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훈(劉統勛): 청나라의 보기 드문 청백리

댓글 0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2021. 1. 18.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그의 아들 유라과(劉羅鍋, 劉鏞)과 비교하면 유통훈의 명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건륭제 시절을 묘사하려면, 소설이건 드라마이건 그를 빠트릴 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일생의 공적은 아들 유라과보다 훨씬 크다.

 

청왕조때 12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모두 8명의 문신들만이 최고영예의 시호인 "문정(文正)"을 받았다. 거기에 유통훈이 들어 있다. 당연히 이 8명 중에서는 대부분 자격미달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탕빈(湯斌)과 두수전(杜受田)같은 사람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가? 가장 명실상부한 사람은 유통훈 외에 오직 증국번(曾國藩)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종묘에 배향된 장정옥(張廷玉)이나 '표호장(裱糊匠)' 이홍장(李鴻章)조차도 '문정'의 영예는 받지 못했다. 유통훈의아들인 유용은 그렇게 유명하지만, 겨우 '문청(文淸)'의 시호를 받았을 뿐이다. 이를 보면 당시에 유통훈이 아주 중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유통훈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가 적지 않다. 인기리에 방송된 <천하양창(天下糧倉)>과 <천하양전(天下糧田)>은 정극에 가깝고, 정직하게 백성을 위하는 청백리의 이미지로 그러졌다. 희극인 <대청관(大淸官)>에서도 오락적인 전기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의 기지와 풍취에 얹어서 관중들이 한번 웃은 후에 그에 대해 더욱 많이 느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유통훈, 자는 연청(延淸), 호는 이둔(爾鈍), 산동 제성(諸城) 사람이다. 옹정제때 진사출신으로 형부, 공부, 이부등의 상서를 지내고, 내각대학사, 한림원장원학사 및 군기대신등의 요직을 지낸다. 75세의 나이로 조회에 나가는 도중에 급사한다. 죽은 후 태부(太傅)로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을 받는다.

 

그는 섬서성 강주(羌州)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사천성 광원(廣元)에 가까운 섬서성 영강(寧强)이다. 집안은 전통적인 관료집안이다. 부친, 조부도 모두 진사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고, 25세때 가볍게 진사가 되어,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및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가 된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그는 중용된다. 먼저 형부시랑이 되고, 이어서 좌도어사(左都御史)가 된다. 이 직위는 주로 조정관리의 언행을 감찰하는 책임자이다.

 

새로 들어온 선비로서 그는 직언으로 유명했다. 부임하자마자 창끝은 당시의 권신 눌친(訥親)과 황제가 가장 신임하던 총신 장정옥(張廷玉)을 향한다. 비록 그가 예상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건륭제는 그의 상소문을 모범으로 공시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본받으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유통훈은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다.

 

이때의 유통훈은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初生牛犢不怕虎)"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정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잘 알지 못했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연원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그의 용기는 그저 건륭제의 가벼운 한 마디 말을 듣는데 그친다:

 

"짐이 생각하기에 장정옥, 눌친이 만일 마음대로 위세를 부리고 있다면, 유통훈이 이런 상소문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런 상소문이 올라온 것을 보니, 두 대신이 세력을 부리지 않고, 관료들을 제약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국가의 복이다."

 

유통훈은 일생동안 두 건의 큰 일을 했다. 하나는 탐관오리를 처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리사업을 한 것이다. 전자는 좌도어사로 있을 때 했고, 후자는 그가 조운총독(漕運總督)으로 있으면서, 하도를 수리하는 것을 감독했었다.

 

조운총독은 권력이 아주 큰 특수한 관리이다. 지위는 양강총독(兩江總督)과 맞먹는다. 주로 양강(兩江), 양회(兩淮)등지의 하무(河務)를 책임졌다. 그의 손을 거치는 은량은 엄청나다. 청나라때 이 자리에서 무너진 인물들이 아주 많다. 한편으로 수리사업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매일 엄청난 은자가 눈앞에 오가다보니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유통훈은 최고수준의 청백리였다. 그리고 최고수준의 능신(能臣)이다. 그가 하무를 처리할 때, 고찰에서 치리방안을 만드는 것까지, 인력을 조직하여 제방을 수리하는 것에서, 물자를 조달하는 것까지, 심지어 민공들의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까지 직접 처리했다. 그가 적절히 처리했기 때문에 그가 주재한 수리사업은 순조롭고 성과를 낸다. 그래서 여러번 건륭제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건륭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우사기신민(遇事旣神敏), 병성원강경(秉性原剛勁), 진자무사감(進者無私感), 퇴자안기명(退者安其命), 득고대신풍(得古大臣風), 종신부실정(終身不失正)"(일을 처리할 때는 기민했고, 성격은 원래 강직하다. 일을 할 때는 사적인 감정이 없고, 물러나서는 편안히 지냈다. 고대 대신의 기풍이 있었고, 평생 올바름을 잃지 않았다."

 

수재를 처리하고, 제방을 쌓는 동시에 그는 탐관오리들을 걸러냈다. 그는 탐관오리들을 미워했다. 황제의 지지까지 받고 있으니, 그는 이들을 가려내어 엄벌에 처했다. 상당한 탐관오리들이 파면되거나 참살되었다. 이렇게 하여 수리사업을 둘러싼 부정부패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낭비현상도 상당히 억제시킨다.

 

유통훈은 치세의 능신이다. 그가 수리사업을 한 기간은 관료로서의 거의 절반이다. 30여년간 수리사업을 행한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수리사업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운명은 수리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나라때, 조운과 수리는 국가의 대사이다. 최고통치자들이 골치아파하던 일이다. 유통훈이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그의 고상한 인품과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된 실천에 있었다. 그는 대청제국의 장치구안(長治久安)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50이 넘어서, 직접 탐사인원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대막 깊은 곳까지 가서 6년의 시간을 들여 <서역도지(西域圖誌)>를 편찬한다. 이는 중국최초의 신강지역전도이다.

 

유통훈은 강의정직(剛毅正直)한 대신이다. 아들 유라과와 비교하자면, 아마도 기지나 풍취는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대청관>은 드라마이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일생동안 한 것은 모두 국가의 대계와 백성의 민생에 관련된 사업이었고, 평범하며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 다만 조정의 1품고관으로서 일댕동안 명리를 탐하지 않았고, 오직 수리에 집중하여, 수재를 막는데 필생을 정력을 쏟았을 뿐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조정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바로 조정의 명맥에 관련되는 것이고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의 불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대색창망중산소(岱色蒼茫衆山小), 천용참담대성핌(天容慘淡大星沉)"(태산의 푸르름은 여러 산들이 작게 보이고, 큰 별이 떨어지니 하늘도 슬퍼한다.) 이는 기효람(紀曉嵐)이 쓴 만련(挽聯)이다. 유통훈의 죽음은 확실히 비장하다. 조회에 나가는 길에 사망했다. 가마를 타고 궁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혼절해 있었다. 건륭제가 급히 어의를 불렀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었다. 유통훈은 근면하게 일하던 중에 사망한 것이다.

 

그는 관료로서 청렴하여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그가 서거한 후, 건륭제는 직접 그의 집으로 가서 조문한다. 그런데 문이 너무 작아서 가마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마의 윗부분을 잘라낸 후에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집은 검박해서 1품의 고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건륭제는 더욱 비통해 한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상이 그의 장례식에 임했는데, 그가 검소했던 것을 보고 크게 가슴아파한다."

 

돌아오는 길에 건청문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여전히 슬퍼했다. 건륭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한다: "짐이 고굉(股肱)을 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잇는다: "통훈은 진짜 재상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너희들도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를 보면 건륭제가 유통훈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황제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 유통훈의 활동궤적은 주로 건륭제때이다. 비록 그가 건륭제의 신임을 받기는 했지만, "의문점이 있을 때는 모두 황제에게 보고해서 결정했다." 그는 건륭제의 곁에 있으면서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는 수리사업도 했고, 군대에도 다녀왔다. 그도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고, 가산을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기(正氣)를 가지고 공(公)을 우선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초심을 바꾸지 않고, 평생 백성들을 위해서 일했다. 그는 일생동안 원망도 후회도 없이 일할 수 있었다. 다행히 건륭제가 혼군이 아니었다. 만일 혼군이었다면 그는 일찌감치 수급이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유통훈은 청나라의 저명한 청백리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야할 것은 이는 그의 가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때 유씨일족은 모두 200여명이 조정관리를 지냈는데, 그중 탐관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청나라때뿐만이 아니라, 중국역사상에서도 이는 유일무이한경우이다. 이런 말이 있다. 십관구탐(十官九貪). 관리 10명중 9명은 탐관오리이다. 그래서 유씨일족의 청렴한 가풍은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건륭제때 관직에 오래 있으면서 여러번 향시와 회시를 주재했다. 당시의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에 따르면, 그의 학생은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장원 왕걸(王傑), 명장 아계(阿桂), 제일재자 기효람, 철면어서 전풍(錢灃), 제사(帝師) 주규(朱珪)등이 모두 그의 문하이다.

 

그는 진사출신으로서 일생동안 시문도 적지 않게 남겼다. 다만 그는 <사고전서>의 총편집이자 대청제일재자인 기효람의 은사이고, 그의 서예는 실력이 출중했다. <대청관>에서 그는 건륭제의 서예에 대하여도 한마디 하는데, 그것은 비록 허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청나라궁중드라마의 재미있는 장면들, 화신, 기효람, 유용등과 비교하면, 유통훈은 확실히 적막한 편이다. 일생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장면은 없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모두 청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때 제일한인재상으로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현재의 드라마가 모두 오락성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정상적인 일이다. 다만 유통훈은 잊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다른 형편없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는 <천하양창>, <천하양전>을 보는 편이 낫다. 그리하면 청렴결백하고, 봉공무사한 좋은 관리를 알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