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종사(武俠宗師) 양우생(梁羽生): 한 지주아들의 망명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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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2021. 1. 21.

글: 유원(劉原)

 

오늘 나는 한명의 밀항자이자 고향사람이며, 무협종사인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양우생이다. 여러 해동안, 무협지를 읽는 우리들은 그저 그 안의 혈해심구(血海深仇)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원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답은 이렇다. 무협지 속에 처량한 내용이 많이 있는 것만큼, 양우생, 김용같은 사람들의 현실생활에서도 그만큼 처량함이 있었다.

 

2009년 1월 22일, 신파무협소설의 비조인 양우생은 시드니에서 사망한다. 오늘은 4월 5일이고, 바로 그의 생일이다.

 

양우생은 나와는 절반쯤 같은 고향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광서(廣西) 몽산(蒙山) 사람이다. 나의 외할머니가 바로 몽산 사람이다.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양우생의 무협지를 읽었다. 그리고 이 고향사람이 사해에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얘기를 나눌 때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말했는데,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고, 2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양우생의 무협은 당연히 종사(宗師)급이다. 그는 국학(國學)의 기반이 탄탄했고, 가국정회(家國情懷)도 농후했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면, 그의 풍격은 전통에 치우쳐있다. 글을 읽을 때의 쾌감으로 따지자면, 기지고괴(機智古怪)한 김용(金庸)이나 광견불기(狂狷不羈)한 고룡(古龍)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은 그래서 예상가능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양우생의 문풍(文風)에 대하여 문학평론가들이 전문적으로 쓴 글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양우생의 신세내력, 양우생의 가국에 대한 탐구가치는 그의 무협지에 대한 것에 비해 전혀 못지 않다.

 

양우생의 본명은 진문통(陳文統)이다. 1924년 광서 몽산현 문우향(文圩鄕)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현지의 명문집안이다. 1944년 일제가 쳐들어 왔을 때, 태평천국사학자인 간우문(簡又文) 교수는 그의 집으로 피난온 적이 있다. 1949년, 양우생은 영남대학(嶺南大學)을 졸업하고, 홍콩의 <대공보(大公報)>에서 근무한다.

 

30여년전에 나는 부모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양우생은 해방초기에 몽산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도중에 동창인 팽영강(彭榮康)을 만났다. 팽영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너의 부친은 금방 탄압받았다. 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빨리 도망쳐라." 양우생, 그때는 아직 진문통으로 불렸던 그는 밤을 새워 도망친다. 그렇게 하여 홍콩으로 돌아온다. 팽영강은 나의 부모님이 잘 아는 사람이다. 그의 아들은 나의 중학교 지리선생님이었다. 다만 나는 당시에 나이가 어렸고, 지리선생님에게 이 과외의 문제를 물어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기실 대부분은 그럴 듯하다. 여러해 이후 나는 <문사춘추(文史春秋)>에 실린 팽영강의 회고글을 보게 되었는데, 나의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와 대체로 들어맞았다. 단지 세부적인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팽영강에 따르면, 1950년 가을, 그가 몽산의 인근현인 여포(荔浦) 즉 토란(芋頭)이 아주 유명한 그곳에 있었는데, 거기서 양우생을 만났다. 양우생은 자신의 부친이 누군가의 무고로 갇혔다고 했고, 가족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을 구해내라고 하였다고 한다. 팽영강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농촌은 곳곳에서 초비반패(剿匪反覇)의 군중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네가 돌아가도 부친을 구하지 못할 뿐아니라, 너 자신도 지키기 힘들 것이다. 양우생은 그의 충고를 듣고, 홍콩으로 다시 돌아갔다. 얼마 후, 그(양우생)의 부친 진신옥(陳信玉)이 피살당한다. 여러 해 이후, 양우생은 팽영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진신옥은 원래 온화하고 선량한 시골선비였다. 항전기간동안, 일제가 몽산으로 쳐들어 왔고, 진신옥은 향단(鄕團)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하기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몽산으로 피난온 문화계의 명사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당시의 학자 간우문은 일가족을 이끌고 몽산으로 피난왔는데, 바로 진신옥이 그를 도와준다. 간우문은 회고록 <환해표류이십년(宦海飄流二十年)>에서 이렇게 썼다: "진가의 대은대덕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 일가족은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일가가 큰 곤란에 처했을 때, 타향으로 피난가면서, 갈곳은 없고 어디서 죽을지도 모를 때, 돌연 아끼는 제자가 스승을 생각해주는 우의를 입었다. 일가족이 우리 식구 10명을 받아주고, 먹여주며, 비호해주고,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평안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반세기 전의 토지개혁때, 일생동안 선량하게 살았지만, 피살당한 지주가 어찌 진신옥 한 사람뿐이겠는가. 김용의 지주인 부친도 마찬가지로 1951년에 피살당했다. 나는 어렸을 때, 양우생의 무협지를 읽고, 김용의 무협지를 읽으면서, 항상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왜 많은 이야기들은 부친을 죽인 원수에서 시작할까? 나중에 나는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1940년, 16세의 진문통은 <인월원(人月圓)>이라는 글을 쓴다. 마치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불감회수당년사(不敢回首當年事)

휴상망향대(休上望鄕臺)

고원황무(故園荒蕪)

고인영락(故人零落)

고적난매(故迹難埋)

 

양우생의 글에서는 가국에 대한 우상(憂傷)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신세내력과 관련이 있다. 다만 그는 비통함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고, 김용처럼 거기에서 빠져나와 가국의 비극을 관찰하지 못했다. 그는 좌경잡지에서 일했고, 시대적인 한계도 있어서, 그는 뼛속까지 좌경분자였다. 소설속의 인물은 흑이 아니면 백이다. 이원대립, 계급투쟁의 흔적이 아주 명확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마찬가지로 부친이 피살당한 고통을 겪은 젊은 김용처럼 생각을 깨지 못했다.

 

다만, 양우생은 뼛속까지 전통명사이다. 영남의 저명한 여성학자인 승옥청(冼玉淸)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천성은 충후하고 솔직하며 진지하다. 근세에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는 시종 정치와는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순(耳順)에 강호에서 은퇴한다. 1994년 기독교에 귀의하는데,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헛소리를 하며, 명리를 추구했던 말년의 김용보다는 여러 단계 수준이 높은 편이다.

 

1946년, 22세의 양우생은 섭감노(聶紺弩)가 주편(主編)인 <형양일보(衡陽日報)>에 <심원춘(沁園春).화모윤지(和毛潤之)>를 발표한다:

 

창번화병렬(悵繁花幷列), 선향묘묘(仙香杳杳), 유춘인중(遊春人衆), 수속도도(隨俗滔滔)

과학안기(跨鶴安期), 승풍열자(乘風列子), 욕상청운만장고(欲上靑雲萬丈高)

 

암중으로 시류에 따라 글을 쓰고 아부하는 사람들을 풍자했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그의 청고한 풍골이 드러난 것이다.

 

토지개혁이후 양우생은 수십년간 몽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반혁명가족의 신분으로 그는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쨌든 대륙의 정치생태를 잘 알았다. 1978년, 등소평이 광주로 남하하어 경제특구를 조사연구한다. 국무원은 홍콩의 일부 기관에 초청장을 보내어, 홍콩동포들도 참가하도록 했다. 양우생은 거기에 참석한다. 그때 조카 진강중(陳强中)은 광서에서 광주로 와서 그를 만난다. 양우생은 등소평(鄧小平), 요승지(廖承志)등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고 나오면서, 초청장을 조카에게 건네준다. 원래 조카는 고향에서 해외와 내통하는 특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양우생은 그에게 이 초청장을 호신용으로 쓰라고 한다. 나중에, 진강중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국무원 도장이 찍힌 초청장을 보고는 놀라서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고향은 많은 경우 세리지향(勢利之鄕), 즉 권세와 이익을 쫓는 곳이다. 1980년대, 몽산현은 문필탑(文筆塔)을 중수(重修)한다. 관례에 따라 몽산출신의 유명인들에게 기부를 청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양우생이 당시 800위안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현지사람들은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너무 인색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기실 양우생이 몇백위안을 낸 것만도 이미 체면을 봐준 것이다. 그의 부친을 죽였는데, 그래도 그는 돈을 내놓았다. 이래도 만족하지 않는단 말인가?

 

양우생은 부친의 죽음이 항상 마음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광서의 요원이 여러번 양우생에게 고향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양우생은 부친사건을 다시 살펴봐달라고 요구한다. 그 의미는 부친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재조사를 거쳐, 몽산현정부는 진신옥을 죽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결정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양우생은 몽산현정부에 회신을 보낸다: "선부의 사건이 마침내 명예회복되다니, 마음 속에 수십년간 응어리져 있던 것이 마침내 풀렸습니다." 그때의 양우생은 아마도 마음 속으로 망망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무협작가로서 천하에 명성을 떨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절대로 통전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부친의 억울함도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양우생이 도망친 후 처음으로 몽산에 돌아간다. 그때는 몽산의 문필탑을 준공할 때였다. 그는 장두시(藏頭詩)를 한 수 쓴다(맨앞의 네글자가 몽산문필이다):

 

몽활려소천지광(蒙豁慮消天地廣)

산환수요견웅기(山環水繞見雄奇)

문인소객등림처(文人騷客登林處)

필건시호입지시(筆健詩豪立志時) 

 

글의 내용은 평범하다. 그러나 그가 마음 속으로 정말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하늘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일찌기 양우생은 병구를 이끌고 광서로 간 적이 있고, 성대한 행사에 참석한다. TV에도 나오고, 생화도 받았다. 아주 호화로웠고, 요란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광서에 돌아간 때였다.

 

어느해인가 청명절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몽산으로 간 적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놀던 문필탑은 이미 양우생공원(梁羽生公園)으로 개명되어 있었다. 이런 시골 현성까지도 명인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나는 탑의 비문을 읽고 있는데, 이미 어둑어둑해질 때였다. 그런데 한 비구니가 다가와서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남녕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 비구니는 내가 몽산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고, 또 성성에서 왔다고 하니, 죽어라 매달리며 돈을 내서 공덕을 쌓으라고 말한다. 나는 싫다고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돌연 슬프게도 1980년대에 양우생이 받았던 기부요청서신을 떠올렸다. 그건 그냥 돈을 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도 받았다. 나는 1950년대의 양우생도 떠올렸다. 감옥에 갇혀 있는 부친에게서 겨우 몇십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까지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되돌아서서 산넘고 물건너 도망쳐야 했다. 그가 그런 고향을 생각하며, 얼마나 처량했을까? 마치 <칠검하천산(七劍下天山)>에 나오는 첫머리의 그 말처럼:

 

파검처연망(把劍凄然望) 검을 들고 처연하게 바라본다

무처초귀주(無處招歸舟) 오라는 곳 하나 없는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