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알아볼까!!!/역사스페셜자료

행복지기 2010. 11. 9. 22:13

HD 역사스페셜

신라건국의 수수께끼, 나정(蘿井)은 알고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곳, 경주시 외곽에서 이루어진 한 발굴은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다. 신화로만 여겨져 왔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정은 과연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신라 건국 역사의 비밀을 풀어 줄 것인가?

 

오늘은 신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하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신라의 수도 경주가 생각나구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뛰어난 문화재들이 떠오르는데요,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이 바로 금관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여기에 놓인 것은 신라의 금관입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정교하게 참 잘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순금으로 만들어진 고대 금관은 전 세계 모두 합해서 열점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중에 6점이 신라 금관이라고 하는데요, 놀랍지 않습니까? 세계가 감탄한 신라 금관은 모두 신라 왕족의 무덤에 부장돼 있었습니다.

 

여기가 신라 금관이 부장돼 있던 왕족의 무덤군인 경주 대릉원입니다. 무덤의 크기가 어마 어마하죠. 무덤이 마치 작은 산처럼 보이는데요, 신라는 황금 나라라고 부를 만큼 이 대릉원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 찬란한 문화를 일군 신라의 시조가 바로 박혁거세입니다.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는 삼국사기에 잘 남아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나정 숲 사이에서 말이 울어서 가보니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이고, 커서 왕이 됐다는 것입니다.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습니다.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에는 이렇게 믿지 못할 과장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라 건국 신화는 후대에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다, 박혁거세도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다, 라고 의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들어 있는 나정이 발굴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숲에 둘러싸인 우물이라는 뜻의 나정은 그 이름대로 경주시 외곽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나정 발굴은 지난 2002년 5월에 시작돼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170입니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나정에서는 예상치 못한 흔적들이 드러나고 있다. 건물의 기단이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네모반듯하게 잘 다듬었다. 기단 안쪽에는 기둥을 세운 주춧돌의 흔적이 발견된다. 기둥 주춧돌은 40여개나 된다. 기단 바깥쪽에는 담장을 두른 흔적도 보인다. 이 흔적들은 박혁거세 탄생지인 나정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문형 연구원 / 중앙문화재연구원

"원래 나정에 그 비각과 돌담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각의 빗물이 계속 돌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담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담을 정비 차원에서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조사를 진행하다보니, 이 기단석들이 확인이 됐구요, 기단석을 계속해서 확장,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팔각건물지가 노출이 되게 된 것입니다."

 

 

돌담을 두른 거대한 팔각 건물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팔각 건물터 기단의 한 변은 8m, 폭은 20m 나 된다. 전체 면적이 무려 90평에 이르는 대형 팔각 건물터다. 원래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이라고 전설로 전해져 왔던 나정은 조선시대에 사적으로 지어 탄생지로 모셔 왔다. 우물이라고 전해져 온 곳에는 사각형의 화강암을 덮어 우물 표지석을 해 놓았었다. 그런데 화강암을 드러내고 발굴했을 때 타원형 구덩이만 확인될 뿐 우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비각 뒤에 있었던 우물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희들이 상부에 큰 화강암 석채가 있었습니다. 상부를 들어내 보니까 이와 같은 형태의 상징적인 우물을 조형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물이라고 전해져 왔던 우물터는 발굴 결과 우물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가 바로 선대 우물지 이쪽이 먼저 조성이 되고 옮겨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운 우물터가 발견됐다. 깊게 판 우물터의 바닥에는 평평한 강돌까지 깔아 놓았다. 원래 우물이라고 여겨왔던 우물터에서 4, 5m 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운 우물터가 확인된 것이다. 원래 우물이라고 알고 있었던 곳보다 우물의 크기도 크고 깊이도 훨씬 깊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는 우물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문형

"지금 보시면 이 바닥에 강돌을 깐 이유가 물이 솟았을 때 일차적으로 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지금 현재까지 조사결과는 맞는 것 같습니다."

 

 

상징적으로 조성해 놓은 우물터 바로 옆에 우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정을 발굴한 결과 대형 팔각 건물터가 드러났고 우물이라고 여겨 왔던 기존 우물터 옆에서 실제 우물이 발견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새로 발견된 우물터 바깥쪽에는 기둥 구멍이 나타났다. 우물가로 기둥 구멍이 발견된다. 이것은 도대체 뭘까?

 

이문형

"우물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기둥 구멍이 곳곳에 확인되고 있는데요, 이런 기둥은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상부에 어떠한 구조를 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 주변에는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우물 바깥쪽으로 도랑을 두른 흔적이 보인다. 우물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도랑이 파져 있다. 도랑 깊이는 1.5m, 폭은 2m에 이른다.

 

이문형

"이 도랑이 지금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빙 둘러져 있습니다. 이 도랑에 물을 가두었던 흔적들이 확인이 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러한 니질 점토가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도랑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물을 가뒀던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도랑의 벽면은 끈끈한 점액질의 니질 점토로 돼 있다. 도랑 안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는 증거다. 도랑은 우물을 보호하는 해자인 것이다. 우물 시설물로 보이는 것은 건물 기둥 자리와 도랑,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도랑 바깥쪽에서 발견되는 구멍 자리. 이것은 나무 기둥을 세운 흔적이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운 목책 흔적인 것이다. 울타리 구멍은 우물에서 14m 거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의 우물가에는 건물 기둥 구멍이 있고 우물을 한가운데 두고 해자와 목책이 동그랗게 둘러져 있다.

 

이문형

"새로 확인된 우물지를 중심으로 도랑과 목책이 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도랑과 목책이 새로 확인된 우물지를 중심으로,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보아지는데요, 따라서 이런 시설로 볼 때 우물지가 상당히 신성시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굴 결과 나정에는 실제 우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물에는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운 해자와 목책 울타리로 이중 보호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예사롭지 못한 우물의 발굴. 그것은 신라 건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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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굴 도면과 고건축 전문가의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한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입니다. 이렇게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목책이 가로막고 있군요. 우물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이렇게 바깥에 울타리를 쳐 놓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출입문을 이용해야 하는데요, 들어가 볼까요. 목책 안으로 들어오면 또 이렇게 큰 도랑을 만나게 됩니다. 도랑의 폭은 2m 정도 되구요, 깊이는 1.5m 정도 파서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이 도랑과 목책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시설입니다. 우물로 가려면 여기 도랑 사이에 난 작은 길을 이용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쳐 놓은 움막 한가운데는 이렇게 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서 깨끗하게 관리한 듯 합니다. 우물을 참 신성시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당시 사람들은 우물에 왜 이런 시설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그 의문에 대한 단서를 대형 팔각 건물터에서 찾을 수 있다. 대형 팔각 건물터는 우물을 덮고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형 팔각 건물터의 정체는 뭘까? 나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천이백여 점에 이른다. 기와와 토기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철기류와 자기류도 나왔다. 그중 팔각 건물터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토기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각 건물터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대부분 깨진 채 발견됐다. 의례용으로 쓰고 버린 제기다. 등잔 역시 제사용품이다.

 

오재진 연구원 / 중앙문화재연구원

"지금 여기 보시는 유물들이 팔각 건물지에서 출토된 토기류들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유물은 앞에 보시다시피 등잔, 잔, 잔받침들이 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각 건물터는 제사와 관련된 유적인 것일까? 삼국시대 산성인 경기도 이천의 설봉 산성. 이곳에서 팔각 건물터가 발견됐다. 설봉 산성 팔각 건물터에서도 산장상을 비롯해 의례용으로 쓰인 제기들이 출토된다. 팔각 건물터는 제사 시설인 것이다.

 

이태호 학예연구사 / 경기이천시립박물관

"토기로 만들어진 파편들이 많이 발견됐습니다. 이런 토기의 편들은 다른 제사 유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설봉 산성 팔각 제단터는 제사용이나 제의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 시설인 이 대형 팔각 건물터는 과연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팔각 건물터에서 출토되는 기와에 그 해답이 있다. 연꽃무늬와 사자무늬 기와는 신라 왕실과 관련도니 건물에 주로 사용되던 것이다. 의봉 4년이라고 새겨진 기와는 팔각 건물터가 왕실 건물이라는 사실과 함께 축조 연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의봉은 당 고종이 반포해 사용하기 시작한 연호로 의봉 4년은 679년, 통일신라 문무왕 19년에 해당한다.

 

김성구 관장 / 국립경주박물관

"의봉 4년 기와는 이제까지 월성이나 안압지 동궁 터에서만 출토되어서 역시 신라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정에서 이 기와가 출토된 것은 역시 나정 유적도 신라 왕실하고 관계가 깊은, 그런 유적이 아닌가 생각되구요."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9년에 왕실 시설을 크게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팔각 건물터는 개축한 건물일까? 팔각 건물터에서는 ‘생(生)’이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백여 점 가량 출토됐는데 생자 명문의 기와가 그 의문을 풀어준다.

 

"이제까지 생가 기와는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바 없기 때문에, 역시 그 나정이 주요한 수요처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생자명이라는 의미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역시 그 탄생적인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된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고, 역시 그 수요처가 나정뿐이기 때문에 역시 나정 유적하고 깊은 관련이 있는 문자 기와로 볼 수 있겠고, 담장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만, 담장에서 함께 나온 다른 수막새들 보다보면 그 시기가 8세기 중엽 경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나정에 출토된 생자명 문자 기와나 담장 같은 경우는 8세기 중엽 경에 크게 확장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개축하기 전, 처음 팔각 건물이 지어진 때는 언제일까 새로 확인된 우물에 단서가 있다. 팔각 건물터는 우물을 흙으로 단단하게 메우고 그 위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물을 메울 때 흙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를 섞어 넣었다. 바로 이었다.

 

정재훈 교수 / 한국전통문화학교

"황토와 숯을 섞어서 다진 그런 흙으로 그것을 매웠어요. 채워서 매웠는데 그것을 우리는 숯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단단하게 메우는 것은 벌레나 또는 세균 숯이 살균 작용이 가능해요. 세균이나 지렁이나 무슨 두더지나 이런 게 그것을 파고들어 가지 못하고 신성하게 그 웅덩이를 보호하는 그런 시설로 그렇게 매웠던 겁니다."

 

팔각 건물은 우물을 메운 뒤에 세운 것이다. 우물이 메워진 때를 알면 팔각 건물이 세워진 때를 알 수 있다. 우물을 채울 때 섞어 넣은 숯의 절대 연대를 측정해 보기로 했다.

 

 

김종찬 교수 / 서울대 물리학과

"이 목탄 시료의 연대는 4백년부터 6백년 사이에 확률이 분포가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값은 서기 5백년. 중심 년대는 서기 5백년으로 나타났으며 우리가 그것을 해석할 때 대개 중심 년대 즉 5백년의 플러스, 마이너스 50년 즉 다시 말하자면 450년부터 550년의 연대로 해석하면 문안하겠습니다."

 

 

삼국사기는 소지왕 9년 시조가 태어난 마을에 신궁을 지었다고 적고 있는데 소지왕 9년은 487년이다. 이것은 절대 연대 분석 결과와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팔각 건물 이전에 존재했던 새로 발견된 이 우물 시설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새로 발견된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 기둥 자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 출토 됐다. 두형 토기가 바로 그것이다. 두형 토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후 시기까지 유행하던 제사용 그릇이다. 원래는 굽이 긴 다리에, 사발이 얹어진 형태다. 이 두형 토기의 출토는 우물 시설이 기원전후한 시기에 존재했던 제사 시설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윤형원 학예연구실장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다리가 길어지고 접시가 얕아지는 두형 토기는 보통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후한 시기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정에서 새로 발굴 조사된 두형 토기 경우는 아마 기원전에 제작되어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와 3년에 시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남해왕 3년은 기원후 6년에 해당한다. 이것은 두형 토기의 편년과 일치하는 시기다. 우물 시설물은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나정 발굴. 그것은 신라 건국 신화를 역사로 다가서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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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굴을 토대로 고건축 전물가의 고증을 거쳐 팔각 건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했는데요, 이 팔각 건물 앞에 서 있으니까, 제가 굉장히 작게 느껴집니다. 크기를 보면 동-서로 20m, 남-북으로도 20m나 된다고 합니다. 건물의 높이는 한 3층 정도로 추정됩니다. 당시에 이런 건물을 짓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신라의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기 위해 이런 거대한 팔각 건물을 지었던 것입니다.

 

신라의 왕들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직접 주관하고 빠짐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조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조를 받들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을 보장받고, 그와 더불어 왕권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정에서 시조를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면 박혁거세의 신화가 과장된 것은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국사기 신라 건국 신화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다고 하는데요, 이때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그 옛날 박혁거세는 과연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요?

 

 

우물 건물터 외곽 가장 아래 아래층에서 새로운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사각형의 집 자리 유적이다. 바닥의 가장 자리에는 집 기둥을 세운 흔적도 보인다. 배수를 위한 외부 돌출구도 확인된다.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에서 전형적인 청동기시대 집 자리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청동기 집 자리는 박혁거세 이전에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이문형

"지금 보시는 게 청동기시대 주거지입니다. 이러한 주거지가 담장 하부와, 북쪽 일대에서 모두 다섯 동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정 주변에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청동기 유물은 박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나정 일대에는 발달된 농기구와 농사 기술로 가진 농경민들의 정착 마을이 존재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종욱 교수 / 서강대 사학과

"나정 근처에 그 시대에 주거지, 마을이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 마을의 존재는 기원전 2세기, 또는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전반기경에 혁거세 집단이 등장해서, 새로운 하나의 국가인, 소국인, 사로국 또는 서라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그 증거가 되겠습니다."

 

 

 

경주 전역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고인돌(경북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지배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고인돌은 신라 건국 이전에 이미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정치적인 토대가 갖춰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혁거세는 경주 전역에 퍼져 있던 청동기 지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 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혁거세 이전에 조선 유민이 산골짜기에 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1977년, 경주 조양동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이상구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절개된 면에서 토광묘 흔적이 보여서 1980년도부터 발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흔적이 보였던 토광묘에서 처음으로 동경도 나오고 철구도 나오고 와질 토기가 상당히 많이 출토가 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했다고 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당시 신라 건국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갈증은 조양동 고분이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철제 농기구를 비롯한 철기류와 함께 신라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기원전 1세기경의 각종 유물들이 조양동 고분에서 쏟아져 나왔다. 청동기 무문 토기에 이은 새로운 형태의 와질 토기가 새롭게 등장했다. 토기의 문양도 매우 특이한데, 양쪽에 소뿔모양의 손잡이를 붙인 이 와질 토기는 무문토기의 결합된 과도기적 성격의 토기로 기원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양동 유물들은 이미 기원전 1세기경 경주지역 문화가 고도의 문명 단계에 들어섰음을 입증한다.

 

윤형원

"1980년대에 조양동 유적이 발굴 조사되면서 경주의 청동기시대와 4세기 적석 목곽분 시대의 사이에 해당하는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양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록에서만 보이던 신라 초기의 모습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잘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양동 고분에 이어 경주 각지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의 고분들은 당시 경주가 국가 시대에 접어 들어섰음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조양동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 전한시대의 동경은 기원전 1세기에 신라가 중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조유전

"중국에서 구하게 여기는 그런 물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교역 집단이 아니면 서로 주고받는 어떤 정치 체제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유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유물이 조양동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강력한 집단체제가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선진 문물인 철기 문화를 가진 집단이었을 것이다. 철기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청동기 문화를 가진 지배 세력들을 통합하고 신라를 건국했을 것이다.

 

이종욱

"혁거세 집단이 경주에 이주했을 때 이런 지석묘를 축조하는 세력이랄까 권력 구조가 없었다면 아마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권력 구조 위에 혁거세 세력은 한 단계 더 높은 권력 구조를 만들고 최고의 권력 구조를 혁거세의 이주민 세력이 장악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게 됐던 것이죠."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웠다는 기원전 1세기. 경주에는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강력한 철기 문화의 힘을 가진 세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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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정이 발굴로 우리는 신라의 건국 신화가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에는 건국 신화가 있는데요, 공통점을 보면 주인공을 모두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떤 것은 너무 과장되고 황당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화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죠. 그리스 로마 신화 시대로 국제관을 꾸며봤는데요, 신들의 왕, 제우스 그리고 태양의 신 아폴론도 보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죠.

 

그런데 여기 보시면 늑대의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쌍둥이는 바로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강물에 버려진 쌍둥이를 암늑대가 발견하고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데요, 늑대가 젖을 먹여 사람을 키웠다니, 역시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대리석에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가 커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우는 장면을 조각해 두었는데요, 결말은 형인 로물루스가 싸움에서 이기고 로마를 건국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 건국 신화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마가 건국됐다고 정확하게 날짜까지 적도 있는데요, 이것은 믿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로마 건국 초기 왕궁 유적이 발굴됐는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왕궁은 기원전 8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화가 말하는 기원전 753년과 일치하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과장된 이야기를 빼고 보면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신라로 돌아오죠. 신라의 건국 신화에는 박혁거세가 왕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박혁거세가 왕이 되기 전 여섯 촌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나정 옆 숲 사이에서 말이 울어서 가 봤더니 큰 알이 있었고 그 알을 끼고 나온 갓난아이가 바로 박혁거세라는 겁니다. 박혁거세가 열세 살이 되자 여섯 촌장들은 그를 왕으로 모십니다. 어떨까요? 이것도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양산재가 있다. 양산재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여섯 촌장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각기 성을 정해 주었다고 한다.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 여섯 성씨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여섯 촌장의 후손들은 각기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알천 양산 촌장은 경주 이씨의 시조다. 시조 제사는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씨의 시조 알천 양산 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와 정착한 곳이라는 표암재.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6촌장들이 회의를 하는데 나정에서 이상한 기운이 돌아 가봤더니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를 데려다 키워 열세 살 되던 해에 임금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이종택 / 경주이씨 표암화수회장

"제가 생각할 때는 여섯 할아버지들이 다 같이 박혁거세 임금을 갖다가 이쁘고, 곱게 잘 키워서 13살 잡숫던 해에 신라를 건국하고 개국을 하면서 초대 임금으로 모셨다고 봅니다. 요건 우리 신라 사기나 유서에 또한 저희들의 고서에 고대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6촌장들은 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의 건국 신화에 주목할 대목이 있다. 박혁거세와 말이 함께 등장 한다는 점이다. 신화를 통해 민족의 이동 루트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김화경 교수. 그는 박혁거세가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이라는 것은 말이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김화경 교수 /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박혁거세 신화에 말이 나오거든요. 그 말이라는 것은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매개해 주는 동물로 불 수 있습니다.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곧 천강 신화를 가진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은 대개 동북아시아에서는 유목 수렵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박혁거세는 다른 곳에서 들어온 유목 수렵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 볼 수 있겠죠."

 

 

나정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선도산. 이곳에서도 박혁거세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선도산 정상에는 선도 산신인 성모를 모셔 놓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의 주인인 성모가 바로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라는 것이다. 박혁거세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라는 것은 성모에 관한 전설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채무기 사무국장 / 경주문화원

"성모에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성모는 원래 중국 황제의 딸인데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바로 이곳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성스러운 능력으로 아들을 한분 두었는데 아들이 박혁거세라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박씨 집안의 따님들이 모여서 한 달에 두 번씩 선모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박혁거세와 관련된 신화들은 그가 북방에서 이주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북방 이주 세력이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설명이 된다. 박혁거세의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구정동, 조양동 등 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는 철제품과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중 주목할 철기가 있다. 철제 마구(말재갈)가 바로 그것이다. 경주에서 마구는 청동기 유물로는 없던 것이다. 이것은 경주 지역에 기마 세력이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유전

"소위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소위 6부 촌장의 추대를 받는 것이 기록에 나옵니다만 그런데 이 세력이 말과 결부된다면 소위 첫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기마 말을 탈 수 있는 하나의 집단이 아닐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보병과 기마는 천장지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탄 집단이 등장한 것으로써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철기와 함께 그런 기동력 확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봐서 신라 사회에 있어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고 나아가서 이런 사람들이 초대 되어서 초대 소위 왕으로 초대될 수 있는 소지가 이런 기마 집단과 관계가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북방 이주민이었던 박혁거세가 경주에 정착한 뒤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나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알영정. 알영정은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도 우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영의 탄생지인 알영정에는 우물이라고 전해져 온 곳에 화강암을 덮어 우물 표지석을 해 놓았다. 알영의 탄생 신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알영정에 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비뼈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알영 왕비라는 것이다. 용에게서 난 알영은 먼저 정착한 선주민 세력으로 해석된다.

 

이종욱 교수

"나정 마을 세력과 알영정 마을 세력들이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나정 마을과 알영정 마을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이웃한 마을이었습니다. 두 마을 세력이 혼인을 통한 동맹을 맺고 그 힘을 바탕으로 경주 지역에 있는 6촌 위에 군림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발전 단계인 국가 단계로 성장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만들어진 나라가 서라벌, 사로국이라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강력한 철제 무기와 기마 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 온 박혁거세. 그는 경주의 6촌장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신라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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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혁거세 집단이 경주로 이주해서 정착한 마을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을 중심에 이렇게 우물이 자리하고 있구요. 그 주위로 집들이 모여 있습니다. 고대에는 우물이 마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우물 파는 법을 알고부터 사람들은 강가에서 벗어나 넓은 들로 나가서 농경이나 목축을 하고 마을을 이루며 살 수 있었습니다. 박혁거세의 이주 집단 역시 나정 우물이 있는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박혁거세는 바로 나정에서 신라의 건국 기반을 잡았던 것입니다. 2천여 년 전 박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해 왕이 됐다면 왕궁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실마리는 삼국유사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박혁거세와 알영을 길렀는데, 그곳이 창림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림사는 어디에 있을까?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해 그린 지도에 따르면 신라 초기 유적과 유물은 나정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오춘영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여기가 현재 경주 시가지입니다. 여기가 남산이구요. 여기가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이구요. 박혁거세가 묻혔다는 오릉입니다. 신라 초기의 도당토성, 남산토성, 박씨 왕족들의 무덤이 이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지역이니까 박씨 왕족의 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곳입니다."

 

 

삼국유사는 창림사가 남산 서쪽 기슭에 있다고 했다. 나정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곳, 바로 창림사가 있다는 남산 서쪽 기슭이다. 그런데 남산 서쪽 기슭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은 돌들이 발견된다. 바로 주춧돌이다. 이 거대한 주춧돌들은 숲 속 여기저기에 수없이 많이 흩어져 있다. 주춧돌은 이곳 남산 기슭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흔적이다.

 

"주춧돌입니다. 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주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초석이 가공된 상태를 보면은 잘 만들어진 초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만든 초석이 있다는 것은 절이 공을 들여서 큰 규모로 만든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춧돌이 흩어져 있는 근처에는 거대한 석탑 하나가 서 있다. 높이가 7m에 이르는 거대한 삼층석탑이다. 절터에서 이 절의 이름을 밝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절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명문 기와다. 바로 창림사다. 박혁거세가 궁실을 지었다는 바로 그곳인 것이다.

 

이종욱

"혁거세가 왕에 오를 때 머문 장소가 나정을 중심으로 한 그 근처였다고 생각됩니다. 창림사도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박혁거세가 초기 축조한 궁실이나 혁거세가 자랐던 궁실이나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창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절이다. 창림사 터에서 발견된 유물만 보더라도 창림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창림사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가 거처했던 궁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종욱

"당시 궁실이라고는 하지만 거대한 웅장한 건물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고구려 신화를 보면 주몽도 처음에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우고 초막을 지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로 미루어 보아서 혁거세가 지은 궁실도 큰집은 아니었을 것이고 청동기시대 주거지보다는 규모가 클 것이고 아마 띠를 이어서 초가집 비슷한 것이고 규모는 좀 컸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가 건국한 왕국은 어디에서 어떤 규모로 시작됐던 것일까? 신라의 고대사를 추적하는 이종욱 교수.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박혁거세가 세운 왕국의 영역을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욱 교수

"이웃한 소국들과의 경계를 찾아내면 사로국의 영역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현재 영천 지역에서 있던 골벌국, 다음에 청도 지역에 있던 이서국, 울주 울산 지역에 있던 우시산국... 이러한 소국들의 영역을 생각하면 현재 경주시 영역이 사로국의 영역이 되겠습니다."

 

 

기원전 1세기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의 모체 사로국의 영역은 현재의 경주시 전체지역을 합친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울 당시 경주 지명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지명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여섯 촌장이 다스렸던 촌락의 이름이다.

 

이종택

"신라가 개국 전에 진한, 마한, 변한 전 삼국이 있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진한 땅이예요. 그때에 6촌이 이미 구성이 되어 가지고 어느 지역을 손씨가 맡고 어는 지역을 최씨가 맡고 쭉 맡아 살았습니다."

 

여섯 명의 촌장이 나누어 다스렸다는 여섯 촌락. 그 촌락을 찾으려면 현재 경주 지역의 지형과 지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채무기 사무국장

"지금도 경주에는 명활산 알천이라고 불리는 북천이 있구요. 소금강산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 쪽 지역들이 금산가리촌, 알천, 양산촌, 명활산, 고야촌 하고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 옛날 촌락 이름이 지금의 경주 지명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두 개의 촌락이 찾아졌다. 또, 경주의 지형을 보면 산 또는 내와 같은 자연 조건에 의해 크게 여섯 개의 지역으로 나뉘고 있다. 위성사진으로 보면 그 경계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6개의 산골짜기에 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남아 있는 지명과 기록을 근거로 산골짜기에 촌락을 이룬 6촌락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다.

 

이종욱 교수

"공간이 대체로 현재로 따지면 1000평방킬로 정도는 직경으로 따지면 30킬로 40킬로 되겠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방백리라는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방백리 소국의 영역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 인구는 대체로 일만 명 정도가 사는 것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이 교수가 삼, 사십 킬로미터 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인구는 만 명. 이것은 삼국유사에서 알아 소국의 인구를 만 명이라고 한 것과 일치한다. 신라는 경주의 작은 소국으로 시작된 나라다. 그 나라의 세운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 우물을 근거로 세력을 넓혔다. 6촌장이 다스리던 촌락을 장악하고 그들 위에 강력한 왕으로 군림한 박혁거세. 신라인들은 그런 그를 신화로 그리며 기억해 온 것이다.

 

이종욱 교수

"일본인 학자들이 주동이 돼서 신라의 건국신화라든지 이런 걸 믿을 수 없는 걸로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 일본의 일급학자들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사람들이 신화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거나, 또는 악의적으로 한국의 건국신화를 못 믿을 것으로 만들어낸, 그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정이 발굴됨으로써 신라 건국 신화의 현장이 그대로 드러나 것이죠. 그러니까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어 오던 삼국사기, 삼국유사 체계랄까, 그런 역사, 원래, 본래의 역사가 이번 나정이 발굴됨으로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정 발굴로 박혁거세와 그가 세운 나라, 신라는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나정에서 시작된 신라 건국 이야기.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어 우리 앞에 다가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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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동안 학계에서는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를 포함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상당 부분을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나정 발굴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건국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를 계기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나정 발굴을 계기로 지금 학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놓고 또 다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 질 수 있습니다. 2천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 나정을 통해 우리 고대사가 한층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서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는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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