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새칼럼

새시대새청년 2008. 12. 15. 11:03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선지사도들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예언들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를 통한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사 42:19)”는 예언은 “소경된 인도자여…(마 23:24)” “소경된 바리새인아…(마  23:26)”라고 예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정체를 밝힘으로 이사야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즉,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와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소경과 귀머거리로 만들어 깨닫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비유(마 13:13)였다. 심지어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았다(마 13:34)고 할 정도로 이미 완악해진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눈과 귀를 비유라는 방법을 들어 깨닫지 못하게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향하여는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고 하시니, 이는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막 4:34)해 주시므로 보고 들을 수 있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보고 들은 자들은 ‘너희’라는 제자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하고 하늘나라에 가 있으니 이 땅엔 하늘의 뜻을 아는 자가 없고, 있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듯 거짓말쟁이고 속이는 자가 된다. 구약이 예언하기로도 선지자의 눈은 감기셨고, 선견자의 머리는 덮으셨다(사 29:10)고 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를 일컬음이다.

 

신약 또한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계 5:3)”고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하나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가 소경과 귀머거리가 된 줄을 즉, 내가 소경이요 귀머거리인 줄을 깨닫지 못하니 유일한 성경,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를 왜곡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알기 쉽게 한다는 명목으로 교권 욕과 이익의 자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비유로만 감추어져 있겠는가. 묵시는 정한 때(합 2:2~3)가 될 때까지는 봉한 책(사 29:11)의 말이다. 그러니 펴거나 볼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묵시는 에스겔 1, 2, 3장의 예언과 같이 열리는 노정과 순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즉, 선민이 이방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오사 그 책을 열어 인자에게 보이시고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말씀을 먹이신다. 즉 계시를 받은(마 11:27) 후, 다시 전할 곳(마 15:24)을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초림 예수는 에스겔 선지자의 입장으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들을 다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을 남기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초림 예수가 이룬 것은 성경 전체를 이룬 것이 아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에 있을 사건을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의 계시록의 계시는 영적 이스라엘의 종말, 곧 오늘날에 이룰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봉한 책을 예수께 주시고 예수님은 그 봉한 책을 취하시고(계 5장), 일곱 인을 떼어 열어 예언대로 이루시고(계 6장), 그 열린 책을 천사를 통해 약속의 목자(사도요한의 입장으로 오신 목자)에게 주어 먹게 하시고 전할 곳(사로잡힌 선민)을 지시(계 10장)하셨다. 그러므로 재림으로 이룰 사건들을 다 이루시게 되니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계 21:6)”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님과 계시 책을 받은 약속의 목자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 참 하나님을 알 자가 없으며, 참 하나님과 예수님과 주의 이름으로 온 약속의 목자(마 23:39, 요14:16~17, 26)를 아는 것으로 영생이 있게 된다. 

 

이처럼 성경은 약속이다. 그 약속을 길로 삼아 가다 보면 찾던 답을 얻을 수 있다. 자의적 욕심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령의 글을 고치고 해석하고 억지로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것은 성도들에게 말씀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목자들에게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목자들은 왜 말씀이 없는가. 신학교에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교엔 왜 말씀이 없는가. 그것은 말씀의 본체이신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대신 사람의 계명만이 무성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이 세대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상실되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실체가 되고 말았고, 감각 없이 다 죽은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디선가 말씀이 흐른다면, 또 말씀을 물(신 32:2)이라 한다면 강물은 말씀이 흘러가는 길이 된다. 그렇다면 그 강물은 틀림없이 발원지가 있을 것이다. 발원지 없는 물줄기는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물줄기를 거슬러 가면 물의 근원인 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이치고 진리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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