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알아볼까!!!/역사스페셜자료

행복지기 2010. 12. 11. 21:32

HD 역사스페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 프롤로그

 

 

지난 1991년, 국립 광주박물관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생김새가 매우 특이한 무덤이 있다는 제보였다. 박물관 측은 즉각 발굴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돌방의 벽면은 온통 붉게 칠해져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무덤 양식이었다. 독특한 형태의 무덤과 그 안에서 발굴된 예사롭지 않은 유물들, 이들은 한일 양국 역사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던졌다. 영산강 유역의 특이한 무덤 발견, 그것은 고대사를 둘러싼 한일 역사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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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의 수많은 유적 가운데 무덤은 그 형태가 쉽게 변하지 않을뿐더러 그 안에는 많은 유물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무덤 즉, 고분은 한 시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이죠. 오늘은 독특한 고분과 그것을 둘러싼 한일양국 간의 역사전쟁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제 뒤로 보이는 저 언덕, 얼핏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난 산처럼 보입니다만 저것이 바로 한일 고대사에 커다란 파장을 던진 전라남도 함평의 신덕 고분입니다. 길이 50여 미터, 높이 10여 미터의 만만치 않은 크기인데요, 그 형태가 아주 독특합니다. 위에서 본 모습입니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모양인데요. 두 개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의 무덤입니다. 생김새가 아라비아 숫자 8자 같기도 하고 또 전통 악기인 장고 같기도 한 매우 특이한 형태의 무덤입니다. 이런 행태의 무덤은 우리나라에선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무덤의 국적을 둘러싸고 한일양국의 역사학계에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전남 함평의 평범한 농촌 마을, 마을 이름이 여느 마을과는 달리 독특한데, 이름의 유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한다.

 

 

홍인후 할아버지

"언제부터인지 확실히는 몰라도 좌우간 임진왜란 전이라고 해요. 옛날 어른들 말씀이, 임진왜란 전에 생겼다 이 동네가. 긴 장(長)자, 예 고(古) 장고산. 근데 그 전에는 북 고(鼓)자를 썻어, 옛날에는."

김영기 할아버지

"아 저 것 때문에 그래. 저 산이 왜요? 저게 장구, 꼭 장구처럼 생겼거든, 가운데가 짧지만. 그러니 전래해서 오느니 전에 어른들이 (마을 이름을) 그렇게 지은 모양이야..."

 

 

 

마을 앞의 낮은 산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장고산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이 무덤을 단순한 산으로 여겨왔다. 그러다가 지난 1991년, 우연한 계기에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이석혁 원장 / 함평문화원

"그때가 석양인데 지금 저 뒤에 나무가 지금 있는데 나무 사이로 윤곽이 나타났습니다. 틀림없는 고분처럼 보였습니다."

 

 

 

발견자는 이를 제보했고 광주박물관은 실측에 나섰다. 그리고 그것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고대 무덤, 즉 고분으로 공식 판명되었다. 두 봉분 사이는 41m, 전체 길이는 70m에 달하는 대형 무덤이었다. 무덤은 특이한 모양 때문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아라비아 숫자 8자와 같다고 해서 8자형 무덤, 혹은 열쇠 구멍형 무덤으로 불리웠으며 드물게 땅콩형 무덤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이와 유사한 형태의 무덤들이 전남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전남 해남의 북일면, 이곳의 옛 지명도 장고산이었다. 이후 이런 형태의 무덤은 ‘장고형 무덤’으로 굳어져 갔다.

 

 

해남의 장고형 무덤은 최초로 학계에 공식 보고 되었다. 그리고 그 보고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공식 측량 결과, 이 무덤은 일본 고유의 양식인 이른바 전방후원분과 같은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강인구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무덤의 분구 형태가 일본에 있는 전방후원분하고 모양이 같다는 게 가장 큰 거죠. 그 다음에 전방후원분의 무덤들은 대개 하천이나 또는 해안 가까이 존재한다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일본 또한 전방후원분에 입지조건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현재 전남 지역에는 이런 무덤이 모두 14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닮은 것이다. 두 무덤을 비교해보면 닮은꼴이 확연해진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은 형태를 보인다. 일본 천황가의 무덤이자 고대 일본문화의 상징인 전방후원분.

 

 

 

한국에서 그와 유사한 무덤이 발견되자 일본의 언론들이 열광했다. 그 반응과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일본은 전방후원분을 고대사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즉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정권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정권의 성립과 지배 영역 확대의 지표라는 것이 일본학계의 정설이다.

 

 

오다 후지오 명예교수 / 후쿠오카 대학

"야마토 정권 아래에서 전방후원분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크기가 매우 커지고, 그 안에 돌을 쌓아 방을 만들거나, 수많은 거울을 함께 넣거나 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야마토 정권은 이러한 고분(전방후원분)의 양식을 완성한 다음, 그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지방의 귀족들에게도 이 고분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러한 대형 전방후원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이 존재해야 하며, 그 실체가 바로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이 전 일본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방후원분도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한반도의 장고형 무덤, 만약 이것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성락 교수 /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한국의 그대로 들어왔다고 전제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산강 유역에 나타난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방후원형 고분이 아닌 고분에 비해서 규모가 크고 또 넓게 퍼져 있는데요, 그것을 만약에 왜인의 무덤이다, 이렇게 인정한다면 어떻게 보면 영산 유역의 짧은 시간동안 일본세력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라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는 입장이 되는 거죠."

 

 

한반도의 장고형 무덤이 던진 파장의 핵심, 그것은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일본인이며 따라서 어느 한 시기,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 지역을 지배했거나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가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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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고형 무덤은 일본의 전방후원분인가?

 

 

네, 일본이 전방후원분에 열광하는 이유, 그것은 일본 고대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적 의미까지 있기 때문이군요. 그렇다면 우리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고분과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과연 같은 것일까요. 자, 이것이 일본이 자랑하는 인덕천황릉입니다. 일본에서는 앞은 사각형, 뒤는 원형이라 하여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고 하는데요. 전방후원분이라는 말은 19세기 일본의 한 사학자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 무덤을 고대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만들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남 함평에 있는 신덕 고분입니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형태의 무덤을 ‘장고형 무덤’이라고 하는데요. 규모는 차이가 납니다만 어쨌든 두 무덤의 형태는 닮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무덤은 한일 간 뜨거운 역사 전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네 이것은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중 하나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4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任那)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고대 일본인이라며 자신들의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대 무덤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가 첨예하게 맞섰던 곳(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동 고분)이 있다. 지금은 모든 발굴조사와 복원이 끝나 세 개의 뚜렷한 봉분을 보이는 경남 고성의 송학동 고분. 일본은 전방후원분과 관련하여 이 무덤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발굴 전의 송학동 무덤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매우 흡사했다. 형태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와 유물들도 주목을 끌었다. 벽면이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진 돌방, 이런 붉은 칠은 일본의 무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었다. 출토된 토기 중 일부 역시 왜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송학동 무덤은 원래 세 개의 봉분이었는데 두 개가 도굴로 주저앉으면서 전방후원분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들은 3개의 봉분을 가진 가야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심봉근 교수 / 동아대 고고미술학부(송학동 고분 발굴)

"전방후원분이라고 했을 때는 왼쪽에 있는 것과 가운데 있는 고분이 도굴이 되어서 삭평(削平 : 깎여서 평탄해짐)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전방후원분 같이 보였습니다만..."

 

 

 

 

고성은 옛 가야 지역, 일본은 이 지역의 무덤에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영산강 유역까지 확대외어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발굴에 매달려 왔다. 그리하여 일부 발굴에서는 무덤의 주인이 고대 일본인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무덤에서 발견된 일부 유물이 그 근거였다.

 

 

강인구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중에서도 특징인 유물은 사슴뿔, 뿔을 조각해서 만든 칼자루가 있습니다. 그 칼자루에 문양을 새겼는데 일본 고분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경주라든지 다른 지역에서 고분을 파도 그런 유물은 잘 나오지를 않는데 그게 거기서 나오니까 야츠이 라는 사람은 아, 이건 일본의 특징적인 유물이라까 일본 사람이 와서 묻혔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을 한 것이고..."

 

 

 

 

그로부터 80여 년이 흐른 지난 1994년, 잠잠하던 임나일본부설에 또 다시 불을 지핀 무덤이 광주 명화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그 형태로 보아 완연한 전방후원분이었다. 특히 일본 학계를 흥분시킨 것은 출토된 유물, 봉분 주위를 따라 배치된 원통형 토기였다. 장례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토기는 몸체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분 주위에서 발견된 이러한 토기는 일본 전방후원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하니와와 닮은 토기가 발견되자 일본은 광주 명화동 무덤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 또한 일본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굴에 보인 일본의 관심은 가히 열광 그 자체였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채택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박중환 학예연구실장 / 국립공주박물관 (명화동 고분 발굴)

"정부의 최고위층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해명기사를 내라고 그런데 이것은 저널에 해명기사를 내는 그런 내용은 아닌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유적이 형성되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실은 진지하게 성찰하고 오히려 비정치적으로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들인데 이렇게 일본 내에서도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또 그 내용에 대해서 반작용으로 우리나라 정부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뭔가 그 내용이 아니라고 부인을 해야 하는..."

 

 

그렇다면 일본학계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방후원분 연구의 권위자를 만났다.

 

 

모리 고이찌 명예교수 / 동지사 대학

"당시 일본은 중국과도 많은 관계, 즉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배로 중국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종의 일본 현지 무역 사무소 같은 곳을 한반도의 서해안에 설치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각 세력이 중국과 교류할 때 영산강 유역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고, 식량보급과 통역 등을 맡은 일본인들이 전남 지역에 세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이 내세운 기록, 기록에 보이는 모한은 당시 백제의 영향력 밖에 있던 영산강 유역의 독자세력이며, 이 세력이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모리 고이찌 명예교수 / 동지사 대학

"그러므로 당시 '전라남도가 백제의 영토였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경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완전히 백제 영토가 된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즉, 이 지역에서 전방후원분이 사라지기 시작한 후라고 생각합니다."

 

 

영산강 유역이 한때 일본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라는 인식은 일본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조차 전남 지역이 이른바 임나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 일부 일본인 학자까지 우려를 하고 있다.

 

 

 

“512년에... 가라의 4현...”

 

아즈마 우시오 교수 / 도쿠시마 대학

"(이런 내용은)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일본의 사학자, 고고학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저 자신은 이런 입장에 반대하면서 진정한 한일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겐 여전히 이런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일본은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을 근거로 고대 일본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모든 교과서에 실려 일본 사회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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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고형 무덤의 주인은 일본인인가?

 

 

네, 우리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일본세력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더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이 하나 같이 이를 기정사실로 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함평의 신덕고분입니다. 무덤의 주인을 안치했던 돌방 안인데요.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벽면의 색깔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돌방 내부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붉은 칠을 한 돌방, 이는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 양식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전남 지역이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데요, 과연 무덤의 양식만으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은 그들의 주장처럼 영산강 유역을 지배했던 고대 일본인일까요?

 

 

 

장고형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이 민감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는 무덤은 현재 전남 함평의 신덕고분 뿐이다. 대부분의 장고형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된 상태, 신덕고분에서만 몇몇 의미 있는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신덕고분에 출토된 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상당히 크네요.”

 

 

 

신덕고분에서 나온 유물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대도(大刀 : 정확히 길이는 110.4cm), 길이 110cm의 이 칼은 한반도 칼의 평균 길이보다 무려 20cm가 긴 일본 칼이다. 당시 한반도의 주력 무기는 창이었다. 따라서 무덤의 피장자는 왜계 무장세력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와는 다른 성격의 유물도 대량 출토되었는데 다양한 장신구들이 바로 그것이다. 목걸이 팔찌 등 이들 장신구는 백제계 유물로 분류되었다. 즉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백제의 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유물로 보면 피장자는 백제인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박중환 학예연구실장

"저는 절대로 그 고분에 묻힌 피장자들이 일본사람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심지어 일본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이 되고 더더구나 어떤 기간이든 왜계집단이 정착하면서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유적 복합세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견된 것이 없거든요."

 

 

 

또 하나 중요한 유물은 금동관 조각, 이는 이 무덤의 주인과 백제 왕실과의 관계를 암시해주는데 바로 백제의 왕실에서 이 무덤의 주인에게 하사한 하사품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유물을 지녔던 장고형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박천수 교수 /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신덕고분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 축조집단들은 왜계 무장 세력이면서 백제와 관계 깊었던 집단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세력은 일본서기에 보이는 왜계 백제관료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왜계 백제 관료는 과연 누구일까? 일본서기에느 장고형 무덤의 주인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나온다. 즉 기씨, 시나노 등 일본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이들의 관직이 모두 백제의 벼슬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식 성을 갖고 백제의 벼슬을 한 이들, 주보돈 교수는 이들이 백제를 위해 대외교역 창구 역할을 한 왜계 백제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주보돈 교수 / 경북대 사학과

"최고위급의 귀족들은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저희들은 중급귀족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세력들은 대체적으로 보면 왜와의 그런 교섭활동, 외교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4, 5세기부터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오늘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성장한 야마토 정권의 중심부까지 진출, 그 세력을 떨쳤다. 그 흔적을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백제왕의 신사도 있다. 지금도 건재한 백제 사찰 역시 이곳이 고대 백제인들이 주 활동 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융성했던 백제 세력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와카야마 시, 고대 일본의 중심이었던 나라와 오사카에 이웃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했던 세력은 기씨였다. 이들 기씨가 바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기(紀)씨, 즉 왜계 백제관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백제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까? 취재진은 이 지역의 수장급 무덤을 찾았다. 무덤 내부는 눈에 익은 모습이다. 통로로 사용되는 기다란 굴이 있고, 그 굴의 끝에 관을 안치했던 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무덤은 굴식돌방무덤. 전형적인 백제 무덤 양식이다.

 

 

야마모토 다카아키 / 와카야마현 역사박물관

"이와세센츠카 고분군에는 430개의 고분들이 있는데요. 그 중 반 이상이 이와 같은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 무덤)입니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한반도, 그 중에서도 백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 무덤에서는 주목할 만한 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발굴된 토기들은 대부분 한반도 계열로 드러났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특징을 가진 토기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백제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기와는 이들이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계열일거라는 추정도 가능케 해준다.

 

 

야마모토 다카아키 / 와가야마현 역사박물관

"이와세센츠카 고분군의 집단은 '급사(給仕)' 집단이었습니다. 급사(심부름꾼) 역할을 한 셈이지요. 한반도와 야마토 정권 사이의 중개자 역할, 즉 교섭을 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대외적인 창구로서의 비중이 매우 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곳 와카야마는 일본에 거주하던 왜계 백제관료들의 역할을 설명해주는 곳이 있다. 고야산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품종의 나무인 금송이 자라고 있다. 바로 이 나무가 이곳의 왜계 백제관료와 본국 백제와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키무라 다카히토 / 와카야마현 삼림관리서

"이 고야산 금송은 옛날부터 귀중한 나무로 여겨져 황족(皇族)의 목관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고야산의 금송이 백제 무녕왕의 관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백제왕에게 이 지역의 특산품을 바쳤을까? 단순한 교류의 차원을 넘어 백제와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왜계 백제관료가 교류 창구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역이 있다. 또 다른 왜계 백제관료인 시나노(科野) 씨, 이들의 본거지였던 나가노현을 찾았다. 나가노의 옛이름은 시나노, 즉 시나노 씨들의 본거지인 것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일본의 유명한 말 생산지였다. 일본의 국가 체제가 정비된 후에는 군에서 사용하는 군마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전역에서 발견되는 말 유적은 40여 개인데 그 중에서 20개가 바로 이 지역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곳의 말 사육기술은 일본의 자생기술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정설이다. 또한 이 지역과 백제와의 특수성을 말해주는 놀라운 발굴도 있었다. 말 유적지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의 무덤, 이 무덤에서는 인골이 한 구 수습되었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이 인골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고바야시 마사하루 과장 / 이이다시 교육위원회

"이 유해에 대해서는 교토 대학의 영장류 연구팀의 스기하라 선생 팀의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의 형질을 띄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50세 전후의 성인남성으로 판단되는데요."

 

 

이들은 백제의 선진기술을 들여와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이들과 백제의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때 기록에 따르면 일본은 백제에 조직적인 군사 원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김현구 교수 / 고려대 역사교육과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된 뒤에 자기들이 필요한 선진문물들을 얻기 위해서 그 자녀들을 백제에 보내서 벼슬을 시켰고 따라서 백제에서 필요한 선진문물들을 얻어가면서 백제가 요구하는 군사원조를 하는 이런 관계였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왜계 백제관료는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호족으로 성장했다. 성장한 후에는 말과 병력, 군수품 등을 백제의 필요에 의해 다시 제공했다. 즉 왜계 백제관료는 백제의 이익을 위해 활약한 사람들인 것이다. 장고형 무덤의 주인은 백제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도 일본식 무덤 양식을 사용했다. 이들은 백제를 위해 활약한 한반도계의 도래인, 즉 왜계 백제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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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장고형 무덤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나오는가?

 

 

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틀림없이, 이른바 왜계 백제 관료(왜인의 성씨를 가진 백제의 관료)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든, 그가 백제의 뜻에 의해, 백제를 위해 일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지도를 볼까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확인된 장고형 무덤은 모두 14개, 모두가 예외 없이 영산강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왜 당시 백제의 중심이던 부여나 공주가 아닐까요? 또 당시 영산강 세력의 중심은 지금의 나주시 부근이었는데요, 장고형은 여기서도 중심이 아닌 나주의 외곽에, 그것도 띄엄띄엄 단독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어째서 장고형 무덤은 이런 분포를 보이는 것일까요? 1500여 년 전, 영산강 유역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전남 나주의 반남면에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형무덤군(신촌리 고분)이 존재한다. 이들 중에는 백제의 왕 무덤보다 더 큰 것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매장전용 옹관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화려한 금동관(신촌리 9호분 출토)을 갖고 있었다. 바로 백제의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동신발(신촌리 9호분 출토) 환두대도(신촌리 9호분 출토) 등의 유물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정호 박물관장 / 동신대 문화박물관

"고분내부에 옹관을 사용한다 하는 특징은 백제와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그것은 이 지역에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얘기죠. 그런데 그 옹관 내부에서 금동관이라든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 됐습니다. 상당한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입니다."

 

 

백제와 다른 독자적 세력을 가졌던 이들, 그 세력의 배경은 무엇일까? 영산포에는 그 배경을 가늠케 해주는 현장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수로 등대가 그것이다.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등대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김경수 소장 / 향토지리연구소

"다양한 배 즉 범선, 증기선, 발동선 1960년까지는 중선배라고 해서 20톤에서 30톤 되는 많은 배들이 저쪽의 흑산도 근처에서 들어와서 지금도 보시면 알겠지만 홍어, 지금도 홍해촌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먼 바다로부터 곧장 육지 안쪽으로 배가 들어올 수 있었던 곳, 영산강은 고대로부터 내륙 수로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나아가 대외 교류의 중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영산강 유역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대외 교류가 활발했다. 그것을 말해주는 유물이 아직도 발견되고 있다. 2000여 년 전, 중국 신나라 시대의 화폐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영산강 유역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최성락 교수 /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이것은 바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서부 남부를 거쳐서 일본에 이르는 해로가 형성됐다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 교역로, 영산강 유역은 바로 그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였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는 일본의 후쿠오카,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고대로부터 영산강 유력과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후쿠오카의 마루쿠야마 고분, 입구에 들어서자 돌을 쌓아 만든 길다란 굴이 나타난다. 그리고 끝에 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백제식 무덤 양식인 것이다.

 

 

구라후지 히로시 /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

"이 횡혈식 석실(굴식 돌방 무덤)의 특징은 이와 같이 얇은 돌을 쌓아올려 벽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돌을 이렇게 안쪽으로 들여쌓는 것도 특징입니다. 천정에 대해 말씀드리면 천정은 이와 같이 큰 돌로 평평하게 쌓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횡혈식 석실(굴식 돌방 무덤)을 저희들은 북규슈형 석실이라고 부릅니다. 규규의 북부 지방에서 보이는 매우 특별한 횡혈식 석실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무덤은 영산강 유역의 그것과 더 닮아 있다. 즉 돌방의 윗면이 좁아지는 특징을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돌방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도 이 지역과 영산강 유역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야모토 가즈오 교수 / 규슈대학 인문학연구원

"이것이 (후코오카현) 반츠카 고분에서 출토된 조족문(鳥足紋) 토기입니다. 이 부분에 새의 발 모양이 보입니다. 이 토기는 시기가 조금 늦은 6세기 때의 것인데요. (조족문 토기는) 주로 전라남도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이 토기도) 전라남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토기들은 백제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전파되기 이전, 영산강 유역의 문화가 먼저 건너간 것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토기 겉면의 새 발자국 문양이 눈길을 끄는데 영산강 유역의 토기에서도 같은 문양이 보인다. 북규슈 토기와 영산강 토기의 새 발자국 문양, 마치 한 마리가 밟고 지나간 듯 닮아 있다.

 

 

박중환 학예연구실장

"이것들은 전부 다 백제계 토기로 이해해 왔었죠. 그렇지만 한반도 내에서 그러한 토기의 연구에 의해서 이것은 백제중심세력이 남하하기 이전에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형성돼 있었던 선조토착세력 즉 마한세력에 독특한 그러한 문화적인 양상이라는 하는 게 알려지게 된 것이죠."

 

 

 

토기와 굴식돌방무덤의 분포를 보면 영산강 유역이 일본 북규슈와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윤명철 교수 / 동국대, 해양문화연구소장

"해양세력은 곧 단순하게 고대뿐만 아니라 전근대시대까지도 주로 무정보성과 호족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중앙정부에 지배를 상대적으로 덜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점지역을 확보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강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형식상으로는 중앙정부와 주종의 관계를 이룰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로부터 벗어나 있던 영산강 유역 세력, 이들은 독자적으로 일본과 교류를 할 만큼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장악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 전부터 백제는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백제는 밀리기 시작했다.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잇따른 왕들의 피살로 백제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다(475년 한성 함락, 웅진[공주]천도, 478년 문주왕 제위 4년 만에 피살, 480년 삼근왕 제위 2년 만에 사망).

 

 

박천수 교수 /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당시 475년 백제는 일단 멸망했다고 봐야 합니다. 멸망해서 거의 문주왕이 쫓겨서 내려와서 공주의 새로운 수도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고구려 군이 공주 바로 부근까지 청원, 대전까지 고구려 군이 쳐들어오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시 백제가 왜의 원군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이는 백제의 대안은 영산강 유역, 그러나 백제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백제가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즉 동성왕이 일본에서 무장 세력을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 주보돈 교수는 이들 무장 세력 중 일부가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됐을 거라고 추정한다. 즉 백제는 왜계 무장 세력을 영산강 세력을 견제하는데 투입했고, 이들의 장고형 무덤이 생기면서 영산강 세력이 퇴조했다는 것이다.

 

 

주보돈 교수

"그 외곽지대에 전방후원분을 축조하는 세력을 이제 배치를 시켜가지고 여러 세력이 서로 공존해 가지고 대립, 갈등하게 하는 그런 구조를 통해서 간접지배를 해나가는 겁니다."

 

 

 

외부 세력을 통해 영산강을 견제, 마침내 복속시켜려고 했던 백제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나주의 복암리 고분(복암리 3호분)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이 고분은 옹관부터 백제식 묘제까지 한꺼번에 보여준다. 맨 아래 층에는 옹관묘가 있고 그 위에는 돌방무덤이 나온다. 그리고 맨 상층부는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이 나타나는데 이는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말해준다. 금동신발의 출토는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 해준다. 즉 이 신발은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후 백제의 왕실이 영산강 세력에게 내렸던 하사품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백제계 왜인 세력을 끌어들여 점차 영산강 지역을 장악해 나갔고 바로 그 과정에서 장고형 무덤이 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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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고형은 일제인가?

 

 

무덤은 그 민족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집트 투탄카멘왕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 등은 그대로 그들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일본은 장고형 무덤을 임나일본부설의 강력한 증거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 고유의 양식이라는 것인데요,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중국 하남성에 있는 타호정 고분입니다. 3세기 후반의 이 지역 귀족의 무덤인데요. 이 무덤을 이렇게 위에서 보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모습이 비슷합니다. 동그라미 두 개가 합쳐진 것이 틀림없는 전방후원분처럼 보입니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한반도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의 압록 강변 자강도에 있는 돌무지무덤, 즉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요. 동그란 무덤에 네모난 제단이 붙어 있는 것이 일본의 것과 닮았습니다.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런 무덤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무덤들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전방후원분이 일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자, 일본의 자랑, 전방후원분, 그것은 과연 100% 일본산일까요?

 

 

 

아파트 숲 사이에 섬처럼 남아 있는 영산강 장고형 무덤, 영산강 장고형 무덤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무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주구(周溝), 즉 도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일본 전방후원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덕천황릉의 주구는 호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런 주구는 전방후원분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른 시기의 주구가 나타나는 히라바루 유적, 사각형의 봉분 주위로 도랑이 둘러싸고 있어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 : 도랑이 둘러져 있는 네모 모양 무덤)라 불린다.

 

 

고카베히로토시 / 마에바라시 교육위원회

“왕의 묘를 둘러싸듯이 폭 2m 정도의 도랑이 주위에 둘러져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보시는 것처럼 저쪽으로요. 이쪽에는 왕의 묘의 분구(墳丘)가 있습니다. 분구는 높이가 약 2m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뚜렷한 형태를 보여주던 주구, 일본은 이 사각형의 주구묘가 바로 전방후원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오다 후지오 명예교수 / 후쿠오카 대학

"방형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이 발전하지요. 이것은 야요이시대 후반(3세기 후반)에는 관동지역에서 규슈 지역에 걸쳐 폭 넓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방후원분은 처음에는 이 묘(방형주구묘)에 만드는 일종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이 몇 개씩 함께 생기면서 발전한 것입니다."

 

 

즉 주구의 일부가 끊기고 만들어진 길이 확장되어 발달된 것이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전방후원분을 일본 고유의 무덤 양식이라고 자랑한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강인구 명예교수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 학자들이 한반도를 비롯해서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일본에 있는 전방후원분 같은 것이 한반도와 중국에도 있나 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찾았습니다. 찾았는데 그 사람들 눈에는 한반도에서도 전혀 발견을 하지 못하고 중국대륙에서도 전혀 발견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갖게 됐죠. 이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 형태는 일본 고유의 무덤 형태고 이것은 일본열도에서 자생해서 일본에서만 발전한 무덤의 형식이라고..."

 

 

그러나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우리 학계의 반박도 만만찮다. 강인구 교수는 중국, 한반도, 일본으로 흐르던 고대 문화의 흐름으로 보아 일본 학계의 주장은 타당치 않다고 한다.

 

 

강인구 교수

"일본의 고분문화라고 하는 것은 일본 속에서 자생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전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이지요. 그런데 하필 전방후원분만 거기서 독창적으로 그것만 크게 일어났느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주구묘가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한반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의 발굴 현장, 곳곳에 깊게 파인 주구가 목격된다. 모두가 봉분을 둘러싼 형태를 보인다. 그리고 주구 안에는 장례의식에 사용된 토기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은 무덤의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김승옥 교수 /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두형(豆形) 토기라는 것이 이 부분이 이렇게 날렵하게 동그란 형태를 두형토기라고 합니다. 이 두형토기와 함께 바닥 전면에서 원형점토대 토기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주구묘의 상한연대가 최소한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3세기 까지 소급해서 올려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 되겠습니다."

 

 

 

일본이 그들만의 것이라 주장하는 주구, 그것은 당시의 매장 양식으로 보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지상에 관을 놓고 그 관을 덮을 흙을 모으는 과정에서 주구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자연스런 현상을 두고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의 무덤에서는 주구의 크기가 대형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변의 최대 길이는 40m, 전체 둘레가 100m에 이르는 초대형 주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초대형 무덤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영철 연구실장 / 호남문화재연구원

"영산강 유역의 고대묘제는 무덤을 만드는데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장을 한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고분의 경우도 저희들이 조사를 해보니 최초에는 약 20m 정도의 규모를 가진 주구를 가지고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아래쪽으로 보시면 저 넓어지는 부분을 확장을 해 가지고 마지막 길이가 약 40m에 가깝게 최종적으로 완성이 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의 주구묘를 능가하는 무덤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고대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한반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주구묘들이 발견되고 있다. 무덤의 크기도 클 뿐 아니라 형태도 사각형, 삼각형, 원형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최성락 교수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다양한 주구묘들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시원이 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즉 원형과 사다리꼴이 합쳐지면 그것이 바로 전방후원분과 같은 모양이 된다는 것이다.

 

 

최성락 교수

"주구묘의 형태가 2m 방형 뿐 아니고 원형, 타원형이라든지 사다리꼴 형태도 있고 또 다른 고분원형 형태가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전방후원형의 형태를 띨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또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1996년, 충남 보령(주교면 관창리)에서는 일본 역사학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발굴이 있었다.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주구묘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주구묘보다 최소 100년 이상 앞선 시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 언론은 헬기까지 띄워 발굴현장을 취재했다.

 

 

“저는 지금 한국의 고분 발굴 현장 상공에 있습니다.”

 

 

방형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발달했다는 일본 독자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홍종 교수 /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보령 관창리 유적 발굴)

"독자적인 무덤이라는 것을 주장한 학자께서 와서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아 이게 2,30년 동안 공부, 연구해온 그 성과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듯 한 그래서 어떤 상당히 가슴이 아프다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전방후원분, 독자 발생설을 주장하며 일본 고대문화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여기던 전방후원분, 그것의 기원이 한반도일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영산강 장고형 무덤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치열한 역사전쟁, 그러나 그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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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고형 무덤이 웅변하는 것

 

오늘 우리는 영산강 지역의 장고형 고분이라는 아주 독특한 무덤에 얽힌 비밀을 추적해 봤습니다. 장고형 고분을 둘러싼 한일 간의 역사전쟁도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이 무덤이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대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무덤의 기원이 일본이 아닌 한반도일 가능성도 확인했습니다.

 

 

저 무덤의 주인은 일본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관을 쓴, 백제의 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본까지 아우르던 대제국 백제의 위용을 웅변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일 역사전쟁의 핵심인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 그 비밀이 낱낱이 밝혀지는 날, 일본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된 한일 고대사의 물줄기는 바로 잡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 저작권은 KBS HD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No. no. no.

 

 

감사합니다~
네,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행복하세요.
우연히 유튜브YOUTUVE 동영상으로 보았는데..정리를 알기수비게 잘해놓은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전방후원분은 일본학자의 작명이고,

장고무덤은 이것을 본뜬 우리나라 교수의 작명입니다.

우리 고유의 이름은 통뫼, 또는 통뫼산이라고 합니다.

통뫼의 뜻은 온통 뫼 즉 하나의 무덤이란 뜻이지요.

즉 전방후원분이나 장고무덤이라고 하지말고 "통뫼" 라고 합시다.

통뫼는 우리고유의 무덤의 형태입니다.

일반 산소의 앞 상돌을 흙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 해 봅시다.

틀림없는 전방 후원분이고,

둘레의 활개석 밖의 도랑은 해자의 축소판 이지요.

즉 우리나라의 모든 무덤은 바로 전방후원분의 형태이고 ,

전국적으로 수천만기의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며,

현재도 그형태로 무덤을 계속 만들고 있으니,

갈수록 그 숫자는 늘어 날 것입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 의 주인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지배하기위해 간 분들의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본을 지배한 흔적이 됩니다.​

http://blog.naver.com/333222s/220328204111?copen=1&focusingCommentNo=13603062
전방후원분은 일본묘제입니다.

일본의것이 한국보다 2세기 앞서요. 주구묘나 분구묘는 한국묘제구요.

서로 다릅니다.
한국의 주구묘나 분구묘 같은 장고형 무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방후원분으로 독자적으로 발전해서 다시 한국으로 온겁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 한국은 5세기~6세기 입니다. 일본이 2세기 더 빠릅니다.

한국식 묘제들이 2세기부터 서일본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3세기 중엽에 전방후원분이 탄생합니다.

전방후원분은 일본 천황과 천황을 따르는 무사들의 무덤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전라도에 4개의 현을 두어 다스렸다고 나옵니다. 전라도에서 전방후원분이 그래서 나오는겁니다.

또한 가야는 임나로 나옵니다. 그래서 가야가 있던 김해,고령에서 일본천황의 위신재인 파형동기가 나오는겁니다.

글이 수정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주구묘,분구묘=한국묘제 // 전방후원분=일본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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