 살았다. 실내는 휘장을 둘러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런데 앉아있는 자리는 평상이다. 그렇다면 난방은 어떻게 했을까?

서울 구의동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 이곳에서 난방을 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온돌 흔적 온돌 자리가 그것이다. 한반도의 전통적인 온돌 문화가 고구려에 있었던 것이다. 아궁이의 온기를 전할 수 있도록 돌로 만든 구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든 굴뚝도 여러 개 출토됐다.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엔 온돌 형태가 보다 뚜렷하다. ㄱ자 모양으로 방 일부에만 설치하는 쪽구들이다
.

김용만 박사

"벽화 고분을 보면 고구려의 온돌은 방안 전체를 다 놓은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온돌을 놓고 나머지 부분에는 평상이나 좌상을 놓고 생활했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귀족들은 평상시 좌상에 앉아 있다. 반드시 그 앞에 신발이 놓여 있다. 즉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고구려인의 활기찬 생활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귀족이 살았던 실내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방 한쪽엔 탁자와 의자를 놓아, 식탁이나 손님 맞이용으로 사용한다.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 짓고, 그 안쪽에 평상을 놓는다. 평상엔 기둥을 세워 역시 휘장을 두르는데, 여기에서 사람을 맞이하거나, 잠을 잔다. 그리고 한 쪽 벽엔 쪽구들을 설치해 난방을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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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 여가생활 도입


 

 ▲ 덕흥리 고분의 '말타고 활쏘기' 벽화

 

이것은 앞서봤던 덕흥리 고분의 널방에 있는 벽화입니다. 이쪽의 이 그림을 한번 보시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막대를 쓰러뜨리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녁을 지났는지 몸을 뒤로 한껏 돌려서 활을 당기고 있고 또 5개의 과녁 가운데 이쪽 2개는 표적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활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군요. 그리고 이 사람은 붓대를 쥐고 뭔가 적고 있는 걸로 봐서 기록자인가 봅니다. 그 옆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심판관일 겁니다. 여기 한켠엔 뭔가 적혀있군요.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무덤의 주인은 마사희라고 하는 이런 놀이를 하며 여가를 보냈던 모양입니다. 이 밖에도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놀이문화는 아주 풍성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여가를 어떻게 보냈을까요? 다른 고분으로 가보겠습니다.

 

덕흥리고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안남도 강서군. 이곳 수산리고분 역시 5세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는 널길과 하나의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다. 널방 입구엔 문지기가 그려져 있다. 눈을 부릅뜨고, 손엔 창을 들었다. 험상궂은 모습이 무덤을 지키기엔 손색없어 보인다. 이곳 벽화 중 특히 눈에 띄는 건 외출 장면이다. 시종을 거느리고 나들이에 나선 귀족이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서커스다. 함께 따라온 시종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한 재주꾼은 나무 다리로 춤을 춘다. 또 다른 재주꾼은 여러 개의 막대기와 공을 엇바꿔 던진다. 이런 서커스 구경이 당시 여가 생활의 하나였던 것이다.

전호태 교수

“일반적으로 교외라고 한다. 재주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날 서커스라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교외라 이야기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재주 장면은 보통 여러 가지 문화요소가 혼합되어서 나타난다. 그래서 고구려의 재주 장면도 자세히 보면 그 기원이 중앙아시아나 이란 쪽에 있는 것들이 보인다. 당시 문화교류의 양상을 알아내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쪽 벽에 있는 행렬도에선 악기가 보인다.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있는 큰 북, 기다란 뿔나팔도 있다. 고구려의 악기는 다양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만도 38종에 달한다. 악기는 자체 개발한 것도 있지만, 교역의 산물이기도 하다. 비파 모양의 완함이 대표적이다.(이미지 2)

전호태

"완함이라는 악기는 원래 기원은 중앙아시아 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앙아시아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가면 그 악기와 똑같은 형상의 모습을 가진 악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돼서 서쪽으로 러시아까지 동쪽으로는 고구려까지 전파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춤도 즐겼다. 무용총의 춤 그림을 보면, 지휘자인 영무를 비롯해 춤꾼과 가수가 등장한다. 고구려 춤의 명성은 대단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한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깃털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흰색 무용신을 신고 망설이다가/어느새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어/ 새처럼 나래 펼치고 요동에서 날아왔도다'

벽화에 나타난 춤동작을 기초로 해서 이애주 교수는 고구려 춤을 연구했다. 그가 복원시킨 고구려 춤은 이렇다. 우리의 전통적인 춤사위와 흡사하다.

이애주 교수

"벽화의 다섯 사람 춤을 보면 우리 고유의 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보여진다. 두 팔을 들고 한발을 앞으로 진중하게 내 디었는데 바로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춤사위의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손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무술인 수박은 남자들의 놀이다. 씨름 씨름도 벽화에 곧잘 등장한다. 주로 힘 겨루기를 하며 여가를 보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도둑잡기 놀이, 말길들이기 놀이, 칼놀이가 있다. 즐기면서 또한 힘을 기르는 것이다. 남자들이 가장 즐겼던건 사냥이다. 호방한 기마인의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런 사냥 역시 평상시에 힘을 기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성립 초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강국과의 싸움을 되풀이 했다. 특히 초기 명단에는 중국 한족이 세운 식민지 세력들을 고구려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까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상무정신을 배양했다.”

 

고구려는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를 가르쳤다. 활쏘기는 사냥을 통해 연마되고, 군사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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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의 服飾 도입


천오백년전, 그때 이미 고구려에 이렇듯 아슬아슬한 묘기의 서커스가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벽화는 이 밖에도 기록엔 없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합니다. 이 서커스를 관람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면, 당시 귀족들은 외출할 때 아주 큰 양산을 썼는데, 양산은 대가 굽은 박쥐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들이에 나선 이 귀족 남자는 누런 색의 기다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엔 검은 색의 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뒤에서 양산을 받쳐든 시종은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저고리와 바지 차림입니다. 그리고 이 귀족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저고리의 깃과 도련, 소매 끝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수놓아져 있고, 치마는 오색의 색동치마입니다. 대단히 화려하죠? 그 뒤에 서있는 시녀 역시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멋을 부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만 봐도 고구려의 패션은 다양하고,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테마는 '고구려의 복식'으로 잡아볼까요? 인물 풍속도를 그린 벽화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상태 또한 잘 남아있는 안악3호분으로 가보겠습니다.

황해도 안악군엔 있는 안악3호분. 고구려의 고분가운데 큰 규모에 속한다. 한 변이 30미터를 넘고 높이는 7미터에 달한다. 내부도 복잡하다. 널길을 들어가면 널방 입구 양쪽으로 조그만 곁방 두 개가 있다. 한쪽 곁방 벽면에 무덤의 주인이 그려져 있다. 휘장이 둘러진 화려한 방에 위엄 있는 차림새로 앉아있다. 그 옆 기록에 따르면, 이름은 동수인데, 중국에서 귀화한 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인물에 대해선 또 다른 설도 있다. 우선 그는 머리에 왕이 썼다는 백라관을 쓰고 있고, 손엔 도깨비 모양의 귀면 부채를 쥐고 있다. 그리고 벽화엔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등장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은 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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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이 무덤의 인물들은 화려하고 격조있다. 주인공 옆 벽면엔 부인인 듯한 여자가 있는데, 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잔뜩 호사를 부렸다. 그녀 옆에 있는 시녀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맞은 편 벽엔 그에게 소속된 신하와 무사들, 의장대와 악대까지 그려져 있다. 그림 옆엔 글자도 적어 두었다. 고구려의 관직명이나 기타 명칭들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다. 이곳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만큼 고구려의 복식도 엿볼 수 있다
.

 


기본 복장은 남녀 모두 저고리와 바지다. 활동하기 편한 차림이다. 여기에 두루마기를 걸치기도 한다. 추위를 막는 덧옷이자, 귀족의 의례용 옷이다. 여자들은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기도 한다. 옷은 색상도 다양하지만, 무늬도 여러 형태가 있다. 점박이 무늬도 그중 하나다. 무용총의 접객도를 보면, 점박이 무늬의 의상이 많이 등장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런 무늬가 시종 당시에도 있었던 것일까
?

민길자 교수

"요즘 말로 하면 방염직 물이다. 어떤 한 부분에 염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무늬에만 염색이 들어가게 하는 염색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실염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는 사라사염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라사염법은 일찍이 인도에서 기원해서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이미 동남아시아를 걸쳐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궁중이나 상류계급사람들은 그 사라사기법의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그런 증거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서역까지 진출해서 시베리아나 인도와도 교류했다. 점박이 무늬가 그 증거다. 벽화속 고구려의 패션은 이렇다. 귀족남자의 외출복은 두루마기, 길이가 길고 소매통이 넓다. 이것은 귀족여자의 외출복, 색동의 주름치마가 아름답다. 귀족 남자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바지다. 소매통과 바지통이 넓다. 귀족여자의 평상복은 저고리 끝단에 무늬를 넣고, 주름치마로 멋을 냈다. 다음은 평민남자의 평상복이다. 소매통과 바지통이 귀족에 비해 훨씬 좁다. 평민 여자의 평상복도 단순한 차림이다. 치마 끝으로 바지가 내비친다. 다음은 관복, 소매가 특히 넓고 끝자락이 발등을 덮는다. 활동성은 떨어지는 복장이다. 무용복은 소매의 통이 넓고, 발목에 이를 정도로 길다.


머리 모양도 옷차림만큼이나 다양하다. 뒤로 묶어서 내린 이 머리는 시집을 안 간 여자들이 주로 했던 것이다. 이마에서 좌우로 상투를 틀 듯 올린 쌍상투 머리도 마찬가지다. 얹은 머리는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시집간 여자들의 일반적인 형태다. 얹은 머리를 변형시킨 고리튼 머리. 반고리 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둘레를 감싸고, 여러 장식으로 치장했다.

임명미 교수

"그때 당시에는 머리를 크게 한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자기의 머리로는 안 된다. 심지어는 사형수들의 머리까지도 사용을 하는데 아마 벽화 속에 나온 귀부인의 머리는 가발을 사용해서 크게 만들었다. 머리를 크게 한 것은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연장선에서 자기를 확대시키는 면도 있다. 머리가 커졌을 때 그것은 민족의 자부심이거나 그때 시대의 상상되는 어떤 것을 확대한 것도 있다."


남자는 상투머리가 일반적이다. 여기에 모자를 쓰곤 한다. 천으로 머리를 감싼 이것은 ''이다. 시종들이 주로 했던 것이다. 삼각형 모양의 이것은 절풍이다. 신분에 관계없이 가장 즐겨 했다. 절풍에 새깃을 꽂은 조우관, 깃은 신분이 높을수록 많아진다. 책은 관리의 의례용 모자다. 문관의 것은 뒷부분이 가닥져 구부러져 있고, 무관의 것은 뒤가 뾰족하게 솟은 형태다. 비단으로 만든 ''은 신분이 높은 사람만 썼다. 지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복식은 이렇듯 다양하다. 사회가 분화되고, 질서 속에서 안정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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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구려 군사 도입*

고구려는 잘 아시다시피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국제교류 또한 아주 활발했습니다. 그것이 가져다 주는 풍요를 안악3호분에 있는 이들 부부의 화려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탕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대제국을 일군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이것은 안악3호분의 다른 벽면에 있는 대행렬도입니다. 높이가 2m, 길이가 6m나 되는 한 장의 판석 위에 거의 들어차게 그린 것으로, 화면의 크기는 고분벽화 가운데서도 으뜸입니다. 복잡하고 다채롭기도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이죠. 이 행렬도에 등장하는 인물만도 무려 250여명에 달합니다. 악대가 앞서고, 그 뒤를 여러 무장한 군사들이 따르고 있는데요, 여기 수레를 타고 있는 주인공의 출행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시가 퍼레이드 같은 것이죠. 그런데 주인공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무사들을 보면, 그 생김새가 아주 다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이름을 날렸던 고구려 군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안악 3호분의 행렬도는 가장 많은 병사가 등장하는 벽화다. 그 모습도 다양하고, 무기도 여러 가지다. 이것을 컴퓨터로 복원해 하나씩 살펴봤다. 온 몸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탄 병사, 철갑기병이다. 행렬 맨 뒤엔 가볍게 무장한 기병도 보인다. 보병으론, 창을 든 창수가 있다.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었다. 칼을 든 환도수, 역시 갑옷과 방패 차림이다. 도끼를 든 부월수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 5" 궁수 궁수는 갑옷을 입고, 화살통을 허리에 찼다. 이것이 바로 대륙을 누비며, 영토를 넓혀갔던 고구려 군대다. 여러 무기는 고구려의 뛰어난 제철 기술이 뒷받침했다.

전호태 교수

"당시 동아시아는 대단한 접전지다. 그래서 북중국지역의 16개의 왕조가 끊임없이 명멸하고 그 와중에 고구려도 이들 왕조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선진적인 무기 무장체계를 갖추지 않고는 국가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특히 무기 무장과 관련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그와 관련된 산업이 발전된다. 결국엔 고구려의 경우도 철산업의 따른 결과로 철기의 등장이라는 아주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구의동에 있는 고구려군사유적지. 이곳에서 화살촉과 창 등 다양한 철제 무기류가 출토됐다. 고구려 군사중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철갑기병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유물도 나왔다. 투구가 그것이다. 이를 토대로 투구를 복원해봤다. 고구려 철갑기병은 이런 투구를 썼던 것이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편들 가운데엔 갑옷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편들도 있었다. 갑옷은 이렇듯 철편을 이어 붙인 찰갑이었다. 이것은 가볍고도 튼튼하다. 웬만한 화살은 튕겨나가고 만다. 다른 고분의 벽화엔 철갑기병의 또다른 무기가 등장한다. 발에 신고 있는 못신이 그것이다. 끝이 뾰족한 못신은 전투 도중, 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 찍는 데 위력을 발휘한다. 온몸을 무장한 철갑기병, 그렇다면 그가 탔던 말은 어땠을까
?

북한의 철령 유적지. 3-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수십개의 말 모양 토우가 나왔다. 몸통과 얼굴은 온통 갑옷으로 무장돼 있다. 철갑기병의 말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철갑기병의 모습은 이렇다. 완전무장을 한 이런 철갑기병이 고구려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이다
.

이인철 교수

"외관상 이동하니까 말도 겁을 먹고 병사들도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활이나 창을 쐈을 때 중장기병은 잘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 밀고 내려오니 매우 위협적이다. 이런 상황을 최근의 상황과 비교하면 6.25때 북한군 탱크와 아군의 총이나 대포를 쏘아도 끔쩍하지 않고 밀고 내려오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벽화 실제 전투는 어땠을까? 벽화에 나타난 성 전투를 보면, 안에선 육박전이 벌어지고, 밖에선 철갑기병이 공격을 한다. 무기체계를 통해 평원전을 재구성해보면 11" 병사들 나와 서는 철갑기병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경마기병이 선다. 다음은 보병인 창수가 포진하고, 이어 검수와 부월수, 궁수가 뒤따른다. 전투가 시작되면 궁수가 활을 쏜다. 철갑기병은 측면을, 경마기병은 후방을 공격한다. 그리고 보병이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다.

 

* 고구려 군사들의 이미지는 대고구려 1부와 3부를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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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벽화의 제작 기법 도입


동아시아를 무대로 용맹을 떨쳤던 고구려의 군사들, 이 벽화에서 그 힘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대략 1500년 전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생김새하며 표정까지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군대의 힘찬 행진소리, 말발굽 소리, 악대의 우렁찬 행진곡. 이런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여기 보면, 노랑, 빨강, 초록 등 채색도 다양하게 돼있어 한층 더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색상도 선명한데요, 사실 고분 벽화가 1500년 전의 세월을 견딘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분 안팎의 기온 차이로 대개는 내부에 이슬이 맺혀 벽면이 번들거리고, 그로 인해서 물감이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벽면에서 물감이 아예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도 일부 훼손이 되긴 했습니다만, 대부분은 양호한 상태로 발견돼 고구려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기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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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엔 조각이 한 점 보관돼 있다. 쌍영총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5세기 말에 축조된 것이다. 이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단면에서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안료가 나타났다.


천연광석인 진사나 먹은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이들을 비롯해 벽화의 안료는 모두 물에 녹지 않는 천연 광물성이다. 때문에 채색이 습기에 쉽게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안료를 벽면에 어떻게 부착시켰을까? 쌍영총 벽화 조각의 단면을 다시 분석해 봤다. 단면 두 가지 안료 아래쪽의 흰색은 석회다. 검은색은 석회에 잘 붙은 반면, 붉은색은 조금 떠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프레스코기법이다. 진영선 교수는 그 방식대로 고구려 벽화를 재연하고 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석회칠을 두껍게 한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바른다.

진영선 교수

"젖은 석회 위에 천연안료를 써서 자연안료로 접착제 없이 그려서 벽이 마르면서 석회가 마르면서 벽 전체가 마른다.  안료가 석회 틈 사이로 스며들어가서 석회와 같이 마르는 것을 그런 총작업을 프레스코 벽화라고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돌벽 위에 굵은 모래와 석회로 1차 바탕을 만들었다. 다시 가는 모래와 석회를 섞어 바르고, 마지막에 고운 석회를 칠했던 것이다. 이때 회칠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린다. 그래야만 안료와 석회가 안료가 벽면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미연에 방지되는 것이다. 석회에 잘 붙어있는 검은 색이 바로 프레스코기법이다. 반면에 석회에서 떠있는 붉은 색은 또다른 방식인 건식화법이다. 회칠이 이미 말라버린 벽면에 아교를 섞어 그리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듯 습기에 견딜 수 있는 재료와 기법으로 벽화를 제작했다. 과학적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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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四神圖 고분벽화(강서대묘) 도입


고구려의 뛰어난 기술은 이렇듯 생동하는 그림을 돌벽에 그려 천오백년의 세월을 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그린 이런 벽화들을 통해 고구려의 생활상을 들여다 봤습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들 가운데 이런 인물풍속도 벽화는 고구려 전성기인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주로 그려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6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이 벽화의 주제로 등장합니다. 거기에서 고구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여기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강서대묘입니다. 강서대묘를 보면 흙으로 쌓아 올린 봉분의 직경은 대략 51m, 높이는 9m에 달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죠. 이 강서대묘는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인데, 특히 뛰어난 축조술과 아울러 내부의 벽화로 유명합니다. 이번엔 직접 안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다. 시신을 안치했던 널방은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축조했다. 사방 벽면과 천장엔 온통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건 벽면의 그림이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형상의 네 마리 동물이 각각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6-1.
강서대묘 내부와
四神圖 소개

이곳 널방은 한변의 길이가 3m를 넘고, 높이는 3.5m쯤 됩니다. 꽤 큰 방인데요, 제 양 옆의 이곳이 관을 놓았던 자리입니다. 두 개인걸로 미루어 부부합장묘였을 겁니다. 그리고 네 벽엔 상상속의
神的 동물이 각각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사신도라고 합니다. 이쪽이 입구 맞은 편 북쪽이고, 여기 그려진 이 동물은 현무입니다. 거북과 뱀이 서로 엉켜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한눈에도 생동감 넘치게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 그림은 구도와 표현력에 있어 완벽에 가까운 걸작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무 뿐만 아니라 이곳 내부의 전체 벽화가 고구려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벽화예술의 최고봉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북쪽의
현무는 본디 암수 한쌍이 한 몸이다. 거북은 암컷, 뱀은 수컷을 나타낸다. 음양조화의 상징이다. 뱀과 거북의 머리가 서로 마주보며 불꽃을 뿜고 있다. 뱀의 비늘 묘사가 구체적이다. 거북의 몸체에도 구갑무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거북이 자아내는 운동감과 뱀의 탄력 있는 곡선미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서쪽의 신 백호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 입구 쪽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다. 넓은 혀를 내밀고, 몸엔 호피 무늬가 그려져 있다. 선을 많이 생략하고 장식도 없다. 간략하면서도 환상적인 표정이 돋보인다. 백호 옆쪽 벽면에 그려져 있는 건 주작이다. 주작은 남쪽을 대표하는 신이다. 이 주작은 입구인 남쪽의 양벽에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역시 음양조화를 나타낸다. 좌우로 벌린 양 날개와 긴 꼬리, 바람에 날리는 듯한 깃털 묘사가 세밀하다. 하늘을 나는 생동감이 넘친다. 동쪽의 신 청룡도 입구 쪽을 향해 날고 있다. 이 역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영물이다. 도깨비 모양의 머리를 쳐들고 눈은 부릅떴다. 청룡은 치밀한 세부 묘사에 화려한 채색을 더했다. 탄력 있는 필치에서 긴장감이 강렬하다. 4마리 동물은 음양오행설에서 각각 사방을 대표하는 신적인 존재, 四神이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며 동서남북을 지키는 것이다.

이태호 교수

"그 사신도는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그래서 사신도 고분이 유행하게 된 것이 대체적으로 6세기 말에서 7세기 정도.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을 할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오면서 어떤 방어의 개념을 중요시 하면서 그 이전에 인물풍속화를 그렸던 그러한 형식에서 변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천장은 고임돌을 올리면서 구석을 약간씩 좁혀 들어갔다. 정교한 축조방식이다. 이곳 맨 꼭대기엔 황룡이 있다. 황룡은 음양오행설에서 사방의 중심이 된다
.

이태호 교수

"특히 황룡은 그리고 있는 것은 사신과 함께 우리가 음양오행설에서 오행을 맞춘 것이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황룡까지 이렇게 오행을 맞춘 고분은 대체로 왕무덤, 왕릉으로 추정을 한다. 가장 권위 있는 무덤이라 볼 수 있다."

황룡 주위에도 온갖 그림이 있다. 수많은 꽃과 구름이 보이고, 그 사이를 상상 속의 동물과 신선이 날아다닌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생각했던 내세, 즉 하늘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닌다는 비천이다. 날개 옷과 유연한 몸짓이 잘 묘사돼 있다. 천장에 있는 산 그림도 색채의 명암과 원근 표현이 뛰어나다
.

이태호 교수

"6세기 7세기 세계사를 통틀어서 가장 발달한 산수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산들이 그려지고 그 산들은 이렇게 낮은 토산과 바위산이 그려지고 토산 위로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마치 금강산도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정도의 훌륭한 그림이다. 이러한 산수도는 실제로 가보니 이렇게 다 산의 모양이었다. 그래서 현무도 밑에 있는 것도 산이고 주작도의 밑에 있는 것도 산이고 백호도의 밑에 있는 것들이 모두 산이었다. 그러니까 사신도가 산을 뛰어 넘어 웅비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강서대묘의 벽화는 고구려고분 벽화 가운데 그 회화 수준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영혼의 안식처인 무덤에서 고구려의 뛰어난 예술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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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구려의 천하관 도입

이렇듯 수준 높은 예술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력이 가져다 주는 안정된 사회일 겁니다. 4C에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에 걸쳐 세력 확장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5C가 되면 고구려의 국력은 절정에 달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단,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는 동북아 패권국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합니다. 그리고 북아시아 삼림지대와 내륙아시아 유목지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바다 건너 왜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더불어 대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됩니다. 고구려 외교 사절은 내륙 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이곳 사마르칸트,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중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고구려는 동북아를 호령하며 아시아 곳곳에 발길이 미쳤던 겁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대제국 고구려가 세계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천하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천하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이곳 벽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천하관을 알기 위해선 다시 한번 강서대묘의 벽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곳 사방 벽면에 그려진 사신은 우주의 방위신이다. 이들은 무덤을 지키고, 죽은 자를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호신이다. 사신이 영혼을 인도해 가는 곳, 그곳은 바로 하늘세계다. 천장 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늘세계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신선들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고, 죽으면 그들 또한 신선이 된다고 여겼다.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호태 교수

"고구려인들이 특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들은 천손의식이다. 그래서 하늘의 정기를 시조 주몽이 받았다고 믿고 있고 그런 신앙아 고구려 전역에 퍼져 있었는데 결국엔 그런 의식은 벽화에서는 해와 달을 자주 표현한다든가 말기에 가서는 해신과 달신을 빈번히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천손의식을 가질 경우 주변의 나라들은 다 천손후계에 포함되어서 지배를 받아야 하는 거다.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서 의식을 확립하는데도 하나의 이념적 중심이 되는 것……"

천손의식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보인다. 앞부분에 주몽신화가 기록돼 있는데, 주몽의 아버지는 천자인 해모수다. 따라서 주몽은 하늘 신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루고분의 묘지명에도 나타난다. 주몽의 어머니는 물의 신인 하백의 딸, 때문에 주몽은 해와 달의 아들이 된다. 벽화엔 해와 달이 자주 등장한다. 천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구려는 천손의 나라이므로 풍요도 보장받는다. 이 믿음은 다른 벽화에서 엿보인다. 여기엔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 여러 문명신이 묘사돼 있다
.

불의 신은 오른 손에 불꽃이 너울거리는 막대를 쥐고 있다. 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 이것은 농업의 신이다. 손에 곡식 이삭을 들었다. 수레바퀴신은 바퀴살이 있는 개량된 바퀴를 만들고 있다. 그 옆은 쇠를 부리는 제철신이다. 부젓가락으로 쇠를 집고 망치로 단련하고 있다. 이렇듯 하늘이 선택하고 보살피는 나라라는 믿음은 고구려가 갖는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천하관이었다
.

전호태 교수

"한반도 지역은 근세까지는 독립된 문화영역이었다. 거기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나라는 고구려인데 이 고구려인이 주몽신화부터 주장하는 천손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고구려가 그 지역에 흩어져 있던 많은 민족들을 통합해서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는데 아주 중심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된다. 예를들어서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등 동북방의 소수종족들을 고구려인으로 설득하고 통합시키는 데에는 천손사상만큼 좋은 이념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기 때문에 천체 운행도 고구려를 중심으로 운행된다고 생각했다. 벽화엔 별자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고구려가 자체 관측한 것이다. 그 정확도 또한 고구려의 천문관측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우주 운행원리를 파악함으로써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국가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

'
고구려' 하면 우리는 한반도를 넘어 북쪽 대륙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로만 떠올리곤 했습니다. 군사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들의 문화는 오히려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국제성을 흡수하며, 고유 문명을 일군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 문명은 대제국 고구려에 어울릴 만큼 발달해 있었고,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벽화는 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고구려의 생생한 역사가 담긴 고분벽화, 그것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우수하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분명 우리 민족의 값진 유산입니다. 거기 담긴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저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

※ 내용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바삐 작업한 관계로 이미지 출처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미지 주인장께서 이곳에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시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곧 확인한 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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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고분벽화, 되살아나는 고구려

1500 년을 잠들어 있던 무덤이 열렸다. 고대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거대한 무덤, 그 벽면엔 벽화가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그림속엔 고구려인들 이 살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의 생활, 고분벽화는 그 미지의 세계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1.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문자로 쓴 역사기록일 것입니다. 하지만, 먼 옛날일수록 자세한 역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마치 퍼즐게임을 하듯이 그 시대상을 알아 맞춰 나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1500년 전, 이 땅에는 고구려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한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정도로 아주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역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가 어떤 사회였는지, 고구려인들은 어떤 집에서 무얼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지 그 자세한 생활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만약 이 유적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고구려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제 뒤로 보이는 이 무덤들은 고구려의 고분들입니다. 이 무덤 속에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역사책보다도 더 생생한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그 기록은 바로 고분벽화입니다. 오늘 1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고분벽화의 세계로 흥미로운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고대, 동북 아시아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풍요로운 나라, 고구려였다. 700년 역사를 간직한 이 고대왕국은 화려한 고분 유적을 남겼다. 초기 수도인 집안지역에만 고구려 고분은 1 2천기에 달한다. 후기 수도인 평양지역에 밀집해 있는 고분을 더해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은 2만여기. 그 중 총 95기의 고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로 평양인근과 황해도 지역의 고분들이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 3호분.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이 고분은 높이가 6미터나 된다. 고구려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이다. 일곱 개의 단을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이 고분의 높이는 13미터. 그러나 벽화는 남아있지 않다. 장군총에는 못미치지만 벽화를 그린 고분중에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도 있다. 평안남도 남포시에 위치한 강서대묘다. 직경이 51미터, 높이가 8미터에 이르는 이 고분 내부엔 신비로운 벽화들로 가득하다.

 

무덤 규모로 보면 안악3호분 또한 왕이나 최고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대의 무덤으로 들어가 보자. 무덤 안쪽 넓은 방엔 기둥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회랑을 세운 무덤은 마치 지하궁전을 연상케 한다. 회랑 옆쪽으로 움푹 들어간 방이 있는데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무척 화려하다. 서쪽방에는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와 그 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있다. 그리고 반대편 동쪽방에는 부엌이 보인다. 그 옆에는 고기간이 있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차고가 있다.

전호태 교수

벽에 당시의 생활과 관련된 구체적인 표현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당시 귀족들이 사랑채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혹은 안채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했을 때 그 의문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이 벽면마다 구분돼서 표현돼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표현자체를 당시의 주택구조로 전환시켰을 때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판단됩니다.”

평안남도 남포시. 무악산 기슭에 자리한 덕흥리 고분. 무덤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조그만 방이 있다. 그 중 왼쪽 방엔 한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귀신의 얼굴이 그려진 부채를 든 이 남자가 무덤 의 주인공이다. 초상화 위쪽엔 이 무덤 주인의 신분을 알려주는 묵서 명이 있다. 모두 600자로 이루어진 묵서 명은 무덤주인의 이름은 진이고, 광개토대왕 시절 유주자사를 지냈으며 일흔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해 주고 있다. 진의 초상화 옆으로 13명의 관리가 늘어서 있다. 멀리 북경인근지역을 포함해 각 지에서 온 13명의 관리가 진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은 무덤 주인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았던 사랑채를 표현하고 있다.

전호태 인터뷰

사랑채에서 행해졌던 여러 가지 일들, 특히 사랑채라는 것이 안채와는 달리 집주인의 공적인 일을 부분적으로 담당하게 되는데 덕흥리 고분의 경우는 집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이 휘하의 관리들을 만나는 장면이라든가 관리들의 보고를 받는 장면, 이런 것들이 표현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채의 기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사랑채를 지나 무덤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무덤의 구조와 각각의 벽화는 고구려인이 살았던 집의 구조와 모습을 보여준다. 무덤의 가장 안쪽 방 중앙엔 안채가 묘사돼 있다. 주인공의 생활공간이다. 안채 주변에는 부속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남쪽에는 외양간이 있다.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과 잘 꾸며진 정원도 보인다. 말을 타고 달릴만큼 넓은 뜰이 있고 그 한쪽엔 독특한 형태의 창고가 서 있다. 다른 한쪽엔 고기간과 그 옆으로 수레를 넣는 차 고가 있다. 실제 고구려 주택의 건물형태는 안악1호분의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붕이 돋보인다. 벽화에서 본 것처럼 고구려인들은 주택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보통 일반적인 기와의 색이 검은 색인데 비해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기와는 붉은 색이다. 기와에 각종 꽃 무늬를 새겨 장식미를 높이기도 했다

심광주 인터뷰

이런 색깔을 띈 기와로 지붕을 이었을 때 나타날 수는 장식적인 측면 고려. 붉은 색깔을 띈 건물들이 갖는 웅장함이라든가 열정적인 모습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붉은 기와를 사용한 지붕은 건물에 따라 형태가 다르다. 부엌이나 외양간 같은 건물은 두면에만 기와를 얹는 간단한 형태의 맞배지붕을 쓴다. 안채나 사랑채와 같은 주요건물은 네면이 기와로 덮힌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벽화를 바탕으로 고구려인의 집을 복원해봤다. 대문을 지나면 바깥채가 있다. 이곳엔 주인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사랑채, 시종들이 살았던 행량채가 있었을 것이다. 중문 중문을 지나면 안채다. 안채에는 잘 가꿔진 연못과 정원이 있다. 마구간 그 옆으로는 마구간과 외양간이 들어서 있다. 일부러 구석진 자리를 택했을 것이다. 창고 그 옆엔 바닥이 땅에서 떨어진 창고가 있다. 안채 그리고 가장 중앙에 있는 건물은 집주인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생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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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인들은 무덤의 구조와 벽화를 통해서 당시 그들이 살았던 집 구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 볼까요. 무덤 입구인 여기가 대문이 되겠죠. 그리고 여기 동쪽 방이 주인공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인 안채가 됩니다. 안채 주변에는 이렇게 부엌과 마구간 창고와 차고 같은 부속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자 안채를 나서면 이렇게 회랑이 세워져 있습니다. 회랑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아주 규모가 크고 거대한 건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무덤의 주인이 죽기 전에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짐작이 가시죠. 이렇게 무덤을 마치 생전의 집처럼 꾸며놓은 것은 죽은 후에도 살았을 때처럼 생활하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기원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번엔 이 벽화를 한번 자세히 보시죠. 평상에 앉아있는 인물이나,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결코 상상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1500년 전의 사진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습니다.

 

5세기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는 고구려인의 접객도 19 실내생활을 알 수 있는 벽화가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이 벽화를 유심히 보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신발을 신고 있다. 역시 5세기 고구려 고분인 쌍영총 벽화에도 평상부부 신발로 줌인 20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이 담겨있다. 주인공 부부는 평상에 앉아 있는데 평상 앞에는 신발이 놓여져 있다.

김용만 박사 <고구려의 발견>의 저자

고구려 사람들은 조선시대 사람들과 달리 좌식생활이 아니라 입식생활을 더 선호했습니다.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했었고 좌상이나 평상에 앉았을때도 신발을 바로 앞에 둬서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 태세를 갖췄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입식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난방시설로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대립했던 아차산. 이곳 고구려군 주둔지에서 고구려 특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발견됐다.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 온기가 전해질 수 있도록 돌로 만든 불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구조다. 중국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의 평면도는 온돌의 형태를 보다 잘 보여준다. 이 집은 동북쪽 벽면에 기역자 형태로 길이 2m 40cm의 쪽구들을 설치했다.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굴뚝도 연결했다.

김봉렬 교수  

방 한쪽엔 장항이라고 하는 온돌이 놓여지고 나머지 부분에는 귀족 주택인 경우엔 전돌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 특유의 벽돌바닥을 썼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벽돌은 차갑기 때문에 그 위에 바로 앉을 수는 없고 좌상이나 평상이라 부르는 낮은 구조물, 이런 거를 온돌과 같은 높이로 쭉 놨던 걸로 보여집니다. 좌상에서 생활을 하다가 잘 때는 온돌에서 바로 잘 수 있는 이런 구조죠. 그리고 아주 간혹 드물게도 벽돌 바닥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입식생활의 모습도 벽화에는 가끔 나타납니다.”

벽화를 통해 복원한 고구려주택의 실내모습이다. 실내는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하는데 휘장 바깥은 식사나 손님맞이를 하는 공간이다. 평상 휘장안쪽에는 평상이 놓여져 있는데 모서리에 기둥을 세워 역시 휘장을 칠 수 있게 했다. 온돌 그리고 한쪽 벽엔 온돌을 설치해 난방문제를 해결했다. 안악3호분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식생활도 알려준다. 안악3호분의 부엌은 실제의 부엌을 옮겨놓은 듯 묘사가 사실적이다. 한 여인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고, 또 한여인은 큰 시루 앞에 서 있다.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에서도 각종 생활용기들이 출토됐다. 주로 군인들이 사용했던 이 생활용기는 커다란 저장용 항아리와 물병들이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는 큰 그릇이 있었다. 벽화에 그려있는 바로 그 시루였다

최종택 실장

시루는 증기가 올라와서 음식을 익히기 때문에 구멍이 굉장히 중요한 기능을 하죠. 이건 가운데 하나를 중심으로 여섯 개가 돌아가면서 있는데 아주 늦은 시기가 되면 네 개로 되고 커집니다. 네 개로 되면 오늘날 시루와 똑같은 형태가 되는 거죠.”

고구려의 유적에서 발견된 불에 탄 곡식은 고구려인의 주식이 쌀과 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곡식은 창고에 보관했다. 바닥이 땅에 떨어져 있는 구조는 통풍이 잘되도록 한 것이다. 창고에서 꺼낸 곡식은 방앗간으로 가져간다. 디딜방아를 이용해 곡식을 찧었던 것이다. 식수는 우물을 파서 해결했는데, 추를 이용해 물을 길어 올렸다. 고분 속의 기록에 의하면 식탁도 무척 풍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술과 고기 쌀이 많아 다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안악 3호분의 부엌 옆에는 꽤 규모 있는 고기간이 그려져 있는데 그안엔 고기가 가득하 다. 고구려인들은 육식도 선호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즐겼던 고기요리는 맥적이라고 하는데 양념한 고기덩어리를 불에 구워먹는 요리다. 맥적의 맛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맥적과 같은 고기요리를 자르는 데는 작은 칼이 사용됐을 것이다. 음식시중을 들고 있는 이 시종도 작은 칼을 들고 있다. 유물 중에는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칼과 가위들이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중의 하나는 수레다.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는 이 남자는 크고 화려한 수레를 타고 있다. 신분에 따라 수레는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양한데 시녀들이 따라가고 있는 이 수레는 여성용 수레다. 수레는 소가 끌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대부분의 수레 역시 말이 아닌 소 가 끌고 있다.  

김용만 인터뷰

고구려 고분벽화의 40여대의 수레 중에서 말이 끈 것이라고 보여지는 수레는 두 대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소가 끌었습니다. 과거에 말이 끈 수레의 경우는 수레에 탄 사람이 말을 직접 몰고 바깥에 외출을 했는데 소가 끄는 우차의 경우는 옆에 시종이 따라갑니다. 귀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시종이 따라가면서 갈 수 있는 우차가 더 선호 되었겠죠

화려하게 치장한 수레를 타고 다녔던 고구려인. 벽화는 1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3. 벽화 속의 고구려인

고구려 귀족이 살았던 안채를 복원해 봤습니다. 방 한쪽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는데 여기에서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평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실내에서 신을 신고 있다가 평상에 올라갈 때는 신을 벗는 입식생활을 했는데요. 밤에는 여기의 휘장을 내려서 침실로 사용하게 됩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난방도 무척 중요했을 텐데요. 난방장치로는 벽을 따라서 온돌을 설치했습니다. 실내에 아궁이가 있어서 불을 피우고,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군요.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집안을 구경하고 나니까 마치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고구려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드디어 집주인이 나타나셨군요. 이 사람은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잘 차려 입은 의상과 근엄한 자태로 보아서 신분이 무척 높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인은 바로 이 사람의 부인으로 보이는데요. 옷도 화려하지만 머리에 무척이나 멋을 부렸습니다. 머리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큰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가발을 사용한게 아닐까 하는데요. 이 두사람 외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묘사돼 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직접 그린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한데요. 1500년 전의 고구려인을 만나보겠습니다.

무척 위엄 있는 자세로 앉아있는 이 남자의 높은 신분은 복장에서도 나타난다. 깃과 소매부분을 화려한 장식단추로 장식했고 폭이 좁은 허리띠를 매고 있다. 머리에는 하얀색의 관을 썼다. 백라관이라는 이 모자는 왕이 쓰는 것이다. 안주인 역시 고급스러운 예복을 잘 갖춰 입었다. 특이한 것은 머리 모양. 반고리 모양으로 머리를 틀고, 여러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옆에 있는 시녀들도 같은 모양이다.

임명미 교수 

그 때 당시에는 머리를 크게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으니까 자기 머리 가지고는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심지어는 사형수들의 머리까지도 사용했는데 안악3호묘에서 볼 수 있는 귀부인의 머리는 가발을 사용해서 크게 만들고 환으로 엮어 가지고 거기에 또 머리를 늘였거든요. 머리를 크게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연장선에서 자기를 확대시키는 의미도 있어요. 머리가 커졌을 때 그거는 민족의 자부심이거나 그때 시대의 상승되는 어떤 걸 확대하는 그런 것도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가발머리에서 귀 밑으로 한 두 가닥을 살짝 내린 점이다. 애교스럽다. 이런 머리는 안악3호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여인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의 무희들도 한 두 가닥씩 머리를 내렸다. 당시 고구려 여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머리모양으로 보이는데 이런 머리를 빈하수라고 한다. 머리모양으로 나이나 신분을 파악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의 머리다. 시집간 여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벽화 속의 머리모양을 실제로 재현해 보았다. 안악3호분의 여주인이 하고 있던 머리모양이다. 이 머리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이 평범한 모양은 아직 시집 가지 않은 처녀나 평서민이 즐겨 했다고 한다. 남자들은 상투머리가 가장 일반적이다. 여기에 모자를 쓰기도 하는데 신분에 관계없이 가장 즐겨 쓴 모자는 삼각형 모양의 절풍이다. 절풍에 깃을 꽂은 모자가 조우관. 신분이 높을수록 깃털이 많아진다. 이것은 관리의 의례용 모자인데 책이라고 한다. 벽화 속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의 복식도 흥미롭다. 외출에 나선 이 귀족 남자는 예복을 입고 있다. 귀부인은 색동의 주름치마를 입었다. 이 귀족 여인은 붉은 색 옷을 멋스럽게 차려 입었다.

 

벽화를 통해본 고구려인의 복식은 이렇다. 귀족남자는 통이 넓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다. 평민남자의 경우엔 통이 좁은 게 특징이다. 귀족여자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주름치마다. 평민 여자는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점박이 무늬가 있는 옷 을 즐겨 있었다.


민길자 교수

요새 말로 하면 방염직물이예요. 어떤 한부분에 염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무늬에만 이렇게 염색물감이 들어가게 하는 염색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실염이라고 그러고 세계적으로는 그것을 사라사염법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라사염법은 일찍이 인도에서 기원해가지고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이미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로 보고 있고 또 중앙아시아를 거쳐가지고도 북쪽으로 우리나라를 들어와서 이미 고구려의 궁중이나 상류계급 사람들은 사라사 기법의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증거가 되는 거죠

고구려는 국제교류가 활발한 나라였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중심부에 있는 사마르칸트에는 고구려사신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는 벽화가 있다. 삼각형의 모자에 깃을 꽂은 모자는 분명 조우관 이다. 고구려에 인도의 염색기술이 들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4.  

고분 속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의 옷 하나를 보고서 우리는 당시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가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 벽화는 아주 중요한 기록화이기도 한데요. , 이 벽화를 보시죠.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수레를 타고 행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선 그림의 크기부터 대단하죠. 높이가 2m 길이는 10m나 됩니다. 이 행렬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벽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벽화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 인원이 무려 5백명이나 되는데요. 이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행렬의 맨 앞에는 크고 작은 북과 뿔피리 나팔 등의 악기를 들고 있는 악대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주인공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구성이 무척 다양한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겠습니다. 우선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탄 철갑기병이 있군요. 가볍게 무장한 경마기병이 행렬의 맨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보병도 보이는데,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엔 방패를 든 창수가 있군요. 칼을 든 이 병사는 환도수입니다. 도끼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이 병사는 부월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살통을 허리에 찬 궁수도 보이는 군요. 이 행렬도는 우리에게 고구려의 군대가 어떻게 편성돼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무장한 군사들을 통해 군사강국의 면모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속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5세기,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을 때인 영역인데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단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 일대까지 고구려는 아주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 군림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가 군사강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처럼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행렬도의 주인이 타고 있는 수레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집집마다 이런 수레가 묘사돼 있는데,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수레는 요즘의 자동차와 같은 필수품이었습니다
.

이것은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수레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수레인데 짐수레치고는 바퀴가 얇은 게 특이하죠. 그 이유는 바퀴에 이렇게 쇠테를 둘렀기 떄문입니다. 철이 풍부했던 고구려는 철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서 아주 튼튼한 바퀴를 만들 수 있었는데요. 고구려인들은 이런 튼튼한 수레를 이용해서 활발한 국제무역을 펼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얼마나 풍요로운 국가였는가는 그들의 여가 생활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요.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각종 놀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

평안남도 남포시에 위치한 수산리 고분엔 귀족의 나들이가 묘사돼 있다. 양산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화창한 날이다. 나들이에 나선 귀족부부는 지금 무언가를 열심히 구경하고 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은 교예다. 두 명의 재주꾼이 맘껏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1500년 전 벽화에 묘사된 묘기들은 현대 서커스 에서 여전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각저총 벽화에는 씨름을 하는 남자들이 보인다. 흥미롭게도 씨름꾼 중 한 사람은 고구려인이 분명한데 다른 한 사람에게서는 이국풍이 느껴진 다. 그 밖의 다른 벽화에서도 씨름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이 씨름은 현재까지 인기 있는 스포츠로 남아 있다.

무용총 벽화에는 두 남자가 무술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러 벽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 무술은 손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직전, 상대방을 살피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다. 벽화에서 발견한 고구려의 무술은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태껸과 닮아 있다. 고구려인은 춤도 즐겼다. 무용총 고분벽화에는 안무를 지휘하는 사람인 영무와 춤꾼, 가수가 등장한다. 손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 5명이 춤꾼들이다. 고구려 벽화에 묘사된 춤동작을 통해 고구려의 춤을 재연해 보았다. 두 팔을 완전히 뒤로 제낀 이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다. 어떤 동작일까? 바로 이렇게 두 팔을 앞으로 내민 동작일 것이다. 고구려의 춤은 우리의 전통 춤과 많이 닮아있었다.

이애주 교수

다섯 사람 춤을 보면 거기에 우리 춤의 원형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두 팔을 들고 한발을 이렇게 진중하게 내디뎠는데 가장 우리의 합리적인 자세인 춤사위의 구도가 잘 나타나 있어요.”

고구려인의 여가생활에서 빠지지 않는 놀이가 바로 활쏘기다. 덕흥리 고분에는 뜰에서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뭔가 적고 있는 이 사람은 기록자,그 옆에는 심 판관이 서 있다. 고구려는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에서부터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를 가르칠 정도로 활쏘기를 중시 했다고 한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성립시기 자체부터 멸망할 때까지 중국한족과의 싸움을 되풀이했습니다. 특히 초기연간에는 중국한족세력이 세운 식민지 세력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주력했거든요.그래서 고구려는 초기부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의 배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활쏘기에 능한 고구려인은 사냥을 즐겼다. 그런 데 사냥에 사용하고 있는 화살이 무척 특이하다. 명적이라 불리는 이 화살은 신호용이다. 뒤로 몸을 완전히 제낀 상태에서 활을 쏘고 있는 이 사람은 짧은 활을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의 활인 각궁은 활 길이가 짧아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쏠 수 있고 화살도 멀리 나 간다.  숲 속을 누비며 사냥을 하는 고구려인들, 그들에 게서 삶의 여유와 호방한 기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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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벽화제작 기법

활쏘기, 씨름, 수박희처럼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놀이는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만약 이 고분벽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이 놀이들이 먼 옛날 고구려에서 즐겨 했던 놀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바로 이 벽화덕분에 우리의 역사를 찾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사진도.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서 희미해집니다. 그런데 이 고분 벽화는 1500년 전의 것입니다. 돌 위에 어떻게 그림을 그렸길래 150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는지 그 비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이것은 5세기 말에 축조된 고구려 고분벽화, 쌍용총 벽화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이 조각을 통해 벽화제작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벽화조각을 현미경으로 살펴본 결과 벽화를 그린 물감의 성분이 드러났다.

안병찬 씨

적색인 경우는 수은과 황이 농도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화수은이라고 진사로 알려져 있는데요. 황화수은을 안료로 한 그런 것을 적색으로 사용했고 흑색인 경우는 탄소계 먹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고구려 벽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은 적갈색으로 드러났다. 고구려인들은 이 적갈색을 자 연에서 얻었다. 벽화에 쓰인 안료는 천연광물성 재료들인데 검은색은 먹에서, 적갈색은 황토에서 그 밖의 다른 색들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산화시켜서 만들었다. 이번엔 안료들이 돌 위에 오랫동안 남아있게 된 비결을 찾아 보았다. 현미경 관찰 결과, 안료 아래에 흰물질이 보인다. 이것은 석회다. 중국 집안의 무용총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이후 보존 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벽화의 훼손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실제로 훼손된 벽화의 곳곳 에서 하얀 회벽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돌 위에 석회를 여러번 발랐다. 그리고 석회 위에 그림을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 을 사용했다.

진영선 교수

젖은 석회위에다가 천연안료를 써서 자연안료로 접착제 없이 그려가지고 벽이 마르면서 석회가 마르면서 벽전체가 마르면서 안료가 석회틈 사이로 스며들어가서 같이 석회와 같이 마르는 것을 총작업을 프레스코 벽화라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석회칠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먼저 굵은 모래와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삼마와 석회를 섞어 바른 후, 맨 마지막에 고운 석회를 칠한다. 프레스코 기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석회가 마르기 전에 안료를 칠하는 것이다. 그러면 석회가 마르면서 안료도 함께 마치 종유석처럼 단단하게 굳는 것이다. 무덤에 흐르는 석회수는 벽화에 일종의 코팅작용을 하게 된다. 1500년을 견딘 고분벽화의 비밀 은 바로 프레스코기법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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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들의 세계

여기는 무용총의 내부입니다. 이렇게 무희들이 춤을 추는 벽화가 있어 이 고분의 이름도 무용총이 됐는데요. 이 무용총에는 춤 그림 외에도 손님을 맞이하는 접객도,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수렵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생전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이 무덤 안에는 이런 사실적인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그림들이 있습니다. 바로 저기를 보시죠. 무덤의 천장이 무척 특이하죠.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각 층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봉황과 연꽃, 하늘을 나는 신선, 구름이 보입니다.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하늘세계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벽에 있는 그림이 사실적인 반면 천장의 그림들은 무척 상징적입니다. 바로 저 천장벽화에는 죽음 저편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무용총의 천장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 태다. 이런 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건축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구려 천장구조를 살펴보자. 먼저 세단까지는 네벽과 평행하는 사각형을 쌓는다. 그 위의 5계단은 4개의 삼각고임을 써서 8각형으로 쌓아 나간다.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맨 마지막에 큰 돌로 천장 입구를 막는다. 벽면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천장도 회벽을 바른 후에 그림을 그렸는데, 벽면의 그림이 사실적인데 비해 천장은 상징적인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계단의 아래쪽에는 연꽃이 많이 그려져 있다.  상상의 동물인 봉황과 학의 머리를 한 신, 모두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전호태 인터뷰

고분벽화는 신선이나 글을 쓴다든가 여러 가지 모습을 하는 신선들을 기본적으로 연꽃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연꽃이라는 것을 불교의 개념에서는 내세 정토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도구가 됩니다. 결국은 천장부의 하단부는 연꽃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징적인 그림들과 함께 천장 상단부에는 독특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별자리였다. 붉은 해 속에 검은 까마귀가 들어있는 해신. 하얀 달 속에 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달신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북두칠성이 남쪽에는 남두육성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별자리를 그린 벽화는 여러 개가 있는데 덕화리 2호 고분에도 남두육성이 발견됐다. 남두육성은 여름 밤 남쪽하늘에서 발견되는 국자 모양의 별자리로 서양의 궁수자리에 해당한다. 고구려인은 그들이 스스로 관측한 별자리를 무덤 천장에 옮겨놓았다.

김일권 박사

북두칠성은 인간의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별자리로 여겨졌습니다. 남쪽의 남두육성 자리는 삶과 수명장수를 상징하는 별자리로 여겨졌조. 북쪽에 북두칠성과 남쪽의 남두육성 별자리는 인간의 생과 사라는 세계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는 그리고 두 세계를 통해서 영원성을 담아내는 그런 상징체계가 아닐까 여겨지고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김일권 박사의 저서를 몇 권 소개할까 한다.  김일권 박사는 우리 역사의 별자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로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고즈원, 2008), <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사계절, 2008),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예문서원, 2007), <동양천문사상 인간의 역사>(예문서원, 2007)이 있다. 첫번째 두번째 제시한 책은 일반 독자를 위해 세번째 네번째는 전공자들이나 별자리 역사에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이 읽어보시기를......

 

고구려를 동북아의 최강국으로 성장시킨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는 건국신화가 기록돼 있다. 그 첫머리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하늘신의 자 손이라고 씌여 있다. 추모왕이 하늘의 자손이라면 그 후손인 고구려인 역시 하늘의 자손이 된다.

전호태 인터뷰

고구려인들이 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천손 의식이죠. 하늘의 정기를 시조 주몽이 받았다고 믿고 있고 그런 신앙이 고구려 전역에 퍼져 있었는게 결국 그런 의식은 벽화에서는 해와 달을 자주 표현한다든가 말기에 가서는 해신과 달신을 빈번히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손의식을 가질 경우는 주변의 나라들은 다 천손국의 포함돼서 지배를 받아야 되는 것이니까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의 의식을 확립하는데도 하나의 이념적 중심이 되는 것이죠.”

 

천손 즉 하늘의 자손이라는 믿음은 고분벽화 곳곳에서 나타난다. 고구려인은 자신들이 해신과 달신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고분 벽화에는 다양한 신들이 등장한다. 불꽃이 너울거리는 막대를 쥐고 있는 불의 신, 풍요를 관장하는 농업의 신은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 당시 중요한 산업의 하나였던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과 쇠를 부리는 제철의 신도 보인다. 고구려인은 하늘의 후손으로서 각종 신들의 보살 핌을 받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 농업의 신

               ▲ 달의 신

          ▲ 쇠부리신(야철신) 

  ▲ 수레바퀴의 신(제륜신) 

          ▲ 수신

             ▲ 해신

 ▲ 해신과 달신

 

http://blog.naver.com/daniel5660/100021968192[출처] 고구려 고군벽화 / 삼족오, 두꺼비|작성자 소서노

윗 이미지의 출저입니다.

 

고분벽화 중 비교적 후기에 조성된 강서대묘는 고구려인들이 생각하는 사후세계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무덤은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시신을 안치한 방으로 이루어진 단순구조다. 시신을 안치했던 방은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축조 돼 있는데 사방 벽면에는 상상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북쪽에 있는 이 동물은 현무, 암수 한 쌍이 한 몸으로 거북이가 암컷, 뱀이 수컷이다. 서쪽 벽에 그려진 동물은 백호. 백호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영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남쪽의 동물은 주작이다. 역시 암수 한 몸으로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동쪽에는 청룡이 있다. 입구 쪽을 향해 날고 있는 청룡의 비늘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 네 마리 동물은 음양오행설에서 각각 사방을 대표하는 신으로, 사신이라 한다.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신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세계로 인도한다. 사신이 영혼을 안내하는 하늘세계에는 황룡이 있다. 황룡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황룡 주변에는 꽃과 구름 사이를 날아 다니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인들이 생각한 죽음 저편의 세상이다. 죽어서는 신선이 날개 옷 입은 신선 팬 되어 하늘세계에서 산다고 믿었던 고구려인들. 고분벽화는 그들의 믿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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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은 결혼하면 곧바로 수의를 만들고 금은 재물을 장례에 썼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죽음의 의식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정성스레 벽화를 그린 것도 죽음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천손 즉 신의 자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신의 나라 즉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고구려인들은 이 벽화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1500년 전의 고구려로 안내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고분벽화를 통해 1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은 물론 그들의 의식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 어느 기록보다 생생한 고대사의 거울인 것입니다.

 

※ 글 내용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2000 6 17일과 2002 6 8일에 방영된 방송은 거의 비슷한 내용인지라 한 곳에 정리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역사 공부하셔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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