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궁지에 고려는 없고 조선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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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찰,문화재 탐방기

2015. 11. 6.

강화는 지리적인 여건이 외세 침략의 전면에 있어선지  전란의 역사가 점철된 곳이다.

고려때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조의 수도인 한양 뱃길의 관문 역활을 했고

이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외세 침입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고려조 때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피헤 39년간 임시 수도가 되었고

조선 인조 정묘호란에는 인조가 이곳 강화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강화에는 많은 방어시설들이 있다.

 

고려때 만든 군사시설은 대부분 몽고와 화친 때에 몽고의 요구로 철거 되었고

현존하는 방어 시설들은 대부분 조선조 중기 이후에 건설된 것들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소재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후 고려왕실은 원종 11년에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로

 1232년 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년 5월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개수한 ㄷ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외규장각

 
조선시대 왕립 도서관격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서적의 안전한 관리를 목적으로 인천 강화도에 설립
 

1781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하여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 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
한편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처음 발견된 후,

한국 정부는 이 도서들에 대한 반환을 추진해 왔다.

이후 1999년 한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2001년까지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한국 정부는 약탈도서에 대한 영구대여 방식을 프랑스 정부에 공식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1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5년 단위 갱신의 대여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약탈해 간 294권의 조선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4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네이버)

 

 

 

 

 

 

규장각의 도서를 넣어서 보관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상자

 

 

강화유수부의 동헌

지금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만녕전등 고려의 궁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수령 400년이 넘는 이 고목들은 고려궁지의 수난사를 묵묵히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조선시대 강화 유수부의 이방청

오늘날의 강화 군청에 해당되는 청사다.

 

 

명칭은 고려 궁지인데

이 곳에 가보면 고려 때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조선조의 흔적만 찾는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