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고환(高歡)과 우문태(宇文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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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2007. 12. 7.

 

남북조때의 전쟁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의 전쟁이 가장 재미있다. 쌍방은 서로 공격하였으며, 많은 전투는 이후의 전범이 될만하다. 당시 고환은 동위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우문태는 서위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호랑이는 반드시 결전을 벌여야 했다.

 

소관지전(小關之戰)

 

고환과 우문태의 동,서위전쟁은 소관지전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위 대통2년(536년) 1월, 동위의 고환은 서위정벌에 나선다. 분수(汾水)가 황하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인 황하의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하진현)을 점거하고, 계속 황하를 따라 남하하여 포판(蒲坂, 지금의 산서성 포주)에 이른다. 포판은 자고이래로 군사를 서쪽으로 진공시키고, 동관(潼關, 섬서성 구동관)을 공격하는 병력운반나루터로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고환은 전군에 명을 내려 황하에 부교(浮橋)를 세개 설치하게 해서 장안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고환은 우문태를 토벌함에 있어서 병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스스로 중군을 지휘하는 외에, 선봉인 두태(竇泰)로 하여금 동관을 점령하도록 하고, 대장군 고오조(高敖曹)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낙주(洛州, 지금의 섬서성 상현)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후에 서진하여 남북에서 장안을 협공하고자 한 것이다.

 

우문태는 당시 병사를 이끌고 광양에서 장안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고환이 동쪽에서 침입해온다는 군사정보를 듣고, 급히 장수를 소집해서 대책을 논의했다. 우문태는 상황을 분헉한 후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고환이 삼로(三路)로 나누어 호각제세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고, 부교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는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포판에서 황하를 건너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목적은 우리군의 주력을 유인하여 황하양안에서 그의 군대와 대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선봉인 두태는 우리 병력이 부족한 틈을 노려 황하를 건너, 동관의 요지를 점령함으로써 우리 군을 관내에 묶어두고 섬멸하겠다는 것이다. 고환은 병사를 일으킨 이래로 항상 두태를 선봉으로 파견했고, 두태의 수하에는 정예병사들이 모여 있어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교만심이 있을 것이고, 스스로 무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고로 '교만한 병사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번에 먼저 두태를 치려고 한다. 두태가 패하면, 고환은 우리가 치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우리가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의문을 나타냈다: "고환은 우리에게서 가깝고, 두태는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데, 가까운 적을 버리고 멀리 있는 적을 치다가 만일 잘못된다면, 고환의 주력은 황하를 건너게 될텐데 그때 우리가 후회하면 늦지 않을까요?" 그러자 우문태는 아주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없다. 나는 정예병사를 데리고 습격할 것이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두태를 칠 것이다. 이 조치에는 만의 하나라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만의 하나 고환이 진짜로 황하를 건넌다고 하더라도, 우리 군은 잠시 패상(覇上, 지금의 섬서성 임동)으로 물러나는 것일 뿐이다. 여전히 장안은 지키는 것이고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우문태는 여러 장수들의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하여 이렇게 추가했다: "고환은 이번에 대군을 이끌고 국경으로 몰려왔는데, 우리가 병력이 약해서 그저 방어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격하여 그들의 선봉을 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일시적인 성공에 자만심이 가득 차있다. 이 기회를 틈타서 공격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인가? 그는 비록 부교를 만들었지만, 군대는 한꺼번에 건너올 수 없다. 최소한 5일은 걸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두태를 없애면 된다" 우문태의 이러한 작전방안은 직사랑중 우문심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우문태가 방안을 정하자 군대는 장안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고의로 소문을 냈다: "동위의 공격에 군사들의 기세가 대단하여 막아내기 힘들어서 농우(감숙동부)로 물러가서 방어하는 것이 낫다. 잠시 날카로움을 피하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햇다" 그리고 고의로 군대를 서쪽으로 물리는 모습을 보여, 고환을 마비시켰다. 다음 날, 우문태는 문제인 원보거(元寶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병사를 이끌고 몰래 동쪽으로 달려갔다. 위수를 따라 동관왼쪽의 금곡에 도달했는데, 그 곳의 지명이 소관(小關)이었다. 두태는 이때 이미 동관을 점령하였고, 우문태의 군대가 달려온다는 정보를 듣고는 스스로의 힘만을 믿고, 황급히 풍릉에서 황하를 건너 전진했다. 우문태는 목택(牧澤)이라는 유리한 지형을 선택해서 사방에 매복을 시키고, 두태로 하여금 진흙못으로 들어오게 유도했다. 두태의 철기부대는 이 계략에 빠져 서위군대의 화살을 맞고 절반이 사상당했다. 두태 자신도 몸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아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결하고 만다.

 

고환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놀람을 금치 못했다.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할 수 없이 급히 부교를 철거하고, 군대를 되돌렸다. 그리고 고오조에게 상락의 전선에서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우문태는 약한 병력으로 강한 고환의 부대를 이겼다. 기습 한방으로 승부를 결정지은 것이다. 동.서위간의 전투에서 첫번째 승리를 우문태가 거두었다.

 

소관전투는 우문태가 가장 멋지게 이긴 전투였다. 당시 서위의 압력은 매우 컸다.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였고, 병력도 약한 편이었다. 우문태의 위신도 아직 다 수립되지 못했었다. 회의 경과를 보더라도 우문태가 내세운 방안에 대하여 여러 장군들은 지지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때의 서위는 확실히 비바람에 흔들리는 형국이었고, 조금만 잘못하면 전체가 날아갈 상황이었다. 우문태는 이때 영웅의 기질을 나타내서 중론을 물리치고,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여 큰 일을 해냈다. 상대방이 몇 로로 나누어 오더라도 나는 그 중 한 곳만을 치겠다는 것이다. 소관전투는 이런 점에서 아주 전형적인 것이었다.

 

사원지전(沙苑之戰)

 

다음 해, 동.서위간에는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이해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서하며 말하기를: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하남성 양평의 서북)을 공략하고, 동위의 수비장수 고숙례(高叔禮)를 생포한다. 다음 날, 다시 항농성(恒農城,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을 함락시켜 동위의 섬주자사 이휘백, 항농수비장수 고천 및 수비군사 80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리하여 일시에 위세를 떨치며 주위의 의양(宜陽, 지금의 하남성 한성), 소군(邵郡, 지금의 산서성 고성)은 속속 서위에 투항한다.

 

고환은 공격의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놀란다. 그리하여 선비족의 주력병사 10만을 모아서 포판으로 출발시킨다. 이와 별도로 대장군 고오조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황하이남에서 우문태를 막도록 시킨다. 사실, 우문태의 동정은 그저 한번 위세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관중에 양식이 부족하였는데, 동위의 항농성에는 대량으로 곡식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식량을 빼앗기 위한 것이 큰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고환의 병사가 다가오자, 그는 이미 50여일을 머물렀던 곳에서 가득 싣고는 되돌아가 버렸다.

 

고환은 크게 손해를 보았고, 화가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군대를 지휘하여 포판에서 다시 황하를 건넌다. 다시 낙수를 건넌다. 10만대군을 허원(許原)에 주둔시킨다. 그리고 우문태를 찾아서 보복하고자 한다. 우문태는 당시 수정에 1만의 병마밖에 없어서 상호간에 차이가 현격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부장인 우문심이 이렇게 말했다: "고환은 황하이북에서 민심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는 지모는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의 명을 따릅니다. 만일 자기 땅에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가 그를 이기기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병사를 몰아서 서쪽으로 왔습니다. 선비족들간에 서로 싸우도록 한다면 이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니, 마음을 하나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저 두태를 잃고, 곡식을 잃어서 체면이 땅에 떨어졌기 대문에 분하여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화가난 병력은 한번만 싸우면 포로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우문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정예병사를 모아서 위수의 남안에서 건너 북안의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현 남쪽)으로 갔다. 이곳은 고환의 대군과 60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대장인 이필은 다시 우문태에게 건의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평지에서 대치해서는 안됩니다. 이곳의 동쪽 10리에는 위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적을 막을만 합니다" 우문태도 맞다고 생각해서 군대를 다시 10리보내어 물을 등지고 동서로 진을 펼쳤다. 이필은 서쪽의 방진을 지휘하고, 조귀는 동쪽의 방진을 지휘했는데, 모두 갈대숲에 매목해 있었고, 북소리를 신호로 적과 싸우기로 했다. 10월 2일 신시, 동위의 대군이 위곡으로 진격해들어왔다. 서위의 병사가 적은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서쪽의 방진으로 쳐들어갔다. 우문태는 적군이 온 것을 보고는 북을 울려 싸울 것을 독려했다. 우근은 병사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였고, 이필, 조귀의 매복병사들도 갑자기 들고 일어났다. 이필의 철기는 동위의 주력을 막았다. 고환의 대군은 둘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호응하지 못했다. 고환의 대장인 팽락은 창자가 나올 정도로 싸웠지만 결국 동위의 군대가 패�ㅆ다. 고환은 밤을 세워 낙타를 타고 황하서안으로 도망쳤고, 배를 빼앗아서 황하를 건넜다. 거의 전군이 몰살당했다.

 

사원전투에서 우문태는 포로로 7만을 붙잡았고, 양초와 물자는 부지기수였다. 포로중에서 2만명을 뽑아서 군대에 보충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목은 고환이 이미 놀라서 혼비백산한 것을 보고는 추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우문태는 고환이 반격하는 것이 걱정되어,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않는 법이라고 보고, 군대를 위남으로 되돌렸다. 이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문태는 모든 병사들에게 나무 한 그루씩을 심게 해서 전공을 나타냈다.

 

사원전투의 의의는 고환이 서위를 삼키겠다는 의도를 철저히 깨트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우문태의 권위는 확립되었고, 전쟁후에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에 돌았다. 정치적인 위망도 날로 급증했다. 이후는 쌍방간에 밀고당기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전략적으로는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하교지전(河橋之戰)

 

이어서 하교지전이 벌어진다. 서위는 사원대첩후, 사기가 올라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일거에 하동의 포판과 낙양의 금용성을 확보했다. 동위의 효정제 원상원년(538년)에 동위의 대장인 후경(候景)은 금용을 다시 빼앗았고, 낙양내외의 많은 민가와 관청을 불살랐다. 서위의 문제 원보거와 승상 우문태는 원래 낙양을 점령한 후 선제의 능원에 제사지내고자 하였는데, 후경이 금용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우문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서 지원했다. 전군이 곡성(谷城, 하남 신안현 동쪽)에 이르렀을 때, 동위의 선봉 막다루대문을 죽였다. 후경은 서위의 대군이 지원을 오자, 포위를 뚫고 물러났다. 우문태는 경기부대를 몰고 하상까지 추격했다. 후경은 북으로 하교(河橋, 하남성 맹현 서남)를 두고, 남으로 망산(邙山, 하남 낙양시 북쪽)에 의지하여 진세를 펼쳐, 우문태와 대적했다. 두 군대가 대치한지 얼마되지 않아, 우문태가 탄 말이 화살을 맞아서 놀라서 날뛰었다. 도독인 이목은 우문태의 곁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우문태가 말에서 떨어지자, 좌우가 모두 흩어졌다. 동위의 병마가 추격해 왔다. 이목은 말채찍으로 우문태를 때리면서 욕을 했다: "이 쓸모없는 놈. 너의 주인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데, 너는 아직까지 여기 남았느냐?" 동위의 병사들은 이 말을 듣고, 우문태가 신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이목이 말을 우문태에게 주어, 우문태는 병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후경은 초기에 승리를 거두자, 서위의 군대가 물러갔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위의 군대가 물밀듯이 다시 몰려왔다. 후경은 다시 진을 펼칠 새도 없이 서위군에게 패배했고, 병사들이 흩어졌다. 후경 자신도 말을 타고 도망쳐야 했다. 고오조만이 용감하게 우문태와 격전을 벌이다가 겨우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단기필마로 하양남성으로 갔다. 하양남성의 수비장군인 고영락은 고조오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성문을 닫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고오조는 다리아래에 숨어 있다가, 서위의 추격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고오조는 동위의 군사(軍司), 대도독이며, 통칠십육도독이며, 동위의 군대내에서 고환에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유명한 맹장이었다. 그는 한족이며, 당시 선비족의 한족에 대한 태도는 아주 오만했으마, 고오조의 앞에서는 함부로 하지 못했었다. 고환은 부대에 얘기할 때는 선비족의 말로 하는데, 고오조가 있으면 한어로 바꾸어 말하곤 했다. 이번에 동위군은 대패를 했고, 물에빠지거나 죽은 자가 만에 달하였고, 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고환은 후경이 패배했다는 말과 고오조가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간이 떨어지는 것같았다. 그리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빼앗으러 갔다. 쌍방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날은 안개가 가득 끼었고, 전선이 너무 길어서, 앞과 뒤는 거리가 멀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웠는데, 수십합을 겨루었지만 쌍방은 교착상태였고,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서위의 좌우익인 독고신, 조귀는 전투에서 불리하고, 주사령관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자, 두서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패배한 줄 알고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군 이호, 염현등도 따라서 도망쳤다. 서위의 전선이 어지러워지자, 우문태는 할 수 없이 군영에 불을 질러 태운 후에, 장손자언을 남겨 금용을 지키게 하고, 장안으로 되돌아갔다. 회군하는 도중에 우문태는 항농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번 전투에서는 쌍방이 비긴 셈이다.

 

망산지전(邙山之戰)

 

쌍방은 다시 5년간 대치한다. 동위 효정제 무정원년(543년)에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전쟁의 원인은 동위의 북예주자사 고중밀(高仲密)의 처가 고환의 아들인 고징(高澄)에게 희롱을 당하여, 고중밀이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하고 만다. 우문태는 여러 장수를 이끌고 그를 맞이하고, 하교의 남성으로 진격한다. 고환은 고중밀이 반란을 하고 우문태가 침범해왔다는 말을 듣고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하북으로 막으러 갔다. 우문태의 군은 전상으로 물러가서 군사들에게 배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상류에서 불을 질러 하교를 불태워서 고환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동위의 장령인 곡률금은 행태랑중 장량을 파견하여, 작은 배 백여척으로 적선을 막고, 쇠사슬로 연결해서 강을 가로지르게 했고, 황하의 양안에 고정시켰다. 적선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서 하교(河橋)의 안전을 보호했다. 고환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고 망산이라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여러 날을 진격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우문태는 물자가 전곡에 남겨져 있어, 밤을 틈타, 정예부대를 이끌고 고환의 군대를 습격했다. 그런데 고환의 군대는 미리 눈치채고 전체부대를 대기시켰다. 여명이 되자 과연 우문태의 군대가 왔다. 고환은 장수 팽락은 우문태의 부대가 진열을 정비하기 전에 수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우문태의 군대는 대패하여 도망쳤다. 고환의 군대는 이들을 쫓아서 전상까지 뒤쫓았다. 우문태는 병영을 버리고 다시 도망쳤다. 서위의 시중 대도독인 임조왕 원속, 촉군왕 원영종, 강하왕 원승, 거록왕 원선, 초군왕 원량, 첨사 조선등이 모두 포로로 잡혔고, 병사들중 사상자가 6만여에 달하였다.

 

동위의 대장 팽락은 우문태를 급히 뒤쫓았다. 우문태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대장군 팽락이냐? 멍청한 남자로다. 생각해봐라 오늘 내가 없어진다면, 내일 네가 있겠는가? 하루빨리 군영으로 가서 재물이나 챙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듣고 팽락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우문태를 뒤쫓지 않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누군가 팽락이 우문태를 놓아주었다고 고발했다. 고환은 대로하여 패검을 뽑아 팽락의 목에 세번 내려치려다 세번 들어올리고는 결국 팽락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늘 내가 너를 용서해주니 이전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공을 세워 속죄하라고 하였다. 팽락은 연신 명을 따르겠다고 응락했다. 우문태가 아직 살아있으므로, 고환은 감히 군대의 용장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양군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서위의 중군, 우군이 연합하여 동위를 격패시켰으나, 좌군이 패배했다. 우문태는 전체적으로 불리해지자 병력을 이끌고 관내로 물러갔다.

 

망산지전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서위는 경령귀, 왕호인, 왕문달의 세 장군에게 상을 내렸다. 우문태는 이때 비로소 관중 사람들이 용맹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널리 병사를 뽑아서 군대에 충당시켰고, 부병제를 창립하여 병사들을 백성들 속에 들여보냈다. 일단 필요하면 그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동시에 관료제도도 개혁하여 선비식 제도를 한족식 제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족의 정책을 써서 국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옥벽지전(玉璧之戰)

 

다시 3년이 지났다. 동위 무정4년(546년) 다시 옥벽지전이 벌어진다. 이해 10월, 고환은 다시 10만대군을 이끌고 서위의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포위공격한다.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거점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고환은 밤낮을 쉬지 않고 공성한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십여개의 지하터널을 팠다. 서위의 수비장수 위효관은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응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산보다 높은 누대를 쌓고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성을 타고 오르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참호를 파서 동위의 지하터널과 연결시켰고, 참호의 바깥에 장작을 쌓아두고 지하터널에 불을 질렀다. 이리하여 동위의 병사들이 감히 지하통로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환은 공성거를 이용하여 성벽을 부수려고 하였는데, 위효관은 베로 만자(子)를 만들어 공성거가 움직이면 바로 만자를 펼쳐서 공성거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환은 병사들에게 죽간을 들고 위에 기름을 발라 만자를 불태우고자 하였다. 위효관은 긴 갈고리를 만들고 끝에는 칼을 달아서, 죽간의 끝을 잘라버렸다. 고환은 다시 20개의 지하터널을 팠고, 가운데 기둥을 두어, 불로 태우면, 기둥이 무너지면서 성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위효관은 나무를 쌓아놓고 기다려서 무너지기만 하면 바로 목책을 세우곤 하였다. 그리하여 고환의 군대는 여전히 성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50여일을 공격하는데, 병사들중에 전사하거나 병으로 죽은 자가 약 7만에 이르렀다. 시체로만 하나의 산을 만들 정도였다. 고환은 이때 머리를 너무 써서 병이 들었다. 할 수 없이 포위를 풀었다. 서위는 방어전의 승리를 거두었다. 고위는 진양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 나이가 52세이다.

 

옥벽지전은 남북조 역사상 가장 힘들게 싸운 공성전투이다. 고환은 당시에 사용가능한 모든 공성기술을 사용했으나 여전히 성을 격파하지 못했다. 이는 서위의 수비장수인 위효관의 방어능력이 뛰어났다는 것과 옥벽성의 관민이 일치하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고환이 겨울을 택해서 공격하여 기후가 추웠다는 것, 병사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점등으로 인하여 공성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고환이 병으로 죽은 후, 후경이 반란을 일으킨다. 동위는 고환의 아들인 고징이 대권을 장악한다. 쌍방은 여전히 싸웠다. 서위는 후경의 난때 동위의 영주등 땅을 차지한다. 동위 무정8년(550년)에 동위의 고징은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영주(지금의 하남성 장갈현 동북)를 1년간이나 공격한다. 쌍방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게 된다. 나중에는 수공(水攻)을 취하여 마침내 함락시킨다. 그러나, 동위의 명장 모용소종이 이 전투에서 죽는다. 성을 수비하던 서위의 명장 왕사정(王思政)은 동위에 투항한다. 이때 후경이 양나라를 어지럽히고, 남조가 쇠퇴하자, 동서 양위는 이때서야 전투를 멈추고 양나라를 삼키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