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현기(魚玄機) : 당나라 재녀의 슬픈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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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2007. 11. 2.

 

어현기의 원래 이름은 유미(幼薇)이며, 자는 혜란(慧蘭)이다. 당무종 회창2년에 장안성의 교외에서 몰락한 선비가문에서 태어났다. 어현기의 부친은 시서를 많이 읽었으나, 평생 공명을 얻지 못했다. 어린 어현기는 부친의 교육을 받아, 5살때는 수백편의 시를 외울 수 있었고, 7살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11,12세때 그녀의 작품은 이미 장안의 문인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시동(詩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어유미의 재능은 당시 장안에 살던 대시인 온정균의 주의를 끌게 된다.

 

어느날 오후, 온정균은 어유미를 찾아나선다. 그는 평강리의 다 부서져가는 집에서 어씨집을 찾아낸다. 평강리는 장안성의 동남쪽에 있고, 당시에는 기생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어현기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씨모녀는 이 곳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씨모녀는 바느질과 세탁을 해주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바로 낮고 어두운 어씨집에서 온정규는 이 어린 여자시인을 만나게 된다. 온정균은 완곡하게 자신이 온 뜻을 전하고, 어린 어현기에게 즉흥시를 하나 지을 것을 부탁한다. 이로써 그녀의 시재(詩才)를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오는 길에 마침 길가에 버드나무솜이 흩날리면서 사람들 얼굴에 달라붙는 것을 보았으므로 "강변류(江邊柳, 강가의 버드나무)"라는 시제를 냈다.

 

어유미는 약간 생각하더니 재빨리 시를 하나 써나갔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온정균에게 바쳤다. 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취색연황안(翠色沿荒岸)

연자입원루(煙姿入遠樓)

영포춘수면(影鋪春水面)

화락조인두(花落釣人頭)

근로장어굴(根老藏魚窟)

지저계객주(枝底繫客舟)

소소풍우야(蕭蕭風雨夜)

경몽부첨수(驚夢復添愁)

 

온정균은 반복하여 싯구를 음미하고는 시의 용어나 평측이나 의경(意境), 시정(詩情)이 모두 보기힘든 일류의 작품이라고 느껴져서 깊이 탄복했다.

 

이로부터 온정균은 자주 어씨집안을 드나들었고, 어린 유미에게 시를 짓는 법을 교육해주었고 거의 그녀의 스승처럼 되었다. 학비를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어씨집안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와 어현기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같기도 하고, 부녀같기도 하고, 친구같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온정균은 장안을 떠나서 멀리 호북의 양양에 자사로 가는 서간의 막료로 간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질 때, 어현기는 멀리 떨어진 사람을 생각하며 5언율시 <<요기비경(遙寄飛卿)>>을 하나 짓는다. 비경은 온정균의 자이다. 온정균은 재주가 뛰어났으나 용모는 추해서, 사람들이 "온종규"라고 불렀다.

 

온정균은 어현기를 아주 아꼈지만, 감정을 스승과 제자, 친구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통제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에 눈뜬 어현기는 일찌감치 마음을 온정균에게 주었다. 편지에 대한 회신이 없이 금방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겨울 저녁에 어현기는 다시 <<동야기온비경(冬夜寄溫飛卿)>>이라는 시를 짓는다.

 

온정균가 어현기의 마음을 모를 리야 없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한 후 여전히 이전의 원칙을 지키기로 하고 더 이상 다른 마음은 먹지 않는다. 당의종 함통원년 온정균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새 황제가 들어선 때를 틈타서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이다. 이년여동안 보지 않는동안 어현기는 예쁜 처녀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장안성 남쪽의 숭정관으로 유람을 떠났다. 마침 일군의 새로 진사가 된 선비들이 벽에 시를 짓고 이름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다 쓴 후에 어현기는 칠절시를 하나 남긴다.

 

운봉만월방춘청(雲峰灣月放春晴)

역력은구지하생(歷歷銀鉤指下生)

자한나의엄시구(自恨羅衣掩詩句)

거두공선방중명(擧頭空羨榜中名)

 

이 시는 앞의 두 구절은 가슴에 가득한 웅심을 표현하고, 뒤의 두 구절은 스스로 여인이어서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며칠 후 처음 장안으로 온 귀공자 이억(李億)은 숭정관을 유람할 때, 무의식중에 어현기가 남긴 싯구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그녀에 대한 흠모의 정을 품는다. 이억이 이번에 장안에 온 것은 음서로 관직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관직을 얻은 후 강릉의 명문집안 후예인 이억은 장안의 친구들을 찾는다. 온정균이 양양자사의 막료로 있을 때 일찌기 이억과 글을 교류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억은 온정균의 집을 찾아왔다. 온정균의 서탁에서 예쁜 글씨로 쓴 시를 보고 이억은 가슴이 뛴다. 이 시는 바로 사랑을 표현한 6언시였다.

 

홍도처처춘색(紅桃處處春色)

벽류가가월명(碧柳家家月明)

누상신장대야(樓上新裝待夜)

규중독좌함정(閨中獨坐含情)

부용월하어희(芙蓉月下魚戱)

채홍무변작성(彩虹無邊雀聲)

인세비환일몽(人世悲歡一夢)

여하득작쌍성(如何得作雙成)

 

이 시를 지은 작자가 바로 자신이 숭정관에서 본 시를 쓴 바로 그 어현기였다. 이억은 가슴이 뛰었다. 온정균은 이억의 미묘한 심리를 눈치챘다. 사람좋은 그는 어현기의 앞날을 생각해서 그들을 맺어주게 한다. 장안의 춘삼월에 꽃가마를 타고 성장을 한 어현기는 이억이 그녀를 위하여 지어준 별장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한동안 즐거운 시절을 보낸다.

 

강릉에는 이억의 부인 배씨가 있었따. 그녀는 남편이 장안으로 간 후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을 데려가지 않자, 계속 서신을 보내서 재촉했다. 이억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강릉으로 가서 그녀를 데려오게 된다. 이억에게 처가 있다는 것은 어현기도 미리 알았다. 그녀를 장안으로 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현기는 이억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강릉수망기자안>>이라는 시를 쓴다. 자안은 이억의 자이다.

 

풍엽천지부만지(楓葉千枝復萬枝) 단풍잎은 천가지 또 만가지

강교엄영모범지(江橋掩映暮帆遲) 강에 놓인 다리에 비치는 저녁배는 천천히 오고 있다.

억군심사서강수(憶君心似西江水)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서강의 물과도 같아

일야동류무헐시(日夜東流無歇時) 낮밤으로 동으로 흐르고 쉬는 때가 없어라.

 

어현기는 독수공방하면서 가을부터 봄까지 지냈다. 그 후에야 이억은 처를 데리고 장안으로 왔다. 비록 이억이 조심스럽게 처인 배씨에게 첩 어현기를 받아들여달라고 달랬지만, 명문출신의 배씨는 시종 응락하지 않았다.

 

별장의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배씨는 시녀를 불러 마중나온 어현기를 땅에 꿇어앉히고 등나무로 심하게 때렸다. 어현기는 감히 반항하지도 못하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부인이 화를 푼 후에 그녀를 식구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배씨의 분노는 다음 날에도 가시지 않았다. 둘째날 �째날에도 계속 소란을 피우게 되니, 이억은 어쩔 수 없이 어현기를 집에서 내보내게 된다. 이억은 배씨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현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혼인은 겨우 3개월간 지속되었고, 5개월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헤어진 것이다.

 

이억은 표면적으로는 어현기와의 관계를 끊었지만,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곡강일대의 조용한 도관인 함의관에 돈을 내서 수리하고 큰 돈을 기부하한 다음 어현기를 도관에 머물게 보냈다. 그리고 어현기에게 "잠시만 참아주면 반드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달랬다.

 

함의관의 관주는 나이 많은 도고(道姑)였다. 그녀는 어유미에게 현기(玄機)라는 도호(道號)를 주었다. 이때부터 어유미는 어현기가 된 것이다. 재주가 뛰어난 그녀는 결국 홀로 청등을 벗하는 도고로 지내게 된 것이다. 긴밤을 잠못자면서 그녀는 이억을 그리워했고, 눈물과 먹으로 <<기자안>>이라는 시를 지었다.

 

도관에 들어간 후, 어현기는 슬픈 마음을 모두 시에 쏟아부었다. 이억이 하루 빨리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이억은 어현기를 함의관에 맡기고, 원래는 기회를 봐서 찾아오려는 것이었지만, 배씨가 너무나 심하게 단속하고, 배씨집안의 세력이 장안성내에 모두 퍼져있어서, 이억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고, 함의관에 있는 어현기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어현기는 아침저녁으로 이억을 생각하고, 이억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도 <<기이자안>>이라는 시를 지었다. 매번 시는 지었지만, 이억에게 보낼 수는 없어서 그저 곡강에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때는 도교가 유행하였는데, 유명한 도관들은 관광명승지이면서 교제장소이기도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여도사들은 사교계의 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의관은 관주인 일청도고가 성격이 엄격하고 규율을 지키게 하는 바람에 아주 조용한 곳이었고, 찾아오는 손님도 적었다. 이억은 당시에 이렇게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어 어현기를 맡긴 것이었다. 이제 어현기는 그저 적막을 벗하면서 여도사들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삼년이 흘렀다. 도관에는 더 이상 사람도 없고 건물은 비었다. 남은 것은 어현기 한 사람 뿐이었다. 바로 이때 그녀는 이억이 일찌감치 처와 함께 양주로 가서 관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현기는 자기가 버려졌다고 느낀다. 그녀는 차가운 함의관에서 홀로 지내면서 유명한 <<증인녀>>라는 시를 짓는다:

 

수일차라수(羞日遮羅袖)

수춘나기장(愁春懶起裝)

이구무가보(易求無價寶)

난득유정랑(難得有情郞)

침상잠수루(枕上潛垂淚)

화간암단장(花間暗斷腸)

자능규송옥(自能窺宋玉)

하필한왕창(何必恨王昌)

 

어현기는 여러 가난한 여자아이들을 거두어서 그녀의 제자로 삼았다. 이때부터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게 된다. 그녀는 도관의 바깥에 "어현기시문후교(어현기가 시문에 대한 가르침을 기다림)"라는 글을 붙인다. 이 소문은 금방 장안에 퍼져갔고, 재주가 있다고 자신하는 문인, 풍류공자들이 줄줄이 그녀를 찾아온다.

 

함의관에는 어현기가 손님들과 차를 마시고 시를 논하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도관에 남아서 함께 밤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그녀가 아주 좋아했던 낙척서생으로 좌명양(左名揚)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녀가 좌명양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귀공자의 풍모에 당당한 의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며, 예전의 남편인 이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좌명양에게 깊이 정을 주었고, 완전히 처가 남편을 대하듯이 좌명양을 대했다. 좌명양은 수시로 그녀의 도관에 와서 그녀와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좌명양외에, 어현기와 내왕을 많이 하던 사람으로는 비단장사를 하던 이근인(李近仁)이 있었다. 그녀는 <<영이근인원외>>라는 시에서 묘사한 정경은 규중여인이 아주 기쁘게 남편을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있다.

 

함의관의 모든 비용은 이근인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는 어현기가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현기는 이근인에게 몸을 맡기는 동시에, 다른 여러 인물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온정균도 포함된다. 그러나, 온정균은 그녀와 시종 우정을 유지한다. 당시의 관리중에 배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현기를 매우 흠모했다. 그러나 어현기는 그가 이억의 부인인 배씨와 같은 성씨인 것을 보고는 멀리했다.

 

하루는, 함의관에 악사인 진위가 왔다. 그는 키가 크고 모습도 준수했다. 그녀의 모습은 어현기의 눈길을 끌었다. 어현기는 그의 모습에 반하여 아주 노골적인 시를 써서 건네주고, 진위도 다음 날 바로 어현기를 찾아온다.

 

이해의 봄날 어현기가 근처에 봄놀이를 갈 때, 집을 떠나면서 시비인 녹교(綠翹)에게 "나돌아다니지 말고, 만일 손님이 오면, 내가 어디로 갔는지 얘기해주거라"고 당부한다. 봄놀이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어현기는 함의관으로 돌아온다. 녹교가 나와서 맞이하면서 "진악사가 내방했었는데, 나는 그에게 스승님이 간 곳을 말해 주었어요. 그는 응이라고 대답하고 바로 가버렸습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어현기가 그녀의 모습을 보니, 머리칼이 약간 흩어져 있고,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심을 품게 된다.

 

밤이 되어 녹교를 방에 불러서 추궁했다: "오늘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사실대로 실토해라" 녹교는 놀라서 바닥에 엎드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답했다: "어려서부터 스승님을 따른 이후에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했고, 조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어현기는 녹교를 가까이 불러서 몸을 검사해보니 유방에 손톱에 �힌 흔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등나무 채찍을 들어 그녀를 때렸다. 녹교는 그러나 일관되게 부인했다. 나중에는 어현기의 말에 말대꾸까지 하며, 어현기의 풍류에 대하여까지 언급했다.

 

어현기는 녹교의 목을 붙잡고, 그녀의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나중에 녹교의 손에 힘이 빠진 것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녹교의 숨이 끊어진 것을 알았다. 어현기는 정신을 차리고 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후원의 자등화아래에 구덩이를 파서 녹교의 시신을 묻어버렸다. 며칠이 지난 후 진위가 와서 물었다: "왜 녹교가 보이지 않는가?" 어현기의 회답은 "봄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진위는 더 이상 묻지를 못했다.

 

여름에 두 명의 손님이 온다. 한 명이 아랫배가 더부룩하여 자등화 아래에서 소변을 본다. 그러는데, 파리들이 많이 꽃아래에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파리를 쫓아내도 다시 돌아왔다. 손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관청에 근무하는 형에게 그 사실을 얘기했다. 관아에서는 사람을 보내서 녹교의 시신을 찾아냈다. 어현기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눈을 들어보니, 재판관은 일찌기 그녀가 거절했던 배징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 녹교를 죽이게 된 경과를 낱낱이 자백했다. 그녀는 이로 인하여 참형을 받게 된다. 이때 그녀의 나이 겨우 24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