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시대 최대의 서화위조단: 4건은 미국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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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2021. 1. 9.

글: 연석서원(硯石書院)

 

1947년 단오절 전날, 당시 상하이 소장계의 거물인 담경(譚敬)은 서화위조전문가인 탕안(湯安)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쌍송평원도(雙松平遠圖)>의 복제품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둘은 바로 의기투합했고, 담경은 장소를 제공한다. 바로 상하이 기제로(祈齊路, 지금의 악양로) 175농 2호의 구식 화원양방(花園洋房)이다. 탕안이 앞장서서 허소(許昭), 정죽우(鄭竹友), 호경(胡經), 왕초군(王超群)등이 모인다. 이들은 모두 상하이에서 뛰어난 서화위조전문가들이다. 이렇게 이들은 근대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화위조활동을 벌이게 된다.

쌍송평원도

위조의 주모자는 소장가인 담경이다.

 

담경(1911-1991), 자는 화암(和庵, 龢盦)이고 재호(齋號)는 구재(區齋)이다. 조적은 광동 개평이며, 그의 조상은 유명한 광주십삼행중 하나이며 주로 해외무역을 했다. 조부가 상해로 이사를 가서 정착했고, 상해의 한구로 소화원부근에 담동흥영조창(譚同興營造廠)을 만들어 수십년간 운영했고, 상해탄의 부호가 되었다.

 

담경이 부친은 집안의 셋째아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담노삼(譚老三)이라고 부른다. 일찌기 영국에 유학을 했는데, 민국의 유명한 외교가인 왕총혜(王寵惠)와 동문수학했다. 1912년 1월, 왕총혜가 남경임시정부 초대 외교부의 총장을 맡았을 때, 담경의 부친도 외교부에서 주사로 지낸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담경의 모친은 당패서(唐佩書)로 부유한 상인집안 출신이다. 당패서의 오빠, 즉 담경의 외삼촌은 바로 저명한 차상(茶商)인 당계산(唐季珊)이다. 그는 세계3대홍차중 하나인 기문홍차(祁門紅茶)를 판매했다. 그리고 그는 상해연화영화공사의 대주주였으며, 유명한 영화배우 완령옥(阮玲玉)을 취한다. 모친 당패서는 아들 담경에 대한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그리하여 영남사인(嶺南詞人)으로 '근대영남육대가'중 하나로 불리는 반비성(潘飛聲, 1858-1934)를 가정교사로 모셔서 담경에게 시문을 가르치게 한다.

 

담경은 1936년 상해 복단대학 상과를 졸업한다. 1939년에는 뉴욕대학의 대학원에서 국제무역학과를 졸업한다. 귀국후에는 화업신탁공사, 화업공정유한공사의 동사장, 동남신탁은행 상무동사등의 직위를 맡는다. 1948년에는 홍콩화상총회 이사가 된다.

 

담경은 부호가정에서 태어나서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뛰어난 사업수완을 지녔다. 비지니스계에서의 서로 속고 속이는 권모술수에 아주 능했다. 1939년 그가 유학에서 귀국한 후, 오랫동안 부동산과 금융업에 종사했고, 사업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는 상해탄의 신예로 등장한다. 1949년에는 홍콩으로 옮겨간다. 

 

1939년부터 1949년까지 짧은 10년간, 담경은 상계의 신예에서 일거에 상해탄의 소장가로 성장한다. 방래신(龐萊臣), 오호범(吳湖帆), 장형(張珩)등 유명 소장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된다. 그는 많은 역사적인 명작들을 소장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 전쟁이 계속되고 사회가 어지러워, 소장가들이 생계를 위하여 계속 소장작품을 내놓았다. 둘째, 담경은 사업이 순조로와 돈이 많았다. 셋째, 그는 근대소장계의 거물인 장형선생으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다. 그리하여 눈을 떴고, 장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담경의 소장은 송,원시대의 서화작품에 집중되었다.

 

장형(1914-1963), 자는 총옥(葱玉), 호는 희일(希逸), 절강 남심(南潯)의 큰집안에서 태어난다. 청나라 도광연간, 장씨집안은 중국의 최고부자였다. 장형은 저명한 소장가인 장석명(張石銘)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있고, 특히 조부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젊었을 때부터 유명했다. 1934년 장형이 20살때, 고공박물원에서는 그를 감정위원으로 초빙한다.

 

장형의 서화소장은 수량이 많을 뿐아니라, 그 질도 뛰어났다. 여러 국보급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은 당나라때 장훤(張萱)의 <당후행종도(唐后行從圖)>축(軸)(絹本設色), 당나라때 주방(周昉)의 <희영도(戱嬰圖)>권(견본설색), 그리도 원나라때의 그림들이다. 장훤은 성당시기의 궁정화가로 인물화에 능했다. 특히 사녀(仕女)를 주제로 한 그림을 잘 그렸으며 자주 궁중의 연회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당후행종도>는 황후의 궁정생활을 그린 것이다. 주방은 당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중 하나이다. 그가 인물을 그릴 때 의상이 힘있고 간단하며, 채색은 화려했다. 대부분 귀족계층의 생활을 그렸다. <희영도>는 청말에 황궁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한다. 장형은 큰 돈을 주고 북경에서 사들였고, 아주 아꼈다.

 

장형이 16살때, 즉 1930년 200만은원의 가산을 물려받는다. 그는 당시에 유명한 젊은 부호였다. 그는 돈을 마구 쓰는 생활을 하였을 뿐아니라, 그는 도박을 좋아했다. 장형은 사업도 했고 대부분 부동산, 은행류의 큰 거래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사를 잘하지 못했고 항상 손해를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는 점점 쪼그라들고, 결국은 서화를 팔 수밖에 없었다.

 

담경과 장형은 모두 상해탄에서 자란 젊은 부자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 교분이 깊었다. 장형은 돈이 없으면, 자주 담경에게 돈을 빌렸다. 담경도 기꺼이 빌려주었다. 다만 조건은 장형이 소장한 고서화를 담보로 맡기는 것이었다. 장형이 돈을 갚지 못하면, 장형이 소장했던 그 유명한 서화들은 담경의 것이 되는 것이다. 왕계천(王季遷)은 이렇게 회고한다. "불행하게도 그(장형)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도박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에게 유명한 사건 하나는 하룻밤만에 상해의 유명한 대세계를 잃은 것이다. 그의 부동산은 어떤 것은 도박으로 잃고 어떤 것은 은행과의 거래가 잘 되지 않아서 물어주어야 했었다. 그는 유명한 서화작품들을 담경에게 담보로 맡겨야 했다."(양개림 편저 <왕계천독화필기>, 중화서국 2010년 12월 북경제1판). 담경과 장형의 교분은 얕지 않았다. 심지어 '강탈해가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장형이 소장하고 있던 원나라 안휘(顔輝)의 <종규출렵도(鍾馗出獵圖)>권은 장형의 일기에 담경이 '강탈해 갔다'고 적혀 있다. 그후 <목안재서화감상필기(木雁齋書畵鑒賞筆)>에는 다시 이렇게 기록한다: "담경은 나의 어릴 때 친구이다. 자라서도 기호가 같았다. 그래서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리고 강탈해 갔다....."

 

3대 소장가인 장형은 이렇게 쇠락해갔다. 대소장가 방래신(1864-1949)는 이때 이미 늙었다. 그리고 오호범도 마음은 있지만 힘은 부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담경은 이때 상해탄에서 새로운 최고 소장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심지어 기고만장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허재(방래신)은 낙오되었고, 총옥(장형)은 힘이 없다. 상해의 송,원 서화분야에서 누가 나와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담경이 소장하고 있던 송, 원 및 명초의 유명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송나라 조휼(趙遹) <노남평이도(瀘南平夷圖), 남송 조자고(趙子固) 수선도(水仙圖), 원나라 조맹부의 <쌍송평원도>와 <조씨일문합찰(趙氏一門合札)>, 조원(趙原) <청천송객도(晴天送客圖)>, 예찬(倪瓚)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가구사(柯九思) <상경궁사(上京宮詞)>, 명초 하창(夏昶) <죽천춘우도(竹泉春雨圖)>, 해진(解縉) <자서잡시(自書雜詩)>, 양일청(楊一淸) <자서시(自書詩)등.

 

장형의 지도로 담경은 다음과 같은 작품들도 사모은다: 유공권(柳公權) <신책장군비(神策將軍碑)>, 미불(米芾) <향태후만사(向太后挽詞)>, 마원(馬遠) <답가행(踏歌行)>, 가구사의 <상경궁사>, 하중소의 <죽천춘우도>, 황산곡(黃山谷)의 <복파신사시권(伏波神祠詩卷)>, 심주(沈周)의 <이죽도(移竹圖)>등

 

이제 담경은 이미 상해탄 소장계에서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담경의 서화위조와 그 일당들

 

소장가는 역대이래로 여러 유형이 있다. 첫째 유형은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며 소장품을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청나라때의 고사기(高士奇, 1645-1704)가 있다. 그는 황제가 소장품을 내놓으라고 할 때도, 위작을 내놓으면서 버텼다. 더욱 이기적인 인물로는 명말의 오홍유(吳洪裕)가 있다. 그는 후손들에게 소장하고 있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불태워 자신과 함께 순장해달라고 한다. 둘째 유형은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재물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단 생활이 힘들어지면, 자신의 소장품을 팔아버린다. 장형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셋째 유형은 이익을 노리고 구매하는 사람이다. 목적은 이익을 얻는 것이다. 

 

담경은 대체로 셋째 유형에 해당한다. 그의 안목은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소장하는 것은 모두 이익을 노리고서이다. 예를 들어보면,

 

1. 저명한 소장가 장숙미(張叔未, 1768-1848)은 '건문(建文)'이라는 낙관이 있는 명나라때의 필가(筆架)를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는데, 희세진품이다. 나중에 담경이 손에 넣는다. 그런데 명청시대의 도자기를 소장하기로 이름난 구염지(仇炎之)가 그것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담경은 넘겨주지 않는다. 기실 그건 가격문제였다. 결국 구염지가 '건문'낙관이외의 각 연대낙관이 있는 자기를 내놓고서 바꾸게 된다.

 

2. 그가 소장하는 것은 종종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한 것이다. 가격을 형편없이 후려쳤고,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한번은 담경이 방래신(허재)로부터 조맹부 일문이 그린 <삼죽>권을 사는데 그떄 허재는 돈이 급했고, 담경은 가격을 마구 후려쳤다. 허재는 담경보다 배분이 높았고, 나이도 오십여세가 많았다. 평소에 담경은 그를 존경해왔다. 그러나 이때 담경은 돈을 가지고 오만했다. 도의는 완전히 내팽개쳤다."*(<해상수장세가>, 정중 저, 상해서점출판사. 2003년 제1판).

 

담경은 원래 뛰어난 상인이다. 그의 눈에 예술품도 다른 상품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상인은 당연히 이익최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서화위조는 이익이 많이 남는 일이고, 소장계에서는 가장 큰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담경은 이익을 위해 도덕적인 선을 넘어 버린다. 그리하여 위조의 길로 들어선다. 이는 그의 금전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화위조는 전문성이 높은 기술이다. 욕심을 낸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건은 위조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담경이 반비성의 문하에서 시문을 배울 때, 그에게는 대사형(大師兄)이 있었다. 이름은 탕안이다. 그는 그런 위조능력이 있었다.

 

탕안(?-1965), 호는 임택(臨澤), 절강 가흥 사람. 나이는 담경보다 20여세 많다. 그는 원래 약방에서 일했다. 그는 금석서화에 능했고, 역대 유명인사들의 전각, 서화를 위조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탕안을 잘 아는 상해의 전각가 진거래(陳巨來,1904-1984)는 그의 <안지인물쇄기(按持人物瑣記)>에서 탕안의 위조에 대하여 많이 까발린다. 탕안이 위조한 골동품은 3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인장(印章)으로 그가 위조한 것은 심주, 문징명, 당백호, 구영등 명나라때 오문4대가도 있고, 문수도인(문가), 김준명, 방효유등 역대명인의 인장도 있다. 이들 가짜인장의 재질은 서각, 상아등이다. 그가 조작한 벌레먹은 모습, 갈라진 흔적까지도 진짜와 같았다고 한다; 둘째는 자사호(紫砂壺)이다. 일찌기 오호범이 소장하고 있던 명나라때 진명원(陳鳴遠)의 자사호를 빌린 적이 있는데, 모조품을 만든 후에는 오호범도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셋째는 서화위조이다. 진거래는 직접 탕안이 위조하는 작업장을 가보았다고 한다.

 

"그(탕안)는 일찌기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서 스스로 위조한 일을 얘기해준 적이 있다. 그의 집은 당시 납도로 흥순리에 있는데, 2채였다. 1채는 그가 사는 집이고, 1채는 그가 위조하는 공장이다. 그가 한번은 기분이 좋아져서 나를 데리고 공장으로 가서 보여준 바 있다. 표구하는 곳에는 일꾼 1명이 있을 뿐이었다. 천정의 벽에는 무슨 문천상의 글, 사가법의 대련, 축지산의 등등등 수십장의 종이가 비를 맞고 햇볕을 쐬고 있었는데,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해져서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낡고 헤여졌는데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탕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형편없이 낡고 헤어진 후에 다시 내가 수리하고 보완하면 진짜처럼 된다. 그러면 사람들을 속여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일찌기 가흥 장숙미의 후손에게서 2원을 주고 청의각의 잔탁편 1포를 구매했는데, 싼 종이는 1,2척된 오래된 종이였다. 거기에는 장옹이 직접 싼 것이다. 붙이는 곳에 직접 "가경모년모월숙미봉'이라는 9글자가 있었다. 글자를 쓴 곳이 마침 왼쪽 아래였다. 나는 그래서 '봉'자를 지웠다. 종이에 연꽃을 한폭 그려놓고서 가짜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요우금(姚虞琴)에게 팔았는데 200원을 받았다. 요우금은 그것을 얻고서 매우 기뻐하면서 오부로(吳缶老, 吳昌碩)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부로는 숙미의 친필인 것만 확인하고, 그림이 아주 뛰어나다고 여겨서 싯구를 써주었다."

 

탕안는 나이도 많고, 서화조작으 유명했다. 또한 담경의 대사형이다. 그래서 담경이 탕안으로 하여금 앞장서서 서화조작단을 만들도록 요구한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탕안이 담경을 위하여 위조한 첫번째 위조품은 조맹부의 <쌍송평원도>이다. 그때는 1947년 단오절 전날이었다.

 

정중(鄭重) 선생은 담경의 서화위조에 대한 연구를 깊이있게 했다. 그가 쓴 <60년간 잠들어 있던 가짜그림 배후의 이야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탕안은 허징백(허소), 정죽우, 호경, 왕초군등을 모아서 서로 분담하며 합작했다. 허소는 그림을 모방하고, 정죽우는 낙관글자를 위조하고, 호경은 인장을 만들고, 탕안은 오래되도록 보이게 만들었으며 이후에는 김중어(金仲魚)가 그림을 모방했으며, 마지막에는 왕초군이 표구를 했다. 옛그림을 위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수백년 심지어 수천년간 전해져온 그림이 겪은 창상을 짧은 새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그림을 잘 그린 다음, 표구를 하고, 물 속에 집어 넣어 거의 보일락 말락할 정도로 만든다. 그후에 다시 옛그림이 전해져 내려온 것처럼 반복하여 표구하고, 옛그림을 보수하는 것처럼 보완하는 식으로 만들어 고색창연하게 보인 것이다."

 

"위조공장은 악양로 175농 2호에 두었다. 거기는 담경이 소유한 구식 화원양방이었다. 평상시에 드나드는 것은 영가로의 후문을 이용했다. 담경은 이를 기밀로 처리했다. 오직 서안(徐安, 懋齋)만 데려가서 보여주었다. 장형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서안의 여동생 서무천(徐懋倩)은 장형의 숙모이고, 유명한 화폐소장가인 장숙순(張叔馴)의 처이다. 서안은 고전(古錢), 서화를 소장했고, 장형과도 가까운 친구였다. 서안의 집에는 각종 인보(印譜)를 소장하고 있었고, 옛날 인니(印泥)도 공급해 주었으며, 상급의 붓과 오래된 종이 및 비단을 탕안에게 제공해 주었다. 복제에 쓰인 옛종이와 비단등 재료중 어떤 것은 북경의 고궁에서 사온 것도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담경의 위조집단내에는 업무분담이 명확했고, 각각 자신의 장점을 살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위조한 사람은 허징백이다. "역대 고화를 모방하면,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했고, 모두 고수로 인정했다."

 

허징백(1887-1948전후), 이름은 소, 자는 징백, 청속(淸簌), 실명은 기영초당(箕潁草堂), 강소 강도(양주) 사람. 산수와 인물잡화에 능했다. 상해미술전문학교의 교수로 여러 해동안 있었다. 그리고 '밀봉화회(蜜蜂畵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낙관을 모방한 사람은 정죽우이다. 그는 오랫동안 허징백과 합작하여 고화를 위조했고, 소장계에서 활약한다.

 

정죽우, 양주사람. 양주의 유명서화가 정기(鄭箕, 1809-1879)의 후손, 당시 상해에서 활약한 서화가, 고화모방의 고수.

<안지인물쇄기>의 기록에 따르면, 정죽우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창작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다. 다만 '진본'만 있다면 모방할 수 있다. 전혀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죽우와 합작한 사람으로는 상해의 표구업자인 유정지(劉定之, 자 春泉, 강소 구용 사람)가 있다. 그는 보수해야할 곳이 있으면 항상 정죽우를 찾아가서 부탁했다. 

정죽우는 나중에 상해시 문사관의 관원이 되고, 1962년 북경고궁박물원으로 가서, 북경고궁박물원에서 전문적으로 고화를 수리하는 작업을 한다.

 

인장을 만든 것은 호경이다. "호경이 인장을 모방하여 만들 때의 정확성은 촬영한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허실도 있고, 정신도 나타난다. 아연판도 잘 만들어, 일본의 아연판과도 싸울 만했다. 전후로 크고 작은 인장 수백개를 만드는데, 위로는 송,원나라의 명인부터 역대 공사인장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서화의 인장과 종이, 비단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데 진짜와 같았다."(<해상수장세가>, 정중 저, 상해서점출판사, 2003년 제1판), 그후 탕안이 전체적으로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마지막에 왕초군이 표구한다.

 

나중에 담경이 급여를 연체하자, 허징백은 화가나서 떠나버린다. 그를 대체한 사람이 김중어이다.

 

김중어도 양주 사람이다. 회화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친 김순(金純)은 자가 검오(儉吾, 혹은 建吾)인데, 민국시대 양주일대에서 이름을 날린 화가이다. 말련에는 상해로 이주했다.

 

1960년, 고궁수복창에서 모화실(摹畵室)를 두어 전문적으로 고궁의 서화소장품을 복제하여, 원작을 대체하여 전람과 소장하도록 했다. 김중어는 정죽우와 함께 북경고궁에서 일하게 된다.

 

"담경이 위조한 작품"은 어디로 갔을까?

 

담경의 서화위조단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전후로 2년여이다. 즉 1947년 단오절 전날부터 1949년 상해해방될 때까지이다. 그러나 전과는 찬란했고, 죄증도 적지 않다.

 

현재 이미 확인된 담경일당의 위조품은 4건이다:

 

송 조자고 <수선도>권, 원작은 천진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담경이 위조한 작품은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 조맹부 <쌍송평원도>권. 원작은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담경이 위조한 작품은 미국신시네티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나라 주덕윤(朱德潤)의 <수야헌도(秀野軒圖)>권,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담경이 위조한 작품은 미국 워싱턴 프리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나라 성무(盛懋)의 <추강대도도(秋江待渡圖)권,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담경이 위조한 작품은 미국 워싱턴 프리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외에, 1949년 담경이 홍콩으로 가기 전에, 위조작품을 그의 친구이자 상해산호봉기창의 자본투자자인 홍옥림(洪玉林)에게 넘겨주었다. 홍옥림은 이 위조작품은 상해의 골동품상 대복보(戴福保, 1910-1992)에게 넘겨 주었고,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해방군이 점령한다. 그후 홍옥림은 '문화재밀수조직죄'로 신중국의 법원에서 형을 받는다.

 

대복보는 몰래 이들 위조작품을 미국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자신의 창고에 60년간 묵혀둔다. 대복보가 죽은 후, 이들 위조작품은 미국의 크리스티경매에 나타난다. 모두 "담경작"이라고 표시되었는데, 9건이다:

 

원 조맹부, 관도승, 조옹 <총죽도>권,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

원 조선장 <추산유수도>권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

원 장손 <죽석도>권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

명 동기창 <방고산수책> 원작은 미국 넬슨박물관;

명 항성모 <송도산선도>권 원작은 미국 보스턴예술박물관;

명 항성모 <강남시의도책>, 원작은 행방불명;

명 항성모 <초은도>권, 원작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예술박물관;

청 운수평 <산수화훼책>, 원작은 북경고궁박물원;

무관 <진부십팔학사>, 원작은 행방불명.

 

'담경작'이 위의 몇 건만은 아닐 것이다. 국가문물국 사진생(謝辰生)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49년이후 담경이 위조한 조원의 <청천송객도>축의 소장자가 북경고궁박물원에 팔려고 했는데, 박물원의 서화담당자가 장형에게 쪽지를 보내어 감정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청천송객도> 진품은 원래 장형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은 담경이 위조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국가문물국 문물처의 관리로서 장형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가 위조작품이라고 말을 해서 그 작품은 고궁박물원에 들어오지 못한다. 나중에 장형이 소장하던 진품이 고궁박물원에 들어온다.

 

북경에 사는 한 외국인은 담경이 좋은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홍옥림에게 부탁하여 담경을 만나게 된다. 담경은 영어도 잘 했다. 그래서 말이 잘 통했다. 서양인은 홍옥림을 통해 담경에게 작품 몇 개를 넘겨달라고 부탁한다. 담경은 그 서양인에게 위조품을 몇 개 판다. 한번에 8건을 주고 1천냥을 받는다.

 

동시에 담경은 서안을 통해, 위조품을 미국의 설(薛)씨성의 화교에게 판매한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위조품은 아마도 이들일 것이다.

 

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담경위조품'의 수량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각처에 흩어져 있다. 현재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임본(臨本)으로 원작이 남아 있다. '담경작'은 쉽게 들통이 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위조하는 사람들은 마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 자주 고화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확인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가짜작품은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 '담경위조품'의 판매방향을 보면, 담경서화위조일당이 위조한 가짜그림은 외국인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해외에 주로 팔았고, 국내에 판매한 것은 소수이다.

 

담경위조일당의 최후

 

담경. 이 위조집단의 주모자. 1949년 5월 상해해방전날 서화를 가지고 홍콩으로 간다. 홍콩화상총회의 이사가 된다. 자동차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힌다. 보석후 마카오로 도망치려고 수중에 있던 진품을 모조리 팔아서 6백냥을 마련한다. 담경은 그후 서화와는 인연을 끊는다. 남은 일부 명품은 모친 당패서의 집에 있었는데, 정진탁, 서삼옥, 장형등이 기획하고, 서백교가 뛰어다니면서 차례로 사들인다.

 

1950년, 담경은 상해시문관회의 초청으로 홍콩에서 상해로 돌아간다. 이때 반달우가 청동대정을 국가에 헌납하여 큰 뉴스가 되었다. 담경은 이에 고무되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진자화자부(陳子禾子釜)'와 '진순부(陳純釜)'를 상해박물관에 기증한다. 중앙인민정부 문화부는 그에게 상장을 주어 표창한다. 담경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북송 사마광의 <자치통감>고권고본을 국가에 헌납하고,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신중국이 들어섰지만, 그는 새롭게 태어나지 못했다. 그는 귀뚜라미도박으로 1958년 도박죄로 백모령의 노동개조소로 보내어진다; 큰딸은 화장댄스파티를 주최한 것으로 인하여, 역시 백모령으로 보내어진다; 1960년대 작은 딸 담단(譚端)은 홍콩으로 가고, 다시 대만으로 간다. 그리고 두월생(杜月笙)의 아들 두유선(杜維善)에게 시집간다. 두유선은 비단길 고동전을 수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7년, 담경을 석방되어 상해로 돌아온다. 그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동화축구팀을 되살린다. 그 축구팀은 그의 전성기때 그가 만든 축구팀이다. 직접 이끌고 홍콩을 다녀오기도 했다. 1991년 상해에서 사망하니, 향년 80세이다.

 

위조조직의 시행자인 탕안은 가장 먼저 사망한다. 진거래에 따르면, 탕안은 말련에 괴이한 병을 앓았다. 6월에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난로를 피워야 했다. 1963년, 상해제6인민병원에서 병사한다. 시신을 안치소에 넣었는데, 밤중에 깨어나서, "나 안죽었다!"고 이쳤다. 1965년이 되어, 탕안은 사망한다. 80여세까지 살았던 것이다.

 

장형은 1949년이후, 옛친구이자 국가문물국 국장인 정진탁의 요청을 받아, 국가문물국의 문물처 부처장이라는 직위를 맡는다. 1960년, 북경고궁수복창에 모화실을 설립하여, 전문적으로 고궁의 서화작품의 임모작을 만든다. 원작을 대신하여 전람하고 소장하기 위해서이다. 장형은 정죽우와 김중어가 고화의 수복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들을 북경으로 불러 일하게 한다. 정죽우와 김중어는 신중국에서 고화수복분야의 창립자가 되고, 문화박물관계통의 많은 사람을 가르친다.

 

1963년 4월, 북경 영보재 구매처에서 북송대가 미불의 명작 <초계시>권을 구매한다. 이는 장춘의 만주국 황궁에서 유출된 것인데, 누군가에 의해 찢어져서 이미 조각조각 났다. "념(念), 양(養), 심(心), 공(功), 불(不), 염(厭)"의 6글자는 모두 없어졌고, "재(載), 주(酒)" 두 글자는 반이 없어졌다. "기(豈), 각(覺), 명(冥)" 세글자는 약간 없어졌다. 이동양(李東陽)의 전서대자로 된 인수(引首)와 권말(卷末)의 항원변(項元汴)의 제기(題記)도 많이 사라졌다. 고궁박물원은 <초계시>권을 얻은 후, 양문빈이 종이를 보완하여 붙이고, 다시 정죽우가 손괴되기 전의 사진을 근거로 미불첩의 빠진 글자를 모방하여 완전하게 만든다. 이는 양인개의 <국보침부록>과 서방달의 <고서화과안요록:진수당오대송서법>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고궁에서 그때 전시한 전자건(展子虔)의 <유춘도>,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는 모두 정죽우와 김주어가 만든 복제품이다.

 

"담경작"의 나머지 구성원인 허징백, 호경, 왕초군 3명은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