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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여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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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2010. 6. 8.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씀, 후마니타스,2009)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들의 어머니, 힘없고 빽없는 모든사람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80년 이야기다. 이소선 어머니는 구술하고 시인 오도엽이 쓴 글이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지만, 얼마전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다. 난 그게 요즘 쓰고 있는것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 지난번 노무현대통령 자서전을 추천했던 후배가 이책을 빌려주었는데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다.

 

전태일평전을 읽었지만 그 어머니로 부터 듣는 이야기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한 여성으로 어떻게 그렇게 강직하고 변함없이 독재에 항거하고 노동운동에,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는 자식들을 돌봐줄수 있었을까? 역시 어머니는 강한것인가?

 

만약에 보통사람들이, 그 자식이 노동의 '노'자도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할때 분신항거를 했다면, 그리고 정권의 협박과 그 폭압에 노출되었다면 노동운동 하는 사람만 보면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전 자유당정권이나 유신정권때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던 사람의 가족이 오히려 북한에 대해 이를갈고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을 거부했던 것 처럼 '너 같은 노동운동 하는사람들 꾐에 내 자식이 죽었다' 라고 할수도 있다. 지금도 국가의 폭력에 의해 고엽제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이나 HID 출신들, 그리고 월남참전, 해병대출신들을 보면 알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항거해야 할 대상이 국가폭력 임에도 오히려 그들편에서서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1970년11월13일  그러니까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분신항거 했을때, 나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나는 촌에 살아서 우리 부모님이 허리가 휘도록 일을해서 밥을 굶지는 않았다. 물론 내 친구-나하고 한동네 살던-네 집에 가면 화로에 시커먼 된장국과 꽁보리밥  한그릇밖에 없었지만 우리집은 그래도 밥도 두세그릇은 있고 아주 꽁보리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서울 평화시장엔 내나이 또래의 시다들이 죽도록 일하고 풀빵도 못사먹었다.  물론, 전태일이 불에 타 죽은것도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는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 어머니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불에탄후 꺼져가는 생명으로 어머니에게 자기가 못다한 일을, 노동자의 권리를 찾도록 하고,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자기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가슴은? 죽으면서 아들의 마지막 유언, ' 아 배고프다' 라는 말을 들은 그 어머니의 가슴에는 노동자의 배고픔이 한으로 저며들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식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이 땅속에 묻히는 순간외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80이 넘을때까지 노동자를 위해서,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살고 계신다. 아니... 어머니는 민주화 보다는, 침에 발린 민주화, 인권 이런말 보다는 몸에 와 닿는 노동자의 권리, 배고프지 않는 노동자를 위해서 투쟁하여 왔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이 하지 않았고 남들이 모두 했고, 남들한테 고맙다고 하신다.

 

전태일동지가 묻힌 묘역... 마석 모란공원에 나도 작년11월에 가 보았다. 거기에 문익환 목사님도 계시고, 우리 전국공무원노조 초대위원장 차봉천님도 계신다. 꽤 많은 노동형제들이 투쟁과정에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고 누워 계신다. 근데 왜 그리도 묘역이 추운지? 우리의 동지들은 죽어서도 따뜻한곳 보다 그늘이 지는 추운곳에 계셔야 하는지...

 

이소선어머니의 80평생을 담은 글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시건방진 일이다. 다만, 앞으로 기회를 만들어 서울에 있는 '평화의집'과 태일기념사업협회등을 방문해 보아야 겠다. 청계천의 전태일광장은 벌써 가 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