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曹操)는 왜 장료(張遼)를 받아들이고, 고순(高順)을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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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2021. 4. 12.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장료와 고순은 모두 여포의 수하대장이다. 여포의 군중에서의 활약으로 보자면 고순의 군사적 능력은 장료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함락시킨 후, 장료의 투항은 받아들였지만, 고순은 여포와 함께 죽여버린ㄴ다. 둘 다 여포의 수하장수인데, 조조는 왜 장료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고순은 죽여야했을까?

 

장료는 원래 정원(丁原)의 부하였다. 무공이 뛰어나고 힘이 세서 정원이 휘하로 거둔다. 하진(何進)이 군대를 경성으로 불러모을 때, 정원은 장료를 데리고 간다. 정원이 패망한 후, 장료는 동탁에 넘어간다. 동탁이 패망한 후에는 장료와 그의 부하들이 다시 여포에게 귀속된다. 여포가 이곽에게 패배한 후, 장료는 여포를 따라 서주로 간다. 그리고 대리노국상(代理魯國相)이 된다. 고순의 초기 경력은 불명확하다. 단지 그는 여포를 따라다니면서 전투를 치렀고, 그의 수하에 있는 부대는 아주 대단했다. "함진영(陷陣營)"이라 불린다. 왜 '함진영'이라고 불리웠을까? 왜냐하면 이 부대가 공격하면 적진이 함락되기 때문이다. 삼국초기 가장 전투력이 강한 부대중 하나이다. 조조의 호표기(虎豹騎)와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고순은 지나치게 강직하여, 여포에게도 자주 반대의견을 내서, 여포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전투에 너무 능하여, 평상시에는 그를 내버려두지만, 전투만 있으면 그에게 병력을 이끌게 했다. 특히 건안3년의 전투에서 고순은 단독으로 병력을 이끌고 유비를 쳐부순다. 조조가 하후돈을 보내어 유비를 지원가지만, 역시 고순에게 패배당한다. 그외에 여포가 성을 나가 조조군대의 식량보급로를 끊으려 했을 때, 성에 남겨서 지키게 하려던 인물이 바로 진궁(陳宮)과 고순이다. 그리고 여포가 포로로 잡혔을 때,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피살된 것은 진궁과 고순이다. 이는 모두 고순이 여포수하의 대장이었음을 말해준다.

 

모두 조조는 인재를 아낀다고 말한다. 병력을 이끄는 무장은 더더욱 당시에 꼭 필요한 인재였따. 고순과 같이 이미 당시에 발군의 장수를 조조는 왜 살려두고 자신이 쓰지 않았을까?

 

투항과 수항(受降,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쌍방이 모두 원해야 가능한 것이다. 한쪽만 원한다면 분명히 의견일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여포는 투항하고자 했다. 조조도 약간 망설인다. 그러나 유비가 '옆에서 부채질하는 바람에' 조조는 여포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포를 처결한다. 진궁은 정반대이다. 조조는 그를 남겨서 쓰고자 했지만, 진궁은 투항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조조는 그를 죽인다. 고순의 일은 여포처럼 투항을 애걸하지도 않았고, 조조가 특별히 그를 남겨두려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같다. 쌍방 모두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같다.

 

그렇다면, 조조는 왜 진궁을 대할 때처럼 고순을 '만류'해보지도 않았을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사람의 '실력'문제이다. '문관'이라면, 그의 실력은 아마도 문재방면의 영향력일 것이다. 아마도 한 지방을 다스리는 정치적업적에 대한 명성일 수도 있고, 그의 배경인 가족의 영향력일 수도 있다. 단지 어느 한 방면에서만 특출나다면, 새로운 군주는 그를 남겨서 쓸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유비가 성도를 탈취할 때의 허정(許靖)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유비는 그를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법정이 이렇게 말한다. 이 자는 천하에 허명(虛名)이 알려져 있다. 그를 쓴다면 '인재를 아낀다'는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허정에게 높은 관직을 내린다. 그리고 원소 수하의 그 최염(崔琰)이 있다. 조조가 기주를 탈취한 후 삼십만의 인구가 있는 것을 보고 아주 기뻐서 그 말을 꺼낸다. 그러자 최염은 즉시 그가 백성을 안정시키고 인의를 행할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막 투항해온 자가 어찌 이렇게 겁도 없이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가족배경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장은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지닌 병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장료가 투항할 때, "그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투항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투항한 것이다. 전투에는 사상자가 발생한다. 만일 계속 싸우려면 병력을 보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전투가 끝난 후 한 장수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해 온다면, 그 전투는 손해를 보지 않은 셈이 된다. 조조의 수하에 주령(朱靈)이라는 장수가 있는데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삼국지>에서 단독의 전기조차 써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조의 사대장(四大將)중 후장군(後將軍)이다. 조조가 살아있을 때 봉한 최고의 군직이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바로 조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원소가 원군을 보내 도와준다. 전투가 끝난 후 다른 사람은 모두 돌아갔는데, 주령은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한다. 그래서 조조는 비록 그를 싫어했지만, 그가 자신이 어려울 때 병력을 이끌고 투항해온 점을 고려하여 그에게 아주 높은 관직을 내린 것이다. 조조의 수하에 투항해온 장수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투항하자마자 중용된 장수들은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중요한 순간에 투항해온 것이다. 허유(許攸, 단순한 무장이 아니다), 장합(張郃), 고람(高覽), 서황(徐晃)등이다. 다른 하나는 부대를 이끌고 투항해온 것이다. 주령, 장수(張繡), 장연(張燕) 및 장로(張魯)등이다. 이들중 어떤 사람은 삼국명장이 되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묻혀버린다. 이는 그후 각자의 발전결과이다. 각자의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느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순은 투항할 뜻도 없었고, 병사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두 가지 면이 모두 결핍되어 있다. 자신에게 투항할 뜻이 없고, 가지고 있는 병력도 없는데, 조조로서 그의 귀순을 굳이 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순은 왜 병력을 거느리고 있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여포때문이다. 일반인의 인상에서 여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무장이다. 그러나 기실 서주에서 여포는 먼저 영지와 병력을 지닌 독립적인 제후였다. 다음으로 비로소 '원문사극(轅門射戟)'의 무장이다. 그러나 여포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고, 더더구나 사람을 쓸 줄 몰랐다. 고순은 청렴하고, 위엄있는 인물이다. 여포는 말을 함부로 하고, 실수가 잦다. 그럴 때면 고순이 전혀 봐주지 않고 이를 지적했다. 여포는 고순이 그렇게 하는 것이 충성심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자신의 체면을 너무 봐주지 않다보니 고순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여포는 마음이 자주 바뀌는 소인이다. 너무나 많은 주군을 모신다. 그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했고, 그러다보니 부하들에 대하여도 의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부하장수 학맹(郝萌)이 배반한 후, 여포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고순은 그리하여 소원해진다. 위속(魏續)은 여포와 친척관계이다. 그래서 여포는 고순의 병력을 빼앗아 위속에게 넘긴다. 그러나, 이 위속은 멍청이이고, 충성심도 없었다. 여포가 나중에 생포되는 것은 그들 몇 사람이 여포를 묶어서 조조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여포는 바로 그를 자기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평상시에 이들 병력을 위속에게 맡긴 것이다. 전투를 할 때만 고순에게 위속의 병사를 이끌고 지휘하게 했다. 이렇게 되니 고순은 그저 적진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인물일 뿐이고, 그의 손아귀에 병사 한명이 없었다.

 

이제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장료는 투항할 뜻도 있고, 병사도 있다. 그런데 조조가 고순에게는 투항하라는 권유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순은 투항할 뜻도 없었고, 수하병사도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