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풍선

내가 사는 이야기

대화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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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삐딱이의 시선(회사)

2021. 7. 14.

   회사의 경영진은 대화와 경청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조'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매번 회의 때마다 구호를 외친다. 내가 볼 때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구호를 외침으로써 대화와 경청을 막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마치 "코끼리 이야기"처럼(어떤 강사(?)가 대중들에게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세요"라고 주문하면 대다수의 대중은 그 말을 듣자마자 코끼리를 떠올린다는 이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다 보면 하게 되고, 해야 할 것을 강조하다 보면 안 되는 것들만 자꾸 보이게 되는 현상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대화와 경청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의 위치에 있는 경영층인데, 그들은 과연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려고 노력하고는 있는지 의문이 가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왜냐하면 한 번도 진정성 있게 의사결정에 대한 의견을 나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정기적인 업무 보고회 마무리에 어떤 중역이 한마디 하겠다고 하고서는 매우 높은 언성으로, 심지어 '정신이 나갔다'라는 표현을 쓰며 강도 높게 비난(내가 봐서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었다)을 했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가 가만히 보니,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내용은, 하반기 생산 능력을 증가하기 위한 방안 중에 간접 인원 충원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하루 전에 보고서를 마무리해서 결재 상신한 내용이었다. 결재 중인 안 건이데, 그는 결재 라인도 아니었지만, 전날 임원회의 때 누군가가 설명을 했을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 

   지적하고 싶은 거는,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용히 불러서 1:1로 설명을 듣고, 회사가 처한 상황과 보고서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면 사전에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의 특성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상대방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는지 궁금해진다. 마치 70년대 드라마에서 보듯이 악덕 부자가 하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듯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한 번은 이런적도 있었다. 정기 업무보고 회의를 마치면서 회장이 몇몇 보고 남아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하자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데, 회장이 나도 남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줄 것 같은데,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생각하며 자리를 옮겨 앉았다. 주제는 유럽 규제에 관한 일반적이고도 기술적인 내용이었다. 우리 회사도 유럽 수출 실적이 증가하고 있는데, 유럽 수출과 국내 판매 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은 회장, 부사장, 연구소장, 영업본부장, 생산본부장, 품질 임원 그리고 실무 팀장과 나 이렇게 있었다. 상황을 보면, 그 규제에 대하여 내용을 알법한 사람은 품질 임원과 실무 팀장 정도였다. 내가 아는 연구소장은 중소기업을 전전했던 사람이었고, 품질 임원과 실무 팀장은 대기업 출신이었다. 그들은 품질 임원과 실무 팀장 및 나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네끼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연 제대로 공부나 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냥 사랑방에서 잡담 나누듯 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보려고,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이크를 켜거나 헛기침을 하는 등 신호를 보냈다. 내가 말을 하려고 하면 그들은 나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말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결론까지 다 내렸다. 그리고 나서 마치 선심 쓰듯이, "그래, 자네, 할 말이 있었는 거 같은데, 말을 해보게"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때 대화의 주제는 유럽 안전 규격을 전 생산량에 적용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었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아직 유럽 수출 물량이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유럽 수출 건만 (다소 생산성이 떨어지더라도) 적용한다였다. 그 이유는 유럽 안전 규적을 만족하기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전에 있던 회사에서는 우리나라 법규가 유럽 수준으로 강화되어서 기왕 하는 거 유럽 수준을 맞추는 걸로 10여 년 전에 결정한 바 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는 아무런 대꾸고 하지 않았다. 마치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그리고 몇 주 후 다른 회의에서 일본과 대만이 안전규정이 강화되고 있으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제가 나왔고, 그 내용이 유럽과 대등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도 (결국) 유럽 수준으로 안전규격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