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岳飛)의 만강홍(滿江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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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송사

2007. 7. 19.

 

 

노발충관빙난처, 소소우헐(怒髮衝冠憑欄處, 瀟瀟雨歇)
대망안,앙천장소,장회격렬(抬望眼,仰天長嘯, 壯懷激烈)
삼십공명진여토(三十功名塵與土)
팔천리로운화월(八千里路雲和月)
막등한, 백료소년두, 공비절(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정강치유미설(靖康恥猶未雪)
신자한하시멸(臣子恨何時滅)
가장거, 답파하란산결(駕長車, 踏破賀蘭山缺)
장지기찬호로육(壯志饑餐胡虜肉)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
대종두,수습구산하, 조천궐(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

 

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정도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년간 쌓은 공명이 한갓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이 없구나.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그저 비감한 마음이 애절할 뿐.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없앨 수 있을 것인가.

전차를 몰고,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옛 산하를 다시 되찮은 후에 황제를 만나러 가리라.

 

중국사람중에 악비의 <<만강홍>>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는 실제로 악비가 쓴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명나라때 문인이 악비의 이름을 빌어 지은 위작이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이 송사의 위조는 악비에 대한 신화조작의 단계부터 얘기해야 한다.

 

악비의 신화는 두 단계를 거친다. 첫번째는 송나라때 악비의 자손들에 의해서이고, 둘째는 명나라때 때이다. 악비의 자손들이 악비신화를 만들어낸 수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패전을 언급하지 않고, 승전은 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후손들에 의하여 미화된 내용이 나중의 <<송사>>에 포함되게 된다.

 

<<송사>>는 원나라의 토토(脫脫)등이 쓴 기전체의 사서이다. 그러나, 황급하게 썼고, 교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여러 사람이 손을 대는 바람에 잘못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악비는 전설처럼 백전백승한 장수가 아니었다. <<금사. 왕백룡전>>에 의하면 "군대가 채석을 넘어서 악비, 유립, 노상등의 군대를 격파하고 양식 수백만을 확득했다"는 기록이 있고, <<금사. 완안앙전>>에는 "송나라 장군 악비는 병력 10만으로 100만대군이라 칭하면서 동평으로 와서 공격했다. 동평에는 5천의 군사가 있었는데, 황급히 나가서 막았다. 마침 뽕나무가 무성한 계절이어서 완안앙은 깃발을 숲속에 두어 병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며, 자신은 정예병사를 데리고 앞으로 군진의 앞에 섰다. 악비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고, 며칠을 대치하다가 퇴각했다" "완안앙이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자, 악비는 바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고, <<금사. 복산혼단전>>에는 "천권2년, 송나라의 악비와 대치했다. 혼단은 60기를 이끌고, 적진을 깊이 들어가 언릉에 도착해서, 송나라 호양향군 700여명을 무찌르고 많은 자를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금사. 완안종수전>>에 의하면, "완안종필이 다시 하남을 회복하였고, 종수는 해릉과 함께 군대에 일을 맡았다. 송나라 장군 악비는 호, 숙의 사이에 있었는데, 종수가 보병기병3천을 이끌고 요충지를 막았으며, 여러 군대와 악비를 격파했다" 이로써 볼 때, 악비의 혁혁한 전공의 뒤에는 이처럼 많은 패전도 있었던 것이다.

 

<<송사>>를 읽다보면, 악비의 군대는 수시로 적군 수천 수만을 죽였다고 나오고, 심지어 "오백 기병으로 금나라병사 10만을 무찔렀다"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실제로 악비가 무찌른 적군은 진정한 여진족인 금나라 사람이 아니라, 여진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세운 "허수아비 제(僞齊)"나라의 군대였다. 이들은 원래 북송에 속했으나, 여진에 투항한 자들이다. 그리고 "첨군(簽軍)"도 있다.

 

이런 "첨군"은 1회적인 소모용 군대였다. 교전때 방패막이로 사용하여 적군의 화살을 소비시키는 목적이고, 일반 백성들 중에서 붙잡아와서 내세운 자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군인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악가군의 혁혁한 전공중에는 이들처럼 여진족에 붙들려 전선의 전면에 배치된 한족 '첨병' 혹은 투항한 '위제의 한족군인'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당시 금나라군대에서 악비를 악야야(岳爺爺, 악할아버지 혹은 악어르신)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분명 금나라군대내의 한족인 "제군" 또는 "첨군"일 것이다. 이것은 한족의 구어(口語)이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 여진족이 이민족인 적군의 장수를 이렇게 부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패한 적장을 "야야"라고 불러줄 리도 없는 것이다.

 

악비의 자손은 조상을 미화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만강홍>>은 그들이 수집한 문집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와 관련된 약간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명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계가 편찬한 <<악무목유문>>에 <<만강홍>>이 실리게 된다. 이 책은 홍치15년(1502년)에 절강제학부사 조관이 쓴 악분사비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관의 비기에서 언급한 악비의 또 다른 시인 <<송자암장선생북벌>>도 명나라사람이 이미 가짜작품이라고 고증한 바 있다.

 

이외에 글에는 "하란산"이 나오는데, 하란산이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북송때부터이다. 당송때 사람들이 하란산이라고 할 때는 실제 있던 하란산을 가리켰다. 하란산은 지금의 내몽고 하투의 서쪽에 있고, 남송때는 서하(西夏)에 속했다. 금나라의 땅도 아니다. 금나라의 황룡부(黃龍府, 금나라의 수도.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直搗黃龍은 바로 수도로 바로 진격해서 쳐부순다는 말로서 자잘한 부하들을 처치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보다 우두머리를 바로 해치우는 전략을 가리킨다)는 지금의 길림성 경내에 있었다. 악비가 서하에 속하는 '하란산'을 가지고 금나라 황룡부를 공격하겠다는 뜻을 나타낼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소머리에 말주둥아리를 갖다 붙인 꼴이다. 실제로 명나라때 북방의 타타르족이 자주 하란산을 침입하였고, 명나라 홍치11년(1498년)에 명나라장군 왕월이 하란산에서 타타르를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이 사에 나오는 하란산은 바로 왕월 또는 왕월의 수하문인이 그 승리를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시사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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