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물결

댓글 23

창작

2013. 12. 2.

 

 

Music : Kitaro - Caravan Sary-Youtube

 

 

 

                                                천안문 (天安門:텐안먼).출처:cafe.daum.net

                                  

 

2008

하계올림픽 개최지가 베이징으로 결정되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을 때

터져나온 기쁨의 환호는 한 여름밤 대륙의 하늘을 열기로 달구고 있었다.

2001. 7. 금요일, 대륙너머에서 날아든 급보는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소식이었기에

중국인들은 열광하며 형형색색의 불꽃들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하늘을 수 놓았다.

 

 

중국의 상징 테안먼(天安門) 광장.

해가 어슴프레 떠오르는 새벽의 오묘함이 사통팔방으로 뻐져나간 드넓은 광장위에 서려

이곳에 영멸했던 영욕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는 1949년 10월1일.

청명한 가을아침. 공산 혁명이 완수되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광장 북쪽

옛 왕궁의 궁궐 자금성 난간에 육중한 모습을 드러내고 광장을 메운 군중을 굽어보며

공산정권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1949.10.1).출처:위키백과

   

                                                          천안문 (天安門:텐안먼).출처:cafe.daum.net

 

                                              

 

 

국민당 대륙에서 내전을 벌이던 마오쩌둥(毛澤東)의 홍(紅)군은 100만여 명의 병력과 중무장한

장제스(蔣介石)군의 토벌공격으로 첩첩히 포위된 루이진의 공산요새를 포기하고 대륙의 오지(奧地)로

       후퇴를 거듭하며 퇴각한다. 장시성기지에서 출발하여 쓰촨성과 티베트고원기슭을 거쳐 11성(省)에 이르는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 척박한 북부 산간마을까지 368일간의 대장정을 통해 종착지인 산시성 옌안에

       공산 기지를 세우게 된다. 1만2천km 걸어서 이룬 대장정에서 정치적 감각과 군사적 전략가 기질이 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동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명실상부한 공산당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1934.10 ~ 1935.10)

 

           중국은 유럽제국주의 열강들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1911년대.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유일한 異민족인

           징키스칸의 元제국에 이어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의 청나라가 1,2차 아편전쟁을 거쳐 서구열강의

           물밀듯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사라져간다.

           대륙의 마지막 왕조의 청황제 푸이[선통제: 3세 즉위,서태후가 지목한 푸이의 생부이며 광서의   

          이복동생 순친왕이 섭정하고  6세에 1차로 하야함. 신해혁명 후 쑨원(손문:孫文)이 임시총통에 오르나 갈등끝에 실력자인 군 벌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 총통자리를 물려주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초대총통에 오르나 군벌의 반기로 실각하고 돌아온 쑨원이 뒤를이어 1923년~1925년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을 이끔.]를 마지막으로 쑨원(손문:孫文)은 중국 최초의 혁명(신해혁명)을 통하여 1912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중화민국을 선포한다.

                                          

                                       

                                                             순친왕과 푸이(우)                          

                                                         위안스카이(원세개).출처:위키백과

         

 

 

쑨원 사후 분열된 국민당은 쑨원의 동서인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을 통해 평정한다.군벌토벌(1차 국공합작)과

피 비릿내  나는 8년간의 중일전쟁 때에는 일시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전선(2차 국공합작)을 이루나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1945년~1949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혈투를 거쳐 부패하고 타락해진 국민당군은

중국인민과 서방세계로부터 외면받고, 공산당은 대륙의 최후의 승자가 된다.

 

국민당군은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려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와 국민당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의 붕괴 등으로 인한 민심이반 등으로 무너져 갔다.

 

1948년 가을. 린뱌오(林彪:임표)이끄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것으로 시작하여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 베이징 함락, 4월 창강을 건너 국민당정부 수도인 난징이 함락된다. 이어 파죽지세로 5월에 최대도시 상하이, 10월에는 국민당군에 남아있던 최후의 보루 청두까지 함락되며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잔존세력은

대륙의 남쪽 변방에 떨어진 타이완섬으로 도피한다.

 

 

                         

                               대 장 정(大長程) 출처:www.picturechina com.cn  newslink.media.daum.net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세계질서의 냉전시대 (1945년~1989년)와 더불어 시작하게 된다. 1950년~1953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은 북한공산정권에 미국 등 UN군은 대한민국을지원하며 전쟁에 개입되고, 소련에서는

공포정치를 이끌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르시쵸프가 정권을 잡고 탈 스탈린주의가 시작된다.(1956년)

 

 

 

중화인민공화국를 세운 마오쩌둥(毛澤東)은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 사오산에서 여유있는 지주(地主)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건장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구습(舊習)에 절은 부친에게 반항하던 젊은 시절에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나 곧 사별한다.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 당시 18살로 혁명군에 가담한다.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그리고 도서관 사서로서 많은 사상 책을 섭렵하고 19C 후반 내내 서구열강의 외세에 시달리는 나약한 조국을 바라보며,

해방이란 사명감이 가득차 있던 그 당시 젊은이들 처럼 열렬한 애국청년이었다                                                   

      

                            

 

         

 

                                                     

                         오쩌둥(모택동).출처:  xiaokang@joongang.co.kl, cafe.daum.net                                

                                                                               

 

 

                                                                   

恩師(은사)

의 딸과 재혼하고 영국유학파 출신으로 당시 중국 봉건사상을 비판하던 은사 楊昌濟(양창제-후에

 베이징대 교수가 됨.)의 뜻에 따라 상하이 공산당 설립에 발을 들여 놓는다. 볼쉐비키의 도시노동자들의 봉기를 통한 

사회 개혁 운동을 보고, 시골출신이었던 마오쩌둥은 중국의 진정한 힘은 농촌에서 나온다고보고 농민의 봉기를 통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한다.   반면에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당이 농촌에 침투하여 거점을 확보하고 이념적으로

확산되어가는데 반해, 농촌과 단절되며 부정부패와 투기 등으로 도시인들에게 조차 외면받고 있었다.

 

 

역사의 수많은 세월동안 전쟁과 폭력과 혼란 등으로 너무많은 피를 흘려온 중국인들인지라 통일중국의 과업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있었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공산정체성에 신념을 갖지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그간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가혹한 실정을 겪어보았지만, 그래도 무능한 국민당 정부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대다수

중국인들은 공산정권의 수립을 체념반 기대반으로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택동과 홍군의 대장정.출처:www.picturechina.com.cn

 

                                                                                  

 

1950년. 공산당정부는 중국사회의 가장 뿌리깊은 조직인 가부장제도를 해체하고자 두가지 사회개발을 추진하여

기존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기존의 가정에 억메였던 여성의 지위를 혼인법 개정으로 해방하여 여성들도 경제활동에

참여함이고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고 집단농장체제를 도입하여 기존 씨족사회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

 

1951년. 공산정권은 그들이 염원하는 사회개혁을 위해 대대적 숙청에 들어간다. 종교인(특히 개신교인), 대지주, 지식인, 반혁명주의로 낙인된자들은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모욕과 수치와 함께 숙청되고 탄압을 받게된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이들을 공격하는 것을 방치해 주었다. 거의 모든 농촌마을에서 군중집회를 통해 과거 자신들을 핍박했던

지주 등 반혁명분자들을 끌어내어 수모를 주고 고문하고 자아비판을 통해 처형하였다.

 

1952년까지 이로인한 사망자수는 최고 2백만 명 이상에 달했다. 2000년이상 중국농촌사회를 지배해온 지주계급은

거의 소멸되고 농지는 몰수되고 다시 골고루 여성을 비롯한 농민들에게 얼마씩 나누어 주어 농민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급격한 변화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공산당은 선동과 폭력을 사주해 강제로 토지개혁을 마무리하고 도시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 나갔다. 공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위해 모든 사기업을 국유화 했고 농민들에게 분배했던 농지를 다시 걷어 들여 인민공사

집단농장에 흡수하면서 공산경제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쑨원(손문)

 

장제스(장개석)와 타이완(대만)

                    출처:cafe.daum.net                  

 

 

1957년.백가쟁명’이라는 구호와 함께 마오쩌둥이 시도하는 공산사회를 위한 반우파운동이 일고, 그 다음해인 1958년. 대 약진운동이라는 중국사의 비극적인 사회운동이 일어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이 일어났다. 공산당정권은 그간 추구해온 경제성장을 더욱 증진코자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로의 노선전환을 강요한다.

그러나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급격한 농업집단화로의 강요, 마오쩌둥 사상강조를 위한 정치체제

그리고 지식인들의 억압 등의로 인해 복합적인 불만이 도사리고 숨어있었다.

 

이같은 시기에 소련에서는 스탈린 비판이 일어 스탈린 신화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마오쩌둥은 이를 직시하고 중국공산당의 부조리와 모순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방안을 찾기 시작한다.

백가쟁명운동은 공산체제 자체모순을 극복하고자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서 이 대중운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체제를

비판하고 이를 수정하고자한 대중운동이었는데, 결과는 예상 밖으로 공산체제 비판 즉,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여지껏 잠재되었던 억압된 불만이 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시위대와 공동작업.

   출처:www.picturechina.com.cn.  Naver Tistory.

                                

                                                     

 

 

예기치 않았던 비난과 체제 비판이 터져나오자 공산당국은 당황하여 이제는 노출된 불만자들에 단속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이제 이 운동을 반사회주의 독초인 주자파(극우주의자)라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기위한 반우파 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한다. 공산당국을 마음껏 비판하라는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을 벌여놓고 이제는 노출된 체제비판자들을 사회주의국가의 반역자로 취급하고 반우파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제 ‘만발한 꽃들’을 ‘해로운 잡초’로 규정함에 따라 공산체제를 비판했던 주자파들은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동료, 친지 하물며 부모형제를 고발하고 배신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5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고 농촌에서 경작하도록 추방되었다.  연이어, 마오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대약진운동은

 

수 년안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이를 위해 철 생산을 늘려 대영제국을 따라잡고,

농촌에서는 대규모 관개공사, 재식립사업 등을 계획적으로 실시하여 각 지방을 일종의 자급자족 지역로 만들고자

하였다.  약 5000가구를 모아 ‘인민공사’라는 노동집약적인 생산조직을 통해 모든 인민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공동 생활시설의 자급자족 체제로 배급, 혼인,이주 까지 관장하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자찬하는 공산주의

사회조직의 일환의 통제된 사회조직이었다.

 

10년도 안되어 공산정권 출현과 함께 농촌의 실상, 중국 사회의 모습은 완전히 변모해갔다. 이 운동은 현실에 맞지않는

실행할 수없는 목표 추구와 비효율성으로 인한 대기근과 굶주림으로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만들며 중국대륙을 황폐화

시킨 참담한 실패로 드러났다. 공업화를 위한 기술의 미비와 농업의 경시, 게다가 이상기후와 참새를 해충으로 박멸

하라는 해괴한 마오의 선동에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지면서 참새가 잡아먹던 실제해충의 창궐로 인한 인재로 인한

처참한 흉작으로, 1958년과 1961년에 걸쳐 중국전역을 휩쓴 대약진운동은 약 3천~5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홍위병 의 만행.

                                    출처:www.picturechina.com.cn

                      

                                                      

전국에 인민공사가 설립되고 농민의 토지들은 모두다 이곳으로 흡수하여 공동취사, 공동작업, 식량배급을 지급하며 현실성 없는

과대목표를 설정하고 몰아쳤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은 중국대륙의

재난 중에 가장 처참한 인재(人災)였다.

식량부족은 도시에서도 심각했지만 농촌에서는 더욱 처참했는데 농촌대부분 사람들이 노동재교육현장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기근이 확산되자 마오쩌둥은 당원들에 대한 또 다른 숙청을 개시하여 600여만 명을 처단함으로써 반주자파운동을

무색할 지경이었다.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을 더욱 거세게 몰아부쳐 전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참극을 빚게된다.

 

 

문화대혁명은(1966년~1976년) 마오쩌둥에 의한 공산체제의 확립을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기위해 홍위병으로 알려진

학생, 젊은이 들을 동원해 공산혁명을 지속토록한 마오쩌둥의 교할한 선동운동으로서 중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반주자파운동이 미미한 파장이었다면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삶들의

목숨을 앗아간 끔직한 대지진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1962년 가을부터 중국공산당의 내분이 심해졌다. 일시적으로 용인되었던 자유주의 성향이

다시 문제시 된 것이다. 인민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아비판으로 처형되거나 농촌 각지로 뿔뿔히 보내졌다.

노년에 이른 마오쩌둥은 최고의 권력자 자리를 지키기위해 한번 더 자신이 구상한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문화대혁명의 준군사 학생집단인 ‘홍위병’은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에서 자본주의 사상에 젖은 지도층을 자아

비판을 통해 숙청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만해도 고위공직자. 교육계지도자, 저명한 학자

등이 하루아침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대중들 앞에서 우스꽝스런 뾰족모자를 쓰고 구타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끌려

다니며 린치를 당하는 광기가 전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산야를 지나 행군하는 홍군의 대장정.

출처

:www.picturechina.com.cn

 

 

중국대륙이 미쳐 날뛰는 홍위병들로 가히 내전 상태로 되어갔다. 이러한 사태가 이제 공산주의 체제자체를 위협하며 국제적 이미지 마져 훼손되어가고 있기에 군부실세 린뱌오(林彪)와 저우안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에게 홍위병 사태의 우려와 심각성을 알리고 해산을 촉구하게 된다. 1967년. 8월. 마오는 마침내 극좌파들의 행동을 막으라며 이제 홍위병들 상호간 유혈충돌로 미쳐 날뛰는 홍위병 해산명령을 하게된다.

 

 

1966년. 여름부터 사태는 급진전되며 고교생 홍위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재교육을 받고 대학생 및 성인인 홍위병들은

산업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라는 명을 받는다. 군부실력자 린뱌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홍위병들을 오지(奧地)로 유배

시키는 해산작전을 하며 그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로서 한세대를 통해 중국역사 이래로 가장 치욕적인

모습을 남기고 홍위병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홍위병들은 해체되었으나 마오의 정치일정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劉少奇)는 실각하여 감옥에서 사망하고 전직 간부들 또한 군부 실세 린뱌오가 관리하는

인민해방군 소속 5.7 간부학교에서 엄격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세월에 장수가 없다던가.. 대륙을 호령하던 마오는 병세가 악화되어 후계자 싸움에 불이 붙었다. 드러내놓고 마오의

2 인자로 자칭하던 군부 실세 린뱌오(林彪)는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정치적대립에서 마오는 저우언라이의 손을 들어준다. 1971년 9월13일 몽골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짧막한 기사로 그의 실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린뱌오의 죽움으로 군인들의 악명높았던 몇 달간의 통치는 중국공산주의 체제아래에서 가장 어두웠던 나날이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문화대혁명의 그늘의 종지부를 찍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선다.

 

 

     주은래 와 등소평

 

 

         모택동(중앙)과 주은래(좌).

         출처:www.picturechina.com.cn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고 숙청당해 농촌이나 5.7 간부학교에 끌려가 재교육을 받았던 옛 각료들이 정계로 돌아왔다. 실각했던 덩샤오핑(鄧小平)도 정계로 돌아왔는데 그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난동으로 장남 덩주팡이 창문에서 내던저져 평생 불구자가 되었었다. 1973년. 4월. 덩샤오핑(鄧小平)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신임을 얻어 부총리에오른다. 지방 주요지도층 인사로서는 쟈오쯔양이 복권되었는데 그는 광동성에서 덩샤오핑을 피신시켜주었는데 그 또한 비판받고 숙청되었다. 이제 군 출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통해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4인방이 이끄는 극좌파는 마오쩌등의 묵인으로 아직 물러나지않고 도처에서 져우언라이 진영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오쩌등의 병세가 날로 깊어 갔다. 그는 아직 까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극좌파에게도 귀를

기울이며, 침착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반 평생 동지인 져우언라이(周恩來)를 신임하고 의지하게 된다.

 

 

1972년 리쳐드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국대륙을 방문한 해. 져우언라이는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고 극좌파의 마지막 도전을 뿌리치고 덩샤오핑에 권력을 이양하려고 한다. 해가 바뀌자 마오의 위독설과 함께 져우언라이 위독설이

흘러 나왔다. 1975년 개최된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大)에서는 아직까지 중앙정치무대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화귀펑(華國鋒:화국봉)을 공안부장으로 발탁한다.

 

 

 

                                                    

훈련중인 여성 홍위병.

출처:www.picturechina.com.cn              

 

      

1976년.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이어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중국공산주의 두

거성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화귀펑에게 정권이 이양된다. 중국인민은 덩샤오핑(鄧小平)이 후임총리가 되기를 바랐으나 극좌파의 반대로 마오는

중앙정계에 신인이지만 유순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화귀펑(華國鋒)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화귀펑은 극좌파의 성화에

못이겨 鄧小平을 중앙정계에서 퇴출하게 한다.그러나 중국인민들은 극좌파의 복귀를 반대하고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는

鄧小平의 정계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1976년 9월9일 늦여름이 지나가는 문턱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중국전역의 스피커에서 무거운 가락이

울려 퍼지면서 마오쩌둥주석의 사망을 알리고있었다.중국대륙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겼.

수십 년간 마오쩌둥(毛澤東)주의와 그 폐단으로 중국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를 유추해보면 제3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마오를 바라보는 열광적인 숭배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아버지 마오(毛澤東)가 사망한 1976년 당시에는 중국대륙은 외부세계와는 거의 단절된 체 30여년

가까이 마오 숭배의 선전공작에 익숙해져 마오주석의 비판이란 것은 가히 엄두도 낼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없는

금기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상을 초월한 마오에 대한 숭배가 세대를 넘어 지속되어 왔기에 체재를 단속하고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현재 해외의 마오 추종자들 이었던 사람들은 현실에 눈을 떴기 때문에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체제유지를

위한 검열을 거친 언론과 정보에 접하는 대다수 중국인들은 지금까지도 마오의 신화에 젖어있다.

 

 

 

  모택동과 공산혁명동지들 .출처:      www.picturechina.com.cn                                                                                                                                                                                                                                                                                                  

 

중국인들 집단무의식 속에 마오는 되찾은 민족의 자부심과 자력갱생의 상징으로 각인되며 역대 중국왕조의 시조들처럼 신격화되어

아직까지 숭배와 경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것이다.

 

오늘 날 기록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추구한 정치적 실험에 희생된 사람들이 6천여 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은 한세대를 짓밟아 버리고 사람의 가치를 유린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15년 뒤로 끌어들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사망이후 중국은 극좌파의 공포의 정치체제가 다시금 들어설까 두려워하며

불안에 휩 쌓여 가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자취.출처: cafe.daum.net      

                                                         

 

마오의 공식 후계자인 화귀펑(華國鋒)은 마오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7일 한밤중 4인방 (강청,왕홍문,장춘교,요문원)과

그의 측근들을 전격 체포한다. 그는 권력의 공백기간에 먼저 선수를 치며 정적을 제거하며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실력자가 된 것이다. 1976년 4월 이후 중앙정치무대에서 떠나있던 덩샤오핑은 이사태에 동요하지 않았지만

민중들은 그가 져우언라이(周恩來)를 계승해야 한다고 믿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져우언라이가 생애 말년에 덩샤오핑과 함께 문화대혁명의 혼란 중에서 중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민중들에 희망의 불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치판은 덩샤오핑(鄧小平)과 마오의 부인이며 극좌파 4인방 장청의 싸움이었고 마오의공식 후계자인

화귀펑(華國鋒)이 중재하는 모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덩샤오핑은 혁명가로서나 군인의로서나 경력면과 능력면에서

인정받아왔지만 화귀펑은 1970년 초에서나 중앙정치무대에 들어선 새로운 인물이었다.

 

 

 

                                                 남 여 홍위병.출처:www.picturechina.com.cn .cafe.daum.net 

                                                                       

 

또한 덩샤오핑은

대장정의 현장에 있었고 대일항쟁에 공을 세우는 등 공산정권 수립과 함께했다.

중국인민들은 극좌파 공산체제 골수분자들의 치정에 눈을 돌리며 경제적 실용주의를 도입하여 생활수준을 높여주고

제한적  자유이지만 희망의 불빛을 열어주고자 한 치적들..

1970년대에는 져우언라이와 힘을 합쳐 합리적 정책으로 인민들을 잘살게 하고자 노력한점..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민들과 함께 시련과 고초를 당하며 실각한 불운의 정치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권을 쥔 화귀펑은 63세의 이 왜소한 노인 덩샤오핑과의 힘겨루기를 하며 차츰 정적들을 제거하며 정국을 이끌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던 덩샤오핑과의 대립에서 밀리면서 덩샤오핑과 타협하고 그를 복권시킨다. 중앙정치무대로 돌아온

작은거인 덩샤오핑은 20C가 다가기전에 중국을 세계 최고의 사회주의 경제대국을 이루고자 중국현대화를 선언한다.

숙청되었던 옛 인물들이 속속 정계에 복귀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에 희생당한 옛 간부지도자들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청년단

총서기 출신인 호요방(胡耀邦:후야오방)의 도움을 받아가며 당에 입지를 강화하고 세력을 넓혀나간다. 중국을 이끌어

가는 두지도자 화귀펑과 덩샤오핑의 현대화 계획은 달랐다. 특히 농업분야에서 화귀펑은 인민공사의 자급자족 성취를

통해 경제적 부흥이라는 옛 방식을 추구했고, 반면에 덩샤오핑은 보다 실용적 방향 즉 농민들에게 좀더 자율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입장이었다.  규제와 자율이라는 정책의 차이. 이로써 승패는 갈라졌다. 민중의 지지와 복권된 당내 세력에

힘입어 덩샤오핑은 명실상부한  중국대륙을 이끌어갈 권력의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호요방                     

 

 

경제특구를 시찰하는 등소평 .

    출처: cafe.daum.net                                                                :

 

 

t                                     

                   

                                                                            

                                                               

중국공산주의  1세대인 마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중국인들은 지나온 암울했던 시대로의 회귀를 바라지 않고

이제는 잘살아보겠다는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그들의 희망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덩샤오핑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이 1960년대 실시하고자했던 중국사회주의 입각한 자유주의적 개방 농업정책을 채택한다.

20여 년간 지속되어온 집단농장제를 폐지하고 개별농가에 경작권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소규모로나마 자유경작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한 농업개혁이 아니라 이념과 사고(思考)의 획기적 변환이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기위해 맺어야했던 정치적 동맹 특히 체제 내 극력 보수파 및

군부와의 동맹 때문에 권좌에 오른 처음 10년 간은 개방과 개혁의 물결은 더디었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권력게임에서

중재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야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던

공산사회주의의 추종자였다. 그는 낙후된 조국을 현대화하기위한 자본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개방경제체제는

추구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제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04년 쓰촨성에서 태어났다.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여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 시대 혈기의 젊은이들처럼 당연히 민족주의에 의한 애국심이 깊어간 덩샤오핑은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르노자동차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면서 인종차별을 눈으로 보고 느끼며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고 프랑스공산당

창당을 지켜보며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양자강 상류와 석벽.출처:cafe.daum.net                    

 

그는 서구열강으로 부터 침략받고 고통받는 조국 중국근대화를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게된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의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여 중국공산당 게릴라에 합류한다. 대장정의 고난의 여정에도 참여했고

경력을 쌓아가며 고향인 중국남서부 지역에서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거듭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1954년 鄧은 부총리가 되며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체제 내 서열 6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 추종자 이였기 때문에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지지하였고

대약진운동과 소련과의 결별 로선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鄧은 그당시 당내 공산주의지도부가 보는 시각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있었다. 그간의 정치실험에 대한 부정적결과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가 행한 너무 많은 시행착오적인 과오를 알고 더 이상 답습하고 싶지않었던 것이다.

 

 

1961년부터 鄧은 농가에 자율권을 부여한 경작권을 되돌려 주려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때에는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해 그 자신도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수차례 경질과 실각 끝에 1973년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져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정계에 복귀된다. 鄧은 체제내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 1976년 1월 자신을 믿고 밀어주던

져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다시한번 정계에서 밀려나 그해 7월에야 겨우 정계에 돌아온다.

 

 

세 번의 숙청과 세 번의 복권이라는 정치일정에서 오뚜기라고까지 불리어지며 鄧은 실용주의를 배우게된다. 그는

이제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되 마오처럼 위험한 정치적 실험의 장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굳게 믿게 된다.

즉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되 대륙 중국의 특성에 맞는 개방적 요소가 가미된 경제발전 모델을 추구하게된다.

 

 

                         

                                                       올림픽준비로 정돈된 강변의 야경.출처 : cafe.daum.net 

 

    

                                                        

 

1980년대 들어서며 이러한 鄧의 실용주의 경제정책에 인민들은 나아진 생활환경을 피부로 느끼며 인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그려왔던 개혁 개방정책을 구현하게 된다.이제 75세의 노정객으로서 중국천하를 다스리게된

덩샤오핑은 자신이 그간 꿈꾸어왔던 개혁, 개방 정책의 결실을 보기에는 남은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전 수상의 유지를 받들어 4대 현대화도 이루고 싶었으나 도처에 너무 많은 걸림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화귀펑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고 최후의 저항을 하였고 鄧은 이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했다. 1980년 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대회에서 5척 단신의 작은 거인 鄧은 정적 화귀펑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쟈오쯔양(조자양:趙紫陽)과 후야오방(호요방:胡耀邦)을 체제 수뇌부라 할 수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훤칠한 키에 인품좋은 쟈오쯔양은 1919년 허난성의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20세 무렵 공산당에

들어가 광동성과 쓰촨성에서 정치적 경력을 쌓는다.그는 특히 농업분야에서 생산과 소비에 조금의 자율성을 부여한

약간의 자유주의를 도입하여 농민의 생산성동기부여에 힘입어 이곳에서 생산성 증대를 통한 농민경제를 일으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율성을 가미한 이러한 정치성향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고초를 겪다가 1975년 鄧의 도움으로

복권된 뒤에 쓰촨성에서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자오쯔양과 후진타오                         

 

                     

                                                                          

 

극좌파  세력에 떠밀려 중앙정치무대에서 쫒겨나 고향에 와있던 鄧은

이러한 자오쯔양의 열의를 눈여겨 보았고 복권되어

1977년 베이징으로 돌아가면서 그를 중앙정치무대로 불러 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쟈오쯔양은 鄧의 후원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화귀펑은 이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지다가 1982년 9월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고 후임총리에 자오쯔양이                                                후진타오와 시진핑.출처:cafe.daum.net  

오르게 된다.

 

 

鄧의 로선을 따르는 개혁의 두 번째 주자인 후야오방은 애소한 몸매에 눈빛이 매우 매서운 인상의 인물로써 1915년

태어나 14세에 공산 게릴라에 합류한다. 농촌봉기에 앞장섰으며 대장정에도 참가하고 1949년 공산체제가 들어서자

공산주의 청년단에서 활동하게 된다. 문화혁명 때에는 숙청당했다가 1972년 정계복귀하고 저우언라이 노선을 따른다.

후야오방은 교육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회과학원을 현대화하는데 힘썼고 대학 부총장을 지내기로 했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당서기로 임명했고 1981년에는 화귀펑 대신 총서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쟈오쯔양과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후계자로써 서로 경쟁관계였지만 힘을 합쳐 개혁을 추진하였다. 쟈오쯔양이 경제

분야에 주력했다면 후야오방은 정치 및 이념 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鄧의 두 후계자는 보수파의 견제와 압박에

10년을 못 채우고 실각 당한다.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학생운동이 일기 시작할 때부터 권력에서 소위되기 시작한다.

자오쯔양은 1988년 리펑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지다가 1989년 텐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하게 된다. 그는 2005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중 사망한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행사 출처:cafe.daum.net

 

                                                 폴 메카트니(헤이주드)와  중궁전통음악 (우)공연

                                                                 

                                                         

                                                                       

                                                                       

덩샤오핑  개방, 개혁의 10여년 간 극좌보수파와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치게 된다. 鄧의 농업부문의 현대화

작업은 집단생산 체제를 폐지하고 농업의 자율성을 부여하여 생산성증대를 통한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농민들은 자신의 책임 하에 경작을 하게 되는데 이는 의욕을 부채질하며 생산성 증대를 통한 농업부문에 혁명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외국자본을 받아들이고 고용창출을 기하게 된다.

 

 1978년 덩샤오핑은 서구자본주의에 대한 개방개혁 정책에 따라 개방의 실험장으로 경제특구 5개 도시를 선정하고

개방경제의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보고 점차 중국전역으로 확대한다는 결정을 한다. 1980년 8월26일 선전이 첫 번째

‘경제특구’로 선포되었다. 이곳은 당시 영국식민지 홍콩의 국경에 위치한 중국남부연안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경제특구실험은 바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경제 특구.출처: cafe.daum.net

 

                                                                              

 

1981년 에는푸젠성 남부의 샤먼을 경제특구로 지정하는데 이곳은 많은 화교들을 배출한 항구도시였다.

1988년에는 대륙의 남쪽 섬인 하이난성도 경제특구로 이름을 올리게되는데 경제특구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거대한 산업지대가 된다.

 

덩샤오핑은 지난날 세번이나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극좌파를 청산해야 할 빚이 있었다. 1980년 11월10일 열린

4인방의 재판은 과거에 집착하는 극좌파를 완전히 제거할 좋은 기회였다. 덩샤오핑과 새 집권부는 4인방의 공개재판을 통해 지난날의 저지른 과오들 특히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모조리 4인방에게 뒤집어 쒸움으로써 마오쩌둥의 정체성은

지켜나갈 수가 있었다. 공산주의가 저지른 모든 과오와 치욕을 장청이 이끄는 극좌파에게 모두 떠넘김으로서 마오의

실책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일어난 공포정치의 대대적인 숙청운동도 유아무아 덮어 나갔고 대약진 운동이 비참한 결과로 끝났지만

그 책임은 엉뚱한 자연재해로 돌렸다. 왕조의 시조(始祖)들의 신격화처럼 중국공산당창시자 마오는

이렇게 보전되었고 중국공산당 적법성도 유지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르자 개방과 함께 현대화 자유화 물결이 출렁거렸다.해외유학의 문호가 조금씩 열려갔고

외국인들도 돌아오기 시작하고 문학과 예술도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신에 물드는 것을

걱정하는 보수파의 견제도 있었다.개혁을 이끄는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정책을 보수파와 줄타기를 하면서도 “닭 몇 마리의 목을 따야 원숭이들을 겁줄수 있다”는 특유의 은유로 보수파의 공격에 비위를 마추며 대처하였다.

 

개혁의 물꼬가 조금씩 터지자 도시에도 좌판이 열리고 야시장이 열렸다. 외국계 은행들도

하나둘씩 돌아왔고 베이징 캠퍼스에도 프랑스 유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영국은 승리하여 홍콩을 100년간 식민지로 얻는다.).출처:cafe.daum.net

 

 

1984년 말 덩샤오핑은 아편전쟁으로 빼앗겼던 홍콩을 1997년 7월 1일 영국으로부터 반환받는 협정체결을

이끌어내어 외교적으로나 국내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이룬다. 1984년 12월19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중국의

자오쯔양이 체결한 반환협정은 일국양제(一國揚制)를 바탕으로 했는데 이는 덩샤오핑의 새로운 구상이었다.

 

영국은 중국이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체제와 영국인들이 설계한 행정 및 사법조직 자유언론, 태환지폐

(홍콩달러)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1997년 7월1일자로 홍콩을 중국에 반환키로 했다.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대륙

공산주의 체제와 공존시키기로 한 것이다.

 

 개방개혁과 함께 각계각층의 사회적 각성이 일고 외서(外書)번역이 일어나고 배급에서 쇼핑으로 인민들의 소득향상

으로 생활수준은 향상되고 기회에 편승한 자영업자들이 富를 쌓아가며 사회양상이 크게 변해갔다. 그러나 급격한

개방과 자유화 흐름과 함께 각 종 문제점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물가 상승으로인한 인플레이션, 부정 부패,

사회불안과 폭력 등 자본주의 병폐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에 의한 결과라며

개혁파를 비난하며 수파의 공격이 거세어져갔다.

 

 

드디어 개혁의 주자 후야오방이 사임했다. 덩샤오핑은 보수파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제1 후계자를 개방 개혁의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단속이 강화되었지만 아직 개혁파에서는 쟈오쯔양이 버티고 있었으나 보수파의 떠오르는 주자로 천윈의

지지를 받는 야오이린 부총리와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으로 계획경제와 수력발전전문가 리핑이 부각되고 있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모든 원로들을 이끌고 중앙정치국에서 물러나 쟈오쯔양이 마음껏 수완을 발휘할 수 있도록 2선에서

있으며 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군사위원회 주석자리는 꿰어차고 군부의 실세로 버티고 있었다.

 

 

 

 

 

                                              선전 경제 특구.출처:www.onbao.com. cafe.daum.net

 

 

개혁의

여파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계획경제 하에서 지급되던 생필품보조금이 중단되면서부터 물가가

폭등했다.  1980년도 개방의 첫 번째 수혜자였던 농민들은 이제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빌딩숲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1982년부터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농민들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하며 이농현상이 사회문제화

되어갔다.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집요한 압력에 굴해 쟈오쯔양을 모든 경제활동에서 물러나게하고

보수파 리핑과 야오이린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자아비판을 하게된다.

 

1928년생으로 60세가 된 리핑은 계획경제와 시장통제를 추종하는 보수파경제학자 천윈의 지지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1983년 개혁파와 보수파의 윈윈게임에 힘입어 부총리가 되고 경제적실권을 거머쥔 자오쯔양을 제거하려한다.

1988년에는 신장 티베트자치구에서 1년 내내 폭동이 일어났다. 베이징 정부는 후진타오(호금도:胡錦濤) 라는 젊은

책임자를 파견하고 티베트를 철저히 진압하는데. 사회분위기가 폭풍전야의 찌프린 하늘이었다.

1989년 초 정치상황은 다시 보수파로 기울고 도시와 농촌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세계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부 소식이 각종 매체의 발전으로 급속히전해졌다. 1986년 필리핀

마르코스 장기정권이 무너지고, 1988년 88올림픽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는 군사정권이 기울고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대만에서는 장제스의 아들 사망소식과 함께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기시작했다.

한시대를 마감하는 독제체제의 종말을 보는듯 했다.

 

체제가 점점 약화되고 지도부는 신망을 잃는 듯 했고 중국인들은 서서히 체체비판을 하게된다. 1989년 4월15일

갑작스럽게 개혁의 기수였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던 신망받던 정치지도자의

죽음은 개방을 원하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좌절을 안겨준다.

 

 

 

                                   천안문 광장에 진입하는 전차부대와 불타는 광장(출처:64memo.com)

 

 

1989년 4월18일 텐안먼(天安門)광장에 학생 가두행진 일었다. 후야오방 추도식이 있던 4월24일에는 50만여 명의

인파가  광장에 모였다.  베이징 시민들이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그간의 쌓인 불만을 토하며 그규모가 5월1일에는

200여만 명이 넘었고 그들의 요구도  정치화되어 민주화 운동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짐은 외국언론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있었다.  단식농성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조짐이 지방까지

확산되어갔다.

 

베이징에서는 호기심에 끌린사람, 구경꾼, 시위대에 공감하는 사람들로 테안먼(天安門)광장은 점점 인파로 붐비기

시작했다. 이 무렵 미하일 고르바쵸프 부부가 지난 30여 년간외교적 단절을 극복하고 두 공산 종주국들이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중국을 공식 방문키로 했다. 그간 중국지도부는 텐안먼 광장에서 일고있는 민주화 운동 이후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왜소한 84세의 노정치가 덩샤오핑과 우아하고 세련되고 힘찬 고르바쵸프 두 거물정치인이 회동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개방의 물결을 몰고온 고르바쵸프의 방중은 어쩌면 중국지도부 입장에서 볼 때 퍽 달가운

모습은 아니었다. 행여나 불고있는 민주화 열기에 도화선이 되지않을까 염려되는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리게 된다. 개방 개혁의 민주화일정은 21C 중반 뒤로 미루기로하고 즉, 중국이 충분히

정치적으로 발전한 다음 고려할 사항이라고 믿는다. 그나마 여지껏 이루어 놓은 경제개혁이 보수파의 역공으로 얼마

남지않은 그의 생애에 실패로 끝나버릴까 노심초사하였다.

 

5월 17일 자오쯔양은 표결에 패해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표를내고 리펑과 함께 테안먼광장의 농성장으로 시위대를 찾아가 곧 강경 진압이 있을 예정이니 돌아갈 것을 읍소하였다. 자오쯔양의 옆에는 그를 수행하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2003년 중국총리가 되는 원자바오였다.시위대는 해산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날 저녁

리펑은 당사무실로 돌아가 黨 방침대로 계엄령을 선포한다. 불안한 며칠이 지나갔다.

 

 

 

                                                               

     시위대와  진압군(출처:64memo.com)

 

                                                                               

5월20일 베이징 시민들은 군용트럭이 수도에 진입하려는 것을 막으려했다.광장을 찾는 이는 줄었지만 민주화 시위의 열기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강경 진압을 우려해 철수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시위대는 이를 거부하기로 했다. 덩샤오핑은 베이징주변에 점차 무장한 군인들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5월24일 개혁파 자오쯔양과 후치리가 해임되었다. 상하이에서 시장 주릉지의 도움을 받아 시위를 진압했던 당서기

장쩌민이 중앙정치무대의 부름을 받는다.해가 저물자 베이징 서쪽에서 요란한 소음과 함께 장갑차와 군용트럭이

다시 나타났다. 시위대와 시민들은 그네들에게 음료수와 먹을 것을 주면서 설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군중들을 헤치고 텐안먼 광장으로 나아갔다. 이어광장에서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때는 자정쯤이었다.서로 뒤엉키며 넘어지고 시위대는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졌다. 피가

낭자한 바닥 에 쓰러진 사람들 수가 늘어나고 아우성과 여기저기에서 울움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또 다시 둔탁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천안문광장의 학생 시위.출처:cafe.daum.net

 

 

뿌연 가로등 불빛사이로 자금성 아래 쪽에서 굉음을 내며 장갑차행렬이 나타났다.

확성기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고성의 해산명령이 울려퍼지면서 시위대는 흩어져갔다.

중국 공식발표는 그날 밤 사망자 수는 700여 명이라고 했고 인권 단체들이 발표한

사망자 수는 2천여 명 부상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했다.

 

베이징 서쪽의 혁명가 묘지에서는 사흘 내내 향불이 피어올랐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역동적 변화의 흐름과 단절된 체 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사그러져 갔다.

 

 

 

 

10월 말 EU와 미국은 중극의 유혈 진압을 비난하며 무기 수출금지 조치를 내린다.

그 무렵 외부세계에서는 역사의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10월 말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혁명의 물결로 동유럽 공산체제가

도미노현상으로 하나씩 무너져 갔다. 중국지도자들은 급속하게 변화는 국제정세를 주시하며 불안해 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가 유혈 진압을 강행하다가 체포되어 가족과 함께 처형되고 1991년에는 소련마져 붕괴 되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테안먼(천안문)사태이후 통제 강화로 대외에서 일고있는 역사적 순간을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서 알게 된다.

 

 

 

 

 

전인대 (全人大) 출처:cafe.daum.net

 

 

중국지도자 덩샤오핑은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며 그로부터 중국이 나아갈 길을 찾으려 했다. 그는 붕괴되어

가는 공산체제를 보고 교훈을 얻는다. 정치개혁보다는 경제개혁을 통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인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정치적 통제는 엄격히 유지하되 생활수준 향상과 기업 활동의 자율로 인민들을 보다 잘 살게 해야하는 것을...

 

이렇게 덩샤우핑은 중국이 경제성장으로 강대국에 반열에 오르면 자유를 갈망하는 비무장 인민들을

전차로 짓밟고 피 비릿내 나는 아픈 기억들을 잠재우고 현 공산

체제를 유지하려해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위대와 전차

(출처:64memo.com)                          

                                                                              

1992.10. 개혁을 공식화하는 마지막 수순이 중국공산당 全人大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중국특색사회주의 이론을 중국공산당헌장에 새겨

넣으므로써 자신이 추구해온 이념의 승리를 법제화한 것이다. 당 공식 발표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자본주의적 요소들도 차용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공산당 수뇌부라 할 수있는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정치적 성향의 균형을 위해 7명의 위원이 있다. 덩샤오핑은

리펑총리가 개혁파성향으로 정치성을 달리하였기에 어찌하지 못하고 대신 자신이 중국공산당 제3지도자로 낙점한

장쩌민(강택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임명한다. 장쩌민은 1926년 생으로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20세에 공산당원이 된다.

공학도의 길을 걸었으며 탁월한 중재수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테안먼(천안문)사태 시에는 상하이당 서기를 맡고 있었으며 상하이 민주화 시위를 평화적이지만 단호하게 진압하여

덩샤오핑의 관심을 끌었다.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보수파에 의해 실각한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장쩌민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를 중앙정치무대로 불러들이고 승진시켜 나갔다.

 

 

1990년 덩샤오핑은 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장쩌민에게 물려준다. 장쩌민은 1993년 전인대의장

차오스와 손을 잡고, 상하이시장 출신 주릉지는 경제계획을 주도하고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과 티베트사태를 무난히 진압한

후진타오가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개혁 개방이 계속세대를 이어 지속될 수

있도록 후진타오를 중국공산당 제 4대 지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쩌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들(중앙에 모택동 과 좌측

3번째 등소평).

출처:cafe.daum.net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제14차 전인대(全人大)를 통하여 대중들에 나타난 것이 공식석상에서 보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늙고 왜소한 노정객은 그의 원대한 목표를 완수한 것이다. 대륙중국을 위대한 개방 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덩샤오핑이 개방으로의 길로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중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맞는다. 1992년 말 중국은 12% 고도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다. 이제 중국의 신세대 젊은이들은 거의 개방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저마다 돈 버는 비결을 찾아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富를 축적해 중산층을 형성하며 민간 경제를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중국 10억 농민들은 1979년 경제개혁으로 집단체제인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자유시장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가장먼저

수혜를 입은 계층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개혁의 물결에서는 소외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리들의 직권남용과 부패로 시달렸다. 도시는 급속히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에 반해 농촌지역은 크게 뒤처져 도농(都農)간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갔다. 이제는 빈곤한 시골에서 도시의 일터를 찾아 상경하는 농민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우후죽순

으로 벌어지고 있는 건설현장이나 작업장에서 육체노동으로 도시생활을 이어갔다.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 다니면서 도시로 도시로 모여 들었다. 2010년에는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 다니는 이들의 숫자가 2억3천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전 세계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없는 이

새로운 사회계층은 10년간 이루어낸 산업발전과 더불어 인류사에서 가장 거대한 이농(離農)현상의 결과로

민공(民工)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놓는다.

 

 

 

 

 

 

 

도시의 노동자 민공 (民工)들.출처: cafe.daum.net.)

 

1997년 2월 20일 새벽 2시 경 중국공산주의 2세대 지도자이며 개혁의 물꼬를 튼 덩샤오핑이 92세로 숨을 거둔다. 아침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국민들은 슬퍼하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지않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가 사망함으로써 강력한 1인 지배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덩샤오핑은 사망을 4년 앞두고 중국공산주의 제 3세대 지도부로 장쩌민 후계자를 중심으로 집단체제에 권력을 이양한다.

덩샤오핑이 추구한 최후의 목표는 정권교체를 원만히하여 권력투쟁으로 인한 분열이나 혁명을 피하고 개혁 개방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함이 였다.

 

 

이를 위해 제 3세대 수장 장쩌민에 이어 제 4대 정치지도자 후진타오까지 지명해둠으로써 자신이 추구해온 중국인들이

잘살기 위한 개방 개혁 정책을 20년 가까이 이끌어 가기위한 포석을 완료하고자했다. 중국인민들은 차분하고 위엄있게

개혁의 아버지 덩샤오핑을 보냈다. 마오쩌둥의 시신은 처리되어 보존되어 텐안먼(天安門)광장에 안치되었지만 덩샤오핑은 유언대로 화장되어 중국 앞바다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보다 실질적으로 중국국민을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했다. 레닌과 스탈린이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고르바쵸프가 개방의 아버지로 러시아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듯이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대부이고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의 아버지였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을 일개 정치인으로 간주한 반면에 마오쩌둥은

신격화 하고자 했다.

 

 

 

 

 

개혁의 위대한 입안자 덩샤오핑의 죽음은 무언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인상을 남겼다. 중국인들은 개방 15년간

높아진 생활 수준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검증된 긍정적 요소들을 가미함으로써 중국식 사회주의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개방과 변혁의 물결과 함께 인플레이션, 실업, 유동인구, 불평등, 부패, 범죄, 도덕적 가치상실, 세대 간 갈등 등 각종 문제점과 병폐가 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원하는 개혁, 정치 민주화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덩샤오핑

서거 후 새로운 지도부 내에서 권력투쟁과 숙청이 뒤따르지 않을까 염려의 나날이 흘렀다. 1926년 장쑤성에서 태어난

장쩌민은 등소평의 신임을 얻어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수장이 되고 그 이듬해 군부의 1인자가 된다. 그는 정치적

판단이 뛰어 났으며 정치적 공작을 꾸미는 법도 몸에 배여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책임과 의무를 시대에 걸맞게

소화해내며 자신의 역량을 통찰력 있게 발휘할 수 있었다.

 

 

 

리펑과 차오스 등의 정적들의 견제를 받았지만 신중하게 대륙 중국호를 잘 이끌고 나갔다. 특히 덩샤오핑의 측근들은

그를 신뢰하고 정권을 맡겼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많은 조언과 협력을 해주었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길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쩌민은 새로히 군인사를 통해 군부의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 내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 상하이

출신들을 중앙 정부요직에 앉힘으로서 ‘상하이 방’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 할 수 있었다.

 

 

 

                                               시진핑(칭화대)과 리쿼창(북경대).출처:cafe.daum.net

                                                

 

 

 

9월12일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중국공산당 제 15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첫째로 정권승계를 완수하고,

둘째 국영기업 개혁을 시작한다. 셋째로 반 부패운동을 추진한다. 는 목표를 채택한다. 이 대회가 끝난 후 당내 서열

3위였던 챠오스란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73세의 중국 정보수장이었던 그는 테안먼(天安門)유혈 진압을 지체한 탓에

호시탐탐 노리던 당 서기직을 장쩌민에게 빼앗기고 만다.

 

리펑총리 역시 개혁의 설계자로 칭송받던 명석하고 권위있는 주릉지에게 물려주어 그를 일약 당내 서열 제 3위에

등극하게 한다. 장쩌민은 최대의 정적 리펑과 손잡고 차오스 세력을 제거하고 덩샤오핑 사후 7개월 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인지로서 후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개방 경제변화와 함께 뒤따르는 정치민주화 개혁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자유를 갈망하는 대다수

중국인들의 희망의 불빛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보수파와 공존하는 현 지도체제 하에서는 체제수호가

무엇보다도 살길이었기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주릉지(주용기:朱鎔其)가 중국정부의 수반인 총리가 되었다. 1928년 후안성 창사에서 태어난 그는 ‘독립사상가‘라고

불리어졌으며 선견지명과 청렴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중국체제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40년 이상을 개혁파로서

소신을 지켰다. 1958년 당시 30세였던 그는공직에 있으면서 대약진운동에 의한 당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경제적

견해가 뛰어났던 그는 이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그로인한 엄청난 폐해를 이미 보고있었다.

 

과감하게도 대약진운동에 반대하고 당에 문제인물로 찍히고 우파라는 딱지가 붙어 자아비판을 거쳐 농장에서 노동을

통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얼마 후 복권되었지만 1970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한반 숙청되었다가

50세가 다되어 1978년에 복권되어 국무원 석유부에서 개혁파로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상하이시장이 되는데 당시 상하이 당서기가 장쩌민 이었다.외국기업들도 주릉지의 효율적 실용주의를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덩샤오핑도 그를 눈여겨 보았고 중앙정부로 불러들여 경제개혁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의 역량 하에 중국은 거대한 비효율적인 계획경제를 지양하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길을 찾아간다.                                                                                                                                                                                     

                                                                                                                                                                                                                                                                                 주룽지 

 

 

1990년 중반에 그는 인플레이션을 잘 관리함으로써 중국경제의 연착륙에 성공한다. 주릉지는 대륙의 중국인들이

잘 살기위해서는 계획경제체제를 탈없이 시장경제체제로 변환시켜야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게된다. 그는 총리

임기가 끝나는 2003년까지 개혁을 가속화 하기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된다.

 

 

아사아 금융위기가 중국에도 드리워졌다. 그러나 주릉지는 위안화 절하를 않을 것이라고 아시아 금융위기에 자신감을

보인다. 1997년 5월18일 태국에서 적신호가 켜졌다. 당시 태국은행들은 10년 전부터 부동산 부분에 누적된 상환불가능 부채가 1천억 프랑규모라 발표했다. 그러자마자 수십억 달러의 투기자본이 방콕에서 빠져나가면서 태국증시는 5% 대로 주져 앉았다. 투자자들은 태국바트화가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제를 유지못하고 바트화 평가절하를 예상했다. 7월 2일 방콕은 고정환율제 포기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달려갔다. 전세계를 들뜨게했던 아시아경제 성장세가 둔화되었다. 불과 몇주만에 아시아

모든국가들은 손놓고 뭉치돈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외환보유고가 충분했던 홍콩만 예외였다.

(9월말 당시 880억 미국달러 보유). 아시아 금융위기의 파고는 중국을 제외하고 도미노현상처럼 아시아 전체를 휩쓸고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 런던, 파리, 뉴욕 등 전세계금융가가 악몽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11월 초에야 겨우 안정세를

찾아갔다. 1929년 대공황, 1987년 경제위기에 이어 세 번째로 일어난 경제 위기였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국의 튼튼한 경제력에 의한 대외이미지는 크게 호전되고

신뢰받는 위치에 까지 이르게한다. 베이징지도자들 특히 주릉지 총리는 위안화 절하의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박을

견디어내었다. 이제 전세계는 자본주의경제체제의 걸음마하는 중국이 금융위기 속에 보여준 침착함과 대담함과

탁월한 통찰력에 놀라고 있었다.

 

2002년 11월8일 중국공산당 16차 全人大가 열렸다. 중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중국헌법은 연임만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임기를 끝낸 지도부가 이제 퇴진할 때가 온것이다.

당시 군사위원회 부주석 지위에 있던 59세의 후진타오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게된다.

 

 

 

 

 

                                                                           

 

 

새로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석 늘어난 9석으로 구성되었다. 서열 1위가 후진타오 그다음이 상하이방 소속의

주릉지총리의 측근이라 할 수있는 60세의 우방귀였다. 그는 칭화대학에서 무선전자공학 전공의 엔지니어 출신으로 리펑을 대신하여 전인대 의장직을 맡게된다. 그 다음이 1980년대 자오쯔양 총리와 가까웠던 또 다른 개혁 주자 원자바오(온가보:溫家寶)이다.

 

 

새지도 체제 하에서 총리직을 맡게된 원자바오는 텐진 출신으로 지질학을 전공했고 후진타오와는 동갑이었다. 그다음

서열은 장쩌민의 총애를 받는 베이징시장 및 지역당서기 출신인 62세의 자칭린이다. 그는 2001년 부패스캔들에 아내가 연루되었지만 이혼하여 정치생명을 지켜내었다. 역시 62세의 쩡칭홍은 장쩌민의 인맥이였고 그는 군부와 석유부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많은 개혁파들과 교류하였다. 상하이시장과 지역당서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이력을 쌓은 63세의 황쥐가 서열 6위에 오르지만 그는 전 국가주석 장쩌민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국민들이겐 별로 큰 인기가 없었다.

 

한편 후진타오의 측근이자 청렴하기로 아름난 63세의 우관정은 반 부패운동을 책임지는 중앙기율심사위원회의 서기가 된다. 58세의 리장춘은 장쩌민의 또다른 심복으로서 질서의 수호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는 1998년 광동성 당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내려갔다가 이번에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66세의 가장 고령의 뤄간은 과거 동독에서 수학한 인물로서 상무위원 중 유일한 유학파였다. 그는 리펑의 측근으로 법무와 보안분야의 전문가였다.

 

이렇게 중국공산당 내의 각 파벌들은 골고루 자신들의 대표를 상무위원회에 두게 된 셈이다.

그러나 1980년대~1990년대에 비해 보수파와 개혁파의 차이는 두드러지지 않았고 이념 대립도 심하지 않았고 전반적인

방향과 시장사회주의 발전에 대해서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보다 권력에 대한 야망과 정치인의 청념성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서로 개인적인 정적관계가 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파벌에 대한 소속도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고 변화될 수 있는 문제였다.

 

 

 

 

 

                                                     황하석림으로 가는 길 .출처: cafe.daum.net

 

 

하지만 권력이양 초기의 지도부 9명의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는 자신의 지도하에 중국이 계속개방의 길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후진타오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인이 아니었다. 자금성 서쪽 중난하이에 사는

극소수의 정치인들만이 후진타오의 정치적 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조직은 체제후계자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실시하기위해 중앙정치위원들을 파견하여 철저한 내사를 통해

상무위원회의 다른 위원들 때로는 과거 세력가들 까지 포함하여 중재를 거쳐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조금이나마

정치인으로서 흠이 있으면 당내 파벌싸움에 낙마하기에 체제의 후계자를 엄선하여 선정하게 된다.

 

 

1992년 노쇠한 덩샤오핑이 정치무대를 떠나면서 쑹핑과 그밖의 원로위원들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존속을 위해 잠재적 후계자들을 물색했다. 그때 이 자리에 소개된 유망한 후보들이 우방귀, 원자바오, 후진타오, 리장춘이었다. 덩샤오핑은 후계자 후보의 나이는 반드시 50세 이하여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후진타오는 당시 49세였고 정치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지닌 인물로서 잠재적 후계자 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쓰촨성 지진피해지역.

출처:cafe.daum.net

 

 

예정대로 全人大를 통해 장쩌민은 후진타오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자리를 넘겨 주었다. 주릉지는 원자바오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리펑은 전인대 의장자리를 우방귀에게 넘겨 주었다. 정부 각 부처도 1940년대 출생한 새로운

정치세대의 인물로 채워졌다.

장쩌민은 군최고통치권을 2년도 쥐고있다가 2005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게 된다.

 

후진타오는 중국권력 3대 구성요소인 당, 행정부, 군부 모두를 아우르는 서열 제 1위 공산당정치지도부 제4세대

명실상부한 수반이 되었다. 마침내 새로운 후진타오-원자바오 집단지도체재가 시동을 걸었다.

 

 

 

1977년 신장위그루 자치구에서 분리주의자들의 시위가 일자 중국정부는 강경진압에 나섰다. 신장자치구의 독립시위는 인근 이슬람국가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키키스탄, 투흐크메니스탄이 1991년 소련체제에서 독립한데 자극을 받은 것이다. 신장자치구는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륙서부의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과거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단일국가였으나 1884년 청왕조의 영토에 병합되었다.

 

1994년에서 1949년 까지 동투르스키스탄 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잠시나마 독립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이곳은

베이징중앙정부에서 포기할 수없는 그들의 시각에 반란지역으로 인식되고있는 지역이었다. 중국은 이지역에 漢족화

정책으로 서부 대개발과 병행하여 중국인구의 95%를 차지하는 漢족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사스 발생.출처: 시사중국

 

이즈음  중국남부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비전형성 폐렴 (사스)이 발생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초기에 새 지도부는 이문제를 은폐하며 쉬쉬 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죽음의 바이러스가 베이징까지 확산된 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된다. 온 중국이 공포에 휩싸이며 6주간 마비되었다. 5월의 베이징은 텅 비다시피 모두가

빠져나갔다. 보건 당국은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고 위생부장과 베이징시장이 사스사태의 책임을 물어 총대를 메고 경질되었다. 이 사태로 중국에서만 700여 명 전 세계적으로 900여 명의 사망자가 났다.

 

이 사태를 계기로 중국은  이제 경제성장 수준에 걸맞는 공공서어비스 질이

향상되었는가를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스사태를 훌훌털고 일어난 후 중국은 전보다 더 열기에 휩싸였다. 2003년 7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사스가 물러

갔다고 공식 선언했다. 다시 활기를 띄며 중국은 년8%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하며 2003년 한해를 마감하게된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도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이제 세계산업의 유명브랜드는 거의 다 중국에 진출해 있었다.

세계의 공장이 된 것이다.

 

 

 

 

                                      중국서부 산간마을의  고산 (에베레스트산 자락) .출처:cafe.daum.net

 

 

 긴장과 갈등이 여기저기서 불리어져 나옴에 따라 예기치않은 탈선은 모조리 피할 것이라는 새로운 지령이

당국으로부터 나왔다. 집권 20년을 맞는 중국정부는 조화를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꼭 모든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보다 무리한 요구 자체가 나오지 않게끔 필요하다면 불만분자들의 입을

막아서라도 규제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 보편화 되면서 그런 조치도

유아무아 되면서 실효성이 없어져갔다.                .                  

 

 

중국총리와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자오즈양이 1월 17일 월요일 새벽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제일 먼저 개혁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었다.

 

자오쯔양은 1985년 5월 계엄령 선포직전에 테안먼(天安門) 유혈진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당시

원자바오를 대동하고 상기된 모습으로 텐안먼광장에 나타나 시위대를 설득해보려고 애썼다. 그 이후로 자오쯔양은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3년 그의 수하였던 원자바오가 중국의 새로운 총리가 된다.

 

 

 

                                                           쓰촨성  대지진.출처:cafe.daum.net

 

 

자오쯔양 장례는 테안먼사태에 도화선이 되었던 후야오방장례식을 기억하는 당지도부의

우려로 조촐히 의식을 갖추어 치루어지고 잊혀갔다.

 

개방의 물결과 함께 이제 중국 연안지방 특히 남부연안과 상하이일대의 공업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나 기존 전력

생산이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장 번영된 지방 중 하나인 저장성에서는 2000년부터 정전사태가 빈발하는 고질적

병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 지역이 그렇게까지 급속히 발전하리라는 것은 예상치 못하였다.

생활수준 향상으로 인한 가전제품의 증가도 전력 소비량이 대폭 증가한 이유에 하나라는데

당국은 2006년에 가서나 전력량 수요를 맞출 수 있다고 발표했다.

 

 

                                         

 

                                                                 개방개혁의  산물인 빌딩숲.출처:남방일보

 

 

중앙정부 구 소련의 체르노빌원전 사고이후 그 안전성에 대해 원전을 경계해야만 했다. 2020년까지 원전 2~3

곳을 신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향후 건설될 원전의 80%가 중국에 있어 중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핵 시장이되었다. 프랑스의 아레바, 일본과 제휴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러시아가 그들 나름대로의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달라 붙었다. 결국 기술이전 등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미국팀이 계약을 따내게 된다.

 

 

제2의 경제개혁의 물결이 일던 1992년 당시만 해도 중국에는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강요된 현대화로 구시가지는 무참히 파괴되고 개발업자들은 마구잡이 개발을 시작했다. 쿤밍에서 하얼빈,

항저우에서 시안을 거쳐 카스까지 서둘러 고층건물을 세우느라 도시미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백 년된 문화유산을

갈아엎기에 바빴다. 다행히도 사찰과 중요 건물들은 국가문물국의 지시로 보전될 수있었다.

 

2000년부터 문화유산을 보호하자는 여론이 조성되고 당국도 무분별한 난개발이 관광자원을

훼손하고 있으며 이는 먼 앞날을 위해 다시 얻을 수없는 큰 손실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인대 (全人大).출처:cafe.daum.net

 

 

중국사회 이제 성장에 따른 모순점들이 점점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부패한 지방관료들이 토지 수탈이나 토지 강제수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각종 불만으로 인한

여파가 확산되지 않도록 당국은 2005년부터 정치적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3월의 全人大 에서는 대만을 염두에두고 반분리법을 통과시켰다. 이법은 대만이 독립을 주장할 경우 중국이 최후수단

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터넷 검열과 통제도 강화되고 상당수 반체제인사들이 체포되었다. 2006년 이후로 중국의 시위, 집회에 대한 집계는 더 이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민중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사스사태 은폐를 포함하여 민중을 무시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정부당국은 이제 취약한

사회계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사회적 긴장이 폭발하기 전에 해결의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2006년 6월3일 全人大는

농민들의 모든세금을 철폐하는 ‘신사화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남녀중학교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하였다. 2007년 3월 全人大에서 물권법을 채택하는데 이에 따르면 도시민은 토지소유권을 70년 간 소유할 수 있으나

농촌의 토지문제는 좀 까다로왔다.

 

1950년대 토지의 집단화는 공산주의 개혁의 우선과제였다. 이제는 농민과 지방관료의 이해관계가 얼켜있기 때문에

이념보다는 경제논리가 우선이었다. 지방관료들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도시근교 농지를 헐값으로 업자들에 매각시키고 이득을 취하면서 도시는 점차 확대되고 정당한 보상을 받지못한 농민들의 불만은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사회적 탈선을 막고 조화를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탄압하였다. 2007년 부터는 더욱 통제가 강화되었다. 여러사회문제가 동시 다발적으로 분출되었기에 당근과 채찍을 통한 강온책을 사용해 저항운동을 저지하기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당국의 목표는 조직적으로 연계된 대규모 운동이 일지않도록 저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민들은 용감한 소수의

저항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였다. 지식인들 조차 대부분체제를 비판하기보다는 자문 또는 방관자가 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도 이같은 생각을 갖고있었다. 서민들은 19C 부터 수많은 굴곡의 혁명과 사회운동을 겪어왔기 때문에

대부분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대부분이 이제는 안정 속에서 경제성장을

이어나가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지못하는 중국인들은 점차 주식투자라는 합법적 도박에 뛰어들었다. 이미 1억 명 이상이

상하이와 선전의 증권거래소에서 투자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경제인구의 8%에 해당하며 그중 절반이상이 소위

‘개미’투자자들이며 그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상하이와 선전 증권거래소는 1992년에 설립되었고 1997년

대폭락이후 근근이 버티다가 2005년부터 대폭 상승하며 2년이상 고공행진을 한다. 상하이지수는 2005년 7월에서

2007년 9월 사이에 무려 5배나 상승하였다. 2006년에는 130%, 2007년에는 90% 이상 성장하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는 중국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주식투자 열기는 식어갔다.

 

 

                      

 

                                                                    도시의 난개발.

출 처:

cafe.daum.net

 

 

부동산 분야에도 비슷한 열풍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은 15년째 밤낮없이 건축하기에 바빴다. 국내경제활동의 반의반은 부동산

개발과 관련있는 정도였다. 베이징, 상하이,광조우의 대도시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했고 각성의 중소도시들로

변모해같다. 1998년도부터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다. 중국의 모든 도시에서 주택가격이 폭등했고 이제는 누구나가

부동산에 투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국은 부동산 투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2007년~2009년사이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한해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내국인도 소유주택에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으면 두 번째 주택은 취득할 수 없게 하였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

              출처:cafe.daum.net

 

                                                             

                                                                 

 

중국시장 진출한 외국자본의 기업들은 그간 일취월장하며 고공행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점차 중국에서도

경제애국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외국투자자들의 의욕을 꺽는 산업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공산당내 신좌파로

분류되는 정치계인사들은  외국자본이 핵심산업을 잠식할까바 우려했고 반면에 원자바오총리와 후진타오국가주석을

비롯한 자유파는 개방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국가 부의 증대를 역설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개방과 외국인 투자유치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외환보유국 세계1위의 나라가 되었다. 이젠 증권이나 부동산 같은 투기적 성격이 강하거나 환경을 파괴할 위험이있는 외국인 투자는 억제하고 연구개발, 콘테츠를 제안하고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외국인 투자는 장려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기술독립을 구현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사업을 지속하고자하는 기업들은 이제 자국의 색깔을 최대한

감추고 중국토종기업과 합작을 통한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투자에 따르는 위험부담, 산업스파이가 판치는 중국에서 자발적인 기술이전 뿐만 아니라 상업기밀을 유출당할 수도 있다는가능성을 항상 염두에두어야 했다.

 

 

 

 

                                                                 

       건설중인  빌딩숲.출처:cafe.daum.net

 

 

2007년 10월 22일 중국공산당 제 17차 全人大 에서는 예상대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임기를 5년 더

연장키로 하였다. 또한 후진타오는 그의 최대의 라이벌이자 장쩌민의 자문역이었던 쩡칭홍을 정계에서 은퇴시킬 수

있었다. 비록 쩡칭홍의 측근들이 중앙정치국과 상무위원회에 남아있긴 했지만 장쩌민 지지세력인 ‘상하이방’세력은

후진타오 측근세력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 출신 세력에 비해 약세였다.

 

 

아직 1990년대 중국을 이끌었던 구세력과 연계된 인물이 3명 더 있었다. 우선 全人大 의장 우방귀가 체제내 서열 2위를

지키고 있었다. 리장춘도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으며 자칭린은 중국상원이라 할 수있는 정치협상위원회 주석 직을 맡고

있었다. 국가주석의 새로운 수하들로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써 반 부패운동에 앞장서게 될 허귀창과 공안부장을 맡게된 저우융캉이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태어난 젊은피 두사람이 있었는데 중국공산주의라는 왕조의 정통에 따라 각 각 차기 국가주석과 총리로 예상되는

시진핑 과 리커창 바로 그들이었다.

 

 

 

 

2008년 8월1일 개최되는 베이징올림픽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에 이어 3번째로 열리는 축제였다. 이제 이 행사를

통하여  중국이 그토록 원하던 축제로 승화하여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개혁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해가 다르게 치솟던 경제성장률이 2007년에는 11.4%를 상회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처럼 놀라운 경제성장과 함께

세계화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선전부는 끊임없이 성공적인 대회 개최에 대해 홍보하고 있었으며 국민들도 즐거운 축제 생각에 들떠있기는 마찬가지

였다. 마치 그들의 올림픽이 150여 년간 감내해온 혼란의 시대를 마감할 것처럼...

2008년 8월 봄은 중국의 야망과 이나라 젊음이들의

희망의 빛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2008년 3월 봄. 티베트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중국당국은 ‘티베트의 봄’이라

알려진 이 운동을 유혈진압하여 국제사회의 올림픽 보이콧에 직면하게 된다. 티벳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라마와의 관계로 프랑스마저 불참소식이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올림픽 성화 봉송 소동으로 심기가 틀어진 중국당국은 열려진

모든 외교채널을 통해 성공적인 올림픽개최를 위해 참가 독려를 홍보하였다.

 

 

      

 

 

 

                                                                      지진의  여파.출처:cafe.daum.net

 

              

2008년 5월12일 올림픽개최를 코앞에 두고 규모 8.6의 대지진이 쓰촨성서부를 강타하였다. 티베트고원과 중국 서부 평원지대가 맞닿은 지점이었다. 순식간에 진앙지부근에 위치한 관광도시 원찬을 비롯한 한왕마을은 초토화되어

그날 2시 28분에 시간은 멈추었다.

 

당국과 군대, 자발적인 주민들의 참여로 복구의 손길은 장대비가 내리는 비참한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부근의

도시들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썩어가는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과 같은 아비귀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망자수는 총 9만 2천명에 달했다.

 

2008년8월 8일 저녁 8시8분 베이징 나오자오 주경기장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제 29회 올림픽 개회식이 열렸다. 붉은

수수밭, 영웅 등으로 세계인에 감명을 준 장이머우(장예모:張藝謀)감독의 총지휘 하에 거행된 개회식에는 80여 개국의

국가원수와 정부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베이징올림픽 개회식과 장예모.

출처:cafe.daum.net

 

 

 

미국 부시대통령, EU순회의장 사르코지프랑스대통령, 푸틴 러시아총리, 후쿠다일본총리가 귀빈석에 자리를 하고 있었으나

영국과 독일의 자리는 비워있었다. 개최국 염원대로 중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엄청난 기량을 발휘하며

금매달 51개로 36개 금메달에 만족해야했던 미국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중국 공산당당국은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함으로써 새로히 적법성을 되찾았고 세계인이 바라보는 중국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세계는 중국을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2008년 여름. 얼마 전부터 우려되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사태가 결국 미국에서 터지고 말았다. 미국은행은 10년부터

다양한 부동산 파생금융상품을 개발했다. 상환능력이 없는 이들도 빚을 내어 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고 불량채권은

기관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그러다보니 악성대출이 누적되어 결국 금융체제자체가 도미노현상으로 무너지면서

공멸하게된 것이다.

 

 

9월 15일 미국연방준비기금은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있는 리먼부라더스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리먼브라더스는

미금융계를 떠받드는 기둥 중 하나였다. 국제금융체제 전체가 요동쳤다. 물리고 물린 채무관계는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 사슬처럼 연결되어 그여파는 세계금융계에 바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중국은 그 여파가

비교적 적었다.

 

 

 

 

 

이제막 파생금융상품에 눈뜨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콩은 패닉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홍콩금융은 이미 국제금융체계에 흡수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더 컸고 중국본토는 금융체제는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 않아 위기를 잘 버티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자 중국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불황으로 제품주문이 격감했던 것이다. 중국은 대외 수요감소, 즉

수출감소에 너무나 취약한 경제구조였다. 주문급감은 재정이 악화된 공장들이 더 저렴한 노동력이나 여건 등을 찾아

이전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도산해 버렸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회안정은 또 다른 중국당국의

고민거리였다. 공식적으로 실업률이 4.5%, 2천5백만 명에 달했지만 대도시와 연안지방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1천 6백만 명의 민공(民工)은 제외한 숫자였다.

 

 

1990년대 연안지방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1세대 민공들은 경제위기를 맞아 이제 고향에 돌아와 그동안 피땀흘려

모은 돈으로 작은점포나 식당을 차리고 여생을 보내려했다.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동향을 감지하고 내수시장을 통해

소비를 불러 일으키려했다. 중국당국은 이렇게 경제적 돌파구를 내수시장에서 찾기로 했다. 수출은 과잉생산을

해결하기위한 수단으로 삼고 기업가들에게는 국내투자를 장려하고 각 종 세제혜택도 마련했다. 그리고 사회적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였다.

 

 

 

2009년 겨울이 되자 수십만의 민공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4월에 접어들자 세계은행은 중국경기가 여름부터는

살아나 2010년에는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중국경제를 낙관한다. 확실히 새로운 기운이 조성되고 있었다. 2008년

시가총액의 절반이날아갔던 상하이 증시는 2009년 1월 이후 30%이상 상승하며 회복세를 보였고 20%이상 떨어졌던

부동산 가격도 6월부터 다시 오르기 시작하며 거리에는 활기가 넘쳐 흘러갔다.

 

 

 

                                                            허탈한 개미투자자.출처:cafe.daum.net

 

 

 

중국정부 경기부양책의 정부방향을 경기회복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다. 실제로 중국의 저축율은 50%에 육박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교육비와 의료비가 높고 퇴직연금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항상 돈을 모으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새로운 특권층으로 부상한 신흥젊은 부자들이 못마땅하더라도 공공자금을 늘리고 이로인해

민간부문의 불만을 잠재우기위해 민간 부문에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나갔다. 2009년 가을은 이렇게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며 지도부의 논쟁도 치열해져 갔다.

 

 

2010년 7월 중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강대국(G2)이 되었다. 대만도 중국에 다가왔다. 2010년

6월29일 중국과 대만은 역사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 이제 대만은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 형성해온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만의 독립주의자들은 이렇게 대만이

중국 그물망에 점점 더 얽혀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2011년 10월 18일 全人大 전체회의에서는 권력승계절차가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시진핑이 군사위원회 부주석 자리에 임명되었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자리는 권력 이양의 핵심단계이다. 그리고 2012년 가을에 열리는 중국공산당 제 18차 全人大에서 공산당 총서기가 되고, 이변이 없는한 2013년에는 국가주석과 이르면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차례로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제 5세대 지도부의 수장에 등극한다.

 

 

권력구조를 보면 공산당 일당독재 형태이지만 당 내부통제는 7명의 상무위원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집단지도체재이다.

최고지도자인 국가주석은 7 인의 대표자로서 장쩌민 시대 까지 7인이였으며 후진타오 때 9인, 다시 시진핑 때에는 다시

7인으로  장쩌민 시대로 회귀했다. 중국의 권력집권주기는 5년 단위로 2번 중임에 10년의 주기이다.

 

 

 

 

 

 

중국은 14억 인구 중 약 8000만 명이 공산당원이며 이들의 대표 200여명이모여 5년마다 전당대회를 거쳐 374명의

중앙위원이 선출되고 그 중에서 또 25명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이들중에서 선출된 7인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상무위원이며 이들의 대표가 총서기인 간판스타로써 중국을 대표하는 수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총서기가 절대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고 중요정책사항은 7인의 당 상무위원이 투표로 결정하게된다.

 

 

중국의 권력은 현재 3개의 파벌로 이루어져있다. 첫째가 후진타오계열의 ‘共靑團’(공청단) 파이다. 이들은 자수성가한

개천에서 용난 사람들로써 중국최고명문 칭화대와 북경대 출신의 천재들이다. 둘째로는 장쩌민 계열의 ‘상해파’이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지난 권력이지만 중국 양대 정치권력인 상해파와 북경파가 버티고있고 장쩌민 원로가

바쳐주고 새로히 등장한 태자당과 연합으로 강한 캐스팅보드를 움켜쥐고 있다.

셋째로는 떠오르는 권력 ‘태자당’이다. 부모 잘만나 잘놀던 부류로써 창업공신인 혁명동지나 고위관리 자제들이다.

 

 

중국권력계승의 룰에 격대지정(隔代指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현지도자는 차기가 아니라 차차기 지도자 지정권한을

갖는다는 관례를 말한다. 그간 장쩌민의 상해파 10년(1993~2002), 후진타오 공청단파 10년(2003~2012)에 이어

태자당파 10년(2013~2022)으로 권력일정으로 나아갈 것이다.

 

 

 

 

 

후진타오는 자수성가한 인물로써 분배를 강조하는 좌파 경향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부친이 태자당의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이였으며 동부연안의 성장혜택을 톡톡히 본 사람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우파경향이지만 분배와 타협하는 모양세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분배실상은 임금인상이나 복지제도 개선이 아니라 국영기업의 민영화이다. 그러나 이는 공산당과 태자당의 돈줄을 규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영기업과 연관된 기득권 세력과 태자당의

이권도 포기시켜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3개 정파의 합의의 결과로 탄생된 시진핑세대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공산당의 돈줄인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한

부의 배분에는 제왕의 권력 약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집권자는 후임자에게 미루고 후임자는 나름대로 모양세 갖추기에

급급한 것이 중국권력의 속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상위 20%가 국민의富 50%를 갖고 하위 20%가 겨우 5%를

갖는 증산층이 거의 없는 구조이다. 불만이 없을 수 없기에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고 있는데 나라 국방비보다

사회안전예산이 5조원이나 많은 묘한 현상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장 시급한 문제가 분배문제인즉, 제 5세대 주자 시진핑시대를 맞아 국민을 설득해 나가면서 큰 것은

못해주더라도 작은 부문은 풀어주는 성장전략으로 삼고 분배는 서서히 이루어 나갈  것이다. 가급적 국영기업은

축소해 나가고 민영화 속도를 천천히 조절하면서 근로자의 임금은 속히 올려주며

중산층을 키우고 고소득계층은 규제하는 것이다.

 

 

 

  등 소 평

 

 

                                            

중쉰과 그의 아들 시진핑 .출처:cafe.daum.net)

 

 

5세대 지도자 구성에서 후진타오(공청단)가 다소 밀린 듯 하지만 장쩌민(상해파)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10년 뒤 2022년 선출될 지도자지명권을 갖기에 공청단파는 5년 뒤인 2017년 시진핑 2기상무위원 구성에 주목할 것이다.

공청단파는 이번에 중앙권력을 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중국 31개 지방성지도자 402명 중 42%인 168명이

공청단파로 채워져 중앙의 태자당파의 정책과 지방의 공청단파의 대책의 정책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원래는 5세대 지도자는 격대지정(隔代指定) 관례로 장쩌민계의 상하이파에서 나와야하는데 그간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걸출한 인물이 없기에 “꿩대신 닭”이라고 공청단파를 제외한 그래도 무난한 곳이 태자당인데 상하이파의 홈그라운드인

상해시 당서기 출신의 시진핑을 장쩌민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상해파 대신 시진핑의 손을 들어 주었다.

또한 후진타오도 어차피 이번에는 장쩌민의 역할이 클터이고 자신은 10년 뒤 지도자선출에 영향을 끼칠터이니

정적인 상해파가 아니면 그래도한때 태자당 출신 시중쉰의 아들이었기에 시진핑의 낙점에 동의한 것이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모두 정계의 거물이었던 시중쉰을 상전으로 모신 적이 있고 개혁 개방의 성향이 공청단과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시진핑주석은 이제 밀어준 상해파의 장쩌민도 모셔야 하고 자신을 그래도 어정쩡하나마

도와준 공청단의 후진타오 역시 보살펴주어야 하는 처지이기도하다.

 

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8기 3중회의,11월 9~12일)에서 시진핑은 국가주석(정부)과 총서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  등 중국 3대 권력을 다 쥐고 있었지만, 보수파 원로들을 추스리며 반대를 잠재우고

노동교화제도 최종 폐지를이끌어 낸다. 노동교화제는 재판없이도 인신을 구속할 수있는 인권침해의 대표로 여겨지는

제도로써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제도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입었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됬던 '18기 1중전회' 1주년을 맞추어 개혁안이 공개된 것은 아마도

시진핑주석은 전임 주석과는 다른 막강한 권력을 갖는다는 것으로 예상되기도 하다.   

'18기 3중전회'에는 장쩌민, 후진타오 전 주석 등 원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진 핑 .출처:cafe.daum.net

                                                      

 

 

시진핑 주석은 나아가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를 본뜬 국가안전위원회 설립을 결정한다. 이 조직은 경찰, 인민해방군,

외교부, 민정부 등 중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기구를 이끄는데, 농민시위와 사회불만 테러,신장위그르 와 티베트 

자치구 등 소수민족 분리,독립운동 등 내정문제와 동중국해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를 비롯한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 등 외교분쟁도 담당할 위기 대응 조직으로  그가 총괄 지휘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시진핑 1953년생으로 중국공산주의 초기에 마오쩌둥과 함께 투쟁한 원로 쉬중쉰의 아들이다. 쉬중쉰은 1962년

문화대혁명 당시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혁명가 였다.

2002년 사망한 시중쉰은 덩샤오핑의 측근이면서도 테안먼(천안문) 무력진압에는 반대했었다.  그러나 아들 시진핑은

태자당(당,정,군,재계 실력자 들의 자녀)으로서 미약하나마 당내 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시진핑은 모든계파를 아우르는

인화력이 뛰어나 보였다. 그는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시에서 성장과 당서기를 거치면서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의 눈에

들었고 그를 차기 후계자로 키운 사람은 칭화대학 동문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었다.

 

인민가수 평리위안과 결혼한 시진핑은 경제개방에 호의적이며 실용적 감각과 개방정신이 높이 평가되었다. 중국

공산당체제의 제 5세대 수장 시진핑은 과거‘상하이 방’세력과 ‘공청단’출신의 장쩌민 국가주석과의 타협의 결과였다.

장쩌민 전국가주석은 시진핑의 온화한 성품, 외국사업가들과의 원만한 관계, 합의를 도출하는 인화력을 높이샀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손을 들어준 결과였다.

 

 

    

 

 

                노을 진 강변.출처:cafe.daum.net

 

 

 

1980년 에서 현재까지 중국은 근 30여년의 기간을 공산제국의 고립에서 벗어나 금융,기술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함으로서 세계화 흐름에 진입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이기간 동안 중국인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난 세월 서구열강에게 느꼈던 피해의식을 털어버리고 대국으로의 야망을 찾게된 것이다.

 

 

경제면에서 중국은 이미 세계 제2위경제대국(G2)이 되었다. 수출과 해외자본 유치로 30여 년간 고속성장을 이루어 냈고 덕분에 중국은 세계제1의 외환보유국이며 미국의 채권국이 되었다. 이제 중국은 내수시장을 진작하려고 한다. 베이징

정부는 보다 효율적인 재분배 시스탬 과 청정에너지 및 신기술 중심의 ‘녹색경제’로 나아가려고 하고있다.

 

 

 

 

                                                                                 황하 의 녹색산야.출처:cafe.daum.net

 

그간 중국경제의 도약이 노동착취와 심각한 공해, 급속한 자원고갈, 문화유산의 훼손의 댓가를 치르고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구매력 평가기준 1인당 GDP는 6570달러로 세계 92위다. 중국은 강대국인 동시에 개발도상국이라는 역설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복지와 혁신분야도 가장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20년 후에는 중국내륙지방도

연안지방 만큼 발전하여 중국 대륙 전체가 골고루 경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중국은 근 30여 년간에 걸쳐 점진적 개방을 추구해왔다. 이러한 장기적 개방은 중국이 안정을 확보하면서 중국정치체제가 변화하는 사회욕구에 부응하지못해 정당성을 잃어갈 위험이나 지나친 정체에 빠질 위험을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개혁과 개방을 계속 추진해야한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감하는 분위기이다. 반면에 정치개혁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합의가 이루어지지않고 있는 듯하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체제 백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16억 5천 만명의 중국인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져 능히 민주주의 체제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민주주의가 어던 유형의 것인지는  남겨 놓지않았다그래서 원자바오 총리를 위시한 체제자유파들은  이제 차근차근 정치개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피력하는 것이다.

 

 

당분간은 덩샤오핑이 구상한 정치구도가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합의를 주도하는 국가주석과 개혁파 총리라는

쌍두마차에 체제 내 각 파벌로 대표하는 7 인의 ‘수뇌부’가 존재하는 체제가 계속적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이체제는

권력이 한곳에 집중하여 전제주의적 횡포의 재현을 막아줄 것이다. 그네들이 역사의 교훈에서 얻은 것 처럼...

 

 

                                                                      

 

                                                                                                                                    

 

                          장쩌민(우)과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상)  

                                            출처:cafe.daum.net

 

                                                                         

 

협상과  합의를 도출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 것 이다. 지도층의 5년 임기를 두 번 연임하고 일정한 수순에 의해 권력을 승계한다는 원칙도 정치일정에서 장기적 전략을 펼쳐나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서구 민주주의 사회처럼 잦은 선거운동에 수반되어 민주화를 위한 어쩔 수없이 소모되는 정체기와는 비교되는 부문이다. 중국은 이제 중산층 육성과 소득분배 개혁을 돌아오는 10년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로 내걸었다.

 

중국대륙은 과거보다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며 환경을 보다 존중하며

중국이 법치국가로 거듭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명실상부하게 최고의 강대국으로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세계는 흘러가는 大河의 물결과 함께 변해가고 있다.

 

 

                                                                                

 

 

 

자료 : daum(카페,이미지,뮤직,정보,백과사전),China site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압록강의 침묵--위화도는 말한다..  (16) 2016.04.20
소치에서 평창으로  (16) 2014.02.23
대륙의 물결  (23) 2013.12.02
6월 엔  (4) 2013.06.09
잃어버린 나  (4) 2013.06.04
오 월에..  (4) 201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