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의 침묵--위화도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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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0.

 

비단길/황병기(가야금),김정수(장구)--Youtube

 

 

위화도(威化島)의 밤            

 

 

 백두태산 준령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이 천리 산 자락과 들 녁을 돌고돌아

드넓은 폭을 드러내고 넘실되며 흘러가고 있다. 황토 빛으로 일렁이는

강물을 짖누룰 듯 짙게 드리운 뭉실뭉실한 회젖 빛 구름 자락은 잔뜩 찌뿌린

비구름을 바람에 실스쳐가며 또 다시 장대같은 물줄기를 강물에 쏟아 부으려 한다.

 

억수같이 내려붓는 초여름 장마 비에 압록강물은 불어 무서운 기세로 바닷길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위화도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기세를 더해 가고있는 의주와 신의주 사이에 조그마한 하중도(河中島:강안에 섬)위화도(威化島)는 평북 의주군 위화면 압록강 하구에 떠있는 면적 11.2㎢(여의도 면적 7㎢)로 개경(개성)에서 일천 리 떨어져 있는 국경의 섬이다. 굵은 빗줄기에 불어나 도도히 넘쳐 흘러가는 강 언덕에 서서 정벌군 장군 李成桂 (이성계)는 수심에 찬 심정으로 거품을 토해내는 격류너머 드넓은 대륙을 바라보고있다.

 


개경을 떠난지가 벌써 10여 일이나 지나갔다. 이 손 바닥만한 벌판에서 5만 여 대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
걸어놓은 휘장과  빽빽이 들어차있는 장막을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각양각색의 깃발과 어중청한 군막자락이

펄떡거리고 오가는 말발굽 소리에 진영은 어수선하다.

때는 1393년 5월,

 

明나라를 치기위한 고려군의 정예대군은 불어난 강물에 갇혀 대륙으로 가는 길목인 국경의 섬

위화도에서 한 치의 앞도 나가지 못하고 여러 나날 머물고 있는 것이다.

진군이냐 ?  회군이냐 !
평생을 거친 전장 터에서 살아온 동북면(함경도) 출신 무사 이성계는

삶과 죽음의 岐路(기로)에 서서 고뇌하고 있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장마철에 불어난 강물을 건너 진군하자니 신흥대국 明과의 승산없는 싸움이요,
그렇다고 회군하자니 왕명의 거역인 반역이니..
자신의 인생 절대절명의 순간이며, 한 국가의 역사가 뒤틀어질 선택의
기로에 서서 대장군의 결의는 점차 한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한다.

 

 

   

요동정벌군과 위화도 회군로

 

 

 때는 14C 중엽. 대륙을 호령하던 元나라는 중국 화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세력이 강성해지며 명의 건국과 함께 점차 국력이

약해져가고 있었다. 당시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에 이어 원나라의 침략으로 100여 년간 元의 지배에 놓여 있었는데, 1341년, 왕족인 공민왕은 당시 관례에 따라 12세 부터 볼모로서 元나라 연경에서

생활하다 돌아와 1351년, 고려 제 31대 왕(23세)으로 봉해졌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背元(배원)정책을 추구하며 권문세족을 억누르고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숙위라는 명목 아래 원나라에 끌려가 10년 동안 머므르면서 약소국의 왕자로서 수모와 고려인들의 나약한 처지를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는 反元(반원)의식이 싹트였고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의 국력을 

갈아먹는 권문세족의 타파를 통한 개혁 정책에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볼모생활을 통해 공민왕은 元나라의 몰락을 예견하였다. 무신정권 이후 무력해진 왕권을 되찾고자 최우 정권 이후

인사권을 행사해온 정방을 해체하고 일부 권신들의 권력독점을 막고자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자 한다.

공민왕 5년(1356)에는 몽골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元의 내정간섭기관인 정동행중서성이문서도 철폐한다.

해 공민왕은 대표적인 권문세족 일파인 기철, 권겸, 노책 일당을 숙청하였다.

 

                              원 제국의 전성기

                                           원은 고려의 내정 간섭은 물론 금,은,베,인삼,약제,말 등 특산물과,

                                                              공녀 등을 요구해 고려국력을 소진시켰다.                                               

        

 

기철은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정승에 임명된 뒤

덕성 부원군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들 일파는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자행하였으며 공민왕에게도 신이라 칭하지않는 등 불충을 범하다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입지도

약화되자 일족과 친당을 요직에 앉히고 역모를 도모하였다.

 

권겸은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치고 원나라 태부감 태감이 되어 기철과 권세를 다투다가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입지가 약화되자 역모를 꾀했고 , 평양공 왕현의 딸 경년옹주에게 장가들어 세도가가 된 노책 또한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치고 집현전 학사가 되어 권세를 누리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역모를 꾀했던 것이다.

 

이들의 역모계획을 사전에 간파한 공민왕은 연예를 베푼다는 명분 하에 홍의를 시켜 기철, 권겸, 노책의 일족들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알리없는 기철과 권겸이 먼저 의젖히 입궐하고 노책 부자는 아직 입궐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경천응은 공민왕에게 알리자 왕은 즉시 무장한 장사들을 시켜 연예에 참석한 기철과 권겸을 주살토록

하였다. 기철은 철퇴를 맞아 그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즉사하고 권겸은 도망치다 붙잡혀 참살되었으며,

노책은 집에 있다가 붙잡혀 죽었다.

 

기철 일파를 숙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또한

왕은 인당, 최영 등에게 군사를 주어 기철일파의 근거지였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함주, 북청 등지의

러 성을 공략하며,서북면(평안도)과 동북면(함경도) 일대의 옛 영토를 회복한다.

실로 元의 지배에서 100여년 만에 故土(고토)의 회복인 것이다. 

 

             

 

                                                    요동정벌로                     상공에서 본 현재의 위화도  

 

 

 중국대륙은 元나라가 홍건족의 일파였던 한족 주원장이 세운(1368년) 明의 발호로 점차 쇄락해가고,

고려 역시 정치의 불안정과 여진 등 북방 이민족과 남쪽연안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당시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나라가 어수선 한 가운데 각 종 민난사건 (조일신의 임진정변, 기철의 역모사건,

김용의 난, 최유의 난)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난의 진압 과정에서 최영과 오인택 등은 승승장구하며 정권을 장악하게되고, 북방의 홍건적을 물리치고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진압하는 등 여러전투에서 승리하며 큰공을 세운 이성계는 점차

고려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공민왕(恭愍王)의 개혁과 비참한 죽음

 

 1365년 2월, 만삭의 왕비 魯國大長公主(노국대장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는 사건은 계속되어온 전란과 민족성

회복을 위한 개혁정책을 통해 지친 공민왕을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서른 다섯살의 홀아비 젊은 임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오십이 넘은 辛旽(신돈:왕사편조)이란 승려가 당파에 물들지 않고, 사리사욕이 없으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점을  존중하여, 王師(왕사)로 모셔와 정권을 일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고자

佛事(불사)에만 전념하게 된 것이다.

 

 

공민왕은 비대하고 부패가 만연한 權門勢族 (권문세족:고려 말의 지배계층으로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성장한 귀족계층

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조선의 양반사대부와 유사한 당대의 귀족 계급) 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생경제를

활성화 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초기개혁에는 당대 지조있는 최고지식인 李齊賢 (이제현:익제난고,역옹패설

저자)을 통해 추구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는  신돈을 적임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신돈을 통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일련의 개혁작업(노비,토지개혁 등)을 주도하게하나 경제적 이익을 침해당한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사게되고, 또한 세력이 확대된 신돈은 왕권을 능가하는 전권을 누리다

역모고변 으로 1371년 처형당한다.(신돈- 집권 6년)

 

공민왕은 이후 예전과 다르게 변해가며 노국공주 생각에 집착하여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며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귀족들의 자제로 구성된 자제위를 통해 음행을 즐기면서 자제위의 홍륜, 김흥경과의 적절치 못한

행위로 몸과 마음이 혼탁되어갔다. 1374년 9월 내시 최만생으로 부터 공민왕의 익비 한씨가 잉태한 소식을 듣고

내시 최만생에게 익비와 잔 홍륜과 그들의 무리의 죽임을 암시하자, 이를 알아채고 침전에 침입한 홍륜과 최만생

무리에게 만취상태에서 잠자다  참 !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다.(즉위23년,45세)

공민왕을 암살한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그 다음날 내시 이강달과

당시 권문세족인 실권자 경복흥, 이인임 등에 의해 목이 잘려나갔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우왕의 등극

 

문제의 발단은 이제부터였다. 한 나라의 왕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공석이 되었으니 그 혼란은 어찌 하였겠는가  ..
신돈은 생전에 왕비인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여종 반야로 하여금 왕을 모시게하여 

얼마 후 그녀는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신돈은 그의 친구 승려 능우의 모친에게 반야를 맡겨 그녀의 집에서
반야는 출산하게 되고 궁궐에서는 동지밀직 김횡이 보낸 여종 김장이 유모로서 돌보게 된다.

1371년 신돈이 역모 죄로 처형되자 공민왕은 자신의 아들이 있었음을 대신들에게 밝히고 반야의 아들

[아명:모니노,이름:우(禑)]을 궁궐로 데려와 공민왕의 장자로서 강녕대군에 봉한다.(7살)

 

공민왕은 당시 시중인 李仁任(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가까이 했더니 아들을 얻었다.”면서

禑(우)를 지켜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생모인 반야가 비천한 여종의 신분인지라 禑의 생모를 사망한 궁인

한씨라 하고 禑는 공민왕의 모친인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겨진다. 친모 반야는 禑王 2년 자신이 왕의 생모라

발설하며 다니다 이인임에 의해 죽임을 당해 임진강에 수장된다.

     

공민왕의 비명에 간 급작스런 죽음으로 다음 왕을 세우기 위해 암중모색 하던 고려 말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정치생명에 직결된 문제인지라 불꽃튀는 이땅에 있는 모든 권모술수가 일고 있었다.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明德太后) 홍(洪)씨는

 

신돈의 후광으로 성장한 훈구세력의 실권자인 이인임이 禑(우)를 후계자로 세우자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경복흥(慶復興)과 함께 종친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기를 원했다 한다.  그리하여 판삼사사 이수산은 종친에

맡길 것을 주장하고,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은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 것을 주장하니 , 이러한 양대세력의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 속에 마침내, 고명을 받은 이인임의 뜻에 따라 禑를 고려 제32대 국왕으로 옹립하게된다.(10살)

이로인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이인임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인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최영도 정계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최영장군 

 

 

                

 한 마리의 준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내려치는 채찍을 맞으며 빗속을 뚫고 달려와 깃발이 나부끼는

군막이 즐비한 진영에 도착해 이성계장군이 머무는 군막 속으로 사라져갔다.  조정에서 급파된 환관 김완은

위엄있는 자태로 왕의 명령을 전달한다. 진군을 독촉하는 왕의 친서였다.

 

군막 밖에는 그렇게 내려붓던 빗발도 수그러 잦아들며 서쪽 먼 하늘에서 기우는 햇살의 여운이 강물에 드리워져

엷은 저녁놀로 물들이면서 땅거미가 몰려와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강물에 걸쳐놓은 뱃전에 부딪혀 출렁거리는 강물소리는 역사의 기로에 선 선택의 엄중한 시간의 흐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썩거리고만 있었다........  
 

 

 

 

당시 고려 말 정세는,
공민왕의 사후 李仁任(이인임)의 보필을 받은 禑王(우왕)이 즉위하자 조정은 이인임, 廉興邦 (염흥방),

林堅味(임견미) 등 權門勢族 (권문세족)의 수중으로 들어가 권력을 쥔 그들에 의해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元과의 관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려온 그들인지라 당연한 결과인지 몰라도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공염불이 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들며 고려는 다시금 시대에 역행하며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이듬해 초 北元의 사자가 고려에 오자 임견미 등 친원파 훈구대신들은 평소 親明을 표하며 反元정책을 표방하던

정도전에게 영접을 명하나, 정도전은 과감히 그 명을 거절하고 귀양길에 오른다. 이에 친명정책을 추구하는 신진

사대부들인 김구용, 이승인, 권근 등이 친원정책에 대해 탄핵을 하자, 崔瑩(최영)은 지윤 등과 합세하여 이인임

일파의 편에 서서 김구용, 이승인 등을 유배보내고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원의 추출과 공민왕의 북방영토 수복

 

 

1375년, 최영은 판삼사가 되었고 1380년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해도 도통사에 올랐으나 와병으로 인해 개경으로

돌아와 요양한다. 그 후 조정에 복귀하여 수시중에 임명되고 정계 중책을 맡게 된다. 1384년, 드디어 재상 직인

영삼사에 이어 문하시중(종1품, 중서문하성 수상)의 자리에 오른다. 최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禑王의 뜻에 호응하며, 

 

그동안 이인임과  함께 고려 말 정권을 주물럭거리던 염흥방, 임견미 등 훈구세력을 숙청하여 권력의 중앙에 서게된

것이다. 당시 이인임은 노환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기에 경원부로 정배되었는데 최영의 배려로 풀려나게 된다.    

 

 

이무렵 대륙의 강자로 떠오른 明은 고려의 철령(함남 안번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의 고개) 이북 땅은 元이 지배한 곳으로

자신들의 영토인 요동부에 귀속시키겠다는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하였기에 明과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마침내 明은 요동부에서 관리를 보내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공민왕이 수복한 고토를 놓고 강경론(명분론:친원파-최영)과 신중론(현실론:친명파-이성계)와의 두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어가고 있었다.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론에 대해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는 이유로 4 不可論(불가론)을 제시했다.

 

첫째,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킴은 옳지않다.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된다.
넷째, 장마철이라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

 

이러한 4 불가론은,어찌보면 현실적이고 수긍이 가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하겠다.
여름철에 불어난 강물을 건너 당시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明과의 전쟁은 그것도 선제 공격으로..  지형을 이용한

수비형의 방어전술로 강성했던 고구려의 대국 수·당과의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 요동정벌은 승산이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였으며 당연히 무리한 희생으로 닥쳐올 재앙을 피하고자한 전쟁반대론은

당연한 것 이였는지도 모른다.

 

 

          부교를 놓아 도하하려는 정벌군

 

 

 

 

문제는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땅을 가만히 앉아서 넘겨주자는 데에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친명파들도 내놓고

주장하지를 못하였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라의 역적으로 매도될 것은 뻔하였기에 대신,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고 말할 뿐 이였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어렵게 찾은 국토를 내주자는 말이냐?” 따지면 친명파들은

“明의 천자가 정말로 욕심 낼리는 없다며

고려를 길들이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며 외교술을 발휘해 이 난관을 해쳐나면 될 것“이라고 항변했다.
 
禑王시대 明은 더욱 강성해져 대륙의 북쪽과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북쪽 변방으로 쫒겨난 北元은

쇠약해져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들도 明과의 조공 등을 통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무진정변

 

 1388년(우왕 14년)부터 1392년 까지 4년간은 고려 역사에서 가장 혼돈스럽고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변환의 시대였다. 그것은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14년 간 국정을 농단한 훈구 친원파

이인임의 실각과 임견미, 염흥방의 죽음 때문 이였다. 1387년(우왕 13년) 8월,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났다.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준 이인임 일파의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그 간 그들의 세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禑王(우왕)은 이제 왕권 확립의 기회로 삼고 조정에 그의 외척들을 대거 중용하고 부패한 관리 김봉, 김중기 등을

본보기로 처형하는 한편 무장세력으로 군신간의 신망이 높은 최영,이성계와 손잡고 일대 쇄신을 도모한 것이다.

 

우왕은 노비와 땅을 부당히 갈취하여 민폐를 끼친 자들을 엄단하고 솔선수범하지만 기득권 신료들은 끄덕하지

않았다. 한번 해보려면 해보라는 식이였다. 나약한 왕이 겪는 수모요 슬픈 현실이었다.  최영마저 방관하는

식 이였다. 그러나 철썩같은 돌부처 최영이 펄쩍 뛸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 말 권신들과 그들의 家奴(가노)들의

전횡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권신들은 큰 물인 중앙에서, 그들의 가노들은 지방에서 민생들에 피해를 주고 있었다.

 

 

고려시대 사회계층 과 고려 영토

 

白州 (백주)에서 살고있던 전 밀직부사 조방은 염흥방의 가노 이관에게 땅을 빼앗겨 염흥방을 찾아가 부당함을

호소하고 땅을 돌려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관이 다시 무력으로 다시 그 땅을 빼앗자 조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인들을 데리고이관을 쳐 죽이고 집을 불살라 버렸다. 그 소식에 접한 염흥방은 괘심 죄를 적용 왕명을

 

구실로 조방과 그의 가솔들을 반역죄로 엮어 심한 국문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염흥방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치 못했다. 하지만 이인임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1385년(우왕14년) 1월5일, 우왕과 연합한 최영은 염흥방을 순군옥에 가두고 이어 임견미와 도길부까지 체포한다.

우왕은 권신들의 반격에 대비해 이성계에게 안전을 위해 숙위에 명했다. 그때부터 최영의 친위 쿠테타는

신속하고 잔인했다. 

1월10일부터 18일 까지 이성림과 박일순 등 염흥방과 임견미 추종세력 50여 명을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고

안무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1,000 여명에 이르는 잔당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가족은 물론 갓난아기 까지 가리지 않았다.

죄인에게는 어떤 정상도 참작하지 않는다는 최영의 원칙주의가 빚은 비극이었다. 국사에는 어떠한

사사로운 정리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승자와 패자

                                                                                   

 


공민왕 이래 정사를 농단해온 권신들을 일거에 처단한 무진정변을 통해
최영은 일약 권력의 최고봉에 올랐다. 정변이후 禑王은 최영의 庶女(서녀)를

寧妃 (영비)로 맞아 안전세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생전에 왕실교육을 시켜주던

공민왕의 모친 明德太后(명덕태후)가 승하하자

점차 끈 풀린 연처럼 음주 가무에 물들기 시작한다.

 

조정에는 최영 휘하의 문달한, 송관미, 안노, 안현부 등을 위시해 이색, 성석린 등 성리학자들을 두루 기용해 전국에

찰방을 파견하고 권신들에게 빼앗겼던 토지들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각도에 안무사를 파견해 권신들이 축재한 가산과

노비들을 정리하였다. 무진정변을 계기로 이성계는 정계의 중앙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되나
아직은 그는 최영의 명망이나 영향력에 견줄 수 없었고, 다만 최영은 그를
뛰어난 장수로서 보았을 뿐  그의 동반자격으로 보지는 않았다.

 

 

전쟁 전야

 

14 C 말 동북아 정세는 폭풍 그 자체였다. 대륙의 주인은 한족인 주원장에 의해 明으로 바뀌면서 힘을 잃은 元은

들의 고향인 북쪽으로 쫒겨갔다. 오랫동안 元의 치하에서 시달려온 고려는 이제는 북방의 신흥강대국 明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明나라가 공민왕이 수복하였던 북녘 땅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한 때가 이즈음 이였다. 평생 전쟁터에서 엄격하고

단호한 태도를 견지한 최영은 우왕과 뜻을 같이해 明과의 일전불사를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신흥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明에 대한 선제공격의 전쟁 행위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를 바 없는 선택이었다.

禑王입장에서 보면 요동정벌은 당시 그를 압박하던 군사지도자들이 전쟁에 나가야하고 이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권력자들의 병력인 사병을 혁파 할 수 있고, 자신을 암묵적으로 신돈의 아들이라 모략하는 친명파들을 우려하며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공민왕의 북방영토 수복과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1995년도 고교역사부도)

 

 

자신의 장인으로 묶어둔 최영이 적극적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있으니, 자신은 어쩌면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압박해오는 친명파들을 침묵시키는데 이보다 더 확고한 방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최영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으로서 엄격하고 단호하고 청렴한 태도를 견지한 武人(무인) 이였다.
엄한 군율과 솔선수범하는 범 같은 최영 휘하 병사들은 싸움터에서 죽기살기로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의 협상과 설득 면에서는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죄지은 자들은

인정사정없이 목을 베었으며,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이러한 단호한 처단에 일반 백성들은 공감하며 환호했지만,

정치판에서는 그를 꺼려했다. 이는 禑王을 대신해 최영이 온갖 악역을 떠맡게되는 양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요동정벌도 이런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륙의 중원을 석권한 명은 그 여세를 몰아 그 다음으로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 1387년(우왕3년)에는 그동안

명과 고려의 완충역할을 하던 원나라의 요동 실력자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고 만다. 그 다음 해는 명은 고려의

사신을 억류하며 사절단 파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동지역의 고려의 정보망에 明의 군사작전에 대한 기미가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明은 고려에 단교를 통보해온 것이다.

 

 

 

                  무장한 기병들(원나라 군-상,고려 군-하)                                                                              

 

 

이러한 북방 정세의 변화에 대비해 禑王과 최영은 군량미를 비축하고 성곽을 수축하고 병력동원과 훈련을 통해

이에 대비코자 하였다. 그해 5월 明은 철령 이북의 개원로 지역을 자산의 영토에 귀속 시킨다고 선언하게된다.
고려 중신들은 明의 이러한 조치에 울분을 토하면서도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보다 외교적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강경한 자세로 明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방향을 굳히고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이자송을
임견미의 도당이라는 죄명으로 처형해 버린다

 

명의 철령위 설치가 본격화되자 우왕은 전국에 징집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도 원의 관복을 원의 관복을 착용

케하는 등 전투준비를 하게된다. 3월21일 우왕은 최영을 대동하고 서해도 순시에 나서 4월21일 개경과 서경

(평양)중간 지점에 위치한 봉주에 도착한 다음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물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4不可論은 통해 전장에서 살아온 무장으로서전술적인 의견을 개진하며 가을

까지 출병을 연기해달라고 간청했다. 먼 타국의 원정에서의 보급문제 등  제반여건의 선행이 출병이전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禑王을 등에 업은 최영은 처형된 이자성을 들먹이며 이성계를 압박했다.

더 이상의 반론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출병과 회군

 

요동정벌군은 좌우군 모두 5만여 명으로,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 그리고 최영을 팔도도통사이며

총사령관으로 짜여졌다. 이성계는 병력을 서경(평양)에 머물게하고, 장마철을 피해 군량미 조달이 용이한 가을철에

출병을 건의하나 우왕과 최영은 단호히 거절한다.

 

1388년 4월9일, 드디어 요동정벌군이 서경(평양)을 출발했다. 고려의 요동정벌군은 이성계의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더디게 진군해 5월7일이 되어서야 압록강 하안 어구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요동정벌군이 압록강 하구인 위화도에 도착한 것은 1388년 (우왕14)  5월13일 이었다. 이른 장마철에 연일 폭우가 쏟아졌다. 

불어난 강물은 그렇지 않아도 비좁아 터진 섬 자락을 집어 삼킬 듯 넘실거리며 올라왔다.

 

주둔한지 십여 일이 지나가고 축축한 습한 환경에 환자가 늘어나며 도망병이 속출했다. 명분도 그렇고 확고부동한

싸울 의지에서 솟아나는 용맹도 없는 암울한 기운이 깔리고 있었다.  

요동정벌군이 위화도에 상륙해 渡江(도강)준비를 하는데 이 지역에 폭우가 내려붓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계는 일주일간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조정에 회군을 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회군의 이유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과 4 不可論이 요지였다. 그러나 禑王은 환관 김완을 보내 渡江(도강)하여 요동으로의 진군을 재촉했다.

 

 

 

 

 

진군이냐 ?    회군이냐 !

이제는 어떠할 수없이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장수이자 한 인간인 이성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위화도에 주둔한 고려군은 약 5만여 명의 고려군 주력군으로 선봉인 좌군은 조민수가 우군은 이성계,

좌우군 총지휘자는 최영이였지만 최영은 직접 전투병력을 인솔하지 못하고 후방인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원거리에서 전투지휘를 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무언가 어긋나고 있었다.

 

                                                                       

전투에서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전투상황을 접하며 그때그때 자신의 전투경험에서

솟아나는 지혜를 총동원하여 솔선수범해야하는 자세로 임해야만이 죽고 사는 전투에서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것이 동서고금을 통한 진리이건만...

 

대병력을 그것도 처음부터 도타하지 않고 마지못해 나가는듯한 지휘관에게 맡기고 왕명에 의한 충성과 여태껏

쌓아온 의리와 믿음 이외에는 확고한 통제수단이 없는 선택은 죽고 사는 결정의 순간에는 강력한 통제수단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禑王은 두려웠다. 통치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나이에 왕위에 떠 올려져 실권을 갖은 文武대신들의 꼭두각시

놀음에 점차 나약해져가는 자신을 알아가면서 뜻대로 되지않는 정치보다는 그저 궁녀들 치마자락만 따라다니며

유희에 빠졌을 것이다.

타고난 선왕의 기질보다는 쾌락을 탐하는 인자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어느 누가 어린 왕을 현자로 이끌어줄

힘 있는 후견세력이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당시 실권자들이 뜻하는 바였는지도 모른다. 

 

공민왕시절 1374년 9월 최영장군이 제주도 목동 진압작전으로 출병간 사이 내시들에 의해 비명에 간 부왕의

죽음을 어린나이에 접하고 믿을 수 있는 장인인 최영의 최전방 출정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 내 기반이 든든치 못한 국왕으로서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의견이 분분한 정벌군 작전회의와 회군로

                                                        

 


최영은 국가의 존립에 걸린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고집하는 젊은 왕이자 사위인 그의 간청에 예상치 못한 안타까운 고민을 하게 된다.자신이 정벌군을 지휘하지 못한다면 5만 여명의 고려 대군을 그것도 요동정벌을 달가와 하지 않는 이성계의 수중에 들어가게 한다면 자칫 마음먹기에 따라 천하를 뒤집을 수도 있는 대 병력이었다.   그러나 왕이자

 

사위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할 수도 없었고, 자신 또한 고령(72세)을 감안하여  궁여지책으로 이인임 계열의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이성계를 견제하라고 암시한 다음 이성계의 아들 이방우와 이방과 그리고 그의 심복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을 인질로 개경에 잡아 두었으나 그것 또한 통제가 철저하지 못해 회군당시 인질들은 모두 탈출하게 된다.

 

 

 

넘실되는 압록강 저 너머 드넓은 대륙을 바라보는 이성계의 눈에는 동북면 거친 산야를

얼룩배기 준마를 타고 달리던 아련한 그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4년) 10월 11일 함남 咸興(함흥)에서 약 50km 남서방향 동북면 영흥 흑석리에서

신흥군벌 李子春(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흥은 元의 통치 하에 있었는데 고향 영흥을 포함하여

철령지역을 중심으로 그 북쪽은 元의 직할령이였고 고려는 그 남쪽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말 북방영토

                                                                                        

                            

                                                                         

 

그의 조상은 이 고장에서 대대로 千戶(천호)의 벼슬을 이어온 집안이였으며

부친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년)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에 내응하여

이곳으로부터 元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에 歸依(귀의)하게 된다.

이성계의 가문은 李安社(이안사:고조)로부터 이자춘에 이르기 까지 5대에 걸쳐 元의 직할령 내에서 元의 신하로서

살아왔는데 당시 함경도 일대는 고려인과 오랑캐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元의 세력이 물러나고

고려의 영토로 돌아온 것은 1356년(공민왕 5년) 이성계의 나이 만 스물한 살 때였다. 

 

고려 조정이 이씨 가문을 주목한 것은 5대에 걸쳐 이 고장에서 쌓아올린 기반과 군사력이였다. 당시 고려는 서북

평안도 지방은 元의 세력을 몰아내고 압록강까지 수복하였으나, 동북 함경도 방면에서는 함흥 까지만 수복하는데

그치고 이북 두만강 까지는 元의 잔존세력과 후에 금나라를 세우는 여진족이 버티고 있어 미 수복 상태에 있었다.
이 시대 고려는 편한 날이 없었다. 북쪽에서는 오랑캐들이 수시로 쳐들어와 괴롭혔고 해안가에는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각종 민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왜구(倭寇)

              13C~16C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해안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일본인 해적.

                        

14C 중엽, 중국 대륙이 원에서 명으로 교체기에, 전재화되어있던 일본은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일대의 일본인들이, 쓰시마(大馬), 마쓰우라(松浦), 이기(壹岐)등 의 근거지로 활동하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극심한 피해를 줌.

                                                                

 

이들 남조 세력권의 일부 지방 세력들이 그들의 내정혼란기 속에서 대륙정세 변화와

오랜 원의 강압으로 약해진 고려의 느슨한 체제를 틈타 한반도 연안과 내륙 깊숙이

침범해 약탈과 납치를 자행하였다. 특히 국가 창고인 조창과 곡물운반선인

조운선의 약탈로 국가 재정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양민의 학살과 방화 납치 등의

자행으로 민심의 불안과 동요로 고려정치,사회의 큰 골칫거리였다. 

                                                                 

 초기에는 단순 해적의 무리에서 점차 수백 척의 병선을 보유한 군대급의 정예화된

 무리로 성장해 우리나라 연해안과 내륙깊숙히 침범해 해안가에는 민가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피해를 주었다.     ◐

 

 

 

 

                            

이성계의 조상-유랑에서 정착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이 씨로 시조 이한의 22대손, 이름은 단, 자는 군진이고 원래 이름은 성계이며 호는

송헌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신라와 고려 때 여러 벼슬을 역임했으며 8대 李安社(이안사:목조)때는 전주에서

살게된다. 이안사는 고려 의종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변을 주도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의 손자로 강인한

고려무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1174년(명종 4년) 이의방이 피살되자 무신난 때 형 이의방과 함께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던 이인도 몰락과 함께

전주로 낙향한다. 이 때문에 이안사는 全州(전주)를 본향으로 삼게 된다. 이인 아들인 이성계의 5대조인 李陽茂

(이양무)는 이때부터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중앙정계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자 근거지인 전주지역에서의 형편도 녹녹치 못해 지방관리와 官妓(관기)로 얽흰

염문으로 인한 다툼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결국 가솔들과 자신을 따르는 170여 호의 사람등과 함께 고향인

전주를 등지고 북쪽으로 도피의 길에 오른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양무의 아들인 李安社(이안사)때 일이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강원도 삼척현 이었다.

 

 

고려 말 해안지역은 왜구들의 잦은 침입으로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이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식솔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왜구보다 더 무섭다는 야만인들이 드글드글한 동북면의 의주(덕원)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오지인 동북면의 정세는 매우 어지러웠다. 이곳에는 고려인 몽고인, 여진족, 홍건족 등 여러부족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 홍건족 등 야만 무력세력이 자주 출몰하였으며 元나라도 고려도 이곳에 확실한

지배력을 장악치 못한 실정이었다.

                                                                   

 

                                                                 이성계(좌)와 정도전

         

 

 

 

                           

 

                                                                                                                                         

이즈음,몽고군에 맞서던 동북병마사 신짐평이 주민을 반감을 사자 용진현 출신의 조휘와 정주출신의 탁청이 그를

살해하고 몽고에 투항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몽고는 和州(화주)에 雙城摠管府(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로 삼고 의주는 元의 開元路(개원로)에 편입되어 산길대왕의 지배에 들어갔는데 李安社는 그 당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李安社는 진지를 구축하고 자체방위를 유지하며 유민들을 지켜주었다. 고려조정에서는 북방의 한지에서의

그의 공을 치하하며 의주병마사로 제수해 몽고군과 이민족의 방어임무를 주었으나 당시 북방의 정세로는 멀리 떨어진

고려조정의 뜻을 받들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요동의 산길대왕의 항복권유에 결국 그는 김보능 등 1,000호를 데리고 元에 항복하게된다. 이로서 李安社는 개성에서 전주로 삼척 그리고 이곳 동북면에 이르는 오랜 유랑생활 끝에

개원로의 남경에 있는 斡東(알동)에 정착하게 된다.

                           

                                                                  


元으로서는 멀리 떨어진 국경지역에서의 명망있는 고려인의 귀순은 큰 낭보였었다. 元에서는 李安社에게 알동

천호의 관직을 주고 동북지역에서의 확고부동한 거점을 마련하게 된다.

李安社(목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장자인 李行里(익조)가 벼슬을 이어받는다. 이시기에 斡東(알동)

지역에는 李安社와 李行里의 2대에 걸친 노력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모여들어 살게되었다. 李行里의 아들 李椿

(도조)이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아  재임하게 되는데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인 李子春(환조)이다.
계보를 보면, 이인-이양무-이안사(목조)-이행리(익조)-이춘(도조)-이자춘(환조)순이다.


 

         

                                                              이성계 가계도

   

          군마도(장승업:1843~1897.조선말기 화가)

                                       

                                                       

 

                                                                                               

                                                                                               
李子春은 李安社로부터 시작한 오랜 가문의 방황을 끝내고 고려에 錦衣還鄕(금의환향: 공민왕의 원의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 탈환에 기여 함)하여 이성계가 거목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쌍성총관부 일대에는

여진족과 몽고인, 고려유민들이 뒤섞여 살아가며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원나라와 고려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망명해온 전주이씨 일족에게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대륙에서 元나라가 지고 明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정세변화였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反元정책을 통해

元에 빼앗겼던 북쪽 영토를 되찾고자하였다. 당연히 동북면 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전주이씨 일족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이성계의 부친 李子春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통일신라 시대 및 고려시대

지방호족들은 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었다.중앙집권화가 정착되지 않은 당시에는 중앙권력 대신에 지방의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관할했다.)

 

함경도 영흥 지역은 바로 전주 이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는데 그는 공민왕이 元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동북면 병마사로 제수되었다. 元에 어쩔 수 없이 망명했던 전주
이씨 일족은 다시 명예롭게 고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공민왕의 북방영토 개척                                                             

 

 

공민왕의 쌍성총관부의 탈환은 元의 고종 때 점령당한 후 무려 99년 만에 故土 회복이였다. 이에 적극 참여한 공으로 李子春은 고려에 정식 무장으로서 발을 들여 놓으며 홍건족, 왜구의 침입 등 고려 말에 일어난

각종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호부상서

라는 무인으로서의 명예로운 벼슬에 오른다.

이후 요동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귀환에 매진하다가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李子春은 원명교체기에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호응하여 군사적 업적을 쌓아가며 고려 정계에

이성계가문의 정치적 위상을 각인시키는 최대공로자였다. 그가 마련해준 확고부동한 기반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업하는데 밑거름이된다.

 

 

 

회군-아군과 적군

 

 요동정벌은 공격해오는 적을 방어하기위해 친숙한 환경에서 싸워야만 하는 수비전과는 달랐다.  고국을 떠나 낮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의 공격형 전투에서는 규모의 적정성과 보급의 타당성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를 이끄는 지도자의

사필즉생의 똘똘 뭉쳐진 용기로 승리의 확신을 이끌어야만 하는데 출발부터 삐그덕 거렸다.

 

전선으로 보내는 군주의 확신에 찬 격려도 없었고 조정의 통일된 의사도 미비하였으며 장수를 전장터에 보내면서도

총사령관은 군주보호라는 미명아래 최전선에 나가지 않았으니 죽음으로 내몰린 장수에게
그것도 처음부터 미덥지 않은 장수에게 고려주력군 5만 여명을 통솔하는
大任(대임)을 맡기었으니 어찌보면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위화도 정벌군

 

                                                                            

고려 말의 혼란 상황은 이성계를 북방의 무명의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로 만들었다. 그는 무예와 전술에

탁월한 재능은 타고난 무장집안의 핏줄 탓도 있겠지만 부친을 따라 전장터를 누비며 체득한 경험으로 북쪽의

홍건적을 물리치고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백전 백승의 전적으로 백성들과

조정으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또한 암묵적이나마 최영의 후원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민심을

얻으며 주위에 많은 사람들 특히 유교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성계는 하늘을 쳐다보고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며 산야를 둘러보았다. 산천초목은 그대로이며 변함없는 자연

그대로였다.주마등 처럼 흘러왔던 생애를 뒤돌아보며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백성들의 마음도 고려왕조를 떠나고 있었다. 그것은 개경에서 이곳까지 출병하는 곳곳에서

민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軍心을 얻은 이성계에게 民心도 따랐다.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아차린 백성들은 회군하는

병사들을 환대했다. 자식들과 남편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전쟁 터에 보낸 부모와 처자들은 살아온다는 것만 해도

기뻤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군하는 병사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반겼던 것이다.
 

                            

마음을 굳힌 이성계는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그의 근거지였던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조민수가 이성계의 뜻에 동조하게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원정군 지휘관 들을  대동하고  회군을 선포했다.

국왕에 대한 장수의 명령 불복 그것은 곧 반역이었다.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리면서

이성계는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1388년 5월22일)

 

              

                                진군과 회군

 

                                                                                      

 

 

“왕에게 친히 화복을 진술하고 왕 옆에 있는 악을 제거하여 생령들을 편하게 하겠다.” 이는 우왕에게 자신이 직접

회군의 정당성을 알리고 부당한 정벌을 종용한 최영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잡아두었던 환관 김완을

풀어주고 최영을 처벌하라는 서찰을 禑王에 보낸 다음 개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요동정벌군의 회군은 출병 당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더디었다. 느리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했다. 백성들의 동요를 염려한 처사였다.

 

 

 

최영의 죽음

 

 禑王과 최영이 회군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회군한지 이틀이 지난 5월 24일이었다. 정벌군의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담당하던 최유경이 우왕에게 달려가 회군 사실을 알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우왕과 최영은 다급하게 개경으로 후퇴하면서 저항군을 조직하려 했지만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아차린 영민한 민초들은 따르는 이 없어 개경 궁궐까지 왕의 일행을 따라간 병사들은 기마병 50여 명이 전부였다. 개성에서 다시 군사를 모아 천여 명의 군사로

반란군을 저지코자 하였다. 

 

이성계의 회군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인질로 있던 이방우와 이방의,이화상 세사람은 개경을 탈출했고 이방원은

포천에 있던 생모 한씨와 한씨의 요청으로 계모 강씨도 챙겨 함께 급히 피신시켰다.
의주에 머물고 있던 우왕과 최영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와 수비태세를 갖추니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는

급거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동북면에서는 여진족 1,000여 명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하여 달려왔다.

 

                   

이성계의 회군 병사가 개경 외곽에 도착한 것은 음력 6월 1일 이었다. 6월3일 요동정벌군이 개경에

진입하면서 양측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전투태세로 진입하고 있었다.

개경 외곽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이성계는 禑王에게 사람을 보내 잘못된  요동정벌의 책임을 물어 최영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禑王은 설장수를 보내 군대해산을 명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왕명을 거역한 역적으로 몰아

관직을 박탈하고 개경거리에 방을 부쳐 이반역의 무리를 붙잡거나 목을 베면 큰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개경 전투

                                                                                

 

더 이상의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예상은 하였지만 더 이상의 타협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이성계는 얼마 전만해도

군주로 떠받치던 자신의 고국의 왕궁을 향하여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명령에 죽고 사는

군신관계에서 자신은 거역을 하게되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마도 관계의 正때문 이였는지, 아무튼 이성계의 부하들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어제만해도 아군이였던 고려군을 향해 칼과 화살을 쏟아냈다.

 

이윽고 조민수가 선의문으로, 이성계는 숭인문으로 쳐들어갔다. 처음에는 조민수가 黑旗(흑기)를 앞세우고 영의교

쪽으로 밀어붙이다 숫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용장 최영에 밀려 퇴각하게되자 다급히 이성계가 황룡기를

앞세우고 선죽교에서부터 남산방향으로 맹공을 퍼붓자 최영의 수비군이 맥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세가 기울자 최영은 禑王을 지키기위해 궁궐 내 花園(화원)으로 대피하게 된다. 숫적으로 불리하고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한 수비군은 이미 기울어진 전세가 짙어지자 저마다 칼을 버리고 도주하기에 바빠
이제는 최영을 따르는 군사는 수십 명에 불과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전투의 잔해

                                  

                                                                                                                                           

                                       

 

이성계는 화원주위를 수백 명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군사들을 시켜 최영을 내놓으라고

하였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군사들은 화원담을 부수고 들어갔다.

어제의 신하이며 부하였던 郭忠輔(곽충보)가 화원으로 뛰어 들어 최영과 맞닥뜨리자

아무말 못하고 서있을 뿐이었다. 최영은 禑王에게,

두 번 절하고 순순이 끌려 나왔다. 적들도 아닌 자신의 부하였고 그리도 믿으며 키워주었던 믿음이, 패장으로서의

현실 앞에서 최영은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쏘아보는 최영의 시선을 피하며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오늘의 일은 나의 본뜻이 아니오, 그러나 요동을 치려는 계획은 대의를 거스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편안하지

못한 것이므로 부득이  이렇게 된 것이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쓸데없는 소리다. 옛날 이인임의 말만 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최영이 한마디 말이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그의 고향인 고봉현(파주)에 귀양 보내고 그를 따르던 장수와 신료들을 모조리 유배형에 처했다.

최영은 다시 합포(마산)로 移配(이배)되고 다시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두달 후 1388년 12월, 개경으로 끌려와 참수되어

헝클어진 머릿결 사이 눈 부릅뜬 핏물에 절은 그의 목은 저잣거리에 매달려 오가는 이들의 탄식과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궁에서 치열한 접전

 

회군을 성공리에 매듭지은 이성계는 두 도통사와 36명의 원수들과 함께 두려움에 초조한 禑王을 배알한 다음 성문

밖으로 병력을 돌렸다. 이제 고려조정의 실권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수중에 들어오고 미약하나마  왕권을 쥐고 있던

禑王은 허수아비로 전락되고 말았다.  6월 4일 회군파 장군들은 궁궐 옆에 있는 흥국사에 모여 사후조치를  논의 했다. 그 결과,고려조정에서는 明의 연호를 사용하고 明나라식 의관을 착용하기로 했다. 또한 조민수가 좌시중, 이성계는

우시중에 조준이 청서 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임명되고 삭직되었던 모든 회군파 장성들의 직위도 복귀되었다.

 

그날 밤 그렇게 의지하던 최영과 모든 것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진 禑王은 환관 80여 명의 몸에 비수를 감추고 회군파의

우두머리인 이성계, 조민수 변안림의 집을 습격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집에 가지않고 숙영지에 머물고 있어 禑王의

거사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우왕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된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조민수, 이성계를 대표하는 신군부 세력의 동의를 얻지못한 탓도 있지만

요동정벌 자체가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 역부족이었다. 당시 고려는 해안가에 들끓는 왜구의 노략질과 약탈행위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만일 요동정벌에 성공한다 해도 막강한 세력으로 일고 있는 明의 반격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明의 철령위 설치에 대한 충분한 외교적노력을 지속하고 좀 더 시간을 갖을 필요가 있었지만

최영은 고려의 국력을 과신하고 무모할 정도로 급하게 전장에 임했다. 이러한 무모한 행위는 결국 조민수, 이성계가

이끄는 신군벌 세력에 회군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위화도 회군

                

                                                                                                                                                                              

요동정벌의 대장군에서 말머리를 돌려 회군에 성공한 장수의 선봉장으로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의 실권자로 급 부상한 이성계는 고려의 차기 국왕 옹립 문제로 조민수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힘으로 보면 자신이 그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여건과 분위기가 성숙치 못했는지 자신은 왕권에 욕심이 없는

순수한 구국의 혁명이였는지...

하여간 이성계는 차기 국왕에 정창군 왕요를 내세웠지만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인 세자 창의 옹립을 주창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누가 국왕이 되느냐에 따라 힘이 옮겨다는 것이 권력의 속성임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니

말이다. 세자 창은 이인임의 친족인 이림의 딸 근비의 소생이고  조민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인물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禑王은 신돈의 후예라는 입장을 취했으므로 조민수와 이해가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왕위문제는 당대 明儒(명유)인 牧隱 李穡(목은 이색)이 조민수의 뜻에 동조해 이성계의 묵인 하에 세자 昌(창)을 보위에

올리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아직도 舊臣(구신)들의 세력이 남아있어 이성계의 힘을 어느정도 견제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군부의 힘은 이성계의 수하에 있었고 조민수는 애당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조민수는 이성계가

추진하는 토지개혁 등 개혁정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를 추종하는 개혁파 신료들의 제거 대상이 되었고

힘에 밀린 그는 그해 7월 부정부패 혐의로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이색 또한 수구파를 대변하다 정사에 책임을 지고 향리 장단으로 귀향한다.

 

 

 

       왜구의 침입과 약탈

 

 

 

고려조정은 이제 명실상부한 실권자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신진개혁파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고려사』나 『태조실록』에 의하면 조민수는 간신열전에 들어있고 禑王의 친부로 회자되었던 신돈은 반역열전에

들어있다. 심지어 禑王은 명실상부한 왕이였는데도 신돈의 아들로 간주되어 반역열전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최영은 당당히 『고려사』열전에 올라가 있다. 이들 역사책은 모두 조선시대에 제작되었는데 말이다.

 

우왕에 대한 기록은 貶下(폄하)일색이다. 신돈은 그렇다치고 조민수는 이성계와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해 그렇다지만

최영은 그가 우직하고 잔인하다는 어색한 흠잡는 내용인데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초지일관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오죽하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주옥같은 말귀를 열전에 수록하고 후대에 귀감이 되게했으니 그는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했다는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영의 사람됨이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이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나타내며,

                             

 

                         태조 이성계와  4 불가론
                           

 

그런사람 이었기에 최영은 죽는 순간에도 떳떳했다. 오히려 죽이는 이성계가 미안하여 “이것은 제 본심이 아닙니다.”

라고 사과했을 정도였다는데 피해자는 피해자 대로 가해자는 그 나름대로 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니 ..
세상일은 正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가 시류에
어긋난  잘못된 연분이였지만 시대의 영웅은 영웅이었나 보다. 

 

 

 

 

개혁-田制(전제)와 家奴(가노)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당시 국내 상황은  말그대로 혼란 그 상태였다.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한 명분의 회군이였지만 나아진 것은 어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였다.

고려의 실권을 잡은 이성계의 개혁파는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개혁파의 중심인물인 정몽주, 정도전, 조준, 유영경 등은

오랫동안 기득권층이 누려왔던 특권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려고, 그들이 처음으로 개혁의  칼을 들이댄 곳은

국가의 재정확보와 민생들의 삶과 직결된 경제분야였다. 이는 田制의 개혁과 노비문제의 해결이었다.

 

 

          고려군 복장                                          

 

                                                  조선군 복장                             

 

 

개혁의 선봉에는 조준이 앞장섰다. 원칙주의자인 그는 정도전, 남은 등과 교류하면서 병든 고려를 치유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개혁의 중심 인물인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따르며 도왔다.
1388년 7월, 창왕이 고려 33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준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 핵심은 田制(전제)와 정치,사회 개혁이었다.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元의 지배하에 富를 누려왔던 권문세족들이 관료조직 곳곳에 뿌리박고 있었으며,

 

이색으로 대표되는 보수지식층과 전통적인 권문세족, 또 이림과 우현보 등의 외척세력 그 외에

이성계 무장세력이 왕을 중심으로 뭉쳐 개혁을 가로막고 있었다.
개혁파는 그들에게 집중된 富를 빼앗아 나라의 곳간도 채우며 백성들에게도 돌려주고

경제력을 가진 그들의 저항도 차단해야만 했다.

 

당시 친원파를 비롯한 권문세가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를 불법적으로 강탈하고 양민을 핍박하여 노비로 부리는

상황이였다. 중앙의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고 달랑 지방관리 자리를 꿰어차고 갔다바친 뇌물의 본전은 빼야 겠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생들을 억압하고 갈취하였다.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기고 몸마저 노비로 전락한 양민들의

원성은 힘에 눌려 신음하고 버티다 못해 야반도주하거나 도둑의 무리로 변해갔다. 

                  

 

                  최영장군과 그의 묘               

                                                                      

 

                                                                                                   

고려시대에 富의 원천은 토지와 노동력의 확보여부에서 나왔다.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매입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힘으로 빼앗아  땅문서를

  확보하여 부를 늘려갈 수 있었다. 당시에도 사유재산이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 즉, 收租權 (수조권)을 확보하여 富를 축조할 수 있었다. 당시 국가는

모든 토지에서 수확량의 1/10을  (租:세금)로 걷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이 권한이 수조권이었다.
국가재정은 토지에서 걷어들인 이 租로 운영되었다. 그런대 고려시대에는 특정지역의 수조권을 관료들에게 지급해

관료들이 그 租를 직접 걷어 생활하도록 하는 법이 있었는데 바로 田柴科(전시과)란 토지제도이였다.
 
田科(전과)는 경작지이고 柴科(시과)는 땔감을 얻는 山地(산지)로 경작지와 산지를 관료의 등급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는데 권문세가들은 바로 이 전시과 제도를 통해 지급받은 수조권을 사유화하고 퇴직이나 은퇴 시, 死 후에

국가로 반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계속 소유했다. 
 
그러한 수조권이 늘어나 광대한 농장을 형성했고 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한 토지까지 보태어져

권문세가들의 곳간은 넘쳐났으며 대신에 국가의 창고는 텅 텅 비는 상황이 벌어지고 급기야는  새 관료가 전시과를

지급받지 못하는 우수꽝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을 쓰고 정치를 하려면 명분과 어쨌던 돈이 필요 한데 말이다.

 

조준, 정도전 등 이성계의 책사들은 권문세가에 몰려있는 수조권을 빼앗아야 했다. 이를 위하여 대규모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토지대장을 작성하였다. 1391년 1월 과전법을 실시하고 그해 9월 대궐 밖 마당에서 옛 토지대장을

불태워 버렸다.
며칠씩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에 권문세가들의 원성이 묻혀 날라갔으며 백성들의 환호는 하늘에 치솟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처사는 기존의 질서로는 할 수없는 혁명적인 힘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원나라의 1C 걸친 지배 하에서 고려의 권문세족은 성장함

 

 


수조권을 빼앗기게 된  권문세가들은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왕조가 바뀌면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몰락 해가면서 힘을 잃어가며 저항도 수그러져 갔다. 권문세가로부터 빼앗은 수조권은 국가로 환수되고 일부는 論功行賞(논공행상)의 일환으로 개혁파에게 재분배 되었다. 이와함께 불법적으로 점유되었던 토지는 원주민에게 돌려주었고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은 양인 신분으로 회복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科田法 (과전법)으로 조선의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토지개혁을 통해 이성계 일파는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권문세가로부터 빼앗은 富는 자신들이 소유함으로서

경제력을 확보할 수있었다. 토지를 돌려받고 노비에서 양민으로 신분이 상승한 백성들은 이성계일파를 지지
하여 이로서 개혁파들은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하고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조준을 위시한 개혁파는 지방행정개혁에도 전력을 기울이며 군정의 개혁도 단행하였다. 그간 권문세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대의 지휘권도 환수하는 조치를 취해 1391년 1월 삼군부를 설치해 군 통수권을 일원화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 목적은 고려의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질서의 창립이였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니 기존

보수세력은 가만히 당할 수 만은 없었다. 바야흐로 고려를 지키려는 충신과 새 국가를 창업하려는 공신들
사이에 최후의 한판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몽주와 선죽교

 

 

                                                                               

정몽주-선택의 기로

 

 

당시 이성계파로 분류된 鄭夢周(정몽주)는 새 나라를 꿈꾸는 개혁파의 중심인 이성계와 고려를 보전하려는 스승

이색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갈등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이미 從軍(종군)활동을 통해 이성계와 친분이 있었던 그는 이색, 우현보 등 동료지식인들이 반 이성계 노선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回軍(회군)의 지지 편에 선다.

 

당시 고려는 일대 혁신이 필요한 시기라 파악했던 정몽주는 회군이란 대 반전을 통해 정국의 전환이 그의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의 각종 개혁에 중요한

참모 역할을 해내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혀 나갔다.

 

1389년 이색은 자신과 유림으로 대표되는 반 개혁파, 이성계의 개혁파 그리고 왕실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을 꾸리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대타협은 막후에서 정몽주가 이색을 지원하고 이성계의 묵인 하에서.가능한 것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이성계를 설득해 정도전이 추진하는 급진적 개혁안을 저지하고 자신의 점차적인 개선안을

관철시켰던 것 이다. 그러나 이는 개혁파들에게 더욱 강경노선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정몽주는 易姓革命(역성혁명)의 야욕을 불태우는 조준, 정도전 이성계 등과의 신념의 차이로 그를 이성계로

부터 고려의 국체를 보존하려는 정치적 이상을 품은 이색파로 정치적 변환을 하게 된다. 젊어서부터 이성계와의

인연도 돈독했고 흥국사 9공신으로서 정도전과도 각별한 사이였지만 궁국적으로 역성혁명을 지향하는 그들과 같이

갈수는 없었던 것이다.    

 

 

1389년 11월. 최영의 생질이며 대호군을 지낸 金佇(김저)와 부령을 지낸 鄭得厚(정득후)가 이성계를 암살하고 禑王을

복위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팔관회 행사 시 거사하려 했지만 예의판서 곽충보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곽충보는 과거 우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화원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 최영을 제압한 공로로 이성계 파의 일원으로 

판서의 자리 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거사의 실패로,

 

                       

 

                                     (고려사 21권 )     공민왕과 공양왕 가계도

 

 

정득후는 자살하고 김저는 생포되어 국문 끝에 전 판서 조방흥,변안열,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우흥수 등과 함께

모의했다는 자백을 하고 모두 척결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지, 이거인, 이을진등 대부분 반 이성계파 무장들이

숙청되었다. 
개혁파 신료들은 김저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있던 禑王을 멀리 강릉으로 이배시키고(1389년 11월) 

은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흥국사에는 개혁파들이 모여 앞으로 국정 방향을 논의했다. 참석자는 이성계를 비롯 정도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정몽주 이른바 흥국사 9공신들 이었다. 그 자리에서 廢假立眞(폐가입진)이란 명분을 세운다.

    즉, 거짓 임금은 폐하고 진짜임금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미 明의 홍무제인 주원장이 고려 사신 윤승순에게 폐위된 禑王이나
새임금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며 친조를 거부한 것이다. 明의 이러한 명확한 태도에 이제 정통성을 잃어버린 창왕은

권좌에서 물러나야했고 이색을 비롯한 이승인 등 주위세력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개혁세력은 외척 이림과 그의 아들

이귀를 숙청한 다음 창왕을 폐위하고 이성계의 뜻에 따라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45세)를 고려 제 34대 공양왕으로

추대했다. 1389년 12월 공양왕 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강화도에서 昌王은 죽음을 맞고(10세,재위 1년5개월)),

강릉에는 정당문학 서균형을 보내 우왕도 사사된다.(25세. 재위 13년9개월)

 

禑王과 마찬가지로 昌王도 辛旽(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신록에 편철되지않았고 대신 『고려사』,『반역자전』의

『신부』편에 그 치세과정이 함께 기록되었을 뿐 능도 조성되지 않았고 시호도 받지 못했다.
이와같이 정치적 문제였던 禑王과 昌王의 辛旽의 자손설이 정론으로 확정
된 것은 조선 건국의 합리화를 위한 무리수로 보인다고 회자되고 있다. 

 

 

 

 

13C~16C 전투 상상도

 

 


정치적 노선을 달리한 정몽주는 조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성계의 나팔수격인 언관들을 쫒아내고 그곳에

반 개혁파 신료들로 메워나갔다. 또한 반개혁파 무장들을 규합해 군부실세였던 심덕부를 축출한 다음

광범위한 반 이성계 집단을 조성해나갔다.
당시고려의 군권은 배극렴(중군총제사),조준(좌군총제사),정도전(우군총제사)
개혁의 3인방이 틀어쥐고 있었다. 그러니 무력으로 이성계의 개혁파를 제압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었고 단지 이성계의 합리적 개혁과 타협하는 길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이성계는 오랜 정쟁에 지친 나머지 정계를 은퇴하여 그가 젊어서 불같은 정열과 야망을

갖고 누비던 동북면으로 가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은 유혹에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도심의 삶에 지친 이들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련다는 말처럼..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자 생사를 같이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정도전 등 개혁파 무리가 발끈하여 추구해온 대망론을 이성계에 일깨우면서

이제는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달려온 길로 가야만 한다고 간언하였다. 사실 돌이키기는 너무 늦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변화하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모두가 죽는 길 뿐이라는 것을 이성계도 잘 알고 있었다.
  

        

 

                      치열한 백병전

      

 

이성계의 이러한 심정의 동요 속에 개혁파들이 수세에 몰리자 정도전은 1391년 5월, 공양왕을 비판하고 이색과

우현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위화도 회군이래 암암리 활동하던 그가 처음으로 政爭(정쟁)에서 개혁파의
총대를 메게 된 것이다.

정몽주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가.. 모두가 인정하는 존경받는 대학자이며 추앙받는 정객아닌가..

그는 정도전이 외부에 누설되어서는 안될 대외비밀인 사헌부의 우현보 탄핵사실을 누설했다는 구실로 강력하게 정도전을

몰아쳤다. 거기에 단골메뉴로 따라다니는 그의 비천한 외가의 출생 비밀 까지 더해지면서 ..정몽주와 정도전의 첫 충돌에서

이해할 수없는 이성계의 침묵 속에 정몽주의 손이 들려지고 정도전은 공신녹권을 박탈당하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두 아들 또한 벼슬에서 쫒겨나 폐서인이 되었다.

 

 


정몽주의 죽음

 

공양왕 4년, 明나라에 다녀오던 세자 奭(석)을 마중나갔던 수문하시중(부수상)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도중

낙마하여 드러눕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이성계 일파와 일전을 벌여야만 하는 지경에 도달한 정몽주는 이기회에 개혁파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우선 대간을 부추겨 개혁파의 선봉장인 조준, 남은, 남재, 조박 등을 탄핵케 해 그들을

유배시키고 적극적으로 이성계세력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영특한 아들 이방원은 정국이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급박한 상황을 측근으로부터 전해듣고 얼마 전

돌아간 모친 한씨의 시묘살이 하던 곳에서 급히 벽란도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한데  달려가 급박한 상황을 고하고

동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러진 다리와 금이 나간 가슴뼈를 동여메고 급조한 완자에 태워

밤을세워 개경에 귀환했다.

 

                                                         

                                                              활장비 와 전투장면

                                                                                            

 


이성계가 개경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몽주는 정도전을 비롯한 유배자들을 신속히 처형 할 것을 왕에게

간청했지만 공양왕은 사태 추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차일피일 처단을 미루었다.

그는 이성계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는 한쪽이 무너져야만 사는 ‘치킨게임’에 돌입한 상황이였다.

이방원이 먼저 칼을 빼어 들었다.

그는 이성계에게 정몽주의 이러한 공세를 아뢰고 그를 처단치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간언했으나,
이성계는 이에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하게 받을 뿐이다.”하며 방원에게 모친의

삼년상을 제대로 마치라고 종용했다.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 조영무, 이부, 거려 등을 동원하여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정몽주에 귀에도 들어가게되는데 모의에 참석했던 이성계의 이복형인 李元桂 (이원계)의 사위

卞仲良(변중량)이 변절한 것이다. 

 

정몽주에게 다가오는 무언가 암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무력으로 치자면 이성계일파에 대항할

세력은 고려에는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붉은 저녁놀이 지고 떠오른 하얀 초생달이 걸린 하늘에 구름이 스쳐가는 밤이 이슥해지자

정몽주는 병석에 누워있는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가게된다.

                                                              초생달은 깊어만가고

                                                                      

 

 

잠자는 사자와 같은 그의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초라한 자신의 처지를 포장한 담대함으로 이성계와 마주하였다.

병색이 완연한 그였지만 여전히 장수의 기골이 배여나는 좋은 인상을 잠시 쳐다보면서 엇갈린 운명이 아쉬었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였다. 담소를 마치고 이윽고 집을 나가자 문칸 방에서 대기하던 이방원은 조영규에게

따라가 그를 처치하라고 명한다. 정몽주는 마침 도중에 판개성 부사 유원의 상가에 들러

한 동안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수산 기슭에 서늘한 산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달무리가 배인 그날은 왠지 흐드러지게 녹녹한 밤이었다.

錄事(녹사)가 말 고삐를 잡은 아장거리는 말위에서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갈 때 이상한

기척에 말이 움찔하며 귀를 쫑끗하고 말머리를 두리번 거리자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돌다리 부근에서 뛰쳐나온 한

검은 물체가 다가와, 선뜻 멈치고 놀라와하는 녹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정몽주의 머리에 조영규가

내둘러치는 철퇴가 작렬하며 피가 튀고 이어 거려 등이 칼로 목을 베어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죽교의 돌바닥에 피가 물들으며 정몽주는 저물어가는 고려의 충렬의 화신이 되고 있었다. (56세)

개경거리에는 혓바닥을 길게 늘어드린 목에 반역자 정몽주라는 팻말에 지나는 서민들의

눈물이 배어 나고 있었다.(공양왕 4년 4월 4일)

 

                       

 

대군과 대군의 전투 대열

 

 

 

이성계는 정몽주의 충절을 貶下(폄하)시키지  않았다. 이성계가 개창하는 유교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방원 역씨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선비의 추앙이였으며 그의 학문은

김종직,조광조 등 사림파에게 전승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충절의 표상이였지만 오히려 조선 선비들에게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며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두문동 72현도 고려왕조의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그들은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사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으로 들어가

조선왕조의 어떠한 관직도 받지않고 일절 동네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외부 세상과 등졌다.
杜門不出(두문불출)이란 말은 이렇게 후대에 알려졌다. 
고려의 왕족인 王氏들은 조선 건국과 함께 멸족되다시피 한다.
강화도와 완도 앞바다에서 무리로 수장되였고, 살아남은 王氏들은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全, 玉, 金氏 로 개명하고 살아야만했다.

 

 

 

                                 고려후기 여인의 복식 (위)          조선시대 복식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이성계 세력에 대항하는 모든 저항은 끝이 났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찾아가 그날 밤 있었던 일을

고하자 이성계는 충신을 죽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됐다고 역정내였다 한다.  이튼날 이성계는 황희석을 공양왕에

보내어 그동안 정몽주 무리가 나를 포함 조정 대신들을 모함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그들의 무리를  벌하라고

요구했다. 정몽주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던 이색을 비롯해 이승인,우현보, 이종학 등 반대파들은 꼭두각시같은 왕의

명으로 줄줄히 귀양길에 올랐다. 반면 오랫동안 이성계의 방관 속에 유배지에서 입술을 깨물던
정도전 이하 모든 개혁파 공신들이 조정에 금의환향하게 된다.

 


공양왕은 이제는 자신도 두려웠다. 힘없는 제왕의 말로를 우왕과 창왕의 죽음으로 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대대로 서로의 자손을 해치치 않는다는 동맹서약을 맺자고 건의한다.

다가오는 죽음만은 면하려는 궁여지책이라지만 왕과 신하사이에 이런 일은 만천하에 없었다.
이제는 그가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당시 전투 상상도

                                                                                   

                                                                             

 

공양왕이 계속 머뭇거리자 그날 밤 배극렴, 조준 등 신료들은 공양왕의 부덕함을 공민왕비였던 왕대비 안씨에

고하고 강압하여 교지를 받아내여 공양왕을 폐위시킨다. 그날 이후 4일 동안 고려에는 왕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7월 13일 군국기무를 이성계에게 위임한다는 왕대비 명이 공표되었다. 공양왕은 폐위된 후 비와 세자비와 함께

원주, 간성, 삼척 등지를 전전하다 2년 후인 1394년 죽음을 맞는다. (50세, 2년8개월 재위)

 

 

 

                                                                     

조선의 건국

 

1392년 7월 16일 왕대비에서 옥새를 받아든 신료들은 만조백관을 대동하고 이성계의

사옥으로 몰려가 왕위에 오를 것을 주청했다.
형식적이지만 몇 차례의 사양과 간곡한 권유가 오간 뒤 마침내 이성계는 왕위를 수락하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지 34왕 425년 만에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1392년 7월17일 (홍무 25년) 문하시중 이성계는 고려 개성 壽昌宮(수창궁)에서

만조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500년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57세 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은 무인출신이지만 유교 지식인들을 참모로써 문치주의에 입각해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당시 고려인들의 정신생활을 지배해왔던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고려 말에 이르러 너무 비대해지며 부패
해져 있었다. 너도 나도 승려가 됨으로 稅源(세원)과 군역자원이 줄어들고 사원에 막대한 토지가 비축됨으로

국가재정이 약화되고 국가 기반이 흔들여지고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의 별급문서.1401년(태종1년)이성계의 상속 왕실문서

                                                   (왼쪽에 이성계 친필서명,오른쪽은 어보(御寶)이며 국립박물관에 소장)

 

 

           어보(御寶)와 문서를 돌에 새긴 어필각석(御筆刻石)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불교자체는 물론 연관된 귀족세력들을 정리함으로써 국가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이 저반에는 주자학이라는 宋대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유학정신에 명분과 이념의 근간을 두고

있었다.   불교와 기존 귀족들을 비판하던 유교 지식인들은 당연히 반원 친명 노선을 추구하였다. 조선 건국 시에는 이미 明은 대륙을   석권하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한 상태였으므로 明과는 尊名事大(존명사대)관계로 신흥 강국 명과 우호적인관계를 유지하고 여진이나 일본 등과는 交隣(교린)관계로 우호 협력관계의 외교노선을 취해 국익을 도모하고

안정을 취하였다.

 

 

 


한양천도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500여 년 간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개성)은  껄끄러운 곳 이였다.

새로운 곳을 찾아 찬란한 왕조를 열고 싶었다.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이 선정되었으나

경기 관찰사이며 풍수대가로  알려진 河崙(하륜)의 상소로 다시 다른 곳을 물색하게 된다.

우연곡절 끝에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상소를 받아들여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게 된다.

 


     

                                                                       조선후기 한성

                                                                                      

 

 

도성 축조와 관련해서『조선불교통사』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도성을 축조하려 했으나 주위의 둘레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깥쪽은 눈이 녹지 않은 채 있고 그 안쪽은 눈이 녹아 있었다. 이에따라 城을 쌓으니

이것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다.”

 

이리하여 종묘, 사직,궁궐,도성을 갖춘 한양이 새 도읍지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세워졌던 景福宮(경복궁)은 궁궐로서 조선시대 왕이 거쳐하는 곳이 못되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오른 정종이 다시금 개경으로 옮기게 되고

조선3대 임금인 태종이 즉위 한 후에 다시금 한양으로 돌아와 昌德宮

(창덕궁)을 지어 그곳에서 왕이 거쳐하게 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은 대원군에 이르러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다시 축조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세자 책봉-정국의 혼란

 

조선 開國(개국)당시 태조 이성계의 나이는 당시 황혼에 가까운 57세 였다.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조정이 안정되자 필연적으로 후계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안변에서 혼인한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鄕妻 :향처)와 6명의 아들을 두었고, 20살 터울인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京妻:경처)에게서 2명의 아들을 두었다. 후계구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미래와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大事중에 대사였다.

 

배극렴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야 한다며 신의왕후의 소생인 다섯째 이방원을 염두에

두었으나,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를 의식해 그녀의 소생을 후사로 삼는 뜻을 밝히자, 공신들은

둘째인 방석이 형 방번보다 온후한 성품이 제왕의 자질을 갖고 있다하여 이방석을 추천하였다.

[고려 후기 당시 귀족들은 자신의 부임지에서 지내는

경처(京妻) 와 고향 집을 지키는 향처(鄕妻)를 두는 풍습이 있었다.]

 

 

 

작전회의와 기병전투대열

 

 

 

 1392년 8월 20일 11세의 의안대군 방석이 쟁쟁한 장성한 본처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첫째부인

신의왕후는 조선창업 1년 전인 1391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현존한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입김과

장성하고 강건한 본처의 아들들 보다 어린 왕을 보필하면서 재상중심의 政體(정체)를 염원하던 정도전의 정치적 야욕이

맺은 결실이었다. 이른바 神權(신권)정치를 위한 첫 걸음이였으며, 신덕왕후의 욕망과 정도전의 야욕이 결탁한 것이다.
방석의 장인 심효생과 그를 지지하는 남은이 동조하였다.

 

태조는 첫 부인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에 대해서 고뇌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새 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공헌하지 않았던가..  그 중에서 다섯 째 이방원이 제일 눈에 어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영특한 아들이였지만 개국과정에서 보여준 치밀하고 잔혹한 그의 성품에 이성계 자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개국 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변방으로 돌고
있었다. 당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정도전 등 대신들의 견제와 어린
자녀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신덕왕후 강씨의 날카로운 감시 때문이였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후원을 많이 보았다, 한낮 동북면 변방의 무사였던 그가 홍건적과 왜구를 무찌르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쟁쟁한 중앙정계에 입신하게 된 것은 쟁쟁한 권문세가인 그녀 가문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평생 전장 터에서 살아온 무인이었던 그에게 정치적, 학문적으로 뛰어난 정도전과 같은 인재들의

움이 절실하였다. 정도전은 신명을 바쳐 태조와 신덕왕후를 도왔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의 권력을 재단하는 것에서, 또 한편 미래의 권력을 위해 맺어 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러한 신덕왕후 가문의 후광과 내조가 있었기에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의 바램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첫 부인

신의왕후 한 씨가 아들들을 낳아 잘 키워 주었지만 동북면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정계 활동에는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당시에도 전업주부로서의 내조만으로는 큰 사람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서는 백그라운드와

사회적 활동을 통한 內助(내조)가 필요했는가 보다.

 

 

 

왕과 여인

 

 


한편 조선의 개국과 함께 권력에서 소외된 방원을 비롯한 첫 부인 소생의 왕자들은 분을 삭이며 은인자중하며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을 쥔 공신들은 강성한 왕자들이 왕권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고 있었고 아직 태조 이성계는 강건하고 주위의 튼튼한 권력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396년(태조 5년) 8월 이성계의 둘째부인이자 세자의 어머니이며 국모였던 神德王后(신덕왕후)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해 6월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쾌유를 비는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병석에 누운지 2개월 만에
이득문의 집에서 어린세자를 염려하며 감기지않는 눈을 감은 것이다.

 

운명의 길은 꿈틀거리며 햇빛을 따라가는 해바라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神德王后(신덕왕후)는 생전에는 재상집에 태어나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명망을 얻어가는 이성계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혼인하여 국모에 자리에 올랐지만 死 후에는 참으로 불행한 수모를 당한다. 그 일은 장자우선이라는 기존의

질서와 개국과정에서 보면 功많은 장성한 첫부인 한씨 소생 아들 중에서 세자가 책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생인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자신의 두 아들과 사위가 죽음을 당하고 금지옥엽 이었던 고명 딸 정순공주는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태종 때에는 다시 그녀는 庶母(서모)로 격하되고 무덤인 貞陵(정릉)은 수차례  옮겨지고, 태조가

그렇게 정성들여 세워준 陵(능)의 정자각과  십이지상 등 석물은 해체되어 청계천 돌다리 디딤돌에 쓰여 많은 이들이
밝고 다녔다하니 그때마다 저승에서도 한 많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200여년이나 흘러서 현종때 송시열의 주장으로 신덕왕후였던 강씨는
정식왕후로 추존되어 종묘에 배알되었다.

 

 

 

 

                                                                 전어도  (태조 이성계의 장검) 

 

 

 

1차 왕자의 난

 

조선의 건국과 함께 태조는 의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후계구도도 사랑하는 강비 소생의 막내 아들 방석으로 삼고

정국의 안전을 기했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새 나라 조선을 중앙집권의 왕권 강화와 유교 정신에 입각한 문치주의 실현으로

매진하고 있었다. 고려 말 혼란 속에 살았던 백성들은 새 왕조의 이러한 출발에 호응하며
정국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반면에 이러한 과정에서 도외시된 무리들의 불만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開國(개국)과정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첫째부인 한씨 신의왕후 소생인 첫째 이방우(39),둘째 이방과(36),세째 이방의(33),네째 이방간(29),다섯째 이방원(26세)등

장성한 아들들과 종친들이었고, 동북면에서 부터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조영무, 장사길 등의 무장세력 등 이었다.

 

이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데 생사고락을 같이한 1등공신이였는데도 세자책봉과 개국공신 책봉에서 제외되고,

일부 문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는 태조의 정국운영에 도외시 된 것에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 

(1.한씨 신의왕후와의 첫째인 이방우는 부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을 버리고 처자를 데리고

교주 강릉도 철원 보계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서해도 해주로 옮겨가서 서너달 살고 다시 고향인 동북면 

함흥으로 옮겨 1년 여간 살다가 1393년(태조 2년) 12월 13일 향년 40세로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술병으로 기록되고 있다.

2.한씨소생의 방원의 아래 동복 동생 여섯째 이방연은 일찍 요절 하였음. )  

 

 

 

             

 

                    정도전 과 사당(평택 향토유적 제2호)                                                                                         

                                                                                                                                   

 


정도전을 위시한 정국운영의 주체들은 호시탐탐 왕권을 넘보는 이러한 세력들을 견제하며 세자구도를 굳건히하고

왕권을 공고히 해야만 했다. 그들은 무장한 私兵(사병)을 각자 보유하고 있었기에 군권을 장악하고
그들이 보유한 사병조직을 해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1388년 운명의 무인년의 새 아침이 밝았다.

 

당시 明나라와는

표전문제와 조공문제 등으로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表箋(표전)이란 조선에서 明으로 보내는 문서로 건국초기에 세 차례나  물의를 일으켜 양국관계가

얼어붙고 있었다. 이는 신생국인 조선에 대한 입지강화를 노린 외교적 분쟁이었다.

 

明은 조선의 실권자 정도전으로 하여금 이에대한 책임을 물어 明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사절로 간 사신들 중에는 明의 입맛대로의 처신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非一非再(비일비재)하였다.
당연히 태조는 이러저러한 구실을 들어 정도전을 明에 보내지 않아
정도전은 明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있었다.

 

 

 

            

 

관군과 사병(개국공신들의 사병은 왕권강화에 저해요소가 되었다.)

 

 

정도전은 이참에 요동정벌이란 구실로 ‘진법’이란 방법을 동원해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여러공신들이 거느리던 사병을

官軍(관군)화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주류측에 공세에 불만세력들은 다가오는 자신들의 위상변화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원을 중심으로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와 조카인 이천우 등을 위시해 동북면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조영무, 장사길 등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다. 처남인 민무질, 민무근 형제도 합류하고, 河崙(하륜)과 李叔蕃(이숙번) 등이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형제인 이방과도 휘하의 甲士(갑사)를  지원했고 방간은 자처해서 방원의 핵심 역할을 하게된다.

 

 

 


亂(난)의 발생과 요동치는 정국
 
 

1398년 8월13일, 재위7년을 맞는 태조는 강씨의 3년 상을 마치고 덜컥자리에 눕고 만다. 그처럼

강건했던 그였지만,

전장에서 정계에서 그리고 개국과정 등을 헤쳐나오면서 소진해서 인지 심신이 나약해져 있었다.
왠만한 이들은 감내할 수없는 인내와 감내 그리고 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지만 이제 성취한 후

몰려오는 餘震(여진)의 한계 때문인지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철썩같이 믿고 있는 정도전이 국정을 안정하게 이끌고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 장수들이 있었기에 정국은

안정되기는 했으나, 유난히 자주 발생하는 가뭄과 홍수, 질병과 같은 천재지변 그리고 도처에서 발생하는 地怪(지괴)

현상 등은 그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였을 것이다.  그 중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강비와의 이별도 감당할 수없는

크나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정국은 정도전 등이 이끄는 주류 측과 이방원을 위시한 소외된 무리는 서로 언제 충돌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불꽃튀는 감시와 견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태조가 자리에 누운지 십여 일이 지났는데도 병환은 심해져 정안군(방원)을 위시한 모든 왕자들과

근친들은 만일에 대비해 勤政殿(근정전)문 밖 서쪽 집에서 밤을 세우며 대기하고 있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도 정도전의 집에 모여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태조의 병이 위독하니 방원을 위시한 왕자들을
궐내로 불러 들여 처치해야한다는 계획이였다.

 

 

 

전투대열과 의견 분분한 참모회의

 

 

芳遠(방원)도 자신이 깔아논 정보망에 정도전 일당이 왕의 전처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여 어린 세자의 앞날을 도모하려

한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兵權(병권)은 세자방석과 정도전에 있었고 왕자들의 私兵(사병)들은

이미 모두 관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방원은 이제는 정변을 통해 자신의 억울하게 빼앗겼던 권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책사 하륜이

작전을 짜고 이숙번과 조영규,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등이 군사를 동원하기로 하였다.  초저녁 무렵에 내관이 나와서

태조의 병환이 심해 避接(피접)을 가야하니 왕자들은 궁내로 들어와 대기하라는 전갈을 전해왔다.
정안군은 처남 민무구로 하여금 이숙번에게 무장을 갖추고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신극례의 집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궁궐로 들어가려고 가보니 왠일인지 궁궐의 여러 문들에 불이 꺼져 있어 어둑하기에, 집을 떠날 때


                   
부인 민씨의 염려도 있고 불길한 예감이 들자, 먼저 들어온 형들에게 이러한 분위기를 전하며

궁에서 나와 자신의 집 앞에 대기하던 이숙번을 찾았다.
그는 안산군수로서 능을 보살피기위해 개경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그의 수하 병력 십여 명을 무장하여

대동하고 있었고, 모인 사람들은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민무구, 민무질 등 10여 명에 불과했으며

군사들도 수십여 명에 각각 집에서 모인 10여 명의 하인들을 합해 50여명이

안되는 인원이 뒤따르고 있었다.

 

운명의 그 날은 8월 25일 밤이였다 . 이방원은 드디어 거사를 감행한다.

민무구가 정도전의 소재를 알려온 바에 의하면 정도전은 소동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등불을 켜놓고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방원은 무리를 이끌고 그 집으로 달려가 에워싸고 이숙번을 시켜 불화살을 날리게 하자 불이 붙어

삽시간에 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정도전과 남은은 도망쳤고 심효생 등은 잡혀 죽었다.
정도전은 이웃에 있는 전 판사 閔富 (민부)집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주인의
밀고로 방원의 종 小斤(소근)에 붙잡혀 왔다. 이때 그는 손에 작은 칼을
들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한다.

    

 

 

                                                                          죽은 자와 산자

 

 

그는 방원에 끌려나와 “공이 나를 살려주시오.” 그러자 정안군은 그에게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 형제들을 참하려 했는냐?” 고 말하고 병사에게 목을 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정도전은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다.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고려말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바로 잡고자 했던 혁명가이자 조선의 실질적 통치이념을 정립했던

정치가이며 대학자였던 시대의 지식인의 마지막 절규였다. 

세상에 이유없는 죽음은 없다지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남은과 심효생, 박위, 남지, 유만수 등도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이당시 군권을 쥐고 있던 방석은 방원의 수하들이 광화문과 남산에 햇불을
흔들며 기만술을 쓰자 이래 겁을 먹고 대처하지도 못했다.

 

세자 방석(17)은 대궐에서 끌려나간 뒤 서문 밖에서 맞아 죽었고 그의 동복형  방번(18)도 통진에

유배되어 양화도 부근에서 잠자다 죽임을 당했다..

강비소생  정순공주의 남편 이제도 사사 당했고. 정도전의  4형제 중, 정유와 정영은
병사들에게 살해되고 정담은 자살하였다.

 

한 밤의 무자비한 참극이 막을 내리자,
방원은 조준 등 도평의사사의 재상들에게 정도전이 난을 일으켜 자신들을
죽이려해 먼저 난을 진압하였다고  설득하였다.

 

 

,

 

1차왕자의 난

 

                                                                               

이듵날 아침 변중량, 노석주 등이 태조를 찾아가 사태의 추이를 고하자,
병석에 누워있던 태조는 청천벽력같은 난데없는 변란소식과 어린왕자들과 정도전 등의 죽음에 아연실색

충격에 쌓여 슬픔이 하늘 끝에 닿고 있었다.

 

芳碩(방석)의 죽음으로 빈자리가 된 세자자리는 예상외로 昭格殿 (소격전)에서 

부친 병환을 돌보던 둘째 永安君 (영안군)

芳果(방과)로 돌아갔다. 1차 왕자의 난은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한 패륜적 행위였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아무리 병석에 누운 老王이였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적잖은 힘이 있었고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력과 자신에 대한 저주스런 불편한 심기를  영민한  방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선뜻 세자

자리를 꿰어 찰 수는 없었다.하륜과 이거이 등 추종자들의 추대를 사양하고 주변의 이목을 의식해 잠시 영안대군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모든 권력은 이방원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몸져 누운 상왕

   

 

 

태조는 그해 9월 첫부인 한씨 소생의 둘째 (영안군) 방과에게 미련없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영안군은

조선 2대 임금 定宗(정종)에 즉위하고,이방원은 세자(세제)에 봉해지고 개국공신과 정사공신 1등으로 논정되었다.
그러나 권좌의 정상을 향한 그의 열망은 수그러진 것이 아니었다. 잠시 타들어가던 불꽃이 잦아진 것일 뿐,

그로부터 18개월 후 불씨는 활 활 지펴지게 된다.

 

왕권을 능가하는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정도전이 추구하던 병권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한다.   그는 사병 혁파라는 정도전의 정책에 위협을 느껴 거사를 일으켰지만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같은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속성이란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정도전-조선 왕조의 초석을 다지다.

 

鄭道傳(정도전)은 1342생으로 본관은 奉化 (봉화)이며 대대로 향리였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조모와 장인이 천인출신이라 부모가 어느 한 쪽이 賤人(천인)이면, 천인 취급 받던 전통시대의 관습에 따라

그도 천상 천인 신분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신분은 그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떨어지지않는 꼬리표였다.

그의 政敵(정적)들이 둘쑤기는 단골메뉴가 이러한 그의 신분상의 약점이었다. 이인임도 그랬고 정몽주도 그랬으며,

이방원 또한 그러했다.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떨칠 수 없는 그의 타고난 짐은 그로 하여금 새시대 새나라를 염원하는

역성혁명을 꿈꾸게 하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도전은 개경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친 云敬(운경)이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하게 된 때문이다.

정도전은 당대의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승인, 이존오, 윤소정 등 인재들과 수학하였다.
그는 성균관과 이어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당시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고려 중흥을 위한  정책에

등용되어 승진을 거듭한다.

 

好事多魔(호사다마)라 했던가...
공민왕의 피살로 왕위에 오른 禑王(우왕)시대에 접어들어 그의 생애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린 禑王을 등에 업고 권신 이인임과 지윤이 선대왕의 반원정책 대신 친원정책으로 돌아서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김구용, 이승인, 권근 등과 함께 도당에 글을 올려 극렬히 저항하였다. 그는 결국 파직되어 會津縣 (회진현)으로

귀양길에 올라그 후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토지개혁의 시작

 

                         

회진에서 3년간 귀향살이를 비롯하여 9년 간 야인생활을 통해 전국을  떠돌며 어려운 생활을 한다.
그는 이 시절을 통해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보고 느끼며,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가며
사상을 정립한다. 
  

 

 

정상에서 몰락

 

정도전(49세)은 1383년(우왕 9년) 왜구를 진압하기위해 咸州(함주)에 주둔하고있는 이성계를 찾아간다.

그들의 만남은 고려 말 개혁을 넘어 혁명을 꿈꾸는 신진 성리학자 세력과 신흥 무장세력의 첫 만남이었다.
그곳에서 정도전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이성계의 군대가 잘 정비되고 민생들을 아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있는 큰 그릇임을 마음속에 새기며 병영 정자 옆 老松(노송)에

다음과 같은 시를 새겨 넣었다.

 

蒼茫歲月一株松(창망세월일주송 : 아득히 오랜세월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생장청산기만생 : 몇 만겹의 푸른산에서 자랐는가)
好在他年相見否(허재타연상견부 :언제나 즐거운마음으로 다시 볼수있으려나)
人間府仰已陣縱(인간부앙이진종 : 인간사 잠깐이면 옛 자취 되는 것을)

 

이성계의 호가 松軒(송헌)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소나무를 통해 그의 가치를
일깨우고 역사를 도모하고자 암시하며 그를 정치적으로 깨우치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교분을 통해 삶에 새로운 전기가 되어 그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9년

후에는 그 결실을 맿는다. 한사람은 새 나라의 군왕으로서 또 한사람은 地上天下의 1인지하의 만인의 추존받는

재상으로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당시 고려는 소생 불가능한 경지에 이르러 이의 회생을 위한  어떠한 방책도

무의미하다고 보고 백성들의 추앙받는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나라를 건립하는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思考(사고)를 굳히게 된 것이다.

 

 

 

기병과 보병 전투 전단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반대세력과의 충돌을 면할 수가 없었다. 당시 그의 정적은 스승인 이색을

중심으로 그와 동문수학하였던 우현보, 권근, 정몽주 등이었다. 이들은 쓰러져 가는 고려의 국체를 어떻해서라도
보존하려는 수구파였으며, 정도전 등 개혁파는 이를 부정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 나라를 건국하려는

입장이였으니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다.  
 
정도전은 다시금 정적으로부터 천한 출신이란  꼬리표가 들추어져 유배 길에서 정치생명이 끝나가는 듯하더니,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함으로써 단숨에 정국이 반전되어 긴 유배와 유랑생활 끝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도전은 그와 숙명적인 라이벌이 될 이방원에 의해 구원된 셈이 되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된 국체를 가꾸어 나가려 했다. 그는 재상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위치를 공고히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 하는 중앙집권화된 군사력이 필수로 당시 사병화된 개국공신들과
종친들의 병력을 흡수하여 한데 모아 관리하여야 만 했다.
그것이 ‘진법’이란 제도로써 요동정벌이란 명분하에 중앙관리로 훈련과 조직이 수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태조 이성계의 두터운 신임이 있어 가능하였다.

 


당시 사랑하는 강비를 잃고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니 뚤려버린 태조 이성계의  술자리 정인으로서 그의 신뢰를

통해 정도전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위상이 높아감에 따라 소위된 종친세력들과 재상중심의 정체와 세자책봉에서 제외된

이방원을 위시한 왕자들은 강한불만을 갖고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은
순발력 있게 병력을 동원하여 정곡을 찔러 권력의 핵심세력을 제압한
이방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종- 과도기의 혼란의 시대

 

正宗(정종)은 1357년 (공민왕 6년)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훗날 定安王后(정안왕후)김씨로 月城府院君(월성부원군) 天瑞(천서)의 딸이다.
부친을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근실하고 엄정하였으면 전장터에서 부친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의 회군시 龍虎軍 (용호군) 좌장군의 관리였던 그는 민첩하게 서경(평양)을 탈출해 부친의 진영에
합류해 회군의 성공에 이바지하였다.

 

 

                                                                             정종실록

                                                                        

 

 


하지만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을 위시한 공신들의 견제로 개국공신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하며

치부심 하던 차,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으로 위상이 반전 하게 된다.
1398년 9월 정종은 마침내 조선의 2대 왕에 오르게 되나 실세로 성장한 방원과 장성한 동생들로 왕자리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선 신진개혁세력들이 이룩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중앙집권화 정책을 통해 어느정도 방원이 추구하는 뜻에 교감하고 있었으며 상왕 이성계와의 관계도

원만이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군주로서 강력한 힘이 없었고 정처인 정안왕후 사이에서
자식도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서 미래의 권력인 후계구도는 언제나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동생인 방간과 방원사이에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이 터져 버렸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방간이 먼저 칼을 빼들었다. 동생 방간과 방원에  싸움에 정종은 소유하고 있던 甲士(갑사)의

일부가 방간의 진영에 참여하게 되어 방간을 지원하게 되었다. 방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방원은 책임을
물어 왕이 거느리던 사병과 공신들이 소유하던 사병들을 모두
해산 시켜버린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고 사병혁파와 함께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를

議政府(의정부)로 고치고 왕권강화정책을 추구하였다. 실권없는 정종은 정책에 소외되며 거세어지는
양위압력에 1400년 11월, 방원에게 2년간 지탱해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 자리로 물러났다.
 사실상 유폐생활과 다름없는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내기를  어언 20년
1419년 (세종 1년) 급환으로 거쳐하던 人德宮 (인덕궁)에서 6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진다. 
  

 

 

                                                                2차왕자의 난-방원의 집권

 

 


제 2차 왕자의 난- 방원의 등극

 

 2차 왕자의 난은 정종 이후에 왕위를 놓고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과 이미 실력자로 부각된 다섯째 방원의

 同腹(동복)형제간의 왕위쟁탈 싸움 이었다.

1400년(정종 2년) 정월,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와 함께 2차 왕자의 난을일으켰다. 방간은 성격이 과격하고

욕심이 많아 평소에 왕위에 미련을 갖고 있었지만 동생 방원의 기세에 눌려 지내왔다.
그런데 박포가 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야욕을 둘쑤겼다. 박포는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한다고

밀고하여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늘어놓다가 죽주로 귀양갔었다. 그런 그가 유배지를 이탈해 방간에

접근한 것이다. 박포는 정안대군 방원이 보위에 오르기 위해 장차 장애가 되는

방간을 제거할 것이라고 충돌질 한 것이다. 


회안대군 이방간은,셋째 益安君(익안군) 芳毅(방의)가 건재하여 명분상 문제가 있었고, 개국과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동생 방원의 위상이 너무 견고해 정치적으로 밀리고 있던 당시여서 그는 초조해져 있었다. 그러나 한때 방원의 충실한

참모였던 박포가 그에게 합류한 것은 큰힘이 되었고, 서북면을 근거로 육성된 그의 私兵(사병)은 든든한 힘이 되고

있었다. 또한 방원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正宗과  방원을 증오하며 경멸해 하는부왕의 존재도 큰 힘이 되었다.
방간은 방원이 평소에 나를 시기하니, 이에 속절없이 죽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궐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방원에 완전히 패배하였다.

 

 

 

승리와 패배

 

 

初戰(초전)에는 양군은 남산, 묘련산 고개 부근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잘 훈련된 정규군을 이길 수 없었다.
正宗이 보내준 일부 사병의 지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방간진영은 믿었던 부왕마저 동복형제간 싸움에 비난과

지원세력의 부족으로 戰勢(전세)가 기울어, 이지란 조영무 등 동북면에서 부터 전장을 누비던 실전 경험 많은
장수들과 이화, 이천우 등 종친 일부의 지원으로 방원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방간은 同腹(동복)형제란 이유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免山(토산)에 유배에 되고 박포는 참형에 처해졌다. 형제간의

유혈 충돌은 방원의 등극 명분을 주게 되어, 하륜과 조준 등이 정종에게 압력을 넣어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군권을

이양받는다. 방간은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59세로 천세를 누리다 생을 마친다.(1421년)

 

 

 


태종-창업에서 수성

 

1400년(정종 2년) 11월 13일,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이 그토록 염원하던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 였다..
태종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년) 5월 16일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와 첫 부인 한씨 사이에 다섯째

아들로서 이름은 芳遠(방원)이고 子는 遺德(유덕)이었다. 당시 부친 이성계는 34살의 나이로 동북면의  실력자로 군림

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태어난 이듬해는 明나라가 건국됨으로 대륙의 정세는 나라에서 明나라로 재편되어가고 있었다.

 

 

누대에 걸쳐 동북면 지역에서 무장으로서 입지를 굳혀온 이성계가문은 자녀 중에 누군가는 문신으로의 입신양명을

바라고 있었다.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은연자중 이 다섯째 아들에 기대를 하였다.

방원은 이러한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수학해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는
대과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1382년(우왕8년),

 

 

                       

 

 

 

                                                                         함흥차사                                                                   

 

조선이 건국되기 전 10년 전 일 이었다. 부친 이성계의 기쁨은 말로 표현 할 수없이 기뻤다.
평생 삶에 무쳐 살아오며 별로 도와주지도 못한 자녀가 턱하니 합격증을
보였을 때 갖는 부모의 마음처럼 우러나는 보람있고 대견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1392년 조선 왕조가 열렸을 때 방원은 26세의 혈기 왕성한 젊음이였다. 영특하고 욕망에 찬 젊은 왕자는 필연적으로

다음 권력의 수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차기를 노리며 절치부심하며 준비해온 자신을 턱하니 나이어린

이복동생 방석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으니 그 실망과 불만은 삭히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들이었다.
그는 칼을 빼들어 아버지 이성계에게 겨누었다.
권력의 유혹은 천륜을 무시하고 있었다.

 

 

 


조사의 난- 부자혈전

 

권력이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속성으로, 아들은 아버지가 이룩한 권좌를 피를 뿌리며 탈취하여, 부자지간은 합쳐

질 수없는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권력의 절정에서 어쩔 수없이 내려온 태조 이성계는 깊은 恨(한)을
삭이며 먼저 떠난 강비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리고 政爭(정쟁)의 와중에 희생된 어린 왕자들의 혼령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부처님에 귀의한 딸을 위해 불사에 전념하며 하릴없이 자신의 추억이 깃들은
동북면을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동북면에는 아직 이성계의 대한 변함없는 신망을 갖은 세력이 여전히 건재 하고 있었다. 태종 방원은 이런 속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기 전에는 동북면 절제사가 되어 태조의 군사적 기반을 장악하려했고

 1·2차 왕자의 난 때 활용하기도 했다. 

 

 

 

상공에서본 지금의 압록강 하구와 위화도

 

 


1402년 (태종 2년) 10월 19일,
檜巖寺 (회암사)에서 은거하던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행차를 감행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明의 사신을 배웅하고 동북면에 있는 조상의 능을 참배키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 같은 해 11월 5일, 강비의 친척인 안변 부사 趙思義 (조사의)가  거병하였다. 그들은 동북면 상황을 살피기위해

파견된 박순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서북면과 동북면은 행정조직이 군사조직과 연결된 특수한 조직이였다.
여진 등 북방세력을 방어하기위해 마련되었으나 반란군은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는데 활용하였다.
반란군의 전체규모는 6~7천 명 정도였으며 그때그때 호응하는 여진족이 합류해서 족히 1만명에 달하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는 이천우의 기병 100여 명이 반군에 생포되고 이어 관군이 孟州 (맹주)에서 패배하자 태종 이방원은

친히 진압코자 홍건족과 왜구와의 실전에서 용맹을 떨친 그의 측근 이거이, 조영무, 이숙번, 민무질 등 역전의 용사들을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이들은  11월 27일 안주에서 조사의 반군을 섬멸하고, 흩어진 반군은 한 밤중
薩水(살수:청천강)을 건너 도주하다 강에 빠져 궤멸되고 조사의 등 잔여병력은 안변으로 도주하다 관군에 생포된다.

 

 

                                  태종 이방원의 친필        태종 이방원과 공신들과의 군신간 충성 서약문(자료-국사편찬위원회)

 

 

태조는 같은해 12월 9일 환궁하여 실질적인 연금상태에 들어감으로서 亂(난)은 일단락 된다. 여러정황으로 보아

태조 이성계가 이 반란에 개입되었다는 여지는 있었으며, 난의 진압 후 조사의와 그의 아들 홍 등
반군 지도자 16명은 참살되어 효수되었다.
조사의 난의 평정으로 태종의 왕권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역사의 뒤안길로

 

태종 이방원은 원래 문관 출신이었다. 무장출신인 태조가 그리 피하려했던 유혈사태를 회피하지않고 정면으로 돌파하여

역성혁명의 장애를 걷어냈다. 태조의 즉위과정과 태종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왕권 확립에 저해될만한 요소들을

가차없이 제거하였던 것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척살, 두문동에 은거했던 유학자들을 몰살, 창업동지였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포,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 처남 민씨4형제, 며느리의 부모인 사돈 심온과 심정 등 모두 그 희생자들 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터져나온 태상왕 태조가 연계된 조사의 난이 일어났고 재위 내내 왕비 민씨와의 불화,

만년에는 세자의 기행으로 숙원이었던 장자계승을 포기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태종은 건국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전반에 걸쳐 체제정비와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 세종시대
정치적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의 전제적 강압정치는 오늘날 과오보다는
공이 더 많은 것으로 評價되고 있다.

亂世(난세)에는 선도자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해 혼란을 타파하고
혁신을 통한 정의롭고 가치있는 결실을 이룰 때 바르게 평가되나 보다.
난세에 영웅이 나는 것인가..

 

 

 

                                                                   태조 이성계의 릉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즉위한 후 7년간 보위에 있다가 1398년 둘째아들 정종 이방과(李芳果)

에게 왕위 물려주고 상왕과 태상왕으로 10년간을 더 살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드넓은 평원과 우거진 산야를 마음껏 누비던 출중했던 젊은 날의 기상과 그를 반겨주던 민생들,

절치부심하며 이룩한 새나라의 왕위에 등극하던 날
자신을 우러러보며 펼쳐지는 함성 들..

평생 강씨에 묻혀 여자로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첫 부인 한씨에 대한 미안함..

어린자식을 부탁하며 눈을 못 감던 그토록 사랑하던 강비와의 추억..

어린 동생들과  따르던 재상들을 무참히 제거한 반란의 주역 방원의 잊혀지지않은 모습..

일어서고 사라져간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이들의 모습들과 어이없는
주검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지나가며....

 

저 멀고 먼 세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때는 1408년(태종 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태조 이성계는 7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거두었다.

 

능호는 建元陵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영면하였다.   
      

        

 


자료 : 혁명의 조건(신봉승), 조선태조이성계(김성한), 고려왕조실록(박영규),
      조선건국지(이정근), 조선왕조실록(유종문,이상각),혁명(김탁한),조선왕조사(이성무)

      (daum,위키)백과 .(고려,조선)왕조실록site.   

     

      그림- daum (카페,이미지),(daum,위키)백과,(k.b.s, s,b,s,m.b.c,교육)방송 캡쳐,(고려,조선) 왕조실록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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