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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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010.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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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가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475년경  에스파냐 군인(나폴리 전쟁에도 참전했던 군 지휘관)이었던

   곤잘로 피사로와 미천한 태생의 프란시스코 곤잘레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읍니다. 

 처음에 그가 발견된 곳은  트루질로에 있는 산타마리아교회  차디찬 계단이었다 합니다.

 

     그는 어린시절을 대부분 할아버지 집에서 보내며 당시 시골 소년들이 주로 하는 돼지치는 일을 하며

 정규교육을  받기보다는 지역 장원 영주들 간에 싸움에 가담도 하는 등  용병 역활을  하며

성장기를 거친 삶으로 살아가 그가 평생  글을 읽지 못하는

 서글픈 경력을 달게 된지도 모릅니다.

  

     그가 태어난 에스파냐 중서부에서 폴투칼에 걸처 있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은

돈과 명예를 위해  야망을 품고 신세계로 떠난 사람들이 특히 많은 곳이였읍니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이라기 보다는  부의 상징인 황금에 대한 욕망이 들끓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 이였겠지요.  그때사람이나  이때사람들이나 시간을 초월한  황금에

 대한 욕망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읍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단순한 삶에 지쳐있던 때라 당시 먼바다와 신세계에 대한

 소문과 함께 이들의 욕망은  끔틀거리게 하였겠지요.

 1510년 알론소 데 오헤다가 이끄는 콜롬비아의 우리바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처음에 누구나  그러듯이 경험이 없던때라 그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읍니다.

새로 개척한 세바스치안 정착촌을 관리할때는 굶주림과 질병,호전적인 원주민들의 독화살(밀림의

 독개구리 등에서  채취해 그 맹독을  침끝에 무쳤는데 맞으면

얼마 안가 사망케됨) 을 견뎌내야 했읍니다.

 

     오헤다와 그일행이 독화살과 질병.굶주림으로 죽어가자 피사로는 살길을 찾아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다  1513년 탐험가 바스코 누네즈 데 발보아(태평양을 처음발견한

유럽인으로 알려짐)가 이끄는 원정대에 참가하게 됩니다.

   

     피사로는 발보아 원정대에 합류하여 독충이 득실거리는 파나마 밀림을 통과하여

 1513년 9월 29일  마침내 드넓은 대서양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파나마지협을 통한 최초의 성공적인 항로길 이였읍니다.

 

 

 

      1530년대 아메리카                                                                 피사로

 

 

      그당시 파나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로써 남미 개척이란 자원 쟁탈을 위한 교두보로써

 에스파냐인,  원주민 등 여러부류 사람들이 흥청거린 곳이였읍니다.

 이곳에서 피사로는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여

 며칠만 항해하면 광대한  황금의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낮설고 신기한 종족들의 그림들에 접하게 됩니다

 발보아의 신대양 발견 소식은 에스파냐에서 선풍이 일었고

  황금과 향료를 얻을 수있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 하였지요.

 

   그러나 신임 파나마총독  페드라리아스 다빌라가 부임하면서 발보아와 사이가

껄끄러운 관계에서  점차 서로 마주하기에는 너무 먼 관계로 발전하면서

 왕실과의 인맥으로 자리를 나꽈찬 신임 낙하산총독은

순수한 탐험을 바랬던 탐험가 발보아를

수개월 지나 반역죄로 몰아 피사로를 시켜 체포하고

 교수형에 처합니다.

 

    역사속에서 정적의 제거는  반역죄와 이로 이어지는

 처형이 정석이었던 것 같읍니다.

 어제까지의  상관이었던 발보아를 제거한 피사로는 완벽한 기회주의자였던지

 급변하는 시류의 흐름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즉시  신임총독 페드라리아스에게

 굳센 충성을 바쳐 그로부터 대서양 연안 

 원주민들과의 교역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1519년부터 1523년까지 몇차레의 탐험은 그리 성과를 못내고

 지지 부진했으나  그는 새로건설된  파나마시 시장 등 관리를 역임하면서

 약간의 재산도 모으게 되나

 그 시대의 야심가였던 그를 충족시키지는 못한것 같읍니다.

 

     그 나이 48세가 되는해 1523년 파나마에서 스페인의 돈많은 군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파나마 출신 스페인 성직자인 에르난데도 데 루케와 손잡고

 파나마남부  남미해안을 따라

 탐사 및 정복을 위한  야심찬 청사진을 그리게 됩니다. 

 당시 그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반신 반의하며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이들은 야망을 갖고 모험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524년 11월14일, 피사로는 두척의 배와 112명의 에스파냐 선원들, 말 몇마리 그리고 수명의

 인디안 하인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 1차탐험에 나서게 되는데,

그들은 열대 밀림의 해충에 시달리고   연안에 식인 부족들의 출현에도 혼줄나며   

갖은 시련과 고생을 하다  다시 파나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새로운 원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금과 물자가 필요한지라

그당시 총독 페드라리이스에게  요청하나  첫번째 항해에서 탐탁치 않은 결과와 많은돈을  허비하였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다행이  새로이 부임한  총독 돈 페드로 데 로스 리오스는 성직자 루케의 설득으로

 원정을 허락하고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게 됩니다.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탐험대의 공동 대장으로 1526년 3월 10일 성직자 루케와 함께

 계약서에  서명하게 되는데, 

 정복한 영토와 금은보화는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5세가 요구하는

 1/5을 제외한  나머지는 똑같이

3등분으로 나누어 갖기로 합의하게 됩니다.

 2척의 배로 시작한 탐험길에서 피사로는 산후안강 어귀를 지나 육로로 들어가

 인디안 포로를 잡아  금을 수확하는등 

각자 임무를 수행해 나가게 됩니다

 

     피사로의 부하 루이즈는 남쪽으로 항해하여 적도 남단 푼타 데 파사도스 까지 가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피사로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그에의하면  뗏목처럼 생긴배에  라마의 털로

 솜씨있게 짠 의복을  입은 원주민들이 있다는 것이였읍니다.

 

     피사로는 루이즈에게 좀더 상세한 소식을 기대하며 그를 보내고  재차 육로탐험길에 들었으나 

 열대 우림의 빽빽한 정글과 깊은계곡으로 갖은 시련과 고초를 겪고 해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70여일이 지난후 루이즈가 새로운 정보를 갖고 왔는데 

 

     그에 의하면  험한 산악지대를  넘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며 

 비옥한 토지와 번쩍이는 황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읍니다.

   

                                   원정대  상상도 

    

 

     시대의 야심가였던 피사로는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탐험계획에 착수하게 되고

 알마그로가 스페인에서 새로 모집한 80여명의 인원과 함께  

풍부한 물자와 인원을 보충하고 2척의 배는 잉카제국의 최북단에 위치 한

키토로 항해하기 시작하였읍니다.

  

   피사로는 척박하고 황폐한 갈로섬에서 야영하게 되는데,  길고도 험난한 모험길에 지치고

 지친 그의 부하들은  끝도 모이지 않은 탐험의 길을 포기하고

 이제는돌아가자고

 웅성거리기 사작하였으나 피사로는

 미지의  황금에 땅을 포기 할 수가 없었지요.

 

     피사로는 지쳐있는 부하들과  탐험을 포기하고 돌아오라는 총독의 명령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때가 왔음을 알고, 

 그는 부하들 앞에 나가

 모래위에 선을 긋고 말합니다.

 

   "제군들, 이선은 고통과 굶주림과 갈증과 괴로움 과 질병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진

 다른 역경을 표시한다.

 여기엔 부유함 그 자체인 페루가 있다.그리고 여기에는 파나마와 빈곤이 있다.제군들은

 각자 선택하기 바란다. 용맹한 캬스타인이되려면 어떤 것이 최선인지 말이다.

 나는 남쪽으로 갈 것이다."

 그런다음 그는 선을 넘어갔지요.

   

     그를 따른 사람은  항해사 루이즈를 포함해 12명 이였으며  합하여 모두 13명 이었읍니다.

 훗날  그 선을 넘어온 자들은 원정에 선봉에 서서 나아갔으며

 부와 영광도 같이 차지하게 됨니다. 

 

      뚫린 독에 물붓기 식으로 수확없이 자금만 지원해야한 총독의 입장에서는 탐험을

 중단하고 돌아오라 하지만  알마그로와 루케의 끈질긴  요청으로 총독은 마지못해 허락하고

 6개월안에 돌아와야하며  병사들은 지원없이  배1척으로만 탐험하라고 허락합니다.

 

      피사로 일행은 해안에서 120km 떨어진 북쪽에 위치한 고르고나 섬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은  아름다운 섬으로 맑은 식수와 원시림이 펼쳐저있었으며

  이곳에서  일행은 휴식과 활력을 보충하고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적도를 지나 툼베스만에 도착하게 됩니다.

 

      시야에는  풍요한 평원과 우뚝 솟은 사원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읍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렇게 찾던 황금의 땅

 잉카에 도착하게 된것 입니다.

 

     다음날 아침 잉카전사들은  배를 타고 미지의 이방인들 에게 다가왔는데

  그 중에는 화려한 복장과 무거운 장식을 한 잉카의 관리가 있어 유난이 눈에 띄었으며

  잉카전사들은  그를 오레혼(큰귀를 갖은자) 이라 부르며, 호기심과 경계심을 갖은

 묘한 표정으로  생전 처음보는 이방인과 접촉하게 되었음니다. 

 

    피사로는 그들을 배로 정중히 초청하고  자신들은   먼 곳 에스파냐에서 국왕 카를로스 5세의 사절로

 왔다고 안심을 시키니, 그 관리는 그걸 고지곳데로 믿었는지, 그들에게서 신비함을 느꼈는지 

 하여간 피사로 일행을 그들의 도시로 초대하게 됩니다.

 

      피사로는 잘 정돈된 사원들과 풍부한 식량 그리고 절제된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긴장감을  느끼고  가는곳 마다 요새에는 전사가 지키고 있고  그들의 많은 비축된 식량과 자원

 그리고 건축물에  누런 황금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는 아마도 전율을 느꼈을 것임니다.

 

     그는 이 부족을 제압하고 황금과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지원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야심을 채울 것을

 마음에 되새기며 돌아오게 됩니다.

 

 

       프란시스코 피자로                                      잉카황제    아타우알파  

                                                                    

 

피자로의 얼마 안되는 인원과 장비로 수많은 정예전사로 이루어진  잉카왕국을

 정복하려고한 이면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믿는 신병기 총과 대포 였읍니다.

그당시 피사로의 병력은 말이 군인이지

황금을 찾아모인 오합지졸 정도 였겠지요.   

 

 잉카의 전사들은 죽음과 삶을 넘어가며 생존한

  싸움에는 이골이 난 종족들 이였읍니다. 

그러나 요행히도 문명의 발전은 서구에서  먼저 싹트기 시작해

                                  이들의 문명과 저들의 문명의 충돌에서 이쪽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그렇게도 찾아 헤메던 황금의 땅  미지의 세계를 다녀온  피사로는

 흥분과 기쁨도 잠시  자신들은  더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정복하고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우선 파나마 총독에 지원을 요청하기로하고  파나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떠난지 8개월만에 귀환이였읍니다.

 

      그곳은 이미 그들이 신비의 땅에대한 소문이 입에 입으로 퍼지면서 , 군중심리가 다그러듯이

 특별한 꺼리 없는 그들이었던지 꾀나 흥분되어 있었으며 그들을 보는 눈이 전과 같지 않앗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정에 대한 자금확보를 위한 대규모 지원이 그들에겐 발등에 불이였는데,

총독은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신임 파나마총독은   그들과 달리 전형적인 관리자며,

 냉철한 현실주의자 였던지 그들의 그 꿈같은 모험에 대해 반신반의 하며 

 막대한 예산과 지원을 기꺼히 지원해 주지를 않았읍니다.

 

     피사로는 탐험보다 그들에겐 더 어려운 장고를 거듭한 끝에 가자, 갈곳은 그들의 조국 스페인

그곳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루케신부의 조언에 힘입어  다시 머너먼 항행 길에 오르게 됩니다.

1528년 봄. 파나마를 떠나 항행 길에서  세비아에 도착한 그들은 우연히  멕시코정복자 에르난 코데스와

조우하게되는데  이곳에서 선배 정복자의  조언과 격려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그들의 조국에 도착합니다.

 

                                                                                                                                        자료 :daum이미지,정보,지식.뮤직,잉카site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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