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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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3.

  

 

 

       황병기 (비단길)- Youtube

 

 

 

 

 

 

 

 

꽃향기 머금은 봄 바람이 가슴에 여미는 춘 3월.

저 멀리 남쪽에서 살며시 다가오는 여신인 봄의 미소가

움츠러들었던 산야와 들판 위를 스쳐가고 있었다.

볼에 와 닿는 체취는 싱그러워가고

콧속에 스미는 향내는 픗픗한 초록의 내음을 피어내고 있었다.

 

 

덕만 공주는 봄 내가 피어나는 궁궐 안 뜰을 동생 천명과 거닐고 있었다.

덕만은 임금인 아버지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아 왔기에

임금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궐내에서 왕위수업을 받고 봄 볕이 수줍은 듯 찾아든 궁궐 안 뜰을

여동생과 함께 거닐며 모처럼 봄기운을 맞고 있었다.

 

 

덕만의 증조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사륜 두 아들이 있었다.

진흥왕(534~576)은 신라 제 24대 왕으로 지증왕의 손자이며 법흥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왕위에 올라 태후 섭정을 받으며 오랫동안 왕위 수업을 받고 국왕의 치를 다지며

국력을 신장해 대외 정복사업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게 된다.

 

 

 

맏아들 동륜은 일찌기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고

그 아들 백정은 너무 나이가 어려 조정의 실력자인 거칠부(居柒夫:진흥왕의 명으로 신라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國史(국사)를 편찬한 승녀,장군,정치가)가 주도하여 세자의 아우 사륜을

왕위에 옹립하게 되지만, 사륜은 원래 주색에 젖어 국사를 소홀히 하기에 왕이 된지

3년 만에 어머니인 사도태후는 화백회의를 거쳐 신하들과 뜻을 모아 사륜을 폐위하고

세자였던 동륜의 아들 백정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폐위 당한 왕 사륜이 25대 진지왕이고 , 청년이 된 새 임금 백정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되니 덕만공주의 아버지가 된다.

 

 

 

분황사 석탑에 나라를 지켜줄 수호물인 물개와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나라를 지켜줄 용이 깃들기를 기원한 우물

 

 

당시 시국은 한강유역을 사이에 두고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 물리고 물리는 영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남하 정책으로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장수왕 이래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백제 또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영토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곳은 중부지방으로의 내륙으로 교역과 지역 산물이 풍부하고 거래가 활발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삼국은 일찍이 이곳에 진출하여 충돌하고 있었다.

 

 

슬하에 3공주(천명공주,선화공주)를 둔 진평왕이기에 맏이인 덕만공주는

왕위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서른이 되고, 여동생 천명은 흠모하던 용춘과

혼인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김춘추였다.

 

 

폐위된 진지왕은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낮아져 왕궁을 나가 진골 大臣들이 모여 사는

부락에서 살다가 얼마 후 돌아갔고, 그의 아들 용춘은 그래도 왕족의 피를 받았던지라

왕궁의 어른들을 뵈러 자주 궁을 들락거렸다.

용춘은 15살에 화랑이 되었다. 화랑은 진흥왕 때 인재를 기르기 위해 진골 출신(간혹

6두품)미소년들을 선발해 무예를 가르치고 산천을 돌며 수양하며 학문을

익혔다. 이제 용춘은 대화랑이 되어 있었다.

 

 

신라는 박혁거세가 사로국 6부 촌장들의 추대로 나라를 연 이래 박,석,김 세 姓씨가

번갈아 가며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17대 내물왕대 와서는 김氏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22대 지증왕대 와서는 국호를 新羅라 하고 법령을 선포하며 제도를 정비하고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완성하게 된다.

 

 

 

 

 

 

 

대대로 왕위를 세습하는 김氏 왕족은 가장 높은 신분인 성골이였고, 다음이 왕족들의

친척들인 진골 신분으로써 조정대신이나 고급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육두품은 평민보다는 제법 높은 신분으로 중간 정도의 벼슬에 나갈 수 있었고

오두품과 사두품은 평민보다 약간 높은 신분으로 낮은 벼슬아치가 될 수 있었다.

 

 

몇해 전 어머니이신 마야부인이 돌아가시어 임금은 새 왕비를 맞게 되나 기다리던

왕자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덕만 공주는 아바마마의 보살핌 속에 왕위 수업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증조부 진흥왕 때에는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으나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시달려야만 했다.

6년 전에는 백제가 아막성으로 쳐들어왔고 그 다음해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쳐들어왔다. 그때마다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며 물리치곤 했다.

2월과 4월에는 또다시 고구려가 쳐들어와 북쪽 변경 우명산성이 함락되고 백성

8000여 명이 붙잡혀 갔다.

 

 

서기 618년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섰다.

덕만 공주는 어느 덧 혼기를 놓치고 마흔을 흘쩍 넘어가고 있었다.

청년으로 자란 김춘추는 어느덧 믿음직한 조카이며 아들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리고 그의 절친한 동료 김유신이 있었다.

 

   

 

 

 

                   신라 전성기의 왕경(왕이 사는 수도)은 17만 9000호 였다는데 보통 1호를  5인으로 보면 90만 정도 인구수가 된다.

                        현재 울산광역시 인구가 대략 120만 정도라 하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000여 년전 에는꾀 큰 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 금관가야(6가야 중에 맹주로써 김해 땅에 있던 나라)왕족의 후손이었다.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된 이래로 금관가야 왕족들은 신라에 와서

진골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김유신의 祖父인 김무력은 나라에 공을 세우고 그 아들 김서현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혼인하여 아들 유신을 낳았다.

 

 

신라 왕실에서는 가야계 진골출신인 김서현이 신라계 정통진골 출신의 만명과의 혼인을

달가와하지 않아 신라 왕실에서 그 혼인을 인정하여 지방 태수였던 김서현을 왕경 서라벌로

부른 것은 유신이 열 네살 나던 해였다. 유신은 15살에 화랑이 되고 18살에는 최고화랑인

풍월주 자리에 오르고 스물두살에 화랑 조직을 나왔다.

 

 

유신은 춘추보다 일곱 살 연상이었지만 의기투합해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춘추는 유신의 집에 들락거리며 그의 누이동생 문희와 눈이 맞아 쩌릿쩌릿한 관계가 되나

이미 그에게는 처와 고타소라는 딸자식이 있었다.

김춘추와 유신은 둘 다 능력이 뛰어나고 출중한 인재라, 장래 군주가 될 덕만 공주에게는

믿음직한 신하로서 그들을 필요하게 된다.

당시로서 진골출신인 춘추가 아내를 또 둔다는 것은 큰 흠이 아니었나 보다.

 

 

김춘추는 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를 아내로 맞고 아들 법민을 보게되고

첫 부인이 병사하자 문희가 정실부인으로 들어서 무열왕인 김춘추의 아내로 왕비가 되고

아들 법민이 대를 이어 문무왕이 되니 대왕 대비가 된다.

춘추의 아버지 용춘과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내는

대장군으로 막중한 임무를 다하고 있었으며 춘추와 유신 또한 그들 아래에서

중책을 맞고 있었다.

 

 

 

                     

                                                                                  삼국 정립도   

  

                                                                                 

세월이 흘러 진평왕이 자리에 누웠다. 55년간 나랏일을 외세로부터 지켜왔던 왕이었다.

흐르는 세월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흔이 넘는 노인으로 이제는

왕위를 맏 딸 덕만공주에 물려 주려하자, 반란이 일어났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5월에 아찬인 칠숙과 석품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우두머리인 칠숙을 동쪽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어 메달고 9족을 멸하고

달아난 석품도 붙잡아 처형하고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왕권 도전에 대한 어떠한 불만도 용인치 않는다는 서릿발 같은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도인 신분제도로서 왕위는 성골만이 이어 받을 수 있었다.

진평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으나 두 딸은 이미 혼인하여 진골로 신분이 낮아졌고 미혼인

덕만 공주만이 유일한 성골신분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최초의 여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신라사회는 지형적으로 대륙과 떨어진 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부장제의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교가 정착되어 가부장제가 토착화되는 진덕여왕 이후 진성여왕을 제외하고 남성들만이

왕위를 이어 가게 된다.

 

 

진평왕은 점차 기력이 쇠약해져 눈바람이 살을 에이는 이듬해 정월 세상을 떠나고

덕만 공주는 임금에 자리에 오르니 그녀의 나이가 쉰 살을 넘어가고 있었다.

 

 

신라는 나라를 연 이후 삼국 정립의 지형적 관계로 서로 수 없이 영토 확보를

위해 전쟁을 해왔다.

신라는 고구려와 때로는 백제와 동맹하여 다른 한나라를 공격하기도 하고 반대로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신라를 쳐들어오기도 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기원전 57년)건국되었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데는

삼국중 가장 늦게 체재가 정립되어 이웃나라들에 수세적 입장이었다.

 

 

 

 

 

진흥왕 때에 와서는 세력이 커져 영토가 확장되었다.

551년에는 백제 성왕과 동맹하여 왕위계승 문제로 혼란한 고구려를 공략하여

그 동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아리수(한강)유역을 빼앗아 상류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동맹국인 백제는 지난 날 자신의 영토였던 하류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2년 뒤 553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아리수하류 지역 마져 차지하게 되며

중부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요충지인 아리수 하류지역을 빼앗긴 백제 성왕은 격분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되나

부여에서 서라벌로 통하는 첫 관문인 관산성(충북옥천)전투에서 패배하며 3만 명이나 되는

백제군이 몰살하고 왕도 전사하는 참패를 당한다. 이로 인해 백제와 앙숙이 되며

물고 물리는 끊임없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백제는 기회만 있으면 침공을 하고 고구려도 틈만 나면 신라로 쳐들어와 당나라와의

통행로를 막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기 642년 여름 여왕이 즉위 11년이 되는 해 이였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갈 무렵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인솔해 신라를 침공했다.

백제군은 여세를 몰아 미후성(충남 금산군 진산면)을 함락시키고 40개 성을 빼앗았다.

6년 전 신라군에 대패한 뒤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4년 전에는 고구려가 칠중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침공하였으나 알찬 대장군의

활약으로 무찔렀기에 여왕 즉위 이후 이처럼 40여개 성을 일시에 빼앗긴 적은 없었다.

무왕에 이어 왕이 된 의자왕은 충분한 준비를 하고 신라를 침공해 40여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황룡사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던 사찰로 신라진흥왕 14(553)때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14(645)에

                                            완성된 절로 알려짐.신라 삼보(三寶)중 장륙존상과 구층 목탑으로 더욱 유명한 신라 호국신앙의 중심이였으며

                                            고려 고종25(1238)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탑과 사찰 전체가 불타 소실되고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음.

 

 

 

이어 당황성으로 침공할 기미를 보이자 여왕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유신 장군을 당황성으로 보내어 지키게 한다.

대야성(경남 합천군)은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큰 성 이었다.

이곳을 지켜야만이 물자가 풍부한 옛 가야지역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백제군은 15,000명의 병력으로 3,000여명의 신라군이 방어하는 대야성을 맹렬히

공략하였고 신라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역 부족이었다.

 

 

城主(성주) 품석은 백제의 항복 권유에 굴하여 성에서 나오지만 백제군은 그들을 잡아

처형하고 그들의 수급을 베어 백제성으로 보내며 예전에 성왕의 죽음을 갚는다며

대야성을 유린하게 된다. 처형된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으며 역시 희생된

그의 부인 고타소는 춘추가 사랑하던 그의 맏딸이었다.

 

 

김춘추는 백제를 응징하려고 하였으나 당시로는 역 부족이었다.

그는 여왕에게 고구려와 동맹을 맿어 백제를 공략하려고 청원하였으나

비담과 구 대신(보수 귀족세력)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비담은 이찬이란 벼슬이었지만 진평왕 때부터 조정 대신으로 정사를 이끌어왔다.

그들은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며 여왕의 조카인 김춘추가 세력이 커져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아우 ‘장’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신라의 상대등과 같은 지위인 막리지가 되어 국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우연곡절 끝에 사신으로 간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군사동맹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제 신라가 의지할 곳은 외세인 당나라 뿐 이었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시절 만들어 진 구조물로 높이 9.4m 밑면지름 5,17m의 원통형으로 천문관측을 위한 구조물로

국보31호이다. 그간 제사기능의 구조물로도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최근 문헌 연구에 따르면 첨성대 축조 전 천문관측에 관한 고대문헌 기록은

그 양도 적고 간단했지만 첨성대 축조 이후 신라의 천문 관측기록의 양이 많아지고 정밀해진 사실이 밝혀졌다.그리고 서기 640년대 이후 유성이

떨어진 위치의 기록들이 모두 첨성대를 중심으로 관측된 자료로 밝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첨성대에서 유성 관측을 한 것으로 추측하고

천문관측용 구조물이라는 주장이 힘을 실어가고 있다.

 

 

 

백제에게 대야성을 빼앗긴 이듬해 가을. 여왕은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사신을 보내는

문제로 대신들과 신중한 의논을 했다.

신라만의 힘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대항할 수 없으니 김춘추 측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해야 한다고 하고, 비담 측은 군사를 요청하면 그것을 빌미로 더 많은 요구를

한다며 반대를 하였다.

 

 

김춘추 측은 당도 수나라에 이은 고구려와의 전쟁 중이라 신라와의 동맹이

이롭다는 것을 알기에 당과의 동맹으로 백제를 응징하고 고구려와도 대치해야 한다고

하니 여왕도 이제는 더 이상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침공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김춘추의 의견대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지만, 당나라로 부터

여왕이라는 나라라며 수모를 당하자, 비담 측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좀더 국력을 신장하여 대처하기로 한다.

 

 

대야성을 백제로부터 빼앗긴 이듬해 봄 서기 643년 정월 당나라에 특산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며 당에

유학 중인 고승 玆藏(자장)의 귀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지난해 40여 성을 빼앗기고 대야성 마저 함락 당한 뒤 여왕도 신하들도 백성들도 나라

전체가 의기소침해 있은 터였다.

당에서 돌아온 고승 자장은 안으로는 佛事(불사)를 일으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뭉치게 하고

밖으로는 당과 동맹하여 침략해 오는 적들을 막아야 한다고 하며

당의 도움을 얻으려면 그들의 年號(연호)를 사용하며 당나라 官服(관복)을 입으며 그들의 문물을

받아 들여 신임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왕은 법흥왕 때부터 써온 독자적인 연호와 내나라 관리들에게 당의 관복을

입혀야만 하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그러나 佛事를 일으켜야 한다는 고승의 충언에는 진흥왕 때부터 90여 년간 지어온

황룡사에 불탑을 세워 부처님의 가호가 온 나라에 깃들길 염원하기를 기원하며

9층 목탑을 지어 사찰을 완성하기로 하였다.

대공사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 들이고 백성들의 부역을 동원해야하는 부담이 따랐지만

여왕은 佛力으로 외세를 무찌르고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자,백제,고구려,당,왜,오월,탐라,말갈,거란,여진의

아홉나라의 외세를 상징하는 9층 탑을 세워 부처님의 加護(가호)로 적들을 무찌르고자 하였다.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9층으로 쌓은 탑으로 자연석으로 된 1층 기단에는 나라를 지켜줄 수호물을

                      조각해 놓았다. 동해가 바라 보이는 쪽에는 두마리 물개가 서있고, 내륙을 향해서는 두마리의 사자가 버티고 있다.

                      물개는 동해로 쳐들어 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고 사자는 내륙에서 쳐들어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함이다.

 

 

 

자장법사가 당으로부터 돌아와 9층 목탑을 짓자고 한 것이 여왕 즉위 12년이 되는 해였다.

쉰 살이 넘어 즉위한 여왕이기에 이미 환갑을 흘쩍 넘기었고 백제와 고구려와의 싸움에

맘 편할 날 없이 시달려오면서도 아버지 진평왕의 당부를 떠올리면서 백성을 잘 다스리고자

자나 깨나 마음 저리던 여왕이었다.

 

 

즉위 13년 봄에 당나라에 사신과 특산물을 보내니 답례로 당에서도 사신과 특산물이 왔다.

가을이 다가오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자는 김춘추 측과 비담 측간의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며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여왕은 당으로의 원병 요청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하여 만 명의

군사를 주고 서쪽 변경으로가 백제군을 공략하여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아 막혀버린

황산강 물길을 열고자 하였다.

 

김유신은 기병과 보병 일만여 명을 거느리고 넉 달동안 백제군과 치열한 공방 끝에

가혜성(경남 거창군)을 위시하여 일곱 성을 빼앗고 그로인해 가혜나루를 열고 마침내

핏 줄같은 황산강 물길을 다시 열게 하였다.

그것도 잠시 이에 질세라 백제 대군이 매리포성을 공략해왔다.

 

 

매리포성은 김유신장군이 막 물길을 연 황산강 상류에 있는 성이었다.

서쪽 변경 일곱 개 성을 빼앗긴 백제가 대대적 반격에 나선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다시 매리포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점차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싸움에 이긴 장수는 언제나 개선장군으로 민심은 영웅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보다.

 

 

자장법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사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난 선덕여왕 14년인 서기 645년 3월

마침내 황룡사 9층탑이 완공되었다. 225척(80여 미터)높이의 거대한 9층 목탑은

임금과 신하 그리고 신라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고 그 하나된 마음으로 쳐들어오는

모든 적들을 막아내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 깃든 탑이었다.

 

 

 

   황룡사 절터. 신라 최대 호국 사찰로 신라 진흥왕14(553)에 착공해 오랜 공사 끝에 선덕여왕19(645)에 완공됨. 몽고 침입으로 소실 됨.

 

 

 

황룡사를 완공한 서기 645년 5월 당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고구려를 칠 것이니 군사 출병을 요청한 것이다.

당나라와는 언젠가는 군사적 동맹을 맿어야 하였기에 신라로서는 당의 요청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

김유신장군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고구려 남쪽 국경에서 대치케 하였다.

고구려는 북쪽 안시성에서 당나라군과 싸우느라 남쪽에 신라군과는 충돌이 없었다.

신라로서는 행운이었으나, 그 틈에 백제 의자왕이 신라 서쪽 변경의 7개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게 된다.

 

 

여왕은 신라 혼자 힘만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결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낙엽 지는 가을이 되자 김춘추는 당나라에 군사동맹을 여왕께 주청하고 자장의 건의대로

당나라 연호와 관복을 사용하여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나,

비담 측은 여전히 반대하기에 일단 여왕은 생각한 바 있다며 시간을 두고 다시

논의하자며 일단, 비담 측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해 11월에 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상대등은 고구려의 막리지처럼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의 자리였고 임금의 후계자가

없을 시에는 모든 대신들의 추앙으로 임금 자리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여왕 14년 겨울은 써늘한 바람과 함께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해도 가고 여왕 15년 가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여왕이기에 그간 파란 많고 굴곡 많은 세상살이를 살며

나랏일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가며 여왕의 병은 쌓여가는 가을

낙엽만큼이나 깊어가고 있었다.

사람이나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자신의 살아온 삶이 저물어 갈 때면

자신의 갈 때를 알고 준비한다는데,

여왕은 이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임금의 본분을 잊지 않고 성군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며 마음을 수양하며 살아왔으니

이제 세상을 떠난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부처님 앞에서 늘 마음을 맑게 닦으려고

수양했으며 사후에는 원하는 대로 도솔천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격변기의 나랏일을 맡길 대를 잊지 못함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당시 여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은 사람은 왕궁에 하나 남은 성골 출신인

사촌 여동생 승만 뿐 이였다. 그녀는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친동생인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의 딸로써 아직 혼인하지 않고 궁에 홀로 지내고 있었으나,

이미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승만도 춘추를 아꼈고 신라가 살아갈 길은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외교하는 길 뿐이라는

춘추의 뜻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여왕이 승만을 후계자로 정하고 세상을 떠나면, 나라 일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질

터였다. 자장법사의 건의대로 결국 당나라의 연호를 쓰고 당나라 관복을 입으며

당나라와의 군사적 동맹을 이어 갈 것이다.

반대로, 여왕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면, 대신들은 분명히 상대등 비담을 왕으로

추대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와 관제를 사용하며 백제와

고구려에 맞서 힘겹게 생존을 위해 싸워가게 될 것이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9층목탑 자취(사적 제6호)

 

 

                                                       황룡사 9층목탑 모형도 (황성공원) 신라 선덕여왕 때(643) 자장법사의 건의로  3 년간에   

                                                        걸쳐 건립. 높이 82m의 9층 목탑으로 고려 고종25(1238)몽고 침입으로 소실 됨.

 

                                                

 

 

올해도 김춘추는 당과의 동맹을 주청하였고 안시성에서 고구려에 패한 당나라이기에

사신을 보내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비담측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춘추 측에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여왕은 일단 상대등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적 동맹을

제의하지 않는 대신에 정권이 바뀐 왜국에 춘추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왜국은 전통적으로 백제와 친교를 해왔으나 이참에 왜국과 외교를 하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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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신라가 삼국이 정립되어 있는 현실에서 살아나갈 길은 외교에 있다고

생각하고 힘이 약한 신라가 갈 길은 그길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나랏일을 오랫동안 이끌어 오면서 알면서도 여왕은 독자 연호와 관제를

지키면서 우리 힘만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비담 측의 입장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여왕은 깨닫고 있었다.

첫 서리가 내리던 날 여왕은 어전회의에서 승만을 후계자로 발표했다.

왜국으로 사신으로 간 김춘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김유신을 비롯한 춘추 측 대신들은 여왕의 결정을 당연히 받아 들였지만,

 

 

 

 

 

 

비담 측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왕은 상대등 비담과 그를 따르는 대아찬 영종 등 구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병상에서 보고를 들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였다. 여왕은 담담히 받아들이고 구 대신들의 반란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진통이라고 여겼다. 비온 뒤 땅이 굳듯이 그 반란을 평정하고

승만이 왕위에 오르면 춘추와 유신과 더불어 신라를 위한 튼튼한 반석 위에 오르게

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여왕 16년 새해가 밝아왔다.

반란의 와중에 여왕은 병상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비담 측 반란군은 명활산성에서 진을 치고 궁궐을 공격하였고,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진압군은 월성에 진을 치고 반란군과 싸웠다. 명활산성은 도성 서라벌을 방어하기 위한

外城(외성)으로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인 월성과 십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열흘째 되는 날 깊은 밤 자정 무렵에 큰 별 하나가 꼬리를 끌며 월성으로 떨어졌다.

여왕은 이제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임을 알고 있었다.

신라의 장래를 맡길 김춘추를 못보고 가는 것이 아쉬었을 뿐,

이제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 여왕은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김유신은 슬픔 속에서도 병사들을 독려해 명활산성의 반란군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며칠동안 피 비릿내 나는 전투 끝에 비담군의 전세가 기울고

마침내 명활산성이 무너지고 달아나는 비담을 위시한 주동자들은 끝까지 쫓아가

반역의 무리를 생포하였다.

이어 정월 17일 비담과 그 무리들은 모두 저잣거리에서 목이 베여 처형되었는데

달아나 뒹구는 눈감은 목이 30여 개나 되었다 한다.

 

 

여왕16년 정월 8일 선덕여왕이 조용히 눈을 감고 뒤를 이어 승만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 두 번째 여왕인 진덕여왕 이였다.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라 첫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은 어머니처럼 백성들을 사랑했고

타고난 총명함과 수양으로 얻어진 노련함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나라 일을 다스렸다.

첨성대를 지어 천문관측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울 수 있도록 애썼으며,

분황사와 황룡사 9층 탑을 완공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져놓고 재위 16년 만에 흙으로 돌아갔다.

 

 

 

진덕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찬인 알찬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선덕여왕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지원하였다.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김유신과 왜국에서 돌아온 김춘추는 신라조정에서 가장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선덕여왕 릉(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0 소재. 사적 18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김덕만)릉은 경주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며 밑둘레 74m, 높이 16.8m,지름 24m로 겉모양은

                              둥굴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 부문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2-3단의 자연식 석축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는데 여러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물으니

왕이 낭산남쪽이라 했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 지냈다.

30여년이 지난 문무대왕 19년에 왕의 무덤아래 (679년)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진덕여왕 2년 겨울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주변 다른 나라 들 처럼 곧

당나라의 연호를 쓸 것이라고 했다. 그 뒤 김춘추는 아들 문왕을 데리고 당태종을

알현하고 내심 군사동맹을 바라던 당태종에게 군사동맹을 언약 받고 두 나라의 동맹을

돈독히 하기위해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두고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당과의 군사동맹을

맿고 신라로 돌아왔다.

 

진덕여왕 3년 정월에 처음으로 당나라의 관제를 사용하고 1년 뒤에는 당나라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당과의 동맹관계를 돈독히 한다.

진덕여왕 8년 삼월에 여왕이 후사 없이 떠났다.

대신들은 조정회의를 거쳐 김춘추를 왕으로 정하여 김유신은 김춘추를 임금으로 추대한다.

김춘추는 세 번의 固辭(고사)끝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태종 무열왕이 된다.

 

 

서기 659년 가을 태종 무열왕은 마침내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멸하고 의자왕 20(660)의 백제를 멸망시킨다.

고구려 침략에 수와 당에 이은 수차례 패배로  당은 백제를 먼저 공략하기로 한다.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서해바다를 건너 백강(금강)을 거슬러 오르고, 김유신의 신라군 5만은 

육로로 탄현(대전 대덕)을 넘어 진격해왔다.  

백강에서 당군과의 전투에서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황산(충남 예산)벌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는 중과 부족으로 신라군에 패한다. 수도 사비성(부여)은 포위대고,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공주)에

피난갔던 의자왕은 항복하기에 이르고, 대신,장수 등 80여명과 12,000명의 백성과 함께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얼마 되지않아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병사한다.

 

 

 

            

 

                  

 

  

백제멸망 이후 흑치상지와 복신 도침을 중심으로 3년간

                                                                                치열한 저항 운동을 벌였으나 663년 완전히 진압된다                                                                             

  

                                                                                                                                                                                               

 

그 이듬해 무열왕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범민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된다.

서기 668년 문무왕은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3국을 통일하게 된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동생 연정토와 아들 연남생,남건,남산의 권력다툼으로

쇠잔의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20여 년 동안 수,당과의 전쟁에서 국력은 기울어지고, 내분의 권력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당의 이적이 이끄는 60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의 20만 정병의 협공으로 무너져 갔다.

연정토가 남쪽 한성(황해도 재령) 인근 20여 성을 신라 김유신장군에게 받치며 항복하고,

형제간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의 투항으로 요동의16성(요동,백암,안시성을 제외)의 모든 천리장성이

당군에 함락되고 왕궁인 평양성은 두달간 항전하다 나당 연합군의 2차에 걸친 대규모 공격으로  함락되어

찬란한 문화와 힘찬 기백으로 대륙을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668)

 

 

                     

 

       

 

                                            

                                             고구려 멸망 후(668) 고구려 유민 중 검모잠은 왕족이였던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당군에 저항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옛영토에서 당과 싸우고있어 당군을 분산시키기위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한다. 중과 부족으로 당군에 패배한 부흥군은 유민들과 함께 대부분 신라로

                                             투항하고 일부는 동북부지역으로 이주하여 발해 건국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평양 이남의 곳은 신라영토로 약속한 동맹의 약속을 깨고

당나라가 야욕을 들어내매 문무왕은 9년 간의 기나긴 투쟁을 하게된다.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던 대륙의 검은 야심에,고구려와 백제 일부 유민들과 힘을 모아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된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옛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장악한다.

 

이어 20만 대군으로 침공해온 당나라군을 매소성(경기도 양주로 알려짐)에서 격파하고, 금강 하구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을 섬멸하면서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

하지만 고구려 영토였던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해

완전한 통일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당시 여건 하에서는 이룰수 있는 최선의 길이였는가보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 유민의 나라 발해가 들어서며 남북조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이로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를 되찾으며

선덕여왕이 꿈꾸었던 자주적 통일을 이루게 된다.

 

     

 

 

 

문무왕은  선덕여왕 바람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완전한 통일을 위해  당과의 끈질긴 항쟁으로

신라를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민족국가로의 자주적 통일을 이루며

오늘날의 단일 민족으로의 문화와 역사의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는 신라가 이루어낸 삼국통일의 가장 값진 意義(의의)이기도 했다.

 

 

 

여왕은 도솔천 너머에서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자료: daum지식,뮤직,이미지,선덕여왕(위인전,site)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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