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용정차(西湖龍井茶)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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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차도

2007. 2. 2.

절강성 항주의 서호근처의 산들에서는 모두 차(茶)가 난다. 서호에 언제부터 차를 심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가장 권위있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때 육우(陸羽)가 지은 <<차경(茶經)>>에 따르면, 이미, 항주의 천축(天竺), 영은(靈隱)의 두 절에서 차가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때 소동파(蘇東坡)가 항주지부를 맡고 있을 때, 서호에 차를 심은 역사에 대하여 고증을 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서호에서 최초의 차나무는 영은(靈隱) 하천축(下天竺)의 향림동(香林洞) 일대라고 하였으며, 바로 남조(南朝)의 시인인 사영운(謝靈運)이 하천축에서 불경을 번역할 때, 천태산(天台山)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소동파의 이 주장은 <<차경>>의 기재와 들어맞는다. 이로써 추단하면, 서호에 차를 심은 것은 남북조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 1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찻잎을 따지기 시작한 것은 당(唐)나라때부터이다. 어느 지방에서 난 차를 귀중하게 생각했는지는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는 양선차(陽羨茶, 지금의 강소성 의흥지방의 차)를 중시했고, 송나라때는 건주차(建州茶, 지금의 복건성 건구)를 귀중하게 생각했고, 청나라때에는 무이차(武夷茶)와 용정차(龍井茶)를 귀중하게 생각했다. 이로써, 서호용정차가 이름을 크게 얻은 것은 시기적으로 비교적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元)나라때에는 용정부근에서 나는 차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문자로된 기록은 원라나때 우집(虞集)의 <<유용정(遊龍井, 용정에서 노닐다)>>라는 시에서 용정차에 대하여 읊은 내용이 있다.

 

명나라때에는 용정차가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널리 명성을 얻었다. <<가정통지>>에 따르면, "항주에서 나는 모든 차는 용정에서 생산된 것에 미치지 못한다. 우전(곡우전)에 딴 일기일창(一旗一槍)은 용정의 진품이다"라고 되어 있다. 명나라때 용정차는 이미 전국명차의 반열에 들었다. 당시의 <<오잡저>>에서는 "지금 차중에서 상품은 나송(羅松), 호구(虎丘), 용정(龍井)이다"라는 글이 있다.

 

청나라때에는 용정차의 발전이 비교적 빨랐다. 특히 건륭제의 강남순방때, 용정을 방문한 이후 용정차의 품격은 더욱 높아졌다. 이 때부터, 용정차는 중국과 외국에 유명하게 되고, 용정차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때 용정차는 이미 차중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