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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기 2010. 12. 11. 15:56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일본속의 백제, 백제인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 일본 문화가 절정에 달한 겐쇼시대, 성무천황이 모든 국력을 동원해 창건한 이 절의 금당에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금동불상을 볼 수 있다. 752년 5년간의 주조를 거쳐 완성한 이 대불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당시 일본의 기원을 담은 국가의 상징물이었다. 그런데 이 대불은 어느 백제인이 금광을 개발해 거기에서 나온 황금 900냥으로 비로소 완성됐다고 전한다. 그는 의자왕의 후손인 백제왕 경복이었다. 교토 중심에 자리한 히라노신사(平野神社). 광인천황 대에 이르자 간무천황의 어머니였던 고야신립(高野新笠)이라는 여인을 모시는 곳이다. 일본에서 가장 추앙받는 황태후인 고야신립 역시 백제왕족 출신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아닌 일본의 역사서에 찾을 수밖에 없는 백제인들. 일본 속에서 그 백제 인들이 남긴 흔적은 과연 누구의 역사인가?

 

 

6부, 일본속의 百濟, 百濟人

 

 

가을에 문턱에 선 교토는 일본 최고의 고도답게 고즈넉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서기 794년 간무(환무)천황이 나라시대를 마감하고 교토에 도읍을 정한 후 명치유신까지 천백 년 동안 이곳 교토는 일본의 서울이었다. 나라 아스카 문화를 속출한 일본이 새로운 문화와 정치를 이끌어 낸 헤이안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교토였다. 이곳에는 교토를 수도로 정한 간무천황과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이 있다. 바로 환무천황의 어머니로 황태후라 불렸던 고야 신립을 모시는 히라노신사. 일본 천황의 어머니라는 신분에 맞게 이 신사는 다른 신사에 비해 큰 편이다. 일본인의 추앙을 받아온 고야신립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다름 아닌 백제 출신의 여인이다.

 

 

이도학 교수

"히라노신사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여기 세워져 있군요. 이 안내판에 보면 광인천황의 황후인 고야신립이라고 적혀 있는데 바로 고야신립이라고 하는 여성이 백제의 여성으로서 간무천황 다시 말해서 환무천황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환무천황을 이 고야신립이 백제식으로 교육을 잘 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환무천황은 정치를 아주 잘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아내를 백제의 사람으로 맞아드리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그 같은 유서와 유래를 간직하고 있는 신사가 교토에 있는 히라노신사입니다."

 

 

환무는 어머니 고야 신립희1)의 가르침을 잘 따랐고 후에 그 자신도 백제 출신인 여인을 왕비로 맞아드리게 된다. 고야 신립희는 환무의 아버지인 광인천황이 즉위하기 전에 왕비로 간택됐는데 그녀의 총명하고 후덕한 인품으로 왕실은 물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관한 유일한 기록은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 보이고 있다. 환무천황 8년 조를 보면 황태후 ‘고야신립회’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게서 나왔는데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이 높았고 환무천황이 즉위한 뒤 황태후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여인 고야 신립희.

 

 

그녀는 자신이 받았던 백제식 교육을 그대로 아들인 환무에게 가르쳤다. 왕으로서의 올바른 통치덕목을 어머니에게 배운 환무는 후에 천황이 되어 일본의 태평성대를 가져왔고 가장 선정을 베푼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환무는 자신이 백제 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고야 신립희의 선조가 언제 일본에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가 패망할 무렵 일본에 건너온 백제 왕족으로 보고 있다.

 

 

교토의 중심에는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7개의 사찰 중 하나인 광릉사가 자리하고 있다. 603년에 건립된 이 절은 당시 경제 중심지였던 교토에 불교를 전파했고 수많은 불상과 문화재가 있어 지금도 일본 문화의 보고로 불린다. 특히 광릉사 영보전(靈寶殿)은 일본 국보 제1호를 소장하고 있어 유명한 곳이다.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지만 우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후 어렵게 촬영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cafe.daum.net/buddhajk

 

일본 국보 제1호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 ‘그 어떤 언어마저도 무시하고 어떤 언어도 미치지 못할 곳에서 영원한 미소를 띠고 있다’라는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일본인의 신앙 그 자체로 남아 있다는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인의 그럼 염원과는 달리 고대 한반도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 재질이 일본에는 자생하지 않고 한반도에만 있던 적송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도학 교수

"좌정하고 있는 불상이 일본 국보 제1호인 광릉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불상은 한반도와는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불상으로 이야기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하고 쌍둥이처럼 똑같을 뿐 아니라 그 당시에 한반도에서 자생하고 있었던 적송이라고 하는 소나무로 만든 불상이기 때문에 한국계통의 불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서 그 오른편에 보면 우는 미륵이라고 얘기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미루어 볼 때 일본 국보 제1호가 한국계통의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열도에 미친 우리나라의 고대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켰는가를 단적으로 시사해 줍니다."

 

 

                       이미지 출처 : cafe.daum.net/buddhajk

 

 

 

이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재질 뿐 아니라 모양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불상과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그 모태라고 하는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는 똑같은 모습인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당시 앞선 불교문화를 가진 한반도의 불상 양식이 고스란히 함께 전해진 것이다. 또 영보전에는 우는 미륵으로 유명한 일본 국보인 백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우는 미륵)도 봉안돼 있다. 이 불상은 일본 스스로도 백제에서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백제에서 널리 퍼졌던 미륵신앙이 쇼토쿠 태자에 의해 일본에 전파될 때 국가에 번영을 기원하며 백제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광릉사의 불상들은 일본의 불교를 잉태시키고 그 문화를 꽃피운 것은 백제, 나아가 한반도 문화임을 말해주고 있다.

 

 

교토 인근에 시가현 애이지군. 이곳 사카섬에는 너무도 친숙한 이름 백제사를 찾았다. 나카노오에의 황제로 불렸던 천지천황이 백제 패망 후 지금의 시가현 오츠 지역에 오오미 교정을 세우려 할 때 수많은 백제인들도 그를 따라 시가현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백제사가 자리한 시가현 애이지군 일대도 규슈와 나라지역에서 이주한 백제인 수만 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긴 계단과 어우러진 풍광으로 이름난 백제사 인왕문을 지나면 산중턱에는 백제사 본당이 모습을 나타낸다. 백제사는 쇼토쿠 태자의 발언으로 백제에서 온 승려 도흔이 590년 창건했다. 절이 세워진 후에는 그 지역에 정착한 백제 인들이 백제의 재건과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던 곳이다. 백제사 본당 뒤에는 백제 사람들이 세웠다는 5층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옛 백제사의 모습을 담은 수묵화가 이곳에 남아 있는데 이 그림에서 백제사 본당 뒤로 5층 목탑의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백제사 본당 뒤쪽으로 20분가량 오르니 그림에서 보았던 5층 목탑의 유구가 남아 있었다. 목탑 심초석의 크기를 감안하면 백제사 5층 목탑의 규모는 적어도 높이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당시 산 정상 부분에 이런 큰 규모의 목탑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은 뛰어난 건축술을 지닌 백제인 외에 또 누가 있었을까? 패망한 조국을 뒤로 하고 먼 일본의 땅으로 들어와 시가 현의 한 절의 그 흔적을 남긴 백제인들. 그들이 체취는 이렇게 남아 있었다.

 

 

 

백제인들의 자취는 천지천황 때부터 그들의 터전이었던 시가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가현 요우카이치시의 외곽, 가모 지역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이 삼층석탑과 함께 이시도우지 즉 석탑사라는 절로 지어 졌는데 석탑이 지어진 곳에 있는 절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시도우지 3층 석탑을 보고 있노라니 한 눈에 그것이 백제 양식에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석탑이 지어진 때는 669년 어느 백제의 건축가가 고향 땅의 탑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인지 날아갈 듯한 옥개석과 경쾌하게 뻗은 탑신은 백제탑의 모습 그대로다.

 

 

 

 

 

백제시대 석탑인 비인 5층 석탑(충남 서천군 비인면)과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구조와 옥개석이 닮아있음을 볼 수 있다. 또 가벼운 느낌이지만 안정감을 가진 탑신을 가진 부여 장하리 3층 석탑은 이시도우지 석탑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7세기 중반까지 일본에는 목탑이 유행했지만 이곳에 백제 인들이 돌을 깎아 탑을 세우면서 일본에도 석탑이 전래됐다. 가모 지역에 있던 백제 이주민들은 죽은 뒤 백제 땅에 잠들 수 없는 한을 풀기 위해 이시도우지 석탑주변에 묻혔다고 한다. 그 수많은 백제 인들은 어떤 길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이도학

"백제 인들이 어떤 항해 루트를 이용해서 일본열도에 와 가지고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됐는지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음)

이노꾸마 가네가츠 / 교토 다치바나 여대 교수, 전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장

"아스카시대 초기부터, 한반도 남쪽 항해루트를 따라 많은 백제 인들이 이주했는데, 오사카 쪽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항해 루트는 한 가지 방향으로 단정 지을 수 없고, 일본 연안 곳곳에 한반도와 백제의 문물이 다각적으로 들어 왔던 것을 감안하면, 다양한 해양루트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사카와 와카야마 족을 경유해 들어온 것으로 봅니다. 이런 루트를 통해, 538년 백제에서 불교가 전해지고 많은 백제 인들이 들어왔는데, 한가 루트라고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에서 한성을 잃은 5세기 말 그리고 백제가 패망할 때 수십만의 백제 유민들은 북규슈로 왔고 이후 오사카와 나라 아스카에 이주했는데 그 중 일부도 지금의 시가현 일대에 정착하게 된다. 이렇듯 시가 현은 7세기 말부터 규슈와 아스카에 이어 백제 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다. 일본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느 백제인을 만나러 시가 현의 히노를 찾았을 때 우리의 어느 시골처럼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농부가 가르친 곳에 귀실신사(鬼室神社)2)가 보였다. 이 신사는 일본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던 백제인 귀실집사의 제를 올리는 곳인데 지금도 이 마을에선 매년 그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귀실집사는 천지천황 대에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시가 현 오오츠 지역에 정착하면서 일본조정에 발탁된 인물이다.

 

 

이도학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복신장군을 알고 계시겠죠. 바로 복신 장군의 아들인 귀실집사라고 하는 인물을 제사지내고 있는 신사가 귀실신사입니다. 귀실집사라고 하는 인물은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백제 사람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바로 이 오오츠라고 하는 근거지를 형성해 가지고 백제 사람들이 살기도 했었는데 귀실집사라고 하는 인물은 671년에 왜의 조정으로부터 학직두라고 하는 높은 직책에 임명됐습니다. 학직두라고 하는 것은 문교, 행정, 학문 진흥에 총책임자의 직책으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교육부장관에 해당이 됩니다. 바로 귀실집사가 이 같은 직책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사람들이 일본조정 안에서 크나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충남부여 은산면에서는 지금도 백제 복신장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은산별신제가 내려오고 있다. 이 은산별신제의 신, 귀실복신은 백제가 망하자 임존성에서 부흥군을 지휘한 백제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다. 의자왕의 4손인 복신은 예순이 넘는 나이에 부흥 운동을 지도했고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했지만 내분으로 663년 왕자 부여 풍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 백제장군 귀실복신의 아들이 바로 이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귀실집사다. 일본서기 천지4년 조에는 귀실집사가 그의 아버지 복신의 공적에 의해 일본조정으로부터 귀실집사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돼 있고 또 백제의 남, 녀 400여명을 지금의 시가현(오후미 국)에 살게 했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아마도 귀실집사는 그 400여명을 비롯해 시가 현 일대에 살던 백제인들을 다스렸던 책임자였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천황 재위기간인 671년 지금의 교육부와 내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학직부라는 최고위직에 봉해졌다. 그는 곧은 인품으로 왕의 신망을 받아 인재들을 발굴하고 조정의 관리들을 추천하는 일을 했다고 전한다. 패망국의 망명 인으로 일본 정치를 이끈 귀실집사, 1300년이 지난 지금 그 백제인은 이곳 히노 마을에 안녕을 지켜주는 신이 됐다. 취재를 하면서 야마나시 현의 작은 도시의 백제 사람과 관계된 유물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야마나시 현으로 향했다. 규슈나 나라 현 쪽에만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란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난 오츠키에는 독특한 모습을 한 다리가 계곡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원숭이 다리를 뜻하는 사루하시. 이 다리는 히라코라고 불렸던 백제인 지라호 부부가 가설한 나무다리다. 계곡물 위로 35m 높이에 설치된 사루하시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통한다.

 

 

이도학

"지금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데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이 다리는 원숭이 다리라고 부르고 있는 사루하시입니다. 사루하시는 백제인 히라코가 축조한 다리가 되겠는데 이 다리는 보시다시피 전혀 교각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목재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통해서 백제 사람들의 뛰어난 토목기술, 교량기술 등을 우리가 살필 수 있습니다."

 

 

교각을 사용하지 않고 지어진 독특한 다리 사루하시. 추고천황 대인 600년 경 백제인 지라호 부부가 이곳 계곡을 지나다가 원숭이들이 서로의 등을 타고 계곡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이 다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 현대의 기술을 그 당시에 어떻게 생각해 낼 수가 있었을까? 하지만 백제 인들은 웅진교나 사비 능산리 나무다리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삼국 중 가장 뛰어난 토목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1932년 명승지로 지정된 사루하시는 예부터 일본의 유명한 시인들이 그 아름다운 경치를 부르게 했던 곳이다. 지라호가 세운 최초의 사루하시는 전란으로 없어졌지만 이후 그 모습을 그대로 본 딴 다리를 다시 만들어 왔다. 그리고 지금의 다리는 지난 1984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야마나시의 깊은 계곡까지 제 이름을 새겨 놓은 지라호(志羅呼). 사루하시의 낡은 안내판에 남은 그의 이름 석자 외에는 더 이상 그의 자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렇듯 뛰어난 건축물을 남겼지만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백제 인이라는 사실이 일본인들을 그리 유쾌하게 하지는 않는 것인가? 일본의 문화를 심어준 백제 인들은 일본의 기록과 기억에 다가서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대 아스카 문화가 싹튼 곳 나라. 백제 문화가 전해졌던 이 일대에는 알려진 데로 고대 고분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그 무덤들 대 다수는 백제 고분의 구조를 따르고 있고 따라서 부장품 또한 백제 인들에 의해 일본에 들어온 백제 계통이다. 나라 현 텐리 시에 있는 호시즈카 고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굴 이후 지금은 놀이터가 조성돼 있는 호시즈카 고분은 6세기 초반의 무덤으로 밝혀졌는데 이곳에서 나온 유물에 일본 고고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그 유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텐리시 매장문화 연구소를 찾았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지 철저한 비공개로 연구되었는데 지난 1997년 8월에야 1차 연구가 마무리 되어 한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나타낸 것은 새의 발자국 무늬가 새겨져 있는 조족(鳥足) 무늬토기(호시즈카 고분 출토)였다.

 

 

이도학

"이 토기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백제하고 관련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문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즈미 다케시 / 텐리시 매장문화연구소

"이 조족무늬 토기는 텐리시 호시즈카고분에서 나왔는데 문양을 보면 새의 발자국 무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반도 특유의 토기무늬이기 때문에 분명히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후 일본에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이 이 토기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왔는지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 토기 문양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나온 새의 발자국 즉 조족무늬이기 때문이다. 조족무늬 토기는 백제에서 사용된 토기였다. 4세기 대에 백제고분 청주 신봉동 고분에서 나온 조족무늬 토기를 보면 마치 새가 토기 위를 지나간 것처럼 발자국 무늬가 잘 나타나 있다. 조족무늬토기는 백제 영토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전남 나주시 덕산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역시 조족무늬(※ 영산강 세력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나주 대형옹관의 미스터리, 고대 영산강에 왕국이 있었다 - 2001. 9. 22 역사스페셜 방영분을 참조하라.)였다. 백제에서 이 토기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일본 최초의 조족무늬토기가 6세기 대의 것으로 보면 그것이 어디로부터 흘러갔는지 자명해진다.

 

 

이처럼 명백한 백제계통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은 호시즈카 뿐만이 아니다. 오사카부 가시와라시 한 야산에서 발견된 다카이다야다(高井田山) 고분. 이 고분 역시 백제 영향을 받아 무덤에 통로를 내고 관을 안치하는 석실을 갖춘 횡혈식무덤이다. 이곳에선 청동다리미와 거울 같은 백제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돼 일본에서 활동하던 백제인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도학

"이곳은 바로 오사카부 가시와라시에 있는 다카이다야마 고분입니다. 이 고분의 구조는 백제중앙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의 구조를 고스란히 재현에 놓고 있습니다. 바로 5세기 말 이후에 나타난 무덤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 무덤 안에서는 백제와 관련 있는 중요한 유물이 나왔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이 두 점의 유물은 청동거울과 울두입니다. 이 두 유물은 방금 전에 보셨던 다타이다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특이 이 가운데 울두라고 하는 것은 백제 25대 무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울도하고 동일한 양식의 유물이 되겠습니다. 이걸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백제 인들이거나 또는 백제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고대에 있어서 청동다리미(울두)와 거울은 왕족이나 지배층 귀족이 묻힌 고분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다카이다야마 고분에 묻힌 인물은 분명 백제와 관계 깊은 지배계층일 것이다. 지난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에서는 묘비석과 금관 등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다리미가 있다. 원반 모양 몸체에 긴 손잡이가 달린 청동다리미의 모양은 일본 다카이다야마 고분의 것과 마치 같은 제품처럼 똑같다. 고고학계에서는 당시 압전 문화를 향유했던 백제 인이 일본에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곳곳에서 밝혀지는 백제 인들의 흔적을 일본인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소노 가미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처럼 역사를 조작하고 감추려는 일본 특유에 문화에 대한 피해의식일지 모른다.

 

 

369년 백제 근초고왕 대에 만든 칠지도는 일본의 왕에게 전해졌는데 그것이 하사인지 아니면 일본의 주장대로 헌사인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칠지도는 이소노가미 신궁 금족지 안에 작은 나무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동안, 그 누구의 발길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칠지도 속에 진실을 이렇듯 막아 놓은 곳은 아마도 1814년 이 신궁의 대궁사였던 칸 마사토모가 처음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고는 그 중 몇 자를 일본에 유리하도록 지워버렸다는 의혹이 120년 넘게 계속됐기 때문인 것이다.

 

 

후쿠다 호자부로 / 이소노 가미 신궁

"이소노가미 신궁은 일본의 보검을 간직해 온 곳입니다. 그리고 칠지도는 다른 보검과 마찬가지로 신으로 모셔져 섬기고 있는 성스러운 칼입니다. 따라서 그런 칠지도를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한반도 백제의 어떤 왕이 당시 일본의 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 헌상했거나 빌려준 것으로 아는데, 정확하게 어떤 목적으로 그 칼을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분명 ‘헌상’이라는 말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칠지도가 백제에서 헌상한 것이라면 구지 칠지도를 공개 못 할 이유가 있을까? 120년 칸 마사토모가 보았던 칠지도의 명문은 칼의 앞뒤에 상감된 61자의 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 내용은 ‘선세 이래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先世以來未有此刀)’. ‘백제왕 치세에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있어 왜왕을 위해 만든 것을 후세에 전해보아라(百濟王世 ○ 奇生聖音 故爲倭王旨 造傳○後世).’라는 문구다. 특이한 것은 백제왕의 말을 성음이라는 극존칭으로 표현한 점이다. 또 동서의 모든 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하사품으로 알려져 있으니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했다는 것이 타당하다. 더구나 4세기 말 백제는 한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일본에 따라올 수 없는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금족지의 자물쇠를 채운 이유가 아닐는지.

 

 

나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동대사를 찾았다. 지금은 한가로이 사슴들이 노닐고 일본에서도 가장 많이 관광객이 다녀가는 동대사는 백제왕 경복의 도움으로 완공된 사찰이다. 일본에서 불교문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성무천황이 창건한 당시 최대의 국가사찰인 동대사. 752년 완공된 동대사 금당은 높이가 50m, 폭이 무려 75m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다. 세계 최대의 금당에 걸맞게 이 안에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불상이 앉아있다. 15m 높이인 이 노사나불 위용은 당시 일본의 모든 국력을 동원한 결과인데, 747년부터 5년 동안 주조했다고 한다.

 

 

이도학

"제 옆으로 보이고 있는 불상은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금동불상입니다. 바로 노사나불 좌상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일본의 성무천황 대에 와서 이 동대사 금동불상에 대한 주조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을 쓸 황금이 부족하게 되어서 작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인 749년에 백제왕 경복이라고 하는 인물이 금광을 개발해서 거기에서 산출된 황금 900냥을 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불 작업이 마무리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불상에 칠해졌던 황금은 긴 세월에 사라졌지만 금빛으로 찬연했을 이 금동 노사나불은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말해줬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을 만들기 위해 자그마치 500회의 넘는 구리를 녹였고 황금 900냥으로 대불을 칠했다고 전한다. 이 황금 900냥을 바로 백제왕 경복이 성무천황에게 기증한 것인데 그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금광을 개발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왕 경복이 일본 최초로 금광을 개발한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일본 북부에 와쿠야였다.

 

 

미야기 현에 속한 와쿠야는 인구 2만에 전형적인 농촌이지만 백제왕 경복이 금광을 개발한 이후 지금까지도 최고의 금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와큐야에 있는 황금산이라는 뜻에 고가네야마. 이 산이 바로 백제왕 경복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황금을 캔 곳이다. 성무천황 대인 749년대의 일이었다. 이 산에 자리한 고가네야마 신사(황금산 신사)는 여기에서 황금이 나온 것을 기념해 세웠는데 일본의 100대 신사 중 하나이다. 원래 이 신사 터에는 백제왕 경복이 황금을 캔 후 세웠다는 거대한 석조 기념물이 있었지만 그 일부는 200년 전 이 신사가 지어지면서 주춧돌로 사용됐다고 한다. 동대사 대불에 칠할 황금이 없어 고민하던 성무천황에게 황금 900냥을 보낸 백제왕 경복. 그가 고가네야마에서 황금을 캔 최초의 금광은 찾을 수 없지만 고가네야마 신사 옆에는 경복이 사금을 채취했다는 작은 내가 흐리고 있다.

 

 

사사기 시게모토 / 미야기 현 문화재보호위원

"1200여 년 전 나라 동대사의 대불을 주조했는데 불상에 칠할 황금이 부족해 성무천황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백제왕 경복이 이 산에서 일본 최초로 900냥(13.6kg)의 황금을 캐내 나라 동대사로 보냈습니다. 그 책임자였던 백제왕 경복은 한반도에서 많은 백제출신 기술자들을 데려왔고 그들의 채금기술로 이 산과, 이 냇가에서 많은 황금을 채취했는데, 그 당시 일본에 없던 기술입니다. 백제왕 경복은 직접 기술자들을 지휘하면서 일본 최초의 금광산지를 만드는 활약을 했습니다. 백제왕 경복 덕분에 동대사 대불의 완성이라는 일본의 위업이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의자왕의 셋째 아들로 일본에 가 있던 부여 융의 증손자가 백제왕 경복이다. 그는 일본에서 백제왕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왕족으로 알려졌고 지금의 미야기와 아오모리 지역을 다스렸다고 전한다. 오늘 날에 도지사 같은 관직이었다. 속일본기에 실린 그에 대한 기록에는 경복은 의자왕의 후손이었고 성무천황의 총애를 받아 일본의 북쪽을 통치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3)

 

 

오하시 쇼지 / 와쿠야 정장

"天平 21년인 749년, 이곳 와쿠야에서 백제왕 경복이 일본 처음으로 금을 채취하자 이를 기뻐한 성무천황이 연호를 천평에서 보물을 보게 돼 기쁘다는 天平感寶로 바꿨습니다."

 

 

와쿠야에서는 백제왕 경복이 일본 최초로 황금을 캔 역사를 되새기는 기념관을 지난 1994년 건립했다. 그렇지만 백제왕 경복은 이곳에서 작고 초라한 인형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보다는 단순히 황금 산지를 알리는 기념관인 듯 했다. 이곳에서는 고가네야마 신사 주변에서 발견된 백제 연꽃무늬와당과 함께 동대사 대불을 주조할 때 생긴 불순물 덩어리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동대사 대불을 최초로 제련했을 나온 찌꺼기 중 일부라 한다. 백제왕 경복이 금광을 개발한 것은 당시 일본으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황금은 일본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가져왔고 그 윤택함으로 아스카 시대에 이어 헤이안 시대라는 새로운 시기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일본이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모든 동력을 동원해 주조했던 동대사 대불. 바로 백제왕 경복이 캐낸 황금으로 일본의 빛이 된 것이다. 일본열도 혼슈의 최북단인 아오모리 현. 이 지역은 경복이 지금의 미야기 현 일대와 함께 다스렸던 곳이다. 이 땅을 개척했던 그는 766년 69살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백제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의자왕의 후손 경복은 백제 땅이 아닌 일본에 다시 태어난 마지막 백제왕이었다.

 

 

먼 동쪽의 땅에서 패망국의 한을 접고 새로운 사람들의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이 향유했던 모든 것을 전해졌다. 규슈에서 아오모리까지 이어지는 백제 인들의 자취, 그것은 한낱 사라진 꿈이 아니었다. 그들의 꿈은 거대한 사찰로 남아 일본의 황모가 되어 때로는 작은 기와장의 모습으로 저마다 왕국 백제를 말하고 있었다. 백제문화가 전해진지 1500년이 지난 일본. 우리는 이 역사 기행을 통해 백제문화가 우월했음을 애써 강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일본에 있었다는 이유로 늘 우리 역사의 테두리 밖에 머물러야 했던 백제인들. 그들이 오래 전 이곳에 남긴 살아있던 역사를 오늘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이도학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려 내려가듯이 선진 백제문화는 일본 열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듯 이번 탐방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 인들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쿠오카에서부터 아오모리에 걸치는 기나긴 취재를 통해서 일본 문화의 뿌리는 백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 글의 저작권은 대전 MBC 문화방송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 주

1. 광인천황과 혼인해 환무천황(재위 781~806)을 낳고 황태후가 된 백제왕족출신의 여인.

2. 백제 ‘복신’장군의 아들로 671년 일본조정에서 학직두(교육부장관)에 오른 백제인 ‘귀실집사’를 모시는 신사.

3. 백제왕 경복의 선조는 백제국 의자왕으로부터 나왔다. 성품이 분명하고, 분별력이 있어, 정사를 맡아볼 도량이 있었다. 성무천황이 특별히 총애하고 대우하여 관직에 올랐다. 동대사 대불의 주조가 끝나고, 황금 900냥을 보내왔다. (속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