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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天安門:텐안먼).출처:cafe.daum.net
2008
하계올림픽 개최지가 베이징으로 결정되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을 때
터져나온 기쁨의 환호는 한 여름밤 대륙의 하늘을 열기로 달구고 있었다.
2001. 7. 금요일, 대륙너머에서 날아든 급보는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소식이었기에
중국인들은 열광하며 형형색색의 불꽃들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하늘을 수 놓았다.
중국의 상징 테안먼(天安門) 광장.
해가 어슴프레 떠오르는 새벽의 오묘함이 사통팔방으로 뻐져나간 드넓은 광장위에 서려
이곳에 영멸했던 영욕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는 1949년 10월1일.
청명한 가을아침. 공산 혁명이 완수되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광장 북쪽
옛 왕궁의 궁궐 자금성 난간에 육중한 모습을 드러내고 광장을 메운 군중을 굽어보며
공산정권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1949.10.1).출처:위키백과
천안문 (天安門:텐안먼).출처:cafe.daum.net
국민당군과 대륙에서 내전을 벌이던 마오쩌둥(毛澤東)의 홍(紅)군은 100만여 명의 병력과 중무장한
장제스(蔣介石)군의 토벌공격으로 첩첩히 포위된 루이진의 공산요새를 포기하고 대륙의 오지(奧地)로
후퇴를 거듭하며 퇴각한다. 장시성기지에서 출발하여 쓰촨성과 티베트고원기슭을 거쳐 11성(省)에 이르는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 척박한 북부 산간마을까지 368일간의 대장정을 통해 종착지인 산시성 옌안에
공산 기지를 세우게 된다. 1만2천km 걸어서 이룬 대장정에서 정치적 감각과 군사적 전략가 기질이 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동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명실상부한 공산당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1934.10 ~ 1935.10)
중국은 유럽제국주의 열강들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1911년대.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유일한 異민족인
징키스칸의 元제국에 이어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의 청나라가 1,2차 아편전쟁을 거쳐 서구열강의
물밀듯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사라져간다.
대륙의 마지막 왕조의 청황제 푸이[선통제: 3세 즉위,서태후가 지목한 푸이의 생부이며 광서의
이복동생 순친왕이 섭정하고 6세에 1차로 하야함. 신해혁명 후 쑨원(손문:孫文)이 임시총통에 오르나 갈등끝에 실력자인 군 벌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 총통자리를 물려주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초대총통에 오르나 군벌의 반기로 실각하고 돌아온 쑨원이 뒤를이어 1923년~1925년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을 이끔.]를 마지막으로 쑨원(손문:孫文)은 중국 최초의 혁명(신해혁명)을 통하여 1912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중화민국을 선포한다.
순친왕과 푸이(우)
위안스카이(원세개).출처:위키백과
쑨원 사후 분열된 국민당은 쑨원의 동서인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을 통해 평정한다.군벌토벌(1차 국공합작)과
피 비릿내 나는 8년간의 중일전쟁 때에는 일시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전선(2차 국공합작)을 이루나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1945년~1949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혈투를 거쳐 부패하고 타락해진 국민당군은
중국인민과 서방세계로부터 외면받고, 공산당은 대륙의 최후의 승자가 된다.
국민당군은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려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와 국민당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의 붕괴 등으로 인한 민심이반 등으로 무너져 갔다.
1948년 가을. 린뱌오(林彪:임표)가 이끄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것으로 시작하여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 베이징 함락, 4월 창강을 건너 국민당정부 수도인 난징이 함락된다. 이어 파죽지세로 5월에 최대도시 상하이, 10월에는 국민당군에 남아있던 최후의 보루 청두까지 함락되며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잔존세력은
대륙의 남쪽 변방에 떨어진 타이완섬으로 도피한다.
대 장 정(大長程) 출처:www.picturechina com.cn newslink.media.daum.net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세계질서의 냉전시대 (1945년~1989년)와 더불어 시작하게 된다. 1950년~1953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은 북한공산정권에 미국 등 UN군은 대한민국을지원하며 전쟁에 개입되고, 소련에서는
공포정치를 이끌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르시쵸프가 정권을 잡고 탈 스탈린주의가 시작된다.(1956년)
중화인민공화국를 세운 마오쩌둥(毛澤東)은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 사오산에서 여유있는 지주(地主)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건장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구습(舊習)에 절은 부친에게 반항하던 젊은 시절에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나 곧 사별한다.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 당시 18살로 혁명군에 가담한다.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그리고 도서관 사서로서 많은 사상 책을 섭렵하고 19C 후반 내내 서구열강의 외세에 시달리는 나약한 조국을 바라보며,
해방이란 사명감이 가득차 있던 그 당시 젊은이들 처럼 열렬한 애국청년이었다
오쩌둥(모택동).출처: xiaokang@joongang.co.kl, cafe.daum.net
恩師(은사)
의 딸과 재혼하고 영국유학파 출신으로 당시 중국 봉건사상을 비판하던 은사 楊昌濟(양창제-후에
베이징대 교수가 됨.)의 뜻에 따라 상하이 공산당 설립에 발을 들여 놓는다. 볼쉐비키의 도시노동자들의 봉기를 통한
사회 개혁 운동을 보고, 시골출신이었던 마오쩌둥은 중국의 진정한 힘은 농촌에서 나온다고보고 농민의 봉기를 통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한다. 반면에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당이 농촌에 침투하여 거점을 확보하고 이념적으로
확산되어가는데 반해, 농촌과 단절되며 부정부패와 투기 등으로 도시인들에게 조차 외면받고 있었다.
역사의 수많은 세월동안 전쟁과 폭력과 혼란 등으로 너무많은 피를 흘려온 중국인들인지라 통일중국의 과업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있었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공산정체성에 신념을 갖지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그간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가혹한 실정을 겪어보았지만, 그래도 무능한 국민당 정부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대다수
중국인들은 공산정권의 수립을 체념반 기대반으로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택동과 홍군의 대장정.출처:www.picturechina.com.cn
1950년. 공산당정부는 중국사회의 가장 뿌리깊은 조직인 가부장제도를 해체하고자 두가지 사회개발을 추진하여
기존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기존의 가정에 억메였던 여성의 지위를 혼인법 개정으로 해방하여 여성들도 경제활동에
참여함이고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고 집단농장체제를 도입하여 기존 씨족사회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
1951년. 공산정권은 그들이 염원하는 사회개혁을 위해 대대적 숙청에 들어간다. 종교인(특히 개신교인), 대지주, 지식인, 반혁명주의로 낙인된자들은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모욕과 수치와 함께 숙청되고 탄압을 받게된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이들을 공격하는 것을 방치해 주었다. 거의 모든 농촌마을에서 군중집회를 통해 과거 자신들을 핍박했던
지주 등 반혁명분자들을 끌어내어 수모를 주고 고문하고 자아비판을 통해 처형하였다.
1952년까지 이로인한 사망자수는 최고 2백만 명 이상에 달했다. 2000년이상 중국농촌사회를 지배해온 지주계급은
거의 소멸되고 농지는 몰수되고 다시 골고루 여성을 비롯한 농민들에게 얼마씩 나누어 주어 농민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급격한 변화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공산당은 선동과 폭력을 사주해 강제로 토지개혁을 마무리하고 도시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 나갔다. 공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위해 모든 사기업을 국유화 했고 농민들에게 분배했던 농지를 다시 걷어 들여 인민공사
집단농장에 흡수하면서 공산경제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쑨원(손문)
장제스(장개석)와 타이완(대만)
출처:cafe.daum.net
1957년. ‘백가쟁명’이라는 구호와 함께 마오쩌둥이 시도하는 공산사회를 위한 반우파운동이 일고, 그 다음해인 1958년. 대 약진운동이라는 중국사의 비극적인 사회운동이 일어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이 일어났다. 공산당정권은 그간 추구해온 경제성장을 더욱 증진코자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로의 노선전환을 강요한다. 그러나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급격한 농업집단화로의 강요, 마오쩌둥 사상강조를 위한 정치체제 그리고 지식인들의 억압 등의로 인해 복합적인 불만이 도사리고 숨어있었다.
이같은 시기에 소련에서는 스탈린 비판이 일어 스탈린 신화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마오쩌둥은 이를 직시하고 중국공산당의 부조리와 모순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방안을 찾기 시작한다.
백가쟁명운동은 공산체제 자체모순을 극복하고자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서 이 대중운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체제를
비판하고 이를 수정하고자한 대중운동이었는데, 결과는 예상 밖으로 공산체제 비판 즉,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여지껏 잠재되었던 억압된 불만이 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시위대와 공동작업.
출처:www.picturechina.com.cn. Naver Tistory.
예기치 않았던 비난과 체제 비판이 터져나오자 공산당국은 당황하여 이제는 노출된 불만자들에 단속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이제 이 운동을 반사회주의 독초인 주자파(극우주의자)라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기위한 반우파 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한다. 공산당국을 마음껏 비판하라는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을 벌여놓고 이제는 노출된 체제비판자들을 사회주의국가의 반역자로 취급하고 반우파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제 ‘만발한 꽃들’을 ‘해로운 잡초’로 규정함에 따라 공산체제를 비판했던 주자파들은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동료, 친지 하물며 부모형제를 고발하고 배신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5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고 농촌에서 경작하도록 추방되었다. 연이어, 마오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대약진운동은
수 년안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이를 위해 철 생산을 늘려 대영제국을 따라잡고,
농촌에서는 대규모 관개공사, 재식립사업 등을 계획적으로 실시하여 각 지방을 일종의 자급자족 지역로 만들고자
하였다. 약 5000가구를 모아 ‘인민공사’라는 노동집약적인 생산조직을 통해 모든 인민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공동 생활시설의 자급자족 체제로 배급, 혼인,이주 까지 관장하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자찬하는 공산주의
사회조직의 일환의 통제된 사회조직이었다.
10년도 안되어 공산정권 출현과 함께 농촌의 실상, 중국 사회의 모습은 완전히 변모해갔다. 이 운동은 현실에 맞지않는
실행할 수없는 목표 추구와 비효율성으로 인한 대기근과 굶주림으로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만들며 중국대륙을 황폐화
시킨 참담한 실패로 드러났다. 공업화를 위한 기술의 미비와 농업의 경시, 게다가 이상기후와 참새를 해충으로 박멸
하라는 해괴한 마오의 선동에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지면서 참새가 잡아먹던 실제해충의 창궐로 인한 인재로 인한
처참한 흉작으로, 1958년과 1961년에 걸쳐 중국전역을 휩쓴 대약진운동은 약 3천~5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홍위병 의 만행.
출처:www.picturechina.com.cn
전국에 인민공사가 설립되고 농민의 토지들은 모두다 이곳으로 흡수하여 공동취사, 공동작업, 식량배급을 지급하며 현실성 없는
과대목표를 설정하고 몰아쳤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은 중국대륙의
재난 중에 가장 처참한 인재(人災)였다.
식량부족은 도시에서도 심각했지만 농촌에서는 더욱 처참했는데 농촌대부분 사람들이 노동재교육현장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기근이 확산되자 마오쩌둥은 당원들에 대한 또 다른 숙청을 개시하여 600여만 명을 처단함으로써 반주자파운동을
무색할 지경이었다.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을 더욱 거세게 몰아부쳐 전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참극을 빚게된다.
문화대혁명은(1966년~1976년) 마오쩌둥에 의한 공산체제의 확립을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기위해 홍위병으로 알려진
학생, 젊은이 들을 동원해 공산혁명을 지속토록한 마오쩌둥의 교할한 선동운동으로서 중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반주자파운동이 미미한 파장이었다면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삶들의
목숨을 앗아간 끔직한 대지진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1962년 가을부터 중국공산당의 내분이 심해졌다. 일시적으로 용인되었던 자유주의 성향이
다시 문제시 된 것이다. 인민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아비판으로 처형되거나 농촌 각지로 뿔뿔히 보내졌다.
노년에 이른 마오쩌둥은 최고의 권력자 자리를 지키기위해 한번 더 자신이 구상한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문화대혁명의 준군사 학생집단인 ‘홍위병’은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에서 자본주의 사상에 젖은 지도층을 자아
비판을 통해 숙청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만해도 고위공직자. 교육계지도자, 저명한 학자
등이 하루아침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대중들 앞에서 우스꽝스런 뾰족모자를 쓰고 구타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끌려
다니며 린치를 당하는 광기가 전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산야를 지나 행군하는 홍군의 대장정.
출처
:www.picturechina.com.cn
중국대륙이 미쳐 날뛰는 홍위병들로 가히 내전 상태로 되어갔다. 이러한 사태가 이제 공산주의 체제자체를 위협하며 국제적 이미지 마져 훼손되어가고 있기에 군부실세 린뱌오(林彪)와 저우안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에게 홍위병 사태의 우려와 심각성을 알리고 해산을 촉구하게 된다. 1967년. 8월. 마오는 마침내 극좌파들의 행동을 막으라며 이제 홍위병들 상호간 유혈충돌로 미쳐 날뛰는 홍위병 해산명령을 하게된다.
1966년. 여름부터 사태는 급진전되며 고교생 홍위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재교육을 받고 대학생 및 성인인 홍위병들은
산업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라는 명을 받는다. 군부실력자 린뱌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홍위병들을 오지(奧地)로 유배
시키는 해산작전을 하며 그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로서 한세대를 통해 중국역사 이래로 가장 치욕적인
모습을 남기고 홍위병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홍위병들은 해체되었으나 마오의 정치일정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劉少奇)는 실각하여 감옥에서 사망하고 전직 간부들 또한 군부 실세 린뱌오가 관리하는
인민해방군 소속 5.7 간부학교에서 엄격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세월에는
장수가 없다던가.. 대륙을 호령하던 마오는 병세가 악화되어 후계자 싸움에 불이 붙었다. 드러내놓고 마오의
2 인자로 자칭하던 군부 실세 린뱌오(林彪)는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정치적대립에서 마오는 저우언라이의 손을 들어준다. 1971년 9월13일 몽골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짧막한 기사로 그의 실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린뱌오의 죽움으로 군인들의 악명높았던 몇 달간의 통치는 중국공산주의 체제아래에서 가장 어두웠던 나날이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문화대혁명의 그늘의 종지부를 찍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선다.
주은래 와 등소평
모택동(중앙)과 주은래(좌).
출처:www.picturechina.com.cn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고 숙청당해 농촌이나 5.7 간부학교에 끌려가 재교육을 받았던 옛 각료들이 정계로 돌아왔다. 실각했던 덩샤오핑(鄧小平)도 정계로 돌아왔는데 그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난동으로 장남 덩주팡이 창문에서 내던저져 평생 불구자가 되었었다. 1973년. 4월. 덩샤오핑(鄧小平)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신임을 얻어 부총리에오른다. 지방 주요지도층 인사로서는 쟈오쯔양이 복권되었는데 그는 광동성에서 덩샤오핑을 피신시켜주었는데 그 또한 비판받고 숙청되었다. 이제 군 출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통해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4인방이 이끄는 극좌파는 마오쩌등의 묵인으로 아직 물러나지않고 도처에서 져우언라이 진영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오쩌등의 병세가 날로 깊어 갔다. 그는 아직 까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극좌파에게도 귀를
기울이며, 침착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반 평생 동지인 져우언라이(周恩來)를 신임하고 의지하게 된다.
1972년 리쳐드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국대륙을 방문한 해. 져우언라이는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고 극좌파의 마지막 도전을 뿌리치고 덩샤오핑에 권력을 이양하려고 한다. 해가 바뀌자 마오의 위독설과 함께 져우언라이 위독설이
흘러 나왔다. 1975년 개최된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大)에서는 아직까지 중앙정치무대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화귀펑(華國鋒:화국봉)을 공안부장으로 발탁한다.
훈련중인 여성 홍위병.
출처:www.picturechina.com.cn
1976년.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이어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중국공산주의 두
거성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화귀펑에게 정권이 이양된다. 중국인민은 덩샤오핑(鄧小平)이 후임총리가 되기를 바랐으나 극좌파의 반대로 마오는
중앙정계에 신인이지만 유순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화귀펑(華國鋒)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화귀펑은 극좌파의 성화에
못이겨 鄧小平을 중앙정계에서 퇴출하게 한다.그러나 중국인민들은 극좌파의 복귀를 반대하고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는
鄧小平의 정계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1976년 9월9일 늦여름이 지나가는 문턱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중국전역의 스피커에서 무거운 가락이
울려 퍼지면서 마오쩌둥주석의 사망을 알리고있었다.중국대륙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겼다.
수십 년간 마오쩌둥(毛澤東)주의와 그 폐단으로 중국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를 유추해보면 제3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마오를 바라보는 열광적인 숭배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아버지 마오(毛澤東)가 사망한 1976년 당시에는 중국대륙은 외부세계와는 거의 단절된 체 30여년
가까이 마오 숭배의 선전공작에 익숙해져 마오주석의 비판이란 것은 가히 엄두도 낼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없는
금기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상을 초월한 마오에 대한 숭배가 세대를 넘어 지속되어 왔기에 체재를 단속하고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현재 해외의 마오 추종자들 이었던 사람들은 현실에 눈을 떴기 때문에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체제유지를
위한 검열을 거친 언론과 정보에 접하는 대다수 중국인들은 지금까지도 마오의 신화에 젖어있다.
모택동과 공산혁명동지들
중국인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마오는 되찾은 민족의 자부심과 자력갱생의 상징으로 각인되며 역대 중국왕조의 시조들처럼 신격화되어 아직까지 숭배와 경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것이다.
오늘 날 기록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추구한 정치적 실험에 희생된 사람들이 6천여 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은 한세대를 짓밟아 버리고 사람의 가치를 유린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15년 뒤로 끌어들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사망이후 중국은 극좌파의 공포의 정치체제가 다시금 들어설까 두려워하며
불안에 휩 쌓여 가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자취.출처: cafe.daum.net
마오의 공식 후계자인 화귀펑(華國鋒)은 마오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7일 한밤중 4인방 (강청,왕홍문,장춘교,요문원)과
그의 측근들을 전격 체포한다. 그는 권력의 공백기간에 먼저 선수를 치며 정적을 제거하며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실력자가 된 것이다. 1976년 4월 이후 중앙정치무대에서 떠나있던 덩샤오핑은 이사태에 동요하지 않았지만
민중들은 그가 져우언라이(周恩來)를 계승해야 한다고 믿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져우언라이가 생애 말년에 덩샤오핑과 함께 문화대혁명의 혼란 중에서 중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민중들에 희망의 불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치판은 덩샤오핑(鄧小平)과 마오의 부인이며 극좌파 4인방 장청의 싸움이었고 마오의공식 후계자인
화귀펑(華國鋒)이 중재하는 모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덩샤오핑은 혁명가로서나 군인의로서나 경력면과 능력면에서
인정받아왔지만 화귀펑은 1970년 초에서나 중앙정치무대에 들어선 새로운 인물이었다.
남 여 홍위병.출처:www.picturechina.com.cn .cafe.daum.net
또한 덩샤오핑은
대장정의 현장에 있었고 대일항쟁에 공을 세우는 등 공산정권 수립과 함께했다.
중국인민들은 극좌파 공산체제 골수분자들의 치정에 눈을 돌리며 경제적 실용주의를 도입하여 생활수준을 높여주고
제한적 자유이지만 희망의 불빛을 열어주고자 한 치적들..
1970년대에는 져우언라이와 힘을 합쳐 합리적 정책으로 인민들을 잘살게 하고자 노력한점..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민들과 함께 시련과 고초를 당하며 실각한 불운의 정치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권을 쥔 화귀펑은 63세의 이 왜소한 노인 덩샤오핑과의 힘겨루기를 하며 차츰 정적들을 제거하며 정국을 이끌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던 덩샤오핑과의 대립에서 밀리면서 덩샤오핑과 타협하고 그를 복권시킨다. 중앙정치무대로 돌아온
작은거인 덩샤오핑은 20C가 다가기전에 중국을 세계 최고의 사회주의 경제대국을 이루고자 중국현대화를 선언한다.
숙청되었던 옛 인물들이 속속 정계에 복귀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에 희생당한 옛 간부지도자들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청년단
총서기 출신인 호요방(胡耀邦:후야오방)의 도움을 받아가며 당에 입지를 강화하고 세력을 넓혀나간다. 중국을 이끌어
가는 두지도자 화귀펑과 덩샤오핑의 현대화 계획은 달랐다. 특히 농업분야에서 화귀펑은 인민공사의 자급자족 성취를
통해 경제적 부흥이라는 옛 방식을 추구했고, 반면에 덩샤오핑은 보다 실용적 방향 즉 농민들에게 좀더 자율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입장이었다. 규제와 자율이라는 정책의 차이. 이로써 승패는 갈라졌다. 민중의 지지와 복권된 당내 세력에
힘입어 덩샤오핑은 명실상부한 중국대륙을 이끌어갈 권력의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호요방
경제특구를 시찰하는 등소평 .
출처: cafe.daum.net
중국공산주의 1세대인 마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중국인들은 지나온 암울했던 시대로의 회귀를 바라지 않고
이제는 잘살아보겠다는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그들의 희망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덩샤오핑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이 1960년대 실시하고자했던 중국사회주의 입각한 자유주의적
개방 농업정책을 채택한다.
20여 년간 지속되어온 집단농장제를 폐지하고 개별농가에 경작권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소규모로나마 자유경작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한 농업개혁이 아니라 이념과 사고(思考)의 획기적 변환이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기위해 맺어야했던 정치적 동맹 특히 체제 내 극력 보수파 및
군부와의 동맹 때문에 권좌에 오른 처음 10년 간은 개방과 개혁의 물결은 더디었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권력게임에서
중재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야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던
공산사회주의의 추종자였다. 그는 낙후된 조국을 현대화하기위한 자본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개방경제체제는
추구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제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04년 쓰촨성에서 태어났다.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여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 시대 혈기의 젊은이들처럼 당연히 민족주의에 의한 애국심이 깊어간 덩샤오핑은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르노자동차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면서 인종차별을 눈으로 보고 느끼며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고 프랑스공산당
창당을 지켜보며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양자강 상류와 석벽.출처:cafe.daum.net
그는 서구열강으로 부터 침략받고 고통받는 조국 중국근대화를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게된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의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여 중국공산당 게릴라에 합류한다. 대장정의 고난의 여정에도 참여했고
경력을 쌓아가며 고향인 중국남서부 지역에서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거듭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1954년 鄧은 부총리가 되며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체제 내 서열 6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 추종자 이였기 때문에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지지하였고
대약진운동과 소련과의 결별 로선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鄧은 그당시 당내 공산주의지도부가 보는 시각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있었다. 그간의 정치실험에 대한 부정적결과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가 행한 너무 많은 시행착오적인 과오를 알고 더 이상 답습하고 싶지않었던 것이다.
1961년부터 鄧은 농가에 자율권을 부여한 경작권을 되돌려 주려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때에는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해 그 자신도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수차례 경질과 실각 끝에 1973년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져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정계에 복귀된다. 鄧은 체제내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 1976년 1월 자신을 믿고 밀어주던
져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다시한번 정계에서 밀려나 그해 7월에야 겨우 정계에 돌아온다.
세 번의 숙청과 세 번의 복권이라는 정치일정에서 오뚜기라고까지 불리어지며 鄧은 실용주의를 배우게된다. 그는
이제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되 마오처럼 위험한 정치적 실험의 장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굳게 믿게 된다.
즉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되 대륙 중국의 특성에 맞는 개방적 요소가 가미된 경제발전 모델을 추구하게된다.
올림픽준비로 정돈된 강변의 야경.출처 : cafe.daum.net
1980년대에 들어서며 이러한 鄧의 실용주의 경제정책에 인민들은 나아진 생활환경을 피부로 느끼며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려왔던 개혁 개방정책을 구현하게 된다.이제 75세의 노정객으로서 중국천하를 다스리게된
덩샤오핑은 자신이 그간 꿈꾸어왔던 개혁, 개방 정책의 결실을 보기에는 남은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전 수상의 유지를 받들어 4대 현대화도 이루고 싶었으나 도처에 너무 많은 걸림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화귀펑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고 최후의 저항을 하였고 鄧은 이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했다. 1980년 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대회에서 5척 단신의 작은 거인 鄧은 정적 화귀펑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쟈오쯔양(조자양:趙紫陽)과 후야오방(호요방:胡耀邦)을 체제 수뇌부라 할 수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훤칠한 키에 인품좋은 쟈오쯔양은 1919년 허난성의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20세 무렵 공산당에
들어가 광동성과 쓰촨성에서 정치적 경력을 쌓는다.그는 특히 농업분야에서 생산과 소비에 조금의 자율성을 부여한
약간의 자유주의를 도입하여 농민의 생산성동기부여에 힘입어 이곳에서 생산성 증대를 통한 농민경제를 일으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율성을 가미한 이러한 정치성향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고초를 겪다가 1975년 鄧의 도움으로
복권된 뒤에 쓰촨성에서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자오쯔양과 후진타오
극좌파 세력에 떠밀려 중앙정치무대에서 쫒겨나 고향에 와있던 鄧은
이러한 자오쯔양의 열의를 눈여겨 보았고 복권되어
1977년 베이징으로 돌아가면서 그를 중앙정치무대로 불러 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쟈오쯔양은 鄧의 후원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화귀펑은
이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지다가 1982년 9월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고 후임총리에 자오쯔양이 오르게 된다. 후진타오와 시진핑 출처:cafe.daum.net
鄧의 로선을 따르는 개혁의 두 번째 주자인 후야오방은 애소한 몸매에 눈빛이 매우 매서운 인상의 인물로써 1915년
태어나 14세에 공산 게릴라에 합류한다. 농촌봉기에 앞장섰으며 대장정에도 참가하고 1949년 공산체제가 들어서자
공산주의 청년단에서 활동하게 된다. 문화혁명 때에는 숙청당했다가 1972년 정계복귀하고 저우언라이 노선을 따른다.
후야오방은 교육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회과학원을 현대화하는데 힘썼고 대학 부총장을 지내기로 했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당서기로 임명했고 1981년에는 화귀펑 대신 총서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쟈오쯔양과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후계자로써 서로 경쟁관계였지만 힘을 합쳐 개혁을 추진하였다. 쟈오쯔양이 경제
분야에 주력했다면 후야오방은 정치 및 이념 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鄧의 두 후계자는 보수파의 견제와 압박에
10년을 못 채우고 실각 당한다.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학생운동이 일기 시작할 때부터 권력에서 소위되기 시작한다.
자오쯔양은 1988년 리펑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지다가 1989년 텐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하게 된다. 그는 2005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중 사망한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행사 출처:cafe.daum.net
폴 메카트니(헤이주드)와 중궁전통음악 (우)공연
덩샤오핑은 개방, 개혁의 10여년 간 극좌보수파와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치게 된다. 鄧의 농업부문의 현대화
작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