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에 가면..

댓글 2

여행

2010. 8. 23.

 

   

음악 

          Lonely Shephord - Youtube

 

 

                                                             고랑포구에서  본 임진강

                                                                                      

 

 

  경의선  

  전철을  타고 도심을 떠나   모처럼 느끼는 여유로움 속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신흥도시로 발돗움하는 문산역에  도착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자유로로 이어지는 문산 당동 IC에서  다시 자동차 전용도로(37번 국도)를  막힘없이  달리다 보면

  임진강변  황포돗대와 경순왕 IC로 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파주와 연천을 가르며 흐르는

  임진강을  건너면  연천에 들어오게 되지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숨쉬는 청정지역인  이곳은  장남면으로 시작해   백학면, 미산면 등 주로

 군사보호지역으로 그간 제한에 의해  더딘 개발을 하여 왔는데 이제는 점차 완화되어 

 그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변해 가고 있읍니다.

 

 자유로를 숨차게 달려오다 당동 IC에서 시작되는 37번 국도를 따라 임진강 변에 펼쳐지는

 수려한 강변로에 접어들게 되면  도심에서의 누적되고 체증된 현대인의 스트레스도 일시에 날아가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즐기게 되는데

 

 반복되는 정형적인 도시생활에 매여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무쳐있던 감성도  계절에 따라 어김없이 변하는  원시 자연의 비경에 ...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잊고  

 메말랐던 감정이 촉촉히  젖어들게 됩니다.

                                                   

                                                          

                                                      진강을 따라 달리는  국도37번 자동차 도로

 

 

    

  현재의 연천군 장남면은 1989년 백학면 원당출장소에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랑포구는 옛부터  마포포구에 이어 중부 내륙지방 깊숙히 연결된  물길(한강,임진강)이

         육로를연결하는 천혜의 교통의 요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는 시간의             

   흐름에 무쳐 무심한 강물의 흐름과 함께 잊혀가고 있읍니다.                                        

   

  부근의 백학면은 민족을 갈라놓은 비련의 분단선 38선이 지나가는 곳으로써  

  백학면소재지는  인공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쪽  전동리, 통구리마을 등은

  태극기가 휘날리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합니다.

 

 

 이제는 세계적 1,2위를 다투는 LCD,LED및 화학단지 (월롱,문산)등을 지원하는 경기도 산하 지방공단(12만평)을

 조성중이며  개발로 인한 물류량을 소화해내기 위해 비룡대교와 백학면에 이르는 기존 지방도로를 확장하여

 4차선도로로 정비하여 건설중이고  임진강변 산하 60여 만평에 골프와 위락단지가 강변을 굽어보는

 학곡리와 구미리에 첫 삽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1930년대 중부 최대  항구의 하나이며 6.25사변의 최대격전지의 하나였던 이곳은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하루에도 몇번씩 주인이 바뀌며

       산야가 온통 피의 능선을 이루며  강물을  붉게 물들였던 곳 이기도 합니다.  

                           

                           내륙 깊숙히 양안이 현무암의 절리로 이루어진 기암절벽의 천혜의 방어선이 었던               

              이곳은 지금은 수려한  자태로  수많은 세월의 자취와 함께 형성된 절경의           

      자연의 신비를  우리에게 조심스레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고랑포구는

 이지역 에서 나는 콩,인삼,땔감,곡물등의 산물과  내륙의 특산물을 외부로 반출하고

 외부에서 조기,새우젖 등 서해안 산물인 어류와,소금등 필요한 물자가 들어오는 내륙지방

 깊숙히 위치한 농.임 특산물 집하장으로 번창 했던 포구로써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무친 민중들에 휴식과 삶의 생기를 충전해주는 생활의 안식처로써

 저잦거리 부근에  화신 백화점 분점과 상점,주막, 여곽, 민가들이 즐비 하였던 옛 자취들은

 그 당시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던가를 능히 짐작하게 됩니다.

 

 

 

 

 

 

연천군은 귀중한 15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고랑포구 206번지 일원에 부지 면적 61,520m2 ,옛건축물 복원

연면적 3,240m2 규모로 2012년 완공을 목적으로 태마파크 조성사업을 추진하고있으며

주위에는 1968년도  당시 우리국민들의 가슴을 들었다 놓았던 김신조 무장공비(1.21사태)침투로가 있어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국을 되새기는 안보관광  차원과  연계하여

새로운 역사,문화,체험의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읍니다   

 

 

   1.21.사태는

       1968년 북한특수부대인 124부대소속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지금의 장남면 반정리 저지대 지형을 이용해 침투한

       사건으로 1.17 . 20:00 북방한계선을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3시간만에 남방한계선인

      현위치(반정리)에 도착  그 추운 한겨울 임진강을 도하하여 장파리를 통해 파평산과 북 노고산

           앵무봉,남노고산 비봉을 거쳐  우리가 평화롭게 따뜻이 잠든 야음을 통해  험한산악을 상상치 못               할 행군속도로 수도권 중심까지 신속히 잠입하였다하니 얼마나 혹된 훈련을 통해 예측치 못할 침투가 가능 했는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그 들의 준비는 치밀했던 것이지요.                                                               

 

공비들은 1.17. 23:00 침투를 시작하여 낮에는  쉬고 야간에만  빠른속도의

  산악 행군으로 전원이 1.21.  서울에 잠입하게 된 것입니다.무장공비들은    

  우리 국군복장과 중화기(기관단총,수류탄)로 무장하고  청운동 세검정        

   창의문을 지나려다 비상령하에 경계근무중이던  군,경찰 불심검문에          

  발각되자  무차별 총격을 난사하고 그곳을 지나던  시내뻐스에 수류탄을  

던져  우리국민들을 사상케 했던 실로 엄청난  사태였습니다.

                                     

                   

 

                 

 

 

  1968년 1월16일 밤10시 황해북도 연산군소재  124부대에  한대의 버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이속에는 31명의 남파특수공작원들이 타고 있었읍니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 공작원 초대소.

 남조선 해방을 위해 그 심장부에 비수를 꽂으라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선별된 특수 공작원들은                  

  떠날때의 부대장의 이구호를  머리에 되새기며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때의                                          

  암호인  "611" 을 되새기며 과연 살아가 그리운 고향을 볼 수있을까 하는 하나의                                       

    실같은  빛을 갖고 복잡한 상념속에 있었겠지요.                                                                                  

 

            

        그들이 북방한계선 을 넘은 시각이 밤 9시, 비무장지대 그들이 개척해논 안전지대를 따라                  

         침투를 시작하였읍니다. 예상 침투지역은 미군2사단과  한국군 25사단 관할지의 경계선 부근 이였지요.     

             

             이들은 관할지역의 취약성을  역 이용해 이지점으로 침투로를 정해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긴장된 손으로      

               철조망을 헝겊으로 두르고 서서이 절단하기 시작하였읍니다. 등에 식은 땀이 나는 긴장된 시간이

                     지나가고 이들은 이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여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된것입니다.                  

 

                                       당시 서부 철책선 경계임무는(고랑포지역) 미 2사단 과 우리군 25 .26사단                                         관할 이였다 합니다.  당시 우리군은 249km휴전선 전 지역을 철조망 방어시설을

 구축하였으나  미군 관할인 4km지역만 제외되었는데 . 이는 미2사단이 우리군의   

              철조망 설치에  회의적으로  미군들의 전자감응 자체장비로만  설치되어있어다 합니다.         

 

이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아래 정보를 입수하여 미군지역과 우리군 경계지역을   

교묘히  이용해  침투하게 된것이죠. 아무래도 지금의 우리의 철통같은 경계에 비해

 좀 허술하였기에 그들의 침투가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이들은 영하 20도의 얼어붙은 강위를 조심스럽게 도하하기 시작해 19일 밤 경 이곳을 지나  

           앞을 가로막은 파평산으로 전력 질주하여  법원리 삼봉산 기슭에 도달해  숙영을 하게 됩니다.   

 

 

 

 

당시 남방한계선을 침투하는 공비들 모형

 

 

 

최초  우리측에 동태가 포착된 것은  1.19 . 21:00 파주시 법원리에서

민간인  우씨성을 가진 젊은 나무꾼 4 형제의 신고 였지요.             

20대 전 후반의 이들은 법원리 삼봉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오후 2시경 야간 침투로를 탐색 나온

정찰조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들은  26사단 마크를 단 한국군 복장으로 이들 4형제를 데리고  

             그들 야영지로 끌고 갑니다.  우연 곡절 끝에 저녁 때가 되어서 이들은 공비들이 자신들은 군사작전을      

   하는 한국군이니 발설하지 말라는 협박아닌 경고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합니다.                      

 

 

 우씨 형제들은 이들을 처음 본 순간 이상한 감을 직감하였다는군요. 한국군 복장인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 차림 이였으며 어눌한 함경도 사투리로  우리군인들은  아니라고

  직감하였다 합니다. 하여간  이들에게서 여러시간동안 갖혀 있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때쯤  죽움의 문턱에서 풀려나 돌아 오게 되었읍니다.                               

이들은 그형제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 한국군같다하니 이어

  하루에 밥을 몇끼먹냐 물어 3끼 먹는다 하자                                       

        그들도 인간이였던지라 묘한표정을 짓더라던 군요.                                     

 

 형제들은 마을로 내려와 즉시 단양 우씨 종가집으로 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읍 창현 파출소에 신고 하게 되었읍니다.          

       그때가 1.19 밤 9시경 이였는데 인근부대에 9시 30분경에 전달되고 3시간 지나서

                   대간첩 작전 대책위원회가 설치된 합동참모부로 자정무렵이 되어서야 보고 되었다 합니다.

 

 

 

 

 

                                       당시 침입로를 설명하는 김신조 목사                                                 

 

31명의 무장공비들은 발길을 재촉해 노고산을 넘어 송추계곡에 이르니

벌써 군인들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었다 합니다. 설마했던 신고가 들어갔음을 알고 진관사 계곡을 따라 북한산 등선을타고 비봉에 도착한것이  20일 새벽 5시경이였으며 기온은 영하20도를 가르키고 있었읍니다.

체력소모는 예상보다 심했다 합니다.            

 

이들은 20일 낮에는 숨어 쉬고 저녁 8시경 마지막 숙영지인 북악산 기슭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읍니다.새벽까지 북악산 최종 숙영지까지 도착해                                

      있어야 하기때문이지요.                                                                         

      그 들은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부근에 최종 숙영지로 삼고  이곳에서      

            청와대 뒷산으로 침입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군사작전으로 볼때 무장한 병력이  급속행군은 주간에  평지에서 시간당  15km정도이고    

   야간산악  행군일때는  4km/h로 보는데  이들은 시간당 10km의 무서운 속도로   

   야간에  법원리 와 미타산, 앵무봉과 노고산 그리고                                       

           북한산 자락인 진관사 기슭에  아무런 저항없이 산악 구보를 통해 도달하게 된것이.    

            이들이 나무꾼 형제를 풀어주고 즉시 이동해  이미 다 지나간 곳부터 우리의 철통같은    

             비상망(?)이 쳐지게 된것입니다.                                                                          

 

 

 

 

 

 

  세상일 살다 보면 우리가 현제 살고 있는 문명의 역할을 간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읍니다.  발전해온 과학의 힘으로 우리가 그 혜택을 보고있는

사실 아래에는  무섭도록 그것을 바쳐온 각 분야의 꾸준한                        

발전이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곳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 치밀하고 계획된 일들이 어느한               

      순간의  헛점에 의해 무너지는 사실들..  이는 우리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하여    

  지식보다   경험상에서 우러나는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들도 얼마나 많은 혹독한 훈련과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이곳까지 왔으나     

  그들에게도 허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우한 우씨 형제를 죽여야 하느냐, 마느냐,         

                   그들 상호간 의견의 충돌이 있었으나 큰 거사(!)를 앞두고 조그만 피는 거두고 풀어주자는  

인간적인(?) 다수의 결정으로 과오(?)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보고한 후 공교롭게도 수신되는 암호가 해독되지 않았다 합니다.

               무선교신에 이어 소지한  트랜지스터라듸오를 통해 아리따운  여성의 입에서는            

                 계속숫자를 토해 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지한 암호문으로 해독이 되지 않았다는군요.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그 내용은 "원대복귀, 원대복귀" 였다 합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나무꾼 형제 중에는 아직도 현직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분도         

  계신다는데  천우신조라는 말이 이때가 적합한지 아닌지 . 하여간                  

  그때나 이때나 우리 민초들의 역할은 이 사회를 지키는                               

 밑거름이 되고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군요.                          

   이로인해  하늘의 별도 떨어지고  땅위에 별도   떨어져 갔지요.                       

 

 

 

 

 

   이들 무장 공비들은 1.19일 오후 8시경 우씨 형제들을 풀어주자마자

              법원리 뒷산을 출발하여 목적지를 향해 급속 산악 행군으로 들어가 행군이   

 아니라 전력 질주로  산을 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정보망에 불이 튀기시작 할 무렵, 이들 무장공비들은 앵무봉을 지나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으며, 새벽 4시경 노고산을 주파하고 서울의 경게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를 통과하고 오전 6시경  서울을 내려다 보는

   북한산 비봉에 도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10시간을 거의 휴식조차도 없이 푹푹 무릎까지 빠져오는            

                     야간 산악길을 행군이 아닌 전력 질주로 중무장한 31명의 전투병력이                

             곤히 잠든 밤하늘에 우리"코" 앞에서 같이 동거(?)하게 된것이죠.               

                   이들이 지나간 곳에서는 그제야 우리의 철통같은 방어선이 따라붙기                

  시작해  야단 법석인 상태에서 말입니다.                                   

 

 

  무장공비들도 인간이였던지라 체력소진에 의한 힘의 저하로 밤새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속을 악전고투하며 도착한 곳이 눈덮인 승가사를 바라보는 북한산 자락이였다 합니다. 

                    이들의 최종 숙영지며 공격 출발점인 곳은 북한산이 아니라 그 앞에있는 북악산 이였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소름 끼치는 불행의 전주곡 이였으며

 우리들에게는 식은 땀이 흐르는 행운이였겠지요.

 

        목적지인 북악산은 멀었는데 날은 밝아오고  헬기가 산 주위를 날기 시작하며             

   이들에게도 공포가 엄습하게 된것이죠. 그 들은 할 수없이 계획을 변경하여           

산행을 포기하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저녁 8시경 산을 내려와 청와대로           

접근하기로 한것입니다.정해진 시간(일요일 저녁)에 산행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어 그들 계획대로라면 북악산 최종거점(현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청와대 뒷산으로 접근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공격 루투가 변경되어 산에서 내려오게 된것이죠.

 

  

                                                                  현 자하문 내리막 길

 

 

 

 1.21. 일요일 밤 8시경 ,북한산 비봉에서 마지막 공격준비를 갗추고 밤 9시경 북한산

  기슭을 내려와 도로에 접어 들게 됩니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긴 외투를

    걸치고 그 속에  중무장한 기관총과 수류탄을 소지한 체 일열로 한 걸음 한 걸음                      청와대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갑호 비상령이 떨어진 서울 시내 세검정 길까지 접근하여 2열 종대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일요일 저녁이고  비상경계령 으로 거리는 한적하였읍니다.       

           이 괴한 들이 처음으로 꼬리가 잡힌 것은, 수상한 무리가 구평동 버쓰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 쪽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는 현지경찰의 시경으로  숨가뿐 급속한 타전이였읍니다.           

 

         당시 서대문 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급파되어 이들을 선두대열에서 저지하며 검문하자        

이들은, CIC(당시 방첩대)대원들이며 훈련을 마치고 청와대 근교에 위치한 원대로    

   복귀한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며 행군을 지속하자  급히 이들을 상부로                 

      조회하고 이들을 소수의 병력 (6-7명 경찰)으로 지령을 기다리며 경계하고 있었읍니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흐르면서  관할지역을  넘어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의  신원확인을  재차 보고하자  밤 10시경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는  자하문 내리막 길에 당당한 체구의                

     종로경찰서 최규식서장이  지프를 타고 달려와 길을 가로막고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권총을 뽑아들고  한발자국도 못간다고 하자..         

 

극도의 신경이 날카로와진  공비들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투속 총기를 손으로 더듬거릴 때   

      마침 마지막 버쓰가 종점에 도착하면서 그뒤에 불을 밝히며 서자   

 

이들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앞을 가로막은 최서장의 가슴을 향해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해 "국방군" 이다 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인근 버쓰에 슈류탄을 던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게 된것이죠. 

                        그때가 밤 10시 15분경 당시 36세의 최규식총경은 가슴에 세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게 됩니다. 첫 우리측 의 희생자 였지요.

 

 

 

고 최규식 경무관 

 

총성이 퍼지자 당시 청와대 외곽경비를 담당하던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하게 됩니다.                                   

        30대대장은 전두환 당시 중령이였으며 그 아래 장세동 소령이 작전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합니다. 두 분들은 누구나 아시다시피 우리역사에 큰 흐름을  

       장식하신 분들인데 객관적으로 볼때 우리의 근대 역사상 중요한 부분에     

               종종 나타나는 그러한 중책의  position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음니다.            

 

         평상시 꾸준한 훈련으로 즉시 81mm포로 조명탄을 쏘어올려 그 부근을        

      대낮같이 밝히며 공비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 지게 되었읍니다.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빛을 보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준비하는 자세 그 본분을 충실히 지키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뜻의로 보여집니다.         

 

이시대에 살아가면서 가슴아픈 사연들이 수많은 별들처럼  많지만   

길지않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주어진 시간을           

  남들을 위해 보람있게 살아갈때  그 자취가 남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하여간  이 사건 으로

 

               군경은 즉시 소탕전을 벌여  1.20. - 1.31. 까지(12일간)  29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 혹은 투항(김신조) 하고 1명은 도주하거나  사망한것으로 처리하여

 사건을 종결하였으나

                우리국민의 혼을  왈칵 뒤집어 놓고  충격을  남겨준  실로 엄청난  사건이였습니다 .   

                             이로인해 우리 측은 작전 중 15연대장 이익수대령과                                                         

           그 날 밤 현장에서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민간인 등 5명이 사망하고

                 시내뻐스 4대 완파 와 승무원등이 부상 당하는 피해를는  입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우리도 부랴 부랴 예비군을 창설하였고 서해 실미도에 68△ 특수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훈련하여 북한에 대해 보복하려 하였으나 조성되는 남북화해 분위기에 

 무쳐 그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대낮 백주에 영등포 까지 나타나 또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버스 난동사건이

 이번에는 실미도와 관련있었다 하니 ,       

 참  놀랍고도  애절한 감정이  마움속에 스미는군요.. 

 전향한 김신조는 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 목사안수를 받아 성직자로써

 남은 여생을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합니다.

 

 

                   

                                                                      경순왕  릉 

 

  

 고랑포구에서 뭍으로 올라와 조그마한 야산 기슭(성거산)을 오르다 보면  수 백년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무쳐가는 신라 마지막 군주 그리고 쇠약해져가는 나라를 바친 아비를 원망해서 인지                                            

군주 못된 한이 서려서 인지 저린저린 가슴을 부여잡고   개골산(겨울금강산)에 들어가                                                                         

       남은 생을  베옷과 풀입만으로  생을 마쳤다는 마의태자(큰아들),  화엄사(삼국유사 : 해인사) 에                    

       삭발하고 입적한  범용(막내아들) ,  이들의  부친이였던

 

     비운의 경순왕 릉이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머나먼 남쪽 고향  서라벌 언덕을  바라보며

     무심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존의 명당터에  외로이 누워 이곳을 찾는 이의

     가슴을 촉촉히 여미게 하고 있읍니다.

 

 

 

 

 

 

 

  경순왕은  927년 당시 선왕인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유희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참살 당하고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  신라 제 56대  마지막 왕으로써 (927-935:재위기간)   그 당시 판도는                                                  

 침공을 일삼는  후백제, 신흥세력으로 발돗움하는 고려, 기울어져 가는신라로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으나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지방호적들의 군웅활거로  나라는 쇠약해 질때로 약해져가고 있었고

 민심은  왕건의 신흥고려에 기울고 있어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마지막 어전회의를 거쳐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나   43년간  이나 긴 세월을 살아갔다 합니다.

 

 얼마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으면  수백년을 이어왔던  한나라가 제대로  한번 대쳐하지도 못하고    

 그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주지육림속에 날벼락을 맞고 적의 칼에 쓰러져 갔다는 것은

 그 당시 신라 조정이  얼마나  민의와 떨어져  쇠락해져가고 있었는가는  후대의 우리들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바 있어  씁씁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북녁의 문화 유산

          

                                                                  태조 왕건 능(북한소재)

                                  

 

                                                                   숭의전에 모셔졌던  왕건 동상

 

 

                                                     

 

하여간  견훤과 왕건의 갈림 길에서 경순왕의 발길을 고려로 이끌게 한 크나큰  역사적

선택은  행인의 옷을 벗기려는  바람의 강한 힘보다  햇살의 더위가 스스로  행인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속담처럼 왕관까지 씌어준 칼의 힘(견훤)보다  건국초  선정을 지향하는 왕건의 품으로  이끌었느지도 모르겠군요.

 

포석정 참살로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인들은 견훤에 원한 갖고 고려 왕건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경순왕은 고려 왕건을 만나 의사를 타진코자 931년 사신을 보내 그를 경주로 초청하게 됩니다.

이에 왕건이 흔쾌히 승낙하여 역사적 경주회담이 임해전에서 열려 잔치를 벌이게 되지요.

이자리에서 경순왕은 "신라가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에게 유린을 당해 분통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며

눈물을 흘리니 이에  왕건 역시 눈물을 흘리며 경순왕을 위로 하였다고 합니다.

 

 왕건의 마음을 읽은 경순왕은 4년후 935년 스스로 신라 유민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 바쳐 민족적 계승을 이루고자 하였다 합니다. 

 민심은 천심이고 천심이  곧 민심이라는 이와같은 사실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생생히 터득한 진리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걸음씩 앞으로 나갈 것이겠지요. 

 

 

 

                   

                                                            숭의전과 그 입구

            

 

 

 순왕은 귀부후 정승공에 봉해져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덛부쳐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고  오랜 세월을 살아갔다하나,

 

 그 기나긴 세월을  얼마나 많은 상념 속에 살았는지   그 저리고   말못한  한많은 업보는 다 어떻게 이고 갔는지.. 그 누가 알랴마는

 돌아갔을 때는 ,  당시 개성의 주민 2/3가 경순왕을 따라온  신라유민들로써 그들에 의해

 옛군주를 경주에  모시려고  하였건만 , 고려 조정의  왕의 구(주검)는  도읍 개성을 벗어나  100리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하여, 그리도 한 많은 임진강을 넘지 못하고 개성에서  100리가 못미치는 이곳 고랑포리 성거산

 양지바른 터에    왕의 의식을 갖춘 장례를 치루었다 하니, 

 

 혼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리운 고향 바다로 흘러흘러 갔는지  아니면   멀리  그렇게 보고싶던    

 고향언덕으로 나래를 펴  훨 훨 날아갔는지 그저 흘러가는 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심히 흘러만 가고  있읍니다.

  

 무엇보다 수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던 나라가  한나라에 흡수되어간  역사적 사실은   투쟁과 고통만을

 피하려는  나약 함보다도  신라의  통일 정신을 신흥으로 부상하는 고려에 계승시켜 민족적  화합을 이루려는

 대승적 견지에서 우러난   핏줄의  끌림이였겠지요.

 

 

 

                    

 

 

 좌로부터  오두산성, 무장공비 침투로, 경순왕릉, 호로고루성, 육계토성, 칠중성,숭의전, 당포성, 은대리성

 

 

 

                        

 

 

 

  오두산성 (백제,사적 제351호.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68.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돌출지점으로  서해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통한 물길을           

                            장악할 수있는   천혜의 요지.. 조선 초기 지형이 까마귀 처럼 생겼다하여

                            까마귀 오자와 섬 도를 써서 '오도성'이라 부르다가, 그 이후 자라 머리모양 같다하여

   자라 오자와 머리 두를 써서 '오두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북녁땅을 바라보기만 하는 통일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음.) 

 

 

 

 

                          

 

                    

                                                     

                                                          1.21 무장공비침투로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산13. 북에서

남으로 통하는 분지같은 지형으로 이곳을 뚫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파평산으로

 잠입 하였음.    민통선내에 위치하여 사전 신청에 의해 견학이 가능함.)            

 

 

 

                                                        

 

 

 

                                                                                           

 

경순왕릉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사적 제244호. 임진강을 바라보는 성거산

            기슭에 위치한 높이 약 3m, 지름 약7m 원형  봉투무덤으로      

 주위에는 판석으로 둘렀으며 고려 왕릉에서 보여주는  

                                          곡장 담장이 둘러져 있어 고려 왕실이 왕의 예로서  장례를 치루었음을 나타내고 있음.)

 

 

 

                                         호로고루성 (고구려.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9. 사적467호.  

 임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있는  현무암의 수직단애 절벽위에 위치하며 지형이 조롱박 같다하여                              

 '호로고루'  또는  마을을 뜻하는 '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로 마을성을 의미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함..

                              임진강의 두지나루에서 휘감겨져온 물길이 이곳에서 돌아 나가며 낮은 여울목을 이루어 도하하기 쉬운 천혜의    

                              지형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남침하는  북괴군의 주력 탱크부대가 도하하였던 지점이기도 함.)

 

 

 

                                                                       

 

  

  육계토성 백제. 파주시(제217호 기념물) 적성면 주월리 육계동 산99.

고구려 호로고루 성과 대치하였던 대표적 백제토성으로 육계는 여섯개의 계곡을 뜻하며

남과 북을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한국전쟁시 북한군 탱크가 도하한 지점이기도 함.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듯 하여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칠중성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 사적 제437호 ).

                 감악산 줄기인 중성산(149m) 기슭에                  

                    임진강의 흐름이 훤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함.

                           최초 백제가 축성하였으나 고구려에 이어 신라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고 함. )

 

 

 

 

                                                                                    

 

                                                       

                           숭의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10. 사적 223호).

                              임진강을 굽어보는  누에머리 모양의 잠두                                 봉  수직암벽  봉우리에 위치하는 고려의                                 실질적인  종묘로서태조 왕건을 비롯한 역                               대 국왕과 공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

 

 

 

 

                                                     

 

 

 

 당포성 (고구려,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82. 사적 제468호.) 

            임진강 북안  양주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인 당개나루터에서  임진강과

                당개샛강(임진강 지류)이  만나는  현무암의 수직 절벽위에  위치함.

                            삼화교는 문산에서 전곡까지 확장되는 국도로써  건너 동이리에 동이 IC가 생김. )

 

 

 

 

                                                       

 

         

 

                                                               은대리성 (고구려. 도기념물 제197호.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 ,   

                        장수왕 때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하는 삼각지형에  축조하였으며

  보루는 600m이하의 작은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음.)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미산면 아미리 부근 강변 절벽에는 고려의 창업주인 왕건의 사당

    숭의전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의 한 모퉁이 서있는 우리들로서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참 묘한 감정에 젖어들게 하는 군요..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이전 태봉국의 장군 시절에 개성에서 궁예의 도성인 철원까지   

 배를 타고 왕래하며 쉬어가던 곳으로 임진강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드리운 곳으로

당시에는 앙암사라는 사찰이 있어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통일을 기원햇던 도량이기도 합니다.

   

숭의전은 고려 태조와 공신들을 모신 사당으로 흘러가는 임진강물을

굽어보며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4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고려 충신   복지겸,홍유,신숭겸, 개국공신,유금필,배현경,

거란을 물리친  서희,강감찬,윤관,김취려,조충   홍건적과의 공을 세운 안우,이방실,김득배 

고려말 충신 정몽주  그리고 김부식,김방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고려말  왕씨 문중들이  이씨 조선을 거부하고 순응하지 않아 갖가지 설움과 고초를 겪으며 전 왕조를  흠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으로  차츰 조선 왕조도 고려 유민을 무마키 위해  이들을  예우 하는 포용정책을 썼다 합니다.

 수백년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넘어 저렇게 자랑스러히  이어져 가는 것이야 말로, 사람은 가도 이름을 남기고 무슨 무슨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 듯 합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시대의 우리들로서는  힘있는 사람들은 크나큰  만인      의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  민초들도  자신을  돌아보며 소박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때  후대에  의미있는 자취가  남게 되겠지요.

  그 때나 이때나   시대를 떠나  화합과 포용이야  말로  모두가 살고 발전하는 지름길이 란  삶의 지혜는...당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느껴지는 군요.

       

                            

              

                                                      

 

                                              현무암 단층으로 이루어진  주상절애    (임진강,)     

                                                      

       

                                                  

 

                                             

                                                                                                                                                                                 

 

                                     멀리 보이는 감악산( 양주시와 파주시 경계) , 앞 구릉이 호로고루 성지           

          

                                              

 

 이곳은  4c 말 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세력과  백제, 신라의  3국이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 였다 합니다.  

 475.  장수왕의  백제수도 한성을 유린 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고구려의 세력권  이였으나 

 6c 중반부터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임진강 유역에

고구려의 방어선이 구축되며  3국의 물고 물리는 치열한 힘의 각축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읍니다.

   

   임진강 북단에 호로고루성, 당동성, 은대리성은 모두  고구려 요새 였으며, 강  남안에 육계토성, 오두산성은

   백제  그리고 신라의 칠중성은 다 전략적 요새로써 공격과 방어를 위한 요충지로써 구축되었읍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보아도 그 위치나 모습이 손자병법을 몇번이나 탐독한 우리들 이지만 

   선조들의  지혜에   혀를 내두를 만큼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러한 요새들은 한강이남에서 북쪽(개성)으로  북쪽에서 한양으로 접근하는 최단거리에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는 낮은 여울목에  공격과 수비를 위한  전술운용이 용이한 곳으로   주위에서 흔이 보이는 자연석을

   가져와 수직단애의   천혜의 지형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성곽(전초기지)을 구축한  전략적  요새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3국의 힘의 균형이 모두  반도의 중심부인 이곳에서 정립되고 있었으니,  아직 으르렁 거리는

  북쪽의 힘의 세력과  2분화 되어 있는  현대의   힘의 균형은

  어디일까도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인구유입시책 바로가기                                                                                                                                                                                                             

 

                           

 

                                 

                                     

                                              도립선사 박물관                  고대 선사 유적지

  

 

 

                                          태풍전망대     고대산 평화특구 조성     백학산업단지 조성          

 

 

 

           

 

                        연천평원 독수리(천연기념물 제243-2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발전하는  연천의  청사진 

                                                                  

 임진강은  함경남도 문천군 풍산면과 강원도(북한) 법동군, 평남도 양덕군 사이를 지나는  마식령 산맥의  

 달악산과 고춘봉사이   말도 쉬며 넘어간다는 험한 고개  마식령 (768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예성강을  바라보며  남서쪽으로  물줄기를 돌려  강원도로 흘러들어 고미탄천과

 만나고 경기도 북부에  들어와서  평안천과 한탄강과 조우하게 되는데,

 

                    한반도 중심  로하스 연천.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 부근이 한반도 중심 .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삼원리 에서 발원하여  철원을 지나 연천 남계령 도감표에서

 임진강에  합류하게  되고  이곳에서 큰 물줄기를 이룬  임진강은  연천,파주 평원에 풍부한 수량을

 공급하며   휘감아 흐르다가  물줄기를 점점 넓혀가며 문산천을 지나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장장 272km를 달려와  서해로  유유히  흘러 들어가고 있읍니다. 

 지나는  구비구비마다 온갖 사연을 안고  망망대해에 와서는  그 기나긴 여정을 풀고   휴식을 취해도 되건만 

 야속히도  그  물줄기는 모든것을 품어안고  묵묵히 끊임없이  흘러  흘러 내려오고만 있습니다.

 

  연천군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중심에 해당되며 북위 38도  동경 127도 교차점으로서, 이곳은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곡읍 마포리 합수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며  부근에는  호랑이  배꼽마을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위치하고 있읍니다.

  

 

 

건설 중인   장남대교

 

 

 

                                                                           완공된 장남교

 

 

 

                                                                                                                                                                                 

임진강 물줄기가 잠시 사행(s자)을 이루며 숨울 고르고 쉬어가는 이 지역은

             파주 적성과  연천군 장남면을 연결하며 신설되는 관광 장남대교(광폭15미터)의

             완공(2013년)과 더불어  많은 방문이 기대되고 있는데,

         

     수도권  청정지역의 아름다운 환경과 자연 친화적인 개발로

     산업과 자연과 옛자취가 공존하며 발전하여 나가는

     가장  이상적이고 전원적인 아름다운 고장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 입니다.

 

 

 

 자료 : 연청군청 홍보자료. daum이미지,뮤직,지식 참조.

 

연천장단부동산

http://silktime.neonet.co.kr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바뀐 운명  (0) 2010.09.20
제국의 시대  (2) 2010.09.16
시련의 시작  (0) 2010.09.16
마법의 가루  (0) 2010.09.16
잉카 INCA  (0) 2010.09.16
연천에 가면..  (2)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