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새칼럼

새시대새청년 2008. 11. 24. 14:52

신앙인이란 신이 주신 글을 쫓아 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신서(神書)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신앙의 바른 길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모르고도 고집부리며 간다면 그 길은 하나님이 정한 길이 아닌 곁길이며 다른 길이니 신앙인으로서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앙의 목적은 영생(요일 5:13)이라고 성경은 못 박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몰라 하나님이 정한 길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생이 아닌 사망 길을 열심히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 성경은 신앙인에게 셋도 아닌 오직 둘 즉, 생명 길과 사망 길을 앞에 두었으니 살기 위해선 생명을 택하라(신 30:19)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명은 말씀 안에 있다(요 1:4) 하고, 또 하나님이 말씀(요 1:1)이고 진리(요 17:17)라 하며,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라고 하시니 생명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음이 틀림없다. 결국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 했으니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을 알아야 그 분의 뜻대로 신앙을 하며 약속된 소망 즉, 영생의 복에 참예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참 하나님’이라 했을까. 이유는 거짓 하나님이 많기에 참 하나님 즉, 진리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마11:27)”

라고 증거 하는 걸 보아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초림의 아들 예수, 또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 받는 자, 이 두 사람 외는 분명 하나님을 아는 자는 없다고 성경은 단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아들’은 누구나 아는 것이고, 문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 받는 자’는 누구일까가 관건이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는 예수이니 곧 예수의 이름으로 온다는 뜻이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으나 하나님의 “너는 여호와의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다(사 62:2)”는 예언이 성취되는 여호와의 새 이름은 ‘예수(눅 1:31)’였다. 신약에서 ‘여호와’라는 표현이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즉,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인 예수를 성전(요 2:19)삼아 함께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즉, 영은 육을 들어 역사하는 이 한 가지를 정확히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 59:21)”와 같이 신(영)과 말과 육은 함께 역사하는 영적이치를 깨달아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초림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으니, 하나님의 새 이름이 ‘예수’가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일컬으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예수 위에 새 이름을 새기듯이, 예수도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 후 영(고후 3:17)으로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예수의 새 이름을 흰 돌 위에 새기고 돌과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초림 예수님은 육으로 왔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영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새 이름이 새겨진 돌’은 어떻게 찾아가야 하겠는가. 신앙인으로서 기필코 찾아야 하는 이유는 그 흰 돌에는 ‘감추었던 만나’ 즉, 오늘날 영생의 양식, 예수가 받았던 철장 즉, 심판권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 등으로 초림 예수가 ‘돌’에 비유 되었듯이, 예수의 새 이름이 새겨진 돌 또한 예수가 오늘날 택해 함께 재림의 역사를 완성할 목자를 일컫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길로 삼아, 그 길을 걸어가라고 주신 게 바로 성경이며 道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는 아들 예수와 함께 하셨으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니라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게 아닌가. 오늘날도 예수의 영이 함께하는 ‘흰 돌’을 찾는 길만이 재림하신 예수를 영접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또 신앙의 목적인 영생의 소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한 가지 진리를 깨닫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실 것이다. 또 그것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표가 됨을 잊지 말자.

 

   http://cafe.daum.net/scjj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