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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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6.

 

  

 

         황병기 (미궁) -Youtube

 

 

                                                                                        

 

 

 

한 겨울 귓불을 에이는 매서운 추위가 가슴을 파고드는 정월. 

소복히 내린 瑞雪(서설)위로 총총히 새겨진 발자취는

구중 궁궐 동녁 깊은 곳으로 어지러히 이어져 있었다.

 

 

 

産室廳(산실청) 집복현에서는 이따금 들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숨죽이며 마른 침을 삼키며

초조해하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으며   살 에이는 한겨울 바람이 대청을 휘감아 스치며 지나갈 때 

아기 울움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터져나왔다.

꿀꺽 마른 춤을 삼키며 모두들 숨죽이며 열리는 방문 쪽을 바라보니

 상기된 환한 모습의 산실청 나인이 나타나

“왕자 아기씨 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고하니.

해산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感祝(감축)을 한다.

 

“마마! 경하 드리옵니다.”

 

 

살 에이는 정월 칼 바람을 눈 녹이듯 터져나온 기쁜 소식이었다.

내관은 헐래 벌떡 그 좁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大殿(대전)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왕에게

 “전하! 경하 드립니다. 왕자 아기씨의 탄생입니다.”숨 고르며 고하니 서둘러 집복현으로

향하는 왕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영조 11년 1월 21일.

실로 영조가 왕위에 오른지 무려 11년 만에 영빈이씨가 왕자를 탄생 한 것이다.

 

 

왕의 나이 마흔 두살에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의 탄생이었다.

출생 당일 원자로 定名(정명: 이름을 정함)된 '愃(선)'은

다음해(1736년) 3월에 세자로 책봉된다.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축복 속에서 생후 14개월 만에 세자가 된 것이다.

 

 

영조는 16년 전(1719) 후궁 靖嬪(정빈)이씨가 낳은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다.

다섯 살에 敬義君(경의군)에 그리고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나 그는 영조 4년(1728)

열 살의 어린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영조의 正妃(정비)인 貞聖王后(정성왕후) 서씨는 자식이 없었다. 

정빈이씨 소생의 和順翁主(화순옹주)와 영빈이씨 소생의 화평, 화순옹주에 이어 탄생된 귀하디 귀한 왕자였다.

 

                 

왕의 자리에 있으며 후계자인 세자를 두지 못한 것은 실로 불안 그 자체였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간 소현세자와의 갈등과 이로 인한 세자의 급작스런 죽음으로(인조의 독살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니 그가 바로 북벌을 외친 효종이었다.

 

 그가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흔하나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외 아들이  왕위를 이으니 바로 현종이었다.

이때부터 아들 손이 귀해 위태롭게 왕조의 외아들 시대가 이어져 가는데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 대에

 와서는 실로 조선 붕당정치의 황금기가 도래한다. 신권이 왕권을 위협하고 당파간의 피 비릿내 나는

 당쟁으로 왕위계승을 좌지우지 하는 판이니  세자의 자리는 그 만큼 왕위의 중요한 버팀목 이었다.

 

 

숙종은 禧嬪(희빈) 장씨에게서 경종을, 7년후 淑濱(숙빈) 최씨에게서 연잉군을 얻어 두 아들을 두었지만 우연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경종시절에 와서 세자의 부재로 피 말리는 政爭(정쟁)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영조임금이 있었다.

숙종은 왕비를 셋이나 들이고도 정통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희빈 장씨는 중인(商人)인 나인 출신이었으며,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었다.

 

 

숙종은 총애하던 후궁 장씨의 아들을 자식이 없는 仁顯王后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정호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노론 집권층의 반대에 봉착한다. 그러나 서인 노론 측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닷새 만에 원자로 정호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생모인 장씨를 嬪(빈)으로 삼는다. 그러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아직 정비인 仁顯王后(23살) 나이가 창창한데 후궁소생을 원자로 확정짓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니

숙종은 그를 귀양 보내 사사하고 노론계 대신들도 유배보내고 처형하였다.

 

 

 

 

               

 

 

 

 

 

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현왕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새 왕비로 삼고 그 아들 윤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장희빈의 주도면밀한 간계와 피바람의 기사환국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선

남인세력의 치밀한 계략의 결과였다. 정국의 주도는 남인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숙빈 최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의 마음은 점차 民心과 함께 왕비 장씨에게서 멀어져 가고

지난 날의 그녀의 만행도 알게 되어 폐비시킨 민씨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을 갖자 소외되었던 서인세력은 재빨리

인현왕후를 복귀시키는데 성공하고 다시 당권을 잡고 남인들은 축줄한다. 중전 장씨는 다시 빈으로 강등되고

민씨를 다시 왕비로 복귀시키고  소론계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갑술환국이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왕비에서 쫒겨나자 장희빈은 가슴 찢어지는 수모감과 치욕으로 저주의 화산으로 돌변하여

처소인 취선당  한쪽에 神堂(신당)을 차리고 허구한 날 굿판을 벌리며 주술로서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

저주가 약효였던가 왕비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왕비가 죽자

政爭(정쟁)은 걷잡을 수 없게 비화한다.

왕비의 죽움이 장씨의 저주라며 신당을 차리고 주술행위 전모를 숙빈 최씨의 귀뜸으로 알게된 숙종은

취선당에서 그 물증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장희빈을 死하라고 명 한다.

 

 

소론은 세자의 생모를 들어 반대하나 숙종은 끝내 자진할 수 없다는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리도 사랑하던

여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거부하는 여인의 입에 들어붓는다. “아바마마, 어미를 살려주십시오.” 열네 살의 어린

세자는 임금의 곤령포를 움켜지고 울부짖었으나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때의 불타오르는 정염도 이미

식어버린 왕과 집권당인 노론에게 서릿발 같은 여인의 恨을 품고  어린 세자의 모습을 새기며 죽어갔다.

 

 

생모가 피를 쏟고 죽어가는 끔찍한 모습을 눈 앞에서 바라본 그 아들이 왕세자로서 장차 왕이 된다는 사실은

숙종과 집권세력인 노론에게 실로 큰 부담이었다.

 

 

 

 

 

 

 

 

병석에 누운 숙종은 좌의정인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의 독대에서 연잉군을 부탁하는데 입직 승지와 사관이

입회치 않은 은밀한 만남이었다.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과의 당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집권 46년 만에 숙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열네 살의 소년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어미의 모습에 상처입고 심신이 약해지며 병약하였다.

후손도 없었다. 피 맿힌 한을 갖은 새 임금에 노론은 위기를 느끼고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한다. 자신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후손 없는 경종의  후계자로 양자를 들이려는 낌세를 챈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대신들은 한 밤에 경종과의 청대를 요청해 그들만의 뜻을 관철시킨다.

 

왕의 건강과 후사 없음을 들어 연잉군의 王世弟(왕세제)로의 책봉이었다. 한 밤중을 이용해 반대세력인 소론을

교묘히 배제하고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후사가 없고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삼십대 초반의 임금에게 여섯 살

아래인 아우 연잉군을 후사로 삼으라는 알력은 자칫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한순간 목이 덜컹 날아갈 일이었다.

 

 

 

노론은 내친 김이었다. 이들은 경종을 더욱 무력화 시키기 위해 사헌부를 통해 왕세제를 정사에 참여케 라는 상소를

올려 뜻을 이룬다. 연잉군을 代理聽政(대리청정)시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놓칠 수없는 소론 세력들의

간곡한 설득에 경종이 곧 대리청정  명을 거두자 노론은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창집이

사직하게 된다.  그러나 며칠 후 경종은 다시 대리청정을 윤허하게 된다.

 

 

조정은 앞을 내다 볼 수없는 위기감 속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노론 중추세력인 영의정이었던 김창집과 영중추부사 이이명 그리고 판중추부사 조태채와 좌의정 이건명은

경종의 명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죽움을 건 모험이었다.

 

 

문제는 이때 부터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소론이 들고 일어났다. 소론 강경파인 文臣 金一鏡(김일경)을 비롯한 일곱명의 대신들이

목숨을 건 상소를 한다. 대리청정을 주장한 것은 역모라며  賊臣(적신) 四兇(사흉)을 엄한 법으로 다스려 한다고

상소하였다.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렸다. 경종은 김일경을 일약 이조참판에

임명하니 이제 정권은 소론의 몫이었다. 적신 4兇은 유배되고 많은 관련된 이들도 파직, 정배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과정에서 임금을 협박했다는 이유로 노론에 대한 제거작업을

가속화하였다. 地官 睦虎龍(목호룡)의 三急手(삼급수) 고변이 터졌다. 삼급수란 경종을 죽이는 단계별 수단을

말하는데 자객의 칼로죽이는 대급수, 독약으로 독살하는 소급수, 숙종의 유언을 빙자하거나 모해하여 폐출

시킨다는 평지수를 사용해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실로 경천지경할 사건이었다. 얼마나 피바람이 불어

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이 가운데 연잉군이 들어있었다.

 

 

피와 살점이 튀겨나는 국청과정에서 연잉군 처조카 서덕수가 왕세제 연잉군도 관련되었다고 실토하고 사형당한

것이다.  노론의 ‘4兇’대신들도 유배지에서 불려와 사형당하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희생되었다. 이 엄청난 옥사가

경종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난 ‘신임사화’였다. 연잉군의 목숨은 이제 풍전등화 격이었다.

그 당시로는 역모에 연루된 종친은 누구나 없이 목숨을 잃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배 다른 아우를 단숨에 죽일 만큼 잔인하고 표독한 인간은 못 되었나 보다.

 

 

연잉군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 세력은 거의 모두가 죽거나 유배되었고 온통 소론 세상이었다.

오직 대비인 인원왕후만이 있었으나 도움을 청할 수 도 없었다. 그러나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가 갑자기

연잉군을 지원해주어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 날 수가 있었다. 조태구는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중 조태채의

종형이기도 했다 이제는 숨죽이며 병석의 경종이 죽을 때까지 목숨만 부지하는 길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

그때까지 살아날 수만 있으면 자신을 감싸주는  대비 김씨에 의해 새로운 임금으로 책봉, 옹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줄곧 병고에 시달리던 경종이 위독해지자 대비 김씨와 연잉군은 경종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왕의 승하가 다가오매  가장 가까운  종친으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이때 게장과 감 그리고 인삼차를 들인 것에 대해

평생 영조를 괴롭힌 처방에도  효험없이 경종은 병이 악화되어 임종하게 된다.

 

 

경종은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  後嗣(후사)없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연잉군이 조선 제 21대 왕위에 오른다.

진정 파란 많고  굴곡 많은 왕세제의 신왕으로의 등극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여지껏 연잉군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소론은 그야말로 목숨이 풍전등화였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신임옥사를 일으켜 왕세제 연잉군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 넣었던 김일경을 잡아들여 당고개에서 목을 베고

고변을 일으킨 목호룡 역씨 獄死(옥사) 후 梟示(효시) 되었다. 정국은 다시 노론의 손으로 넘어갔다.

노론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며 연잉군을 지켜내며 새왕으로 등극시킨 것이다.

 

 

이제 세상은 노론의 세상이었으며 그들은 이렇케 피로 점철된 왕위를 결코 대대로 어어져가며 내놓지 않으려고

정권을 유지키 위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한다. 영조는 이렇게 즉위부터 노론세력의 신세를 지며 그들로부터

요구하는 피의 댓가로 자유롭지 못하며 단단히 메이게 된 것이다.

영조의 왕위 등극과정은 영조와 노론세력의 씻을 수 없는 업보였다.

 

 

영조는 원래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지닌 임금이었다. 그리고 한점 부끄러움 없는 완벽한 인물이 되고 싶어한

꼼곰한 성품이었다. 자신의 타고난 어미에 대한 핸디캡을 무한한 인내와 노력으로 보상하려는 듯 자기 관리가

철저하였으며 검소하였으나 감정 기복이 심하였다. 영조의 생모 숙의 최씨(선희궁)는 무수리 출신의 천한

출신이었다. 명문 재상가 즐비한 사대부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위축감에 언제나

자신의 관리에 철저하였다.

 

 

 

 

 

 

 

어머니 숙빈 최씨에 신분에 대한, 그리고 선왕인 경종 독살설은 그를 평생 따라 다니며 괴롭힌 '콤플렉스'였다.

즉위 원년부터 경종 독살설이 퍼지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재위 4년(1728) 3월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

7만 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약 20만 명이 반란의 대열에 참가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이었다.

내건 구호는 두가지로,

하나,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둘,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주범이다. 였다.

반대 세력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영조는 큰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영조는 마흔 두 살에 얻은 세자를 훌륭한 제왕으로 키우려고 다짐한다. 아버지들은 흔히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그 아들에게서 이루려고 욕심을 부린다. 영조는 영특한 세자를 볼 때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세자 생모 영빈 이씨도 아이를 낳자마자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그랬던 것 처럼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에 아들을

보낸다. 이는 왕위계승과 권력 투쟁에 대한 음모가 꿈틀거리는 대궐의 속성을 그녀 역시 대궐생활을 통해 알아왔던

지라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아들을 맡긴 것이다.

그것은 부왕인 영조의 뜻이기도 했다.

 

 

세자를 처음 얻었을 때 영조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부왕 숙종이 그토록 행하려고 했던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을 이루고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서둘러 왕위를 세자에 물려주고 국방과 민생에 모든 역량을 다 쏟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세자 주변을 엄히 단속하였다.

 

 

 

자신은 당파에 휘둘리며 또한 그 덕택에 왕위에 올랐지만 세자만은 노론과 소론 어느정파에도 휘둘리지 않는 조선을

모두 어루는 진정한 군주로 성장하길 기대했다. 그래서 세자가 원손일 때부터 대규모 시간원 관리를 임명하였다.

당파적 갈등보다는 학문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영조는 이렇게 세자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아비로써 세자 교육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따뜻한 아비의 마음보다 엄격함이 우선했다.

 

 

 

                     

 

 

 

 

영조가 세자를 생모 영빈 이씨의 손에서 보모의 손에 넘긴 것은 세자가 태어난지 백일 째 되는 날 이었다.

이때부터 세자는 부모보다 남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자가 보모와 함께 생활하게 된 처소는 儲承殿(저승전)이었다.

 

이곳은 선왕인 경종비 어씨가 3년 상을 마치고 궐 밖으로 나가고 다시 어씨 궁 소속의 궁녀들이 들어와 세자를

모시게 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이들에 대해 격하게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궁녀들이 당색이 소론인 것에 우려를

보인 것이다. 세자 주위 궁녀들이 세자에게 노론 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종의 어머니 장옥정과 부인 어씨의 한이 서려 세자주위를 맴돌며 어린 세자에게 잠재적 어둡고 부정적인

의식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세자가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다섯 살 때였다. 영조가 갑자기 다섯 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영조가 양위 소동을 벌인 것은 얼마 전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서덕수에 伸寃(신원: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음) 에 불만을 품은 영의정 이광좌가 사직으로 항의했기 때문이다.

 

이광좌가 보기에는 경종 때 3급수 사건은 분명한 역모였고 서덕수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역적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에게 선왕 경조때 대리청정 주청은 역모가 아니며 자신은 왕위에 초연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섯 살 의 세자를 상대로 양위하겠다고 소동을 벌인 것이다. 다섯 살의 어린아이로 겪은 양위소동의

파동은  세자를 조숙하게 했으며 실로 세자는 조숙하고 영특했다.

 

 

세자 나이 다섯 살 때 이은 여섯 살 때에 일이였다. 구중궁궐 전각 지붕을 후드득 후두득 때리는 빗소리는 밤이

깊어감에 더욱 심해졌다.  1740년 5월 25일 영조가 또 다시 왕의 자리를 여섯 살 짜리 세자에게 물려준다며 정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5월19일 三司(삼사)에서 합동으로 영의정 이광좌의 관직을 박탈하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던 이미 죽어간 조태구 역시 생존에 받았던 소론으로의 영의정 지위가 노론의 집요한

공격으로 박탈되었다.조태구에 불어닥친 불꽃은 삽시간에 이광좌에게 옮겨 붙고 있었다.

 

 

영조는 탕평이란 정책을 지키기위해 이광좌만큼은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노론의 공세가 거칠어지자 영조는 퇴위

선언으로  노론 측과 맞선 것이다. 그 다음 날 이광좌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영조의 탕평책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권력은 노론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1742년 3월26일 세자가 성균관에 8살 나이로 입학했다. 대개 10살 무렵에 입학하는 것을 볼 때 세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영리하고 조숙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세자빈으로 홍봉한의 딸을 간택한다.

숙종시대 외척의 득세로 혼란했던 당쟁을 경험한 영조이기에 명문가이지만  정치판에서는 멀리 떨어져 어려웠던

홍봉한가의 딸을 선택하여 정치에서의  외척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영조25년(1749) 1월에 또다시 세자에게 양위소동을 벌인 것이다. 왕이 임금자리를

내놓는다하니 조정은 벌컥 뒤집어지며 긴장에 휩싸이고

세자는 또 다시 무조건 대궐 뜰에서 거적을 깔고 석고대죄 해야만 했다.

한밤에 내려진 이번 전위소동에도 어김없이 경종 독살설에 대한 자신의 입장 표명이었던 것이다.

 

단지 삼종의 혈맥[후손없는 경종의 후계를 효.현,숙종(삼종)의 혈맥을 이어 연잉군(영조)이 왕위를

계승해야한다는 논리]을 보존한다는 대비의 하교에 따라 할 수 없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종 독살에 대한 영조의 '콤플렉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이런 사실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단지 설로만 膾炙(회자) 되는 사실일 뿐인데

<경조실록>에서는  연잉군(영조)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관여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기록이 상당히 있다고 한다.

노․ 소론의 모든 신하와 세자는 번갈아가며 쏟아지는 찬 빗물을 온몸에 맞으며 거두어 들일 것을 간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영조는 이에 대리청정은 어떠냐고 하니 신하들은 이번 소동이 전위가 아니라

대리 청정임을 알고 임금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이로서

세자는 열다섯 살 나이에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영조의 양위소동이나 대리청정행위로 권력을 나누어가지려 했던 것은 세자에게 무엇보다도 국정을 경험하여

성군으로 만들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었으며, 자신은 왕이 되기 위해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털고

싶었던 것이다. 경종에 대한 자신과 노론이 주도했던 왕세제  대리청정은 역모가 아니라 임금이 병약하고

후손이 없을 시 왕위의 정통성과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정치행위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원로대신 조현명은 이러한 영조의 거듭된 양위소동은 세자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경연에서

영조에게 이렇게 권했다 한다. “신이 세자를 바라보니 천고에 보기 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자의 미래는  영조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고변한 것이다.

실로 앞을 내다본 노신하의 충절에서 나온 고변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은데 비해 그의 아들 세자는 과묵하고 표정이 위엄이 있었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직후 또 다시  양위소동을 벌인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지 4년째 되는 해 였다.

영조가 다가오는 육순을 계기로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시작 된 것이다.

재위 28년(1752) 12월 5일 松峴宮(송현궁)에서의 일이였다.

 

 

선왕 경종 때 대리 주청한 것 때문에 영적의 괴수로 몰렸으니 지금 세자에게 양위하여 그토록 쫒아다니는 의심을

털어버리고자 한 것 이었다. 이때는 영조의 속마음은 세자와 나누어가진 권력을 다시 찾아 <임인옥란>에 역적의

수괴로 올라있던 노론 연잉군이 아니라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전조선의 임금으로 다시 즉위하고자 한것이다.

이러한 소동은 또다시 세자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점점 더지울 수없는 마음의 응어리로 맿혀가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의 나이에 염려치 않고 하나 뿐인 아들을 통해서라도 화려한 정치적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치행위는 선대 임금들에게 재임 중 나타나고 있었다. 영조는 임진왜란 당시 취약한 왕권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전쟁터에서도 종종 양위파동을 일으킨 선조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임금에게 대항하던 자들이 무릎을 끓고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은 자주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했다. 선조 역시 임진왜란 7년 동안 15번이나 이런행위를

통해 세자와 신하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너무 잦은  이러한 행위는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영조는 이광좌가 죽은 후 소수정파로 몰락한 소론인물 가운데 조현명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맏아들 효장세자의

장인 조문명의 아우로 이인좌의 난 때 영조를 지켜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는 정국을 공평히 이끌 인재로 이광좌를

대신할 인격과 도량을 지닌  인물이었고 영조의 신임도 두터웠다. 영조는 어지러운 붕당정치에서 자신의 정치이념인

탕평이념을 갖고 세자를 이끌어 줄 인물로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학문의 깊이를 확인하곤 했다. 영조의 염두에 둔 정치일정에 따라 왕위양도를 염두에

아비의  마음에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고 부족할 시에는 초조하여 세자에게 심한 꾸중을 하곤 했다.

대리청정을 한뒤 영조는 늘 세자가 불안했다. 미덥지 않은 것도 그랬고  좀 처럼 말이 없는 것도 불만이었다.

아비는 말이 많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의심도 많았다.

 

 

                                              

 

 

 

 

피 뿌리는 큰 댓가를 치르고 영조를 왕위에 올려놓은 집권 세력인 노론은 세자가 소론에 기우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쟁취한 정권인데 미래가 반대당에 기우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었다.

스믈을 눈앞에 둔 세자는 소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당 정책에서 보여주는 세자의 태도에서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주장했듯이 어릴 때부터 경종부부를 모셨던 궁녀들과  지낸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론과는 그다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1752년 10월 29일. 연암 박지원의 스승 이양천은 영조에 상소한 댓가로 흑산도로 귀양가고 조현명까지 죽으니

정치균형이 무너져 갔고 세자는 한黨으로의 권력의 쏠림현상에 심리적 압박감이 가중되어갔다. 이런 와중에

3월 4일. 왕세손 ‘의소’가 병으로 죽고 9월 22일 세손(정조)가  태어 났다.

세자는 그해 가을 한 달 보름 동안 열병으로 사경을 헤메었다.

 

혜경궁 홍씨에 의하면 세자의 정신에 이상이 감지된 것은 이때부터 라고 하는데 세자는 병이 나은 듯 보였지만

정신은 이미 피폐해지고 있었다. 심한 열병을 앓고 난 후에도 다시 영조의 양위소동은 더욱 세자의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가중시켜갔다. 한 겨울에도 양위소동은 이어져 갔다.  그때마다 세자는  얇은 옷을 입고  그 추운 얼음 땅에서

엎드려 벌벌 떨면서 대성통곡하며 석고대죄 해야만 했다.

 

 

 

열병에서 일어난지 얼마 안되는 세자에겐 너무 가혹하고 힘든 일이었다. 아비의 이런 계속되는 양위파동에

아들은 이 지긋지긋한 연극을 그만 좀 하시오 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조의 행동들에 대해

신하들도 한양의 사람들도 혀를 찾다고 한다.

이들은 아비가 아들을 너무 고생 시킨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한다.

세자는 이러한 아비의 행위로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를 받아 이미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왕이 되는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힘들어도

병을 앓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1755년. 나주 벽서사건이 터져나왔다. 1728년의 이인좌의 난처럼 무장폭동이 아니라 영조를 비방하는

벽서 한 장이  발견된 뿐이었다. 그런데 영조의 과민반응은 많은 사람들을 死地(사지)로 몰아 넣고 말았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달리 냉철하게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참혹한 살육현장을 그저 마음조리며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스믈한 살의 청년 세자는 1755년 살육의 현장에서 한해를 두려움에 떨면서 보내고 있었다.

세자의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실록에 1755년 4월 28일.영의정 이천보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궁이 최근에 가슴이 막 뛰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방에서 몇가지 약을 지었습니다. 동궁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 영조의 반응은 “안타까운 일이 뭐냐?” 세자에 대한 아비의 마음이었다.당시 대궐에서는 연일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자가  놀라는 것은 원래 허약한 자식이니 별로 놀라는 일이 아니다 라는 반응이었다.

나주 벽서사건의 처리는 7개월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고사장에서 실시된  시험 답안지에서 가득 영조를 욕하는 시험지 때문에 

후반부로 치닫는 벽서 사건의 진압은 더욱 잔인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세자는 누구에게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고립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은 영의정 이천보였다.

그는 사직을 청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중용을 유지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1755년. 나주 벽서사건 이후 그는

수차례 사직을 한 상태였다. 이처럼 많은 사직서를 이유는 영조의 이중적 정치 행태 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세자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지만 세자에게 충성도를 보일 경우 권력 잃은 뒷방 노인으로의 생각 때문이었던지

집요하게 치우친 당인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사람을 공격하고 괴롭혔다.

영조는 이미 아버지로써 아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로 아들을 대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런 변화스런 행동에 영의정 이천보도 미쳐버릴 정도였다.

 

 

 

                     

 

 

 

 

세자는 체구도 우람하고 강인하며 영리했지만 아버지가 직접 취조하는 광기어리고 피비릿내 나는 살육현장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며 병들어갔다. 1757년 새해부터 세자에게 시련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2월 15일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자식을 못낳은 비련의 여인으로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세자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있는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영조의 사위인 정치달이 죽고 얼마안가 숙종의 계비이자 영조가 평생 의지했던 대비 인원왕후 김씨마저

승하했다.  한 달 사이에 왕비와 대비 그리고 사위가  세상을 떠났 것이다. 왕비와 대비의 죽음으로 이제는 대궐에서

아버지와 아들 세자 간의 멀어진 사이를 좁히며 완충역할을 할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다.

세자에게는 커다란 불행이었다.

 

 

주위에 의지하였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자 세자는 극도의 공포감을 갖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점점 무서워져가며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벌벌 떠는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 했고 아버지는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이런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는 불행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아들 정조가 태어난 1752년 부터 라고 했다.

 

 

1752년 10월 세자는 심하게 한번 앓고 난 뒤 겨우 회복되자마자 곧바로 양위파동으로

추운 곳에서 고생한 뒤 밤마다 헛것이  보인다고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리고 증상이 심해진 것은 1755년 나주 벽서사건이 난 뒤부터 였다 한다.

 

 

 

1755년 대궐 안은 그해 내내 죄인의 목이 달아나고 피기 튀어나는 처참한 형장으로 참혹한 형벌이 자행되고 있었다.

아들은 이젠 아버지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런 아들의 행동을 보고 들으며 아버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련하고 냉혹한 정치현실을 이해 못하고 적응 못하는 아들에 대해 이제는 기대보다도 아비의 뜻에 반하는 대상으로

보아갔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오해의 벽이 시간이 지날수록 두껍고 높아만 갔다.

 

 

 

아버지 영조의 광기 어린 행동, 자신에 반하는 이들을 처리하는 잔인하도록 난폭함에 세자는 두려웠다. 그는 자신도

경종처럼 아버지에게 희생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그가 취한 행동은 미친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차라리

편했을까..  그러다 서서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답답하게 죄어오는 압박감에서 정신적

해방감과 탈출구를  찾았는지....... 그러는 가운데 세자는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영조는 이복 형인 경종이 궁궐 깊은 곳에 숨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노론세력과 영조는 경종이 대궐 깊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면서 노론세력을 제거할 어떤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일경을 통해 친위 쿠테타를 도모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경종은 분명 이상한 병에 시달렸다.

혼자 웃거나  혼자 떠들고 사람을 피하고 말을 더듬으며 이상한 증상을 보였다.

숙종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이명과 독대할 때 연잉군(영조)에 대해 언질을 주었고, 이에 일부강경파

노론세력이 연잉군(영조)의 묵인 하에 병든 경종을 독살 했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한다.

 

 

 

1758년.영조의 큰딸 화순옹주가 14일 동안 곡기를 끊고 자살을 했다. 그해 1월에 남편인 김한신이 갑자기

사망했기에 그랬다는데, 세자와  김한신이 말다툼하다 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는 세자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점과  맞물려 그가 패륜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일 것이라고도 하였다.

 

 

 

                                                   

1759년 예순여섯살의 임금이 새 장가가는 날 이었다. 신부나이가 고작 열 다섯 어린 신부였다.

세자는 그 경사스런 날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중들에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당시 세자는 폐쇄된 공간에서 유폐와 가까운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사이는 끝도 없는 갈등과 오해와 증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세자에게 온양행궁을 제안했다. 영조의 허락을 득한 후 세자는 정신적인 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바깥공기를 마시게 되었다.  1760년 7월10일  온양으로 온천 여행을 떠났다.

 

 

온양으로 세자가 떠난 후 영조는 여러차례 그의 행적에 대해 보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대궐에서 미친사람 같았던 세자는 밖으로 나오니 펄펄 날았다.

 직산과 성환을 거쳐 온양에 도착한 세자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말을 듣자

아버지 영조는 치밀어 오른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한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정적으로의 자신의 열등감의 시새움에서 그랬는지, 그간 아비에 보여준 이중적이고

알 수없는 아들에 대한 배신감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자식을 사랑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자상한 아비로서의 자세와

한나라의 군주로서 갖는 대범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조는 10년전 자신이 지방에 갔을 때 온갖비방이 난무하는 괴서들로 가득 찼던 곳에서 세자 행차 시에는 백성들의

환호의 물결이 가득차고 환영받았다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쾌감은 세자에 대한 분노로 변해 갔다.

자신앞에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던  세자가 아니었던가!

 

 

세자는 온양에서 약 보름간 머믈다가 한양 궐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접하고 곧 바로 올라와 임금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려하니 “긴여행 피로 할것 이니 가서 쉬라!“며 문안인사를 받지않았다.

실록에는 “그후 다시 세자는 약방진찰을 받다.” 라고기록하고 있다.

왕조국가 에서 세자가 왕보다 높은 신망을 누린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절대로 나누어 가질 수는 없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정치적 극한 대치상황에서 절충을 모색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승지 김한로가 보다 못해 세자를 찾아갔다. 1761년 2월 25일 이었다. 다음 날 영조는 김한로의 행동에 불괘감을

표시했다. 승지를 시켜 세자에게 올린 글을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영조는 “그자가 무엇인데 왕과 세자사이를 갑론을박 하는가? 건방진 그자를 당장파직 시켜라.”

그 무렵 영조는 세자를 폐위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보다못한 승지가 세자를 찾아갔다 오히려

파직을 당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아들과 아버지, 왕과 세자  사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온양에서 열흘 남짓 쉬던 세자는 무언가 불길한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한양에 올라온 것이다. 아버지 영조가 아들

세자를 폐위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대궐을 비운사이 할 것이란 믿을 만한 소식통의 정보를 들은 것이다.

 

세손의 나이 열 살이고 영조 나이와 건강을 생각하면 늦은 것도  아니었다. 세자가 없는 사이 주위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상자를 후계자에서 끌어 내려 폐하는 것이 옳다고 나서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있었고, 아내 홍씨도 한 몫 거들고 있었다.

홍씨는 '한중록'에 남편이 던진 바둑판에 왼쪽 눈이 실명될 뻔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생모 영빈이씨가 아들 세자를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 혜경궁 홍씨도 그일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외아들과 남편을 죽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머니인 영빈이씨도 부인 홍씨도 노론 세력

이었고 장인 홍봉한 또한 딸자식 덕분에 임금의 은총으로 재상 벼슬에 나와 있으니, 당파의 희생이었던가..

아니면 그들의 주장대로 미쳐버린 자이기에 포기하고

차선책인 세손으로 왕위를 이어가려 했던가..

 

 

 

 

 

 

 

 

그 무렵 세자를 죽움의 길로 재촉한 이가 있었으니 문성국이란 자 였다. 그는 육상궁 별감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여동생을 영조에게 바친 인물이었다. 그녀를 ‘문희’라고 불렀다. 문성국은 세자에 대한 여러 비행들을 과장하여

영조에게 보고했다.

아들을 정적의 대상으로 보는 임금에게  정순왕후와 영빈이씨, 혜빈홍씨, 화환 옹주 등이 세자비방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세자를 도와야할 사람들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영조는 1761년 세손이 성균관에 입학한 뒤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우의정으로 재수하고 이때부터

세자를 폐하고  세손으로 후계자를  세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것을 눈치챈 세자는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나 죽거든 아들하고 잘 사시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761년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가 죽었다. 실록은 “그가 죽기전 유서를 썼는데 세자를 아끼고 보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40일 지나 민백상도 죽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자 제거 작업에  이천보가 먼저 자살로서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이어 인현왕후의 후손이며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상도 역시 우의정으로 발탁된 얼마 후 세자 제거에  죽음으로써 항거하였다.

3대째 대재학을 지내고 있는 김양택은 김춘택의 동생으로 세자 제거 작업에 동참하지 않고 항의 뜻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세손의 성균관 입학식을 앞두고 영조는 세자제거를 위한 홍봉한을 중심으로 노론의 일치된

성원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런 임금의 뜻에 이들은 죽움으로 항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3월4일에는 좌의정이며 세자의 사부(師父)인 이후가 갑자기 죽었다.

한달 간격으로 정승들 셋이나 죽어 나갔다. 이들의 죽움은 음독 자살 이었다.

한나라의 정승들이 세자를 위해 죽움으로 영조의 뜻에 항거한 것이다.

 

 

 

                   

 

 

 

세자의 평양행은 이들 정승들의 죽움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한 달 간격으로 정승들이 죽어 나갔지만

당시 실록은 그들이 지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천보를 필두로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세자의

목숨이었다. 일부에서는 세자의 관서 밀행의 책임을 물어 영조가 자진케  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죽움은 1761년 3월에 모두 끝나지만 세자의 관서밀행은 그해 4월2일에 이루어진다.

세자의 제거를 위한 모의는 1760년 8월 온양 행궁 때부터 이루어 졌다.

 

이때부터 영조는 세자의 행동을 놓고 의심을 하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가 미친 척 하면서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아비와 아들의 대결구도는 대궐 내에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살얼음판 같은 시기에 세자가 평양에 몰래 갔다온 일이 벌어졌다.

노론의 감시망에 갇힌 세자가 관서(평양)행을 택한 이유는

점차  조여오는  위기감을 절실히 느끼며 살기위해 행한 것 이라 보여진다.

 기녀들과 유흥여행도 아니며 정신병도 더욱 아니었다.

 

세자는 관서지방 미행을  가기 전 우의정을 지낸 소론영수 조재호를 방문한다. 소론이 거의 몰락하다 시피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정승이었다. 그는 영조의 장남이였던 효장세자 嬪(빈) 조씨의 오빠로서 정예군사를

갖은 평양감사로 있는 정휘량을 소개해주었다. 정휘량은 세자의 사돈이기도 했다. 세자의 여동생 화완옹주의

남편인 일성위 정치달의 아버지 정우량의 동생이었다. 러나 세자가 믿고 찾아간 정휘량은 시세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노론의 영수로서 우의정까지 오른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전했다.

홍봉한은 영조와 세자의 갈등에서  미래가 확실치 않은 사위보다도 당론과 자신을 키워준 

지금의 임금인 영조의 편에 서있었던 것이다.

정휘량은 영조 37년 8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한 홍봉한의 빈자리인 우의정에 오른다.

 

 

세자의 관서 미행은 우연곡절 끝에 영조의 묵인으로 표면적으로는 해결된다.

관서행을 계기로 유흥과 반역모의로 엮어 세자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노론은 초조해졌다.

영조의 나이 예순 아홉,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령이었다.

잘못해 세자가 즉위하면 여지껏  쌓아온 그네들의  성역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은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네들이 살아갈 수 있었다. 왕비의 아버지 김한구, 숙의의 오라버니 문성국,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환 같은 척신과 김상로 홍계희, 윤금같은 노론 중진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고변할 인물을 물색하였다.

 

 

 

                           

 

                        

 

5월 25일 나경언의 고변이 터졌다. 이즈음 세자는 임금과 대립적인 관계에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인지하고

매사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지내고 있었다. 약방 진찰은 5월에 들어 뜸했다. 나경원은 일개 중인(商人)신분도 못되는

남의 집 청지기로써, 액정서(군주의 명령전달과 관련된 잡다한 업무를 보는 곳) 별감인 나상언의 형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임금을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고변한 것이다.

 

 

 

고변의 핵심은 세자가 군사정변을 일으킨다는 것 이었다. 세자는 이제 일개 상민의 고변을 통해 궁지에 몰렸다.

그 뒤에는 커다란  세력인 노론이 숨겨져 있었다. 나경언 형제는 한낱 보잘것 없는 깃털에 불과할 따름이며

그들을 사주한 숨은 몸통은 따로 있었다.  세자보다 열 살 아래인 젋은 계비 정순왕후를 비롯한 그의 외척 일당과

간교한 후궁인 숙의 문씨 오빠의 문성국 일파,  그리고 장인  홍순환과 아내 혜경궁 홍씨를 업은

모사꾼 홍계희 등의 교활하고도 치밀한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

 

 

 

 

 

고변의 내용의 핵심은 이러하였다.

 

- 왕손인 은전군을 낳은 세자의 후궁 박씨를 죽였다.

- 칼로 써서 여러 하인과 궁첩을 죽였다.

- 여승을 궁안으로 불러들여 주색을 일삼았다.

- 궁궐에 불을 냈는데 하인이 그 죄를 뒤집어 썼다.

- 선비 처럼 변장하여 바깥 미행을 일 삼았다.

- 市廛(시전)상인 들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

- 北城(북성)으로 나가 유람 하였다.

- 신하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정사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 주상께 8개월 동안이나 진현하지 않았다.

- 허락 없이 西路行役(서로행역)하여 역모를 꾸몄다.

- 땅 속에 집을 짓고 상청을 꾸며 주상을 저주하였다.

 

 

 

실로 이들 죄목들로 만으로도 살아남지 못할 고변이었다.

 

 

                   

                         

 

 

 

세자는 왕손의 어미를 죽이고 여승을 궁에 끌어들여 노닌 개인적 비행 때문에 죽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문제를

혜경궁 홍씨의 주장처럼 ‘정신병’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인 임금과 대립하는 정적이었을 뿐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에서 영조가 가장 분개한 것은 세자의 개인적 비행보다도

목숨을 걸고 성취한 자신의 왕위에 대한 도전이였는지도 모른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영조 38년 5월에 땅속에 집 3칸을 지은건 사실이다. 혜경궁 홍씨는 이룰두고 세자가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평범한 사람이 한 행동으로는 볼 수없는 현상이긴 했다.

 

 

 

당시 영조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령인데다 실제로 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행여나 대책없이 세자가 즉위하는 날에는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이었다. 가만히 당하고있을 수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노론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나경언의 고변이었던 것이다.

죽움을 무릎쓰고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카운트 펀치를 날린 것이다.

 

 

 

나경언이 告變(고변)한 ‘세자비행의 10여조’는 그 모두가 사실에 가까운 것 이었다.

죽고 사는 것이 임금 한마디에 늦가을  가랑잎 떨어지듯 오가는 판국에 허술이 거짓을 늘어 놓다가는

단칼에 목이 달아나고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자 역시 영조가 죽는 날에 대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땅속에 집을 지어 무기 등을 감추고 소론 영수 조재호와

관계를 맺고 관서(평양)행에서 군사동원이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자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일까...

결국 이러한 일로 세자는 죽움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실로 눈물나는 일이었다.

 

 

 

운명의 그날이 왔다.

영조는 아침 창덕궁으로 향했다. 영조가 휘령전 殿上(전상)에 앉자 불려나온 세자는 뜰아래 板位(판위)에 네 번

절하는 예식을 행했다.  휘령전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절하는 곳이었다. 영조는 세자의 법적인 어머니이였던

정성왕후 서씨의‘계시’와 생모인 영빈 이씨의 ‘밀고’를 마지막 세자 제거의 명분으로 삼아 세자 제거를

실행하려는 것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며 칼자루를 주었다.

 

 

 

 

"아버님 살려주세요 !"

 

이미 마음을 정한 아비의 굳어진 마음은 아들을 내려보며 어서 자결을 재촉한다.

달려온 세손(정조)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세자 뒤에 엎드렸다.

울며 발버둥치며 끌려나가는 세자 뒤로 갑자기 큰 궤가 들어왔다.

 

 

 

 

 

 

 

 

 

 

 

속히 그곳에 들어가거라”

 

세자는 옷자락을 걷고 두손으로 뒤주 양모서리를 잡고는 어릉거리는 눈망울로

영조를 우러러보며 애소했다.

 

“아버지 ! 살려 주옵소서.”

 

 

마침내 세자는 뒤주 속에 들어갔다.

영조는 직접 뚜껑을 닫고 큰 자물쇠를 잠근 후 長板(장판)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큰 못을 힘껏 박고 동아줄로 묶어 뒤주를 봉했다.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라.”라고 전교를 내렸다.

 

 

 

세자는 영조 38년 윤 5월13일부터 21일 까지 무려 8일간 뒤주 속에 갇혀 있었다.

한 여름 물 한 모금 마시지못하고 그 좁디좁은 어두운 밀폐된 공간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시신은 온통 피멍이 들었고 오그라든 발과 등은 펴지지 않았다.

 

 

 

 

 

 

 

 

 

 

 

세자야!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버지 영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착한 愃(선)이, 잠은 잘 잤느냐?

예, 아바마마, 평안히 주무셨나이까?

 

아들 思悼世子(사도세자)는 답하였다.

 

 

 

 

 

 

실로 권력 무상이던가 ?

 

인생 무상 이던가 !

 

 

 

 

 

자료 : 나무위키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자료 :daum이미지,뮤직,지식, 한중록,조선왕조실록,목숨,영조의 3가지 거짓말,

사도세자(고백,암살미스터리,site) ,M.B.C.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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