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강(羅大綱): 중용받지 못한 태평천국 최고의 전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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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2020. 1. 19.

글: 림림(琳琳)


중국의 지세는 서고동저(西高東低), 북고남저(北高南低)이다. 지형등 원인으로 군사투쟁에서 남방인이 북방인을 이긴 경우가 드물고, 동부정권이 서부정권을 이긴 경우도 드물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남방에서 북벌하여 전국을 통일한 승리는 단지 2번이다. 1번은 주원장이 지휘한 것이고, 다른 한번은 장개석이 지휘한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각각 대명왕조와 중화민국국민정부의 통치기초를 이룬다. 그래서 북벌승리를 거두려면 아주 뛰어난 전략가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태평천국 북벌의 실패는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의 잘못된 전략기획과 아주 큰 관련이 있다. 양수청은 일찌기 태평천국의 천재적인 전략기획가였다. 태평천국이 성립된 후, 관병의 포위공격을 받으면서 연이어 좌절을 겪는다. 특히 사의도(蓑衣島) 전투에서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풍운산(馮雲山)이 죽은 후, 많은 사람들의 사기가 저하되며, 광동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때, 양수청이 "도주결책(道州決策)"을 내놓는다. 그 내용은 태평군이 양광(광동, 광서)를 포기하고 장강으로 북상한 후 동으로 남경을 점령하여, 동남의 재부가 몰려있는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양수청은 격앙하여 소리쳤다: "지금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이다. 어찌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의 상책은 월(광동,광서)을 버리고 앞으로 전진하여 강을 따라 동으로 진격하며, 성을 공력하고 요새는 포기하며, 금릉을 차지하는데 집중하여 근본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 후에 장수를 사방으로 내보내, 남북을 교란시키면 된다. 그러면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황하이남은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


도주결책은 양수청이 태평천국내에서 내린 가장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다. 그것은 태평천국의 발전방향을 명확히 한 것이고, 광서로 돌아간 후 적에게 포위공격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태평천국의 생사에 관련된 전환점이고, 흥쇠를 가름하는 관건이었다. 그후 양수청의 고무와 호소하에, 태평천국은 합심하여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침내 남경을 탈취한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차지한다. 다만, 그후의 양수청은 전략적인 안목이 저하되기 시작한다. 그는 남경을 수도로 정하기로 결정했을 뿐아니라,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일로는 북벌(北伐)을, 일로는 서정(西征)을, 일로는 남경외곽을 공략하도록 한다. 이 전략은 겉으로 보기에는 원대하고 거시적으로 보이지만, 사방으로 출격하며, 중점이 없다. 결국 태평천국은 이로 인하여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천하를 차지할 기회를 잃게 된다.


기실, 이때 태평천국에게는 더욱 좋은 전략이 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 전공을 혁혁시 세우고, 당시 전좌일지휘(殿左一指揮)로 승진해 있던 나대강이 내놓은 것이다. 아쉽게도 양수청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대강의 북벌전략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북벌연경(北伐燕京), 필선취하남(必先取河南)


나대강은 만일 북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하남을 평정해야한다고 보았다. 황하이남을 수복한 후 다시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경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태평군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홍수전(洪秀全), 양수청은 급히 하북을 도모하고, 연경을 취하려 했다. 나대강은 적절하게 그렇게 하는 경우의 위험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병력을 너무 깊이 진입시키게 되면, 험지로 들어가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니 패배하는 길이 된다." 역사학자 맹삼(孟森)은 이렇게 평가한다. "나대강은 소수의 군대를 너무 깊이 진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홍수전은 금릉에 안주하지 말아야 했다. 북벌군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임,이의 북벌군은 전멸한다. 홍수전과 같은 자들은 중원에 뜻이 없었다. 그 일은 <청사고>에 상세히 적혀 있다." 다만, 양수청은 승상 임봉상, 이개방을 파견하여 연경으로 돌진하게 하며, 먼저 진강, 양주를 격파하고, 북상한다. 그런데, 홍수전은 멍청하게 북벌군에게 이렇게 명한다: "직접 연경을 노리고 진격하며, 중도에 성을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이는 바로 군대로 하여금 후방지원없이 거대한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군사모험주의의 잘못을 범한다. 비록 용맹한 북벌군이 한때 천진위에 다가가서, 천자로 하여금 잠을 못이루게 하기는 했지만, 양류청까지 밀고 올라가서 천자로 하여금 놀라서 혼절하게 만들었지만, 후방지원이 없고, 게다가 북방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여, 북벌군은 결국 모조리 희생당하고 만다. 북벌군은 천진에서 참패하고 전멸한다. 나대강의 말이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둘째, 선남후북(先南後北), 삼로북벌(三路北伐)


나대강은 만일 전군으로 북벌을 하려면 반드시 후방근거지를 건설해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남방9성을 모두 평정한 후, 내우가 없을 때, 출병하여 북벌해야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야 양쪽에 모두 전선이 형성되고 후방조달에 압력을 받는 일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벌노선에서, 나대강은 북벌은 3로로 출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1로는 호남호북에서 출발하여 북벌하고, 1로는 섬서한중에서 출발하여 북벌하고, 1로는 서주에서 출발하여 산동을 공격한 후 다시 산서를 취하고, 다시 3로가 합쳐서 연경을 공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 정도천경(定都天京), 필건수사(必建水師)


나대강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는데 반대했다. 그는 통열하게 지적한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안주하려고 하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그는 또한 만일 반드시 남경을 수도로 정하려면, 수군을 건설하는 것을 중시해야한다고 말했다. "남경을 수도로 정하려면 반드시 전선을 많이 만들어야 하고, 수군을 정예군으로 훈련시켜야 한다. 전함을 건조하기 전에는 반드시 목벌(木筏)로 강을 막아서 장강의 수상우세를 상대가 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전략적으로 정확한 의견을 양수청은 취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역사학자 맹삼은 이렇게 평가한다: "동남은 반드시 수군을 써야 한다. 그의 식견은 곽숭도(郭嵩燾), 강충원(江忠源)과 같고, 그리고 증국번(曾國藩)이 사용한 것이다." 태평군은 전투능력이 있는 수군을 끝까지 갖지 못한다. 이는 나중에 상군에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수군이라는 허명으로 민간의 배를 빼앗아서 묶어 크게 만든 것이다. 운수에는 쓸 수 있고, 허장성세를 보일 수는 있지만, 전투에는 쓸모가 없었다. 상군은 수군과 육군을 모두 훈련시켰다. 상군의 수군이 나서자 태평군의 선박은 즉시 불에 타버리고 만다. 강과 호수의 지형적 잇점을 상군만 이용하고, 태평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하면, 나대강의 북벌전략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전략적 안목은 확실히 당시 태평천국의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던 동왕 양수청보다 훨씬 뛰어났다. 아쉽게도 나대강의 견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본인도 전공을 많이 세웠지만, 계속하여 중용되지 못한다. 사후에 겨우 '분왕(奮王)'에 추봉되었을 뿐이다. 나중에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에게 나대강이 왜 왕에 봉해지지 못했느냐고 물어본다. 이수성은 이에 대하여, "이 일은 아주 복잡하다. 말할 것이 없다." 그의 뜻은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기실 나대강은 천지회(天地會) 출신이고, 배상제교(拜上帝敎) 원로들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남경을 점령한 후,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과 연합하여 북발을 진행하는데, 그의 방식은 바로 나대강이 주장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아쉽게도 양수청은 일련의 군사적 승리로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고, 자신은 너무 높게 평가했다. 자신의 실력과 의도간의 비대칭에 대하여 고려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서정에서는 힘들게 승리를 거두고, 북벌은 고군으로 실패하고, 가장 관건적인 외곽정리전투에서도 계속하여 피동적인 위치에 처해 있었다. 특히 남경의 외곽방어선은 끝까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이는 태평천국전략의 최대 실패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