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량의 대만에서의 유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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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2007. 4. 6.

글: 이청(李菁). <<삼련생활주간>>2007년 제13기.

 

장학량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 것은 1970년대였다. "그 때 그에 대한 감시감독도 천천히 풀어졌고, 만나보도록 허용한 사람도 많아졌다. 학백촌(伯村)등의 일부 노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주 함게 모였고, 서로 초청하고,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때의 장학량은 이미 풍채가 예전같지 않은 7순의 노인이었다.

 

그 때 장려형(張閭)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먼저 홍콩에서 몇년간 일을 하다가, 다시 대만으로 가서 한동안 머물렀다. 장학량의 자녀는 모두 곁에 없었으므로,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인 장려지(張閭芝)는 큰아버지 장학량과 가장 관계가 밀접한 친척이 되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가장 기뻐한 날은 설날이었습니다. 평상시에 그들 집은 아주 설렁했고 적막했으며, 마작을 할 인원도 안되었습니다. 이날은 달랐습니다. 제야에 밥을 먹은 후, 큰아버지는 먼저 나서서 마작을 놀자고 했습니다. 그가 시력이나 청력이 좋지 않다고 무시해선 안됩니다. 매번 따는 사람은 그였습니다. 우리 주머니에 들어온 '세뱃돈'은 아직 식기도 전에 대부분 다시 그의 손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기죽은 표정으로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가가대소를 하면서 돈을 돌려주고, 너희는 아직 멀었다. 나는 스승을 모시고 배운 사람이다라고 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밤새워 마작을 하고도 그는 피곤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을 이리비틀고 저리비틀고 했습니다." 장여형의 회고에 의하면, 수부인은 비록 장학량의 생모가 아니었지만, 그는 수부인을 계속 존중했으며 "오이(五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로 마부인은 "육이(六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자주 장려형과 장려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의 할머니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노수(老帥, 장작림)가 가장 아꼈던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노수와 말을 잘 나누었던 사람이다. 대수부의 아래위 모든 사람이 모두 그녀의 말을 들었었다."

 

1964년 7월 4일, 송미령등 많은 친구들이 증인을 서고, 장학량은 조일획(趙一)과 타이페이 북투온천풍경구의 한 교회에서 작은 혼례를 올렸다. 이 때 장학량은 이미 64세였고, 당년의 "조사소저(趙四小姐)"도 이미 54세였고, 옛날의 모습은 없었다.

 

장려형은 이렇게 말했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큰아버지와 비교하여, 큰어머니 조사소저는 '차가웠다' 그녀는 외부사람에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큰어머니는 경건한 기독교도였습니다. 우리가 얘기할 때, 그녀가 끼어들면 분명히 기독교를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큰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말을 자르며 '됐다. 우리 그냥 한담이나 나누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큰어머니는 큰아버지에 대하여는 절대적으로 현처(賢妻)였다. 큰아버지의 음식기거를 아주 잘 돌봐주었다. 그의 생활은 그녀의 모든 세계였다. 큰아버지는 큰어머니를 얘기하면서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에게 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

 

장학량은 '서안사변'후에 연금되었다. 먼저 우봉지(于鳳至)가 그를 보살피며 안휘, 강서, 호남 및 귀주등지를 3년여 따라다녔다. 귀주에서 유선암을 앓아서, 1940년 우봉지는 홀로 미국에 가서 병을 치료했다. 조일획은 그와 장학량간의 유일한 딸인 장여림(張閭琳)을 미국에 보내어 친구에게 키워달라고 맡기고, 아예 장학량을 따라다니며 보살폈다. 장여림은 지금 이미 70여세이다. 대만에서 다시 부모를 보았을 때, 이미 결혼했었다. 미국에서 자랐으므로 언어나 생각이 서로 잘 통할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 미국에 가서 우봉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혼자서 세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이후에 다시는 큰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큰아버지는 해외에 예금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생활에 걱정은 없었습니다. 나중에도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이 많았을 것입니다" 1990년 봄, 93세의 우봉지는 미국에서 사망한다. 장학량과 우봉지는 이남일녀를 낳았다. 장려형은 현재는 딸 여영(閭瑛)만이 남았고, 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1979년, 장려형은 대륙을 방문한 몇 안되는 용감한 사람중의 하나가 되었다. 장학량은 나중에 그녀가 대륙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그녀에게 두 가지 일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나는 할아버지 장작림의 묘에 가서 성묘하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내가 했습니다. 장씨집안에서 수십년동안 아무도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성묘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큰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명의 학생이 아직 대륙에 있다. 하나는 만의(萬毅)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여정조(呂正操)라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싶다"

 

장려형은 북경에 도착한 후, 양호성의 아들인 양증민(楊拯民)을 통하여 여정조를 소개받았다. 1984년 6월, 장려형은 처음으로 북경에서 여정조를 방문했다. "첫눈에 그를 보았을 때, 내 마음 속에는 친근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큰아버지를 닮았는지. 나는 동북인의 습관에 따라, 집안에서 큰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그에게 '대야(大爺)'라고 불렀다. 만의를 만날 때는 더 감동적이었다. 그는 두 눈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만났을 때, 그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가 큰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두 노인의 눈에서 큰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만에 돌아온 후, 그녀는 만난 얘기를 자세하게 큰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 괴로워했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장려형은 자기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정조와 장학량이 미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어레인지했다. 나의 내짐은 항상 일종의 이름없는 에너지가 있는 것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중간에 얼마를 떨어져 있었던지간에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한번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1991년 3월 10일, 반세기동안 자유를 잃어버렸던 큰아버지는 마침내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친척방문을 갈 수 있었다. 5월 23일, 여정조와 수행원들은 미국으로 장학량을 만나러 왔다. 1991년 5월 29일 오전 그들은 뉴욕에서 만났다.

 

뉴욕에서 만나는 날, 장려형은 여정조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자, 장려형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그렇게 정장을 차려입지 않던 장학량이 양복을 입고 꼿곳이 문앞에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여정조는 이전의 습관대로 장학량을 "노교장"이라고 불렀다. "만나는 날을 여정조가 골랐다. 나는 왜 여정조가 하필 그날을 고르는지 몰랐었다. 두 사람이 만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는 교장, 지금까지 당신을 54년 5개월 4일간 만나지 못했습니다....두 노인은 키가 비슷했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였다. 아이와 같이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놓지를 않았다. 아주 사랑스러웠지만, 나는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1994년, 장학량, 조일획은 하와이에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조일획은 젊었을 때 폐암을 앓은 적이 있었고, 한쪽 폐를 잘라냈다. 그리고 장학량은 40여년간 중한 안질을 앓고 있었다. 깊은 산 속에 머물렀으므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시력은 겨우 사람의 그림자만 보일정도가 되었고, 마작도 거의 손감각으로 하였으며, 한쪽 귀는 멀었고, 한쪽귀는 겨우 들리는 정도였다. 여러해동안, 조일획이 바로 장학량의 눈과 귀역할을 했다. 그러나, 크게 말하면 숨이 가빠했고, 매우 힘들어했다. 두 사람은 휠체어를 친구삼아 나날을 보냈다. "비록 하와이에 도착한 후, 우리 전 식구는 그들을 모시고 함께 햇볕을 받고 바닷바람을 쏘이곤 했지만, 이전의 소수(少帥)와 풍류의 조사소저는 모두 노인으로 되었다. 그들의 날로 어두워가는 눈은 나에게 하나의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