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때 "무고지화(巫蠱之禍)"의 막후인물은 누구일까?

댓글 0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2021. 1. 14.

작자: 미상

 

무고(巫蠱)의 통상적인 해석은 한 무리의 독충(毒蟲)을 하나의 그릇에 넣고[고(蠱)라는 글자 자체가 벌레를 놓아두는 그릇(皿)이라는 뜻이다], 독충이 서로를 잡아먹게 한 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한 마리의 독충을 '고'라고 부르는데, 그 독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무고술의 구체적인 방법은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의 위에 저주할 사람의 이름, 생진팔자등을 쓰고 마법과 저주를 한 다음 고를 저주받을 사람이 거처한 곳 혹은 근처에 풀어주고, 이를 통해 저주받는 사람의 영혼을 통제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그럼 2천여년전에 발생했던 무고지화가 어떻게 서막을 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92년, 한무제 유철(劉徹)은 건장궁(建章宮)에서 한 남자가 검을 차고 용화문(龍華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무제는 그가 의심스럽다고 보고 사람을 시켜 체포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도망쳤다. 황궁의 방위가 이렇게 느슨하다니, 유철은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분노한다. 그리하여, 장문후(將門侯, 궁문수비관)를 처형하도록 명한다. 한무제는 병사를 불러서 상림원(上林苑)을 대거 수색한다; 동시에 장안의 성문을 닫아걸고 11일간이나 전면적인 수색을 벌인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어서 무고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기원전92년 연말, 재상인 공손하(公孫賀)가 큰사건을 꺼낸다.

 

공손하는 의거(義渠) 사람이고, 그의 부인은 위자부(衛子夫)의 언니, 즉, 태자 유거(劉據)의 큰이모이다. 공손하는 한무제와는 인척이고, 태자 유거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공손하는 비록 위청(衛靑), 곽거병(郭去病)같은 군신급의 인물은 아니지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고, 단순히 인척관계만으로 승진해온 사람은 아니다. 그는 7번이나 장군으로 출정했고,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기원전103년, 재상 석경(石慶)이 사망하자, 유철은 태복(太僕, 교통부장관에 해당함) 공손하로 하여금 재상의 직을 맡게 한다. 공손하는 재상이라는 자리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아서, 여러번 사양했으나, 한무제는 허락하지 않는다. 기원전92년에 이르러, 공손하는 이미 11년간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고, 곧 선종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화가 닥친 것이다.

 

공손하가 재상으로 승진한 후,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그의 뒤를 이어 태복이 된다. 이 해에, 공손경성은 북군의 군비 1900만전을 임의로 유용한 것이 밝혀져 하옥된다. 이때 한무제는 전국에 양릉대협(陽陵大俠, 양릉은 함양시 동북 약 50리에 있다) 주안세(朱安世)를 체포하도록 명을 내렸으나, 계속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손하는 스스로 나서서 주안세를 체포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청한다. 한무제는 공손하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일단 주안세를 체포해오면 공손경성은 사면해주겠다고 말한다.

 

그후 주안세는 금방 잡힌다. 그런데, 주안세가 체포된 것이 공손하의 멸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안세는 즉시 감옥에서 한무제에게 고발한다: 공손경성과 양석공주(陽石公主, 한무제와 위자부 사이의 공주)는 사촌오누이간인데 사통했다; 공손경성은 무사(巫師)를 시켜 황상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치도(馳道)에 나무인형을 묻고 황상을 악독하게 저주했다. 기원전91년 정월, 한무제는 공손하를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부자 두 사람은 모두 감옥에서 죽고, 멸족당한다. 제읍공주(諸邑公主), 양석공주(둘 다 한무제와 위자부 사이에 태어난 딸들이다)과 위청의 장남 장평후(長平侯) 위항(衛伉)은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당한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공손하 일가와 제읍공주, 양석공주, 위항은 모두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공손하가 주안세를 붙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을 보면, 그는 주안세를 찾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이전에 교분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공손하는 분명히 주안세에게 무슨 약점이 잡혀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안세가 살아서 고발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통이건 무고이건, 주안세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시의 소위 대협은 실제로 깡패이다. 극단적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중요한 일들을 그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주안세와 같은 깡패는 일반적으로 고관대작들과 교분이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 상황을 알고있는 누군가가 그 일을 주안세에게 말해준 것일 것이고, 그로 하여금 황상에게 고발하게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멸족당하고 주살당한 사람은 모두 위자부와 태자 유거의 친척들이다. 막후인물이 누구일지는 아주 분명해진다.

 

음모자들은 발견했다. 한무제는 자신의 친딸조차도 거리낌없이 죽이는 것을 보고, 자신감이 더욱 커진다. 그리하여 다음 번 칼끝을 황태자 유거와 황후 위자부로 향하게 된다.

 

기원전91년, 66세를 맞이한 한무제가 병석에 눕는다. 강충(江充)은 한무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상의 병은 무고로 인한 것입니다." 한무제는 강충을 보내 무고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강충은 호인무사(胡人巫師)를 데리고, 곳곳을 파면서 나무인형을 찾는다. 그리고 무술을 쓸 줄 알거나, 야간에 제사를 지내거나 귀신을 본다고 하는 사람들을 대거 붙잡아 들인다. 당연히 강충은 사전에 준비공작을 적지 않게 해놓았다. 그는 사람을 시켜 나무인형을 묻게 하고, 다시 거기에 핏물을 뿌려놓는다. 그리고 체포한 사람들을 고문하여, 미리 나무인형을 묻어 놓은 곳을 가리키도록 한다. 그리고 벌겋게 달군 쇠집게로 그의 몸을 지지면서, 죄를 자백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형벌은 받은 사람을은 서로 상대방이 무고를 써서 사람을 해쳤다고 자백한다. 관리들도 서로 다른 사람이 대역무도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발한다. 그리하여 경사장안, 삼보(三輔, 장안 주변지역)지구에서부터 각군, 국까지,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전후로 수만명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강충의 외곽타격행동에 불과했다. 곧이어, 더욱 높은 층면의 타격분위기가 이미 성숙되었다. 강충은 호인무사 단하언(檀何言)을 시켜 이렇게 말하게 한다: 궁안에 고(蠱)의 기운이 있다. 이 고의 기운을 제거하지 않으면, 황상의 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안도후(按道侯), 한열(韓說), 어사(御史) 장공(章贛), 황문(黃門) 소문(蘇文)에게 강충을 도와 궁중을 철저히 조사하게 한다. 그리하여, 황궁의 곳곡, 심지어 황제의 보좌까지 훼손하면서 땅을 파서 고를 찾는다. 강충은 먼저 한무제가 별로 찾지 않는 후궁의 거처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수색하면서 황후궁과 태자궁까지 조사한다. 땅바닥은 모조리 파헤쳐진다. 태자와 황후가 침상을 놓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였다. 모든 준비작업을 마친 후, 강충은 마침내 유거에게 독화살을 날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자궁에서 나무인형을 가장 많이 찾았다. 그리고 글자를 쓴 비단도 찾았다. 내용은 대역무도하다. 마땅히 황상에게 알려야 한다.

 

강충은 겨우 2천석짜리 수형도위(水衡都尉, 이는 임시직이고 임무가 있을 때는 사람을 모아서 일하지만, 임무가 끝나면 모두 본직으로 되돌아간다)이고, 강충이 처음에 무고사건을 맡았을 때, 그는 면직상태였다. <한서.강충전>에 따르면, "강충이 수형도위로 옮겨갔고, 종족이나 친구들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자가 많았다. 오래 되다보니 법을 어겨서 면직당한다." 강충이 어떻게 태자와 황후를 사지로 몰아넣을 담량을 가지게 된 것일까? 설사 그러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럴 생각을 감히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 것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강충의 배후에 강충이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기대를 갖게 할만한 인물이 있었다고.

 

그 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사서는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상세히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개괄적으로 얘기하자면, 태자는 공포에 빠져 어쩔 줄을 말랐다. 부황을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강충이 계속 압박하자, 태자는 어쩔 수 없이 강충을 죽여버리고, 거병하여 항거하게 된다. 태감 소문은 장안을 도망쳐 나가서, 즉시 한무제에게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한다. 한무제는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태자는 분명히 겁먹은 것이고, 강충등에게 원한을 품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사자(아마도 태감)를 파견하여 태자에게 직접 와서 상황을 설명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 사자는 장안성을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한바퀴 둘러본 후에 돌아가서 보고한다: 태자는 이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해서, 겨우 도망쳐 왔습니다(이 사자는 왜 이렇게 했을까? 구익부인쪽에서 지시를 받은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무제는 마침내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대노하여 병력을 일으켜 진압한다. 황후, 태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살한다. 그들의 심복들도 일망타진되고, 거의 참초제근당한다(가행히 유거의 손자 유병이(劉病已)는 살아남는다)

 

나중에 한무제가 사람을 보내 조사한다. 그제서야 위황후와 태자 유거는 나무인형을 묻은 적도 없고, 모두 강충일당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 난리통에 그는 태자와 두 손자를 죽였다. 그는 슬프기도 하고 후회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강충의 일족을 멸족시키고, 환관 소문은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 나머지 이 사건에 참여한 대신들도 처형당한다. 마지막으로 한무제는 후회막급했고, 사람을 시켜 호현(湖縣)에 궁전을 건립하고 이름을 '사자궁(思子宮)'이라 한다. 그리고 태자가 죽은 곳에 높은 대를 만들고,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라고 이름짓는다. 태자 유거와 두 손자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 것이다.

 

동시에 한무제는 스스로 반성을 한다. 여러번 대신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때는 어리석게도 혹했고, 방사들에게 속았다.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단 말인가. 요망한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한무제가 이들 요망한 일에 대하여 반성하고 있을 때, 그가 구익부인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을까? 열몇살짜리 여자아이가 한번도 주먹을 편 적이 없다니? 개인위생은 또 어떻게 처리했단 말인가? 14개월임신한 것은 직접 겪었다. 한무제의 머리 속에 영화처럼 그런 장면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당연히 헛점들이 드러났을 것이다. 한무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심기가 뛰어난 젊은 여인이 장래 황제의 친어머니가 된다니. 아예 없애버리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아온 것에 대한 화풀이도 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입자살모(立子殺母)"라는 말로 얼버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