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국(渤海國): 사라진 동북의 문명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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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동북공정

2021. 6. 4.

(이 글은 중국인의 발해에 대한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글이서 소개합니다)

 

글: 사문(思文)

 

역사상의 발해국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다. 중국고대역사상 말갈족을 주체로 한 정권이다. 그 범위는 지금의 중국 동북지구, 한반도 동북 및 러시아 극동지구의 일부에 상당한다. 698년, 속말말갈의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이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길림성 돈화 서남성자산 산성, 일설에는 지금의 길림성 연길 동남성자산 산성 혹은 용서고성이라고 한다)이 '진국왕(震國王, 振)"이라 칭하며 정권을 건립한다. 713년, 당현종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하고,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직위를 수여한다. 762년, 당나라는 발해를 '국(國)'으로 승격시킨다.

 

발해의 도성은 동모산 일대이다. 742년에는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지금의 길림성 화룡)으로 옮기고, 755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으로 옮기며, 785년 다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지금의 길림성 훈춘)으로 옮기며, 794년에는 상경용천부로 되돌아간다. 발해는 다민족국가였다. 주민은 말갈인, 고구려인등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제도에 따라 정치, 경제제도를 건립하고, 전성기때의 관할영토내에 오경(五京), 십오부(十五府), 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문화는 당나라의 문화영향을 깊이 받았고, "해동성국"이라는 미칭으로 불리웠다.

 

그렇다면, 당시 강성했던 해동성국은 왜 사라지게 된 것일까?

 

이는 7세기의 동북 고대민족인 말갈족(靺鞨族, 숙신의 후예, 여진과 만주족의 선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당시 이 부락이 가장 강대했었다.

 

"말갈"이라는 두 글자는 고대의 '통가(通假)"용법이다. 원래 글자는 분명 "말갈(靺羯, weijie)"이었을 것이다. 한(漢), 위(魏)의 사서에 나오는 "물길(勿吉)"의 음이 변화된 것이다. "물길"은 고대 퉁구스어의 음역(音譯)인데, 원래 산림부락이라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혁철어(赫哲語)와 만주어에도 여전히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weji). "속말(粟末)"이라는 두 글자는 요, 금시기에 "송와(宋瓦)"로 바꾸어 적게 되고, 명,청시기에는 다시 "송화(松花)"로 바꾸어 쓰이게 된다. 속말강은 바로 오늘날의 송화강이다. 속말말갈의 실질적인 의미는 "송화강유역의 산림부락"이라는 것이다.

 

남북조시기에, 오랫동안 지배자인 고구려와 대항한다. 수나라 초기, 속말말갈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처한다. 많은 속말말갈인은 고구려의 신하가 된다. 그중 일부분 고구려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 했던 부락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8개의 속말부락이 있다. 우두머리 돌지계(突地稽)가 이끌고 요하의 서쪽으로 도망치고, 수나라에 의해 요서 유성(柳城)에 안치된다. 오늘날의 요녕성 조양일대이다. 그리고 일부분은 유주 창평일대에 정착하는데 오늘날의 북경 북쪽이다.

 

당고종 총장원년(668년), 당나라는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그후 고구려정권이 부활하는 것을 막고 고구려유민이 이웃한 말갈, 거란, 해(奚)등의 소수민족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당나라는 강제로 "속말말갈중 고구려에 붙은 자"들을 요서 영주(營州)로 이주시킨다.

 

발해고왕 대조영의 부친인 걸걸중상(乞乞仲象, 당시 부락의 추장)은 바로 이 부분 속말말갈인들에 들어가 있었다.

 

당나라의 유성에서 영주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문홰(趙文翽)는 대국을 파악하지 못하고, 민족정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취생몽사하면서 여색을 탐했고, 각 부족의 추장을 노비처럼 여겼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욕하고 때렸다. 그래서 각족 수령과 민중은 분노했지만 감히 표출하지는 못했다. 당시, 영주 일대는 몇년간 기근이 닥쳤다. 농민들은 수확을 거두지 못해 도탄에 빠져 있었다. 조문홰는 당연히 사람들의 고통에 신경쓰고, 난민을 구제해주어야 했다. 다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본척 하면서 술마시고 놀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원망을 산다. 당나라 지방관의 압박과 착취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소수민족들은 거란족을 위시하여 반당투쟁에 나서게 된다. 발해말갈족도 이 흐름을 타게 된다.

 

사건발생후, 무측천은 조인사(曹仁師)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진압하게 했다.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과 또 다른 수령인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부족은 요수를 건너 동으로 도망친다. 당나라는 동북 소수민족의 반당연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거란에 대하여는 무력진압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속말말갈에 대하여는 회유정책을 편다.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한다.

 

698년(당 성력원년), 돌궐이 당나라의 규주(嬀州), 단주(檀州), 정주(定州), 조주(趙州)등지(지금의 하남서 중서부)로 침입한다. 거란과 해는 돌궐에 붙는다. 그리하여 중원에서 동북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버린다. 대조영은 시기를 봐서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 오동성에 말갈정권을 건립한다. 그리고 "da"(고퉁구스어로 추장을 의미한다)로 칭하며, 자신의 성을 "대(大)"로 짓는다. 무측천이 그의 부친을 진국공에 봉해서 대외로 "대진국(大震國)"이라 칭하고, 스스로 진국왕이라 칭한다. 이것이 발해국의 전신이다. 당현종시기에 이르러 국호를 발해로 고친다. 

 

발해국은 당나라의 정치군사제도를 채용한다. 경제적으로 중원지역의 선진농업기술을 도입하고, 사회경제가 현저히 발전한다. 내지와의 무역은 매년 끊이지 않았다. 저명한 시인 온정균(溫庭筠)은 <송발해왕자귀본국(送渤海王子歸本國)>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강리수중해(疆裏雖重海), 차서본일가(車書本一家)

성훈귀고국(盛勛歸故國), 가구재중화(佳句在中華)

정계분추창(定界分秋漲), 개범도서하(開帆到曙霞)

구문풍월호(九門風月好), 회수시천애(回首是天涯)

 

발해국은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에 이르러 강역이 기본적으로 확정된다. 지금의 길림성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흑룡강 중하류 동안에 이르러, 달단해협연안에서 사할린섬과 마주본다.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로는 길림과 내몽고의 교차지역에 있는 백성, 대안 부근에 이른다. 남으로는 조선의 함흥부근에 이르렀다. 오경 십오부, 육십사주, 130여현을 두었다. 당시 동북지역에서 강역이 가장 넓은 봉건강국이었다. 나중에 거란, 금나라의 오경지치(五京之治)는 바로 발해국에서 연유한 것이다.

 

발해국의 오경은 다음과 같다:

상경용천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중경현덕부: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용원부: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서경압록부: 길림성 임강시

남경남해부: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

 

925년 12월 거란의 두령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에 대한 전면공격을 진행한다. 926년 정월, 일거에 발해국의 서부 중요도시인 부여부(扶餘府)을 함락시킨다. 거란군은 승기를 잡아 진격했고, 도중에 발해의 노상(老相)이 이끄는 3만의 발해군대를 격패한다. 926년 2월, 발해 상경용천부의 소재지 홀한성을 포위한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소복을 입고 양을 끌면서 신하 3백여명과 함께 성을 나와 투항했다. 야율아보기는 '예의를 다해서 맞이한다' 그리고 그를 풀어주어 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또한 근시 강말항(康末恒)등 십삼명을 성으로 들여보내 무기를 몰수한다. 그러다가 발해 나졸(邏卒)에게 살해당한다. 대인선은 군대와 백성의 압력하에 다시 저항하기로 한다. 거란군은 이에 강력한 공격을 펼쳐 홀한성을 함락시킨다. 대인선은 다시 한번 야율아보기의 앞에 끌려왔다. 야율아보기는 대인선과 그의 일족을 성밖으로 끌고가게 한다. 발해국의 안변, 남해, 정리등의 부와 여러 절도사들이 연이어 투항한다. 이렇게 하여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해동성국은 15왕 229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거란이 부여부를 포위한 때로부터 홀한성이 함락될 때까지 전후로 1달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거대한 발해국이 이렇게 신속히 멸망한 것일까?

 

발해족은 동북지역의 고대민족 숙신, 읍루, 물길, 말갈로 내려온 후예이다. 이 민족은 수천년의 역사발전과정에서, 사회경제발전속도가 비교적 느렸다. 읍루시기에, 수령이 없었다. 나중에 비로소 '부자가 대대로 군장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때는 이미 사유제가 나타났고, 사유제의 발전은 빈부격차를 불러온다.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루는 족규(族規)를 제정하여 '도둑질을 하면 금액이 많건 적근 모조리 주살한다'고 정하게 된다. 읍루시기는 계급사회로의 과도기였다. 물길시이에 '읍락마다 각자 우두머리가 있어, 통일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아직 부락연맹이 형성되지 않았다. 선진(先秦)시기의 숙신에서 수당시기의 말갈까지 그 사회형태는 기본적으로 같다. 이를 보면 기나긴 기간동안, 이 오래된 민족의 변화발전은 크지 않았으며 생산력의 발전이 느려, 오랫동안 원시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과도단계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발해국은 바로 이들 낙후된 사회경제형태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발해국의 신속한 번영은 일정한 정도로 발해정권이 추진노력때문이다. 발해정권이 건립되기 전에, 발해족의 전신인 속말말갈의 한 부락은 추장 돌지계의 지도하에 "부여성의 서북에서 부락을 이끌고 관내로 투항해 왔다. 유성 연군의 북족에 안치시킨다" 오늘날 영주일대에서 살았다. 당나라초기 속말말갈의 또 다른 갈래의 수령인 걸걸중상, 대조영 부자의 지도하에 가족을 이끌고 영주로 이주하여 거주한다. 7,80년전에 영주일대로 이주한 돌지계의 부락과 대체로 같은 지역에 살게 된 것이다. 수당시기에 영주지역에는 이미 한족, 거란족, 해족, 고구려족등이 거주하고 있어, 다민족 잡거지구가 된다. 이곳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발달했으며, 이어서 도착한 속말말갈인들은 이들과의 교류과정에서 중국의 풍속을 받아들여 모자를 쓰고 허리띠를 맨다. 중원의 정치, 경제,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들은 신속히 씨족사회에서 노예사회로 넘어간다.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있은 후, 속말말갈인은 수령인 대조영의 지도하에 "동으로 요수를 넘어, 태백산의 동북을 차지한다. 이 동으로 돌아간 속말말갈인들은 한족지구의 선진적인 생산기술, 생산도구와 문화사상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현지의 생산력수준을 신속히 끌어올린다. 발해가 건국된 후, 중원지역은 성당으로 접어들 때, 고도로 발달한 당나라는 주변의 소수민족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발해의 상층통치집단의 인물은 일찌기 영주지구에서 선진적인 한당문화를 받아들였다. 정권을 건립한 후, 더더욱 당나라의 선진적인 각종제도를 좋게 보고, 극력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대로 베꼈다. 대조영때는 여러 학생을 경사의 태학에 보내어 고금제도를 배우게 한다. 그후 당나라 유학생들은 당나라에 도착한 후 <한서>, <진서>, <삼십육국춘추>, <당례>를 쓰도록 요청했고, 당나라는 이를 허가한다. 선진적인 봉건정치, 경제제도, 생산기술과 문화가 계속 발해에 도입된다. 이는 발해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해동성국의 국면이 출현하도록 촉진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발해국의 신속한 번영은 자체적인 사회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지지역의 사회경제발전단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당나라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발해국의 선주민인 속말말갈인들은 영주지구에서 선진적인 당나라의 사회경제문화를 받아들여, 신속히 말갈의 옛땅으로 가져갔고, 정권을 건립한 후, 상층부에서부터 당나라의 봉건제도를 그대로 채택한다. 경제기초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쳐 발해봉건과과정을 완성한다. 이런 발전모델의 한계는 말갈사회의 경제문화의 독립발전을 막는다는 것이다. 국가정권의 추진과 배양으로 경내 대부분지역의 경제형태는 아직 낙후된 상황하에서, 의식형태만 선진적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봉건국가의 기구는 비교적 완비되었고, 봉건화정도는 아주 높았는데, 봉건경제는 발달하지 못하고, 완전히 발달된 봉건경제기초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당한 정도에서 당나라와 사방인근민족, 국가의 경제교류를 통해 방대한 봉건정권기구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발전모델은 선진적인 사회제도와 낙후된 경제기초간의 모순을 가져온다. 여기에 발해국의 각지 경제발전은 불균형적이었다. 발해상경부근지역을 대표로 한 부근지구는 정치, 경제,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미 봉건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 정복한 지역은 여전히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다. 여전히 원시사회말기단계에 처해 있었다. 이는 특히 '해북제부(海北諸部)'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여전히 물고기가죽을 입고, 물과 풀을 따라다녔다" 그들과 중앙정권의 행정예속관계는 비교적 느슨했다. 게다가 변방지역은 교통이 불편해서 왕래가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간의 사회경제발전이 지극히 불균형적이었다. 그리하여 발해국사회는 원시사회, 노예제, 봉건제가 섞여 있는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발해는 통일된 종합적인 경제체제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발해국의 통치에 견실한 경제적 기초가 부족하게 만든다. 외부의 타격을 받았을 때, 박약한 발해정권은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는 것이다.

 

713년(당 개원원년), 당나라정부는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曉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에 임명한다. 그리고 대조영이 관할하는 지역을 홀한주로 부르고, 대조영을 홀한주도독에 임명한다.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발해'로 칭하게 된다" "발해는 당나라의 중요한 번국이다. 당나라의 책봉을 받아 당나라와의 예속관계를 확정했다. 이는 발해정권에 아주 유리했다. 정치적으로 발해의 말갈여러 부락들 속에서의 명망과 지위를 높여준다. 그리하여 발해의 동북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발해는 직접적으로 당나라의 비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거란세력등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각종 물품을 받았고, 중원지역의 선진적인 생산기술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발해의 생산력을 크게 제고시킨다. 문화적으로 발해는 선진적인 중원문화를 받아들인 후, 사회제도의 변혁과 문화의 번성을 이끈다. 그러므로, 발해가 통치한 229년동안 당나라의 지원, 정치적인 인정, 경제적인 도움, 문화적인 삼투가 없었더라면, 발해는 동북에서 200여년간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의 존재로 인하여, 거란인들은 비록 호시탐탐했지만, 시종 발해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9세기말부터 당나라가 계속 쇠퇴하고, 계급갈등이 격화되며 위기가 나타난다. 특히 874년 황소의 난을 위시한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농민군은 881년 장안을 점령한다. 비록 당나라의 봉건세력이 농민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통일된 당나라는 이미 와해되었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때부터 발해는 당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당나라의 멸망을 전후하여, 발해서부의 거란이 날로 강대해진다. 거란은 태조 야율아보기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한다. 901년(당소종 천복원년), 야율아보기는 이리혁(夷離革, 부락수령)으로 추대되어, 대외전투를 담당하는 군사총사령관이 된다. 그는 대외전쟁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을 발전시킨다. 907년, 야율아보기는 칸(可汗)에 추대되며, 거란의 군정대권을 획득한다. 나아가 거란의 여러 부락을 통일시킨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돌궐, 토곡혼, 당항족의 각부를 정복한 후,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거란으로 하며, 연호를 '신책(神冊)'으로 한다. 그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백성을 통치한다'고 말하며, 중원을 차지할 야심이 있음을 드러낸다. 발해는 부여의 옛땅을 부여부로 하고, 병력을 주둔시켜 거란을 막았다. 9세기말과 10세기초,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날로 긴장되고 충돌과 전쟁이 계속 발발했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경은 발해의 옛땅이다. 야율아보기가 20여년간 싸워서 얻었다." "요태조 4년 십이월 을해일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오직 발해와의 대대로 이어온 원한을 갚지 못했다' 이때 거란과 발해간에는 검발노장(劍拔弩張)의 상태로 서로를 숙적으로 여겨 자주 전쟁이 발생한다. 거란이 계속 압박하자, 발해통치집단은 발해가 위기에 처했음을 느낀다. 그들은 부득이 부여성에 병사를 주둔시켜 방어를 강화한다. 거란이 날로 강대해지고, 계속하여 발해를 침략하고 위협하자, 발해는 후량, 후당과 우호관계를 맺어 예속관계를 건립한다. 그렇게 하여 계속 중원왕조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대인선시기(907년-926년), 발해는 전후로 5번 사람을 후량에 파견하고, 5번 후촉에 파견한다. 그러나 중원지구는 사분오열의 군벌혼전시기였고, 발해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중원왕조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발해는 다시 일본에 기대를 건다. 발해말기에만 6번 일본에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 발해가 일본으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는 불가능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는 삼국대치국면이 일어난다. 발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신라, 후고구려에 사신을 보낸다. 신라, 후고구려, 후백제 삼국간의 전투가 치열해서 거란과 싸울 여유가 없었다. 거란군의 위세에 눌려, 신라와 후고구려는 야율아보기에 공물을 보낸다. 신라는 발해와 결맹을 맺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발해를 팔아먹는다. 병력을 보내어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하고, 홀한성을 포위공격하는 것을 돕는다. 이렇게 하여 당시 주변나라중에서 발해는 완전히 고립되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발해는 강대한 거란의 공격앞에 신속히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발해국이 건립된 후, 대조영시기부터 발해는 계속하여 대외적인 확장을 진행한다. 제2대 대무예가 즉위한 후, 그는 북진정책을 취한다. 동북의 여러 이족이 두려워하여 신복한다. 선왕 대인수의 대에 이르러 다시 해북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켜 영토를 확장한다. '해북의 여러 부족'이라 함은 오늘날 흥개호이북의 각 부족을 가리킨다. 불렬부(佛涅部), 철리부(鐵利部), 우루부(虞婁部)등을 포함한다. 이들 부족은 발해의 백성이 된다. 그외에 쇠락한 백돌(伯咄), 안차골(安車骨), 호실(號室)등 여러 부족도 발해국의 주현으로 편입된다. 이제 발해국의 영토는 이미 흑수부를 제외한 말갈6부족의 거주지와 고대 저명한 부족인 부여, 예맥, 옥저, 읍루의 옛땅을 포함하게 된다. 발해국은 "영주의 동쪽 이천리에 위치하며, 남으로 신라와 니하(尼河)를 경계로 하고, 동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로는 거란과 국경을 마주하며, 지방이 둘레 오천리이고, 호는 10여만이다"  행정구역은 오경, 십오부, 육십이주, 백삼십여현을 보유한다. 발해는 무력으로 정복하여, 지역이 넓은 지방봉건정권을 구축한다. 이는 극히 공고하지 않은 연합이다. 발해국이 쇠락할 때, 이들 공고하지 않은 연합은 동요를 일으키고, 와해된다. 먼저 흑수말갈은 815년부터 발해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중원과 통한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독립된 상태가 된다. 특히 당나라가 멸망한 후, '흑수말갈이 후당에 사신을 보낸다' '그 후에 자주 조공을 바친다' '다음 해, 흑수말갈의 호독록(胡獨鹿)이 사신을 보내온다' 월희부(越喜部), 철리부, 불열부(拂涅部)도 전후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다. 발해로부터 떠남으로써, 발해는 점점 이들 부락과 지역에 대한 지배역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국내민족간의 갈등이 아주 첨에해서 발해국의 쇠락을 가속화시킨다.

 

발해국의 국내갈등은 날로 심각해진다. 발해는 봉건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대씨왕족과 그 귀족은 양극분화의 기초 위에서 봉건주의 방향으로 가서 인민들의 위에 군림한다.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먹으며 부패하게 된다. 광대한 농민, 목민, 어민과 수공업자들은 노예와 농노의 지위에 처해 있었다. 부득이 자신의 노동으로 소득을 얻어야 했으며, 대부분의 소득을 귀족에게 빼앗긴다. 9세기중엽이후, 발해통치계급은 날로 부패한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성을 만들고, 대량의 재력, 인력과 물력을 들인다. 자신의 호화사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직접적으로 많은 백성을 일시켰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사치품과 생활필수품을 얻어냈다. 매번 조공때는 대량의 발해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분명히 백성들에게서 뜯어낸 것이다. 이는 인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그외에 발해국은 당나라조정, 일본사신을 접대하고, 인질을 보내고 유학생을 보내는 과정에서 '해동성국'의 외관을 장식했다. 그리고 원래도 부족한 사회의 부를 낭비했다. 통치계급의 압박하에 인민들은 그저 "동굴을 파고 살며, 와기(瓦器)를 사용하고, 짐승가죽을 입었다"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한 생활은 심각한 계급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동시에 발해통치집단 내부의 투쟁도 격렬했다. <고려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태조8년(925년), "가을 구월 병신, 발해장군 신덕(申德)등 5백명이 와서 투항했다" 이어서 그달 "경자일, 발해 예부경 대화균, 균로,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부, 좌우위장군 대심리등이 백성 1백호를 이끌고 귀순했다." 이는 발해멸망전에 대량의 발해귀족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이때 발해통치집단의 상층부에 심각한 내부투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일부 왕공귀족은 투쟁에서 실패한 후, 망명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발해통치역량을 더욱 약화시킨다. 야율아보기는 바로 이렇게 민심이 이반하는 틈을 타서 공격해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발해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발해국은 9세기말부터, 사회의 정치, 경제위기가 종합적으로 발발하여 국내형세가 급전직하하고 명백히 쇠락한다. 당왕조의 보호를 잃은 후, 강대한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국은 신속히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