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21년 01월

25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자영(子嬰): 조고를 가볍게 제압하고, 항우에게 목숨을 잃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08 2020년 10월

08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한 후, 육국의 군주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원시인(原始人) 순망치한의 상황이 많은 경우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일이라고 여겨서 다른 사람이 우리 주변의 사람을 괴롭힐 때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발할 때, 그것이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자신도 주변사람과 똑같이 당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이런 경험과 교훈은 많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가 바로 전형적인 경우이다. 처음에 일부 국가는 모두 진나라가 주변의 약소국을 멸망시켜도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린다. 그렇다면, 진나라는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육국을 멸망시켰고, 그 군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한(韓) 진나라는 육국을 통일하겠다는 야..

15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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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왜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서주(徐州)의 옛 명칭은 팽성(彭城)이다. 요(堯)임금이 팽조(彭祖)를 대팽씨국(大彭氏國)에 봉했는데, 팽성은 바로 대팽씨국의 도성이었다. 나중에 상(商)의 주왕(紂王)에 멸망했다. 춘추시기에 팽성읍은 송(宋)나라에 속했다. 팽성은 송나라의 중요성읍이다. 왕왕 제후들이 쟁탈하는 목표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십이월, 항우는 여러 제후의 병력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격파하고 진왕조를 멸망시킨 후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오르고, 팽성을 도읍으로 한다. 그는 패주의 신분으로 전국을 18개왕국으로 나누어 제후, 부장(部將)과 항장(降將)을 왕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가 진나라황궁을 불태워버릴 때, 어떤 참모는 그에..

30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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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태행팔형(太行八陘)중의 포음형(浦陰陘)의 역사

글: 지도제(地圖帝) 태행산맥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의 사이에 있으며, 황토고원과 화북평원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이다. 자고이래로 병가의 필쟁지지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태행산은 험준하여 넘기 힘들어 고대인들의 통행이 불편했다. 태행산에는 8개의 산맥 양측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있다. 고대인들은 이를 '태행팔형'이라고 불렀다. 태행팔형은 남쪽부터 북쪽으로 차례로 경관형(輕關陘), 태행형(太行陘), 백형(白陘), 부구형(滏口陘), 정형(井陘), 비호형(飛狐陘), 포흠형, 군도형(軍都陘)이다. 오늘 우리가 얘기하려는 것은 바로 태행팔형중 제7형인 포음형이다. 포음은 옛 현(縣)의 이름이다. 지금의 하북성 역현(易縣)의 서자형령(西紫荊嶺)에 있었다. 동한시기에..

30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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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왜 우물이 고향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장생전(張生全) "배정리향(背井離鄕)"이라는 성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배(背)"를 1성으로 읽어서, 이 성어의 의미는 바로 "우물을 등에 짊어지고 고향을 떠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의문이 생긴다. 우물을 어떻게 등에 짊어진단 말인가? 당연히 이건 오해이다. 정확한 해석은 여기의 '배(背)'를 4성으로 읽어야 하고, "등을 돌리고 떠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의미는 자신의 고향집에 있는 우물을 등지고 고향을 떠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물'은 고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고향에는 사물이 많다. 이치대로라면 집, 토지야말로 고향을 대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왜 토지, 집과 같은 물건이 고향의 대명사가 되지 않고, 우물이 고향의 대명사가..

11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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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평민 유수(劉秀)는 황제에 오르면서 왜 "한(漢)"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을까?

글: 심야요재(深夜聊齋) 한(漢)나라는 전후로 400년간 지속되는데, 둘로 나뉜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나중의 북송(北宋), 남송(南宋)과는 달리, 서한과 동한의 사이는 끊어져 있다. 중간에 왕망(王莽)의 신(新)왕조가 있었다. 다만, 한동안 '신'왕조는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왕망은 황위를 찬탈한 인물로 덕이 없다고 여겨져서, 왕조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왕조의 중후기 당시의 사회 각계층에도 한왕조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비교적 두드러진 것은 유씨종실(劉氏) 종실의 인물들 중에서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대부분은 가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무제의 증손자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였..

30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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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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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무왕벌주(武王伐紂)가 일어난 해는?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무왕벌주는 중국역사상 경천동지할 대사건이다. 당시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과 강자아(姜子牙, 즉 강태공)가 수만의 호분(虎賁)을 이끌고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로 쇄도해 들어간다. 당시, 상나라의 주력은 동이(東夷)를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주왕(紂王)은 어쩔 수 없이 17만의 노예를 무장시켜 성을 나와 주나라군대와 맞서야 했다. 그러나, 상나라는 노예에게 엄격했고, 걸핏하면 그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에게 제사지내는 희생으로 썼다. 분명히 이들 노예는 상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을 터이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자, 노예들은 창끝을 거꾸로 겨누어, 주나라군대를 인도하여 조가로 쳐들어간다. 주왕은 결국 자결하고, 500년에 걸친 상왕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