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021년 02월

27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이릉지전은 동한말기 3대전투중 하나이고, 또한 최후의 대형전투이다. 이 전투이전에 촉한과 동오의 합작관계는 육손이 관우를 기습함으로써 끝났다. 쌍방은 전우에서 적이 된 것이다. 조위는 그래서 잠시 숨돌릴 기회를 갖느다. 촉한은 이 전투에서 일패도지했고, 명장과 정예병사들의 손실이 참혹했다. 이릉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동오는 위에서 아래까지 촉한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육손이 한 행위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었다. 동맹국이 적국과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을 보태지 않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오히려 등뒤에서 칼질을 했다. 그리하여 관우, 관흥 부자는 피살되고, 유비, 유봉부자는 멀어졌으며,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고, 더더욱 간접적으로 장비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5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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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

10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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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가 죽은 후 방천화극(方天畵戟)은 어디로 갔을까?

글: 계설필담(溪說筆談)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적토마는 조조에 의해 관우에게 하사된다. 그렇다면, 그의 병기인 방천화극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무기는 사용하는 사람이 원래 많지 않다. 방천화극을 주병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무장은 더욱 적다. 대장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명소졸은 여포의 병기를 쓸만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조조가 누구에게 하사하고 싶어도 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천화극은 여포의 상징이 되었고, 아마도 전리품으로 조조가 소장했을 것이다. 기실 이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언급되어 있다. 조비(曹丕)가 칭제하기 전에, 그의 동생인 황수아(黃鬚兒) 조창(曹彰)이 불복하여 병력을 이..

21 2020년 11월

21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초선(貂蟬)의 아들이 선비(鮮卑)의 10만철기를 대파했다?

글: 문재봉(文裁縫) 먼저 얘기할 것은 "초선(貂蟬)"이 원래 인명(人名)이 아니라, 한나라때 시종관원(侍從官員)이 쓰는 관모(官帽)의 장식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검으면서 얇고, 얇으면서 가볍고, 가벼우면서 뚤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후궁에 모자를 관리하는 관직을 별도로 설치했는데, 사람들은 '초선'이라는 말로 이런 모자를 관리하는 여관(女官)을 지칭했다. 나중에는 미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쓰이게 된다. 다음으로, 에는 초선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없다. 가장 먼저 초선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초선의 성은 임(任)이고, 원래 여포(呂布)의 처였다. 임도(臨洮)의 전란중에 여포와 헤어져서 나중에 왕윤(王允)의 집으로 흘러들어간다. 초선이 향을 사르고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20 2020년 11월

20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 관우, 장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용모는 모두 선명한 특색이 있다. 너무나 선명하여 수천수만명 속에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한번 보면 잊지 않을만한 그런 용모이다. 먼저 유비를 보자.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눈으로 자신의 귀를 돌아볼 수 있고,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다음으로 관우를 보자: "키는 구척,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대추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단봉안(丹鳳眼), 와잠미(臥蠶眉)이다. 용모는 당당하며 위풍이 늠름하다." 장비는 또 어떨까?: 키는 팔척, 표두환안(豹頭環眼, 표범같은 머리에 동그란 눈), 연액호수(燕頷虎鬚, 큰 턱과 호랑이수염), 목소리는 큰 우..

19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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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 겨우 무명장수 2명을 죽였을 뿐인데, 왜 '삼국제일맹장'이 되었을까?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중국역사상 여포는 유명한 인물이다. 근 2천년동안 그는 '삼국제일맹장'으로 떠받들어진다. 당연히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동한말기제1명장'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찌감치 조조에게 죽임을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포의 용맹은 유명하다. 그는 "비장(飛將)"이라고 불릴 뿐아니라, 에서 무한히 떠받들어져서 심지어 '유비,관우,장비' 세명과 혼자 싸우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다만, 역사상 진정한 여포는 그렇게 대단한 전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출도한 이래 단지 2명의 무명장수를 베었을 뿐이다. 호뢰관전투에서 여포는 병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는 "5합도 겨루기 전에 방열(方悅)을 참하고, 손으로 극을 들어 목순(穆順)을 주살했다." 너무나 ..

22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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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주유(周瑜)는 적벽대전때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이 아니었다?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주유는 적벽대전을 주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후인들은 '삼국주랑적벽(三國朱郞赤壁)'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다만 손권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양로(兩路)의 부대를 파견했고, 각각 주유와 정보(程普)이고, 좌우독(左右督)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적벽대전은 주유가 독립적으로 지휘한 것이 아니고, 주유는 대도독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실의 진상은 그렇다면 어떠했을까? 대도독이라는 관직이 정식으로 나타난 것은 황무원년(黃武元年)이다. 유비가 촉한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자, 손권(孫權)이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유비를 막게 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수하의 장수들은 경력이 더 많고, 공로도 큰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주연(朱然), 반장(潘璋)등이..

20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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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는 왜 항상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았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유비는 평원상(平原相)이 된 후, 자립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실력과 당시 천하형세로 인하여, 제후들은 부득이 다른 제후와의 합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갈등이 첨예한 적을 상대하고,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제후들이 유비와 합작한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유비는 시종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유비가 평원상이 된 것은 공손찬때문이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우기 때문에, 유비와 청주자사 전해(田楷)는 제(齊)의 딸에 주둔했다. 조조는 서주를 공격했고, 서주자사 도겸이 도와달라고 한다. 전해와 유비는 함께 가서 그를 도와준다. 이때 유비에게는 1천여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주의 일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