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배세복 시인 / 피항避航 외 5편

댓글 0

◇ 시인과 시(현대)

2022. 6. 30.

제목 없음

배세복 시인 / 피항避航

 

 

돛으로 몰려드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요 이제 항로를 벗어날 시간이에요 일 년 전 태풍의 시절처럼 말이죠 길어야 사나흘 정도의 피항이라 생각했죠 허나 밤바다에서 바라보는 별이 한없이 새끼를 치는 것처럼 밤은 또 밤을 낳았죠 어느 밤은 앞배가 빠져나가지 않아 어떤 밤은 뒷닻이 풀어지지 않아 또 무수한 어느 밤 동안은 천지사방이 여울목 귀신처럼 울어대서요 어찌 당신 품을 떠날 수 있겠어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뭍을 올려다보면 아무 말 말고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돛대를 입술에 갖다 대던 당신이었지요 아 모항母港, 모항모항 입 안에서 마구 맴돌았지요 올해는 정말로 며칠만 머물겠습니다 까치놀 사라지기 전에 어둠 깊어지기 전에 피항항避航港 당신 품으로 가겠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선장은 소리 질러요 거긴 벌써 몇 해 전에 폐항돼 버렸어

 

시집『목화밭 목화밭』(달아실, 2021) 중에서

 

 


 

 

배세복 시인 / 해돋이 단상

 

 

원-웨이 티켓 원-웨이 티켓!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있다고

포장마차는 밤새 외친다

가시 관목 사이 끼어있는 저 축구공

쭈글쭈글한 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제 처지를 읊는 노래를 듣는다면

심정이 어떠할까 그런 사람 있었다

저수지였고 안개 피어오르는 밤이었다

밤새 어떤 실연의 노래를 불렀고

제 노래에 취한 사지는 벌벌 떨렸다

해가 시리게 돋았고 꼬박

하루 만에 젖은 티켓으로 떠올랐다

왕복권을 버렸다 다시 또

거리엔 입술 쭈그러든 종이컵과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의 새벽

도로 양 옆으로는 불 꺼진 채

마구 정차해 있는 자동차들

따지고 보면 아무도 새 차 살 때

연탄불 피우며 잠들

훗날은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해가 돋을 때는 바람이 잠깐 멈추기도 한다

허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외치듯

바람은 편도로 분다 만약

방향이 바뀐다면 그건 오늘의 바람이 아니다

 

 


 

 

배세복 시인 / 점묘의 나날

 

 

당신처럼 어눌한 화가는 처음이다

밑그림을 한 줄도 그리지 않았기에

채색이 시작될 거라곤 생각 못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세상을 건너뛴 당신

구멍 난 캔버스가 보이지 않냐고

어찌 내 앞에서 무례하게 붓을 드냐며

수많은 밤 당신의 팔레트를 집어던졌다

펄펄 뛰던 밤들이 감히 지나가버리고

꿈마다 찾아가서 훌쩍거리면

벚나무에 물어보라 당신은 시치미 뗐다

지는 꽃잎은 꽃자루를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듯

봄밤은 제멋대로 벚꽃잎을 점점이 휘날리고

따지고 보면 절필을 강요한 건 나였다

누구보다 아둔한 캔버스였다

 

 


 

 

배세복 시인 / 아리아

 

 

 엄마가 보고 싶으면 아, 아빠가 보고 싶으면 오, 하는 놀이였죠. 동생은 자주 울었으니까요 엄마아빠가 늦는 저녁마다 동생을 달랬는데요 밤에 울면 뱀이 나타난다는 미신 따윌 그는 곧이들었죠 그날 저녁도 어스름 없이 밤이 되었죠 울음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그를 뒤뜰로 데려갔죠 중간중간 울먹임이 새어나왔지만 그것마저 막을 순 없었죠 그들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죠 살구나무를 사이에 둔 뒷집 부부는 엄마아빠를 감옥에 집어넣을 작정이었으니까요 간장독을 모두 열고 쪼그려 앉은 채 동생의 소리에 맞춰 리코더를 불기 시작했죠 밤에 울고, 밤에 피리를 불고, 밤에 간장독을 열어놓으면 뱀이 나온다고 했으니까요 실눈을 뜨고 보니 구렁이 너덧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뒷집으로 넘어가는 게 보였죠 담을 타고 들려오는 비명, 우리는 서로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들었죠

 

 


 

 

배세복 시인 / 시작종은 울리고

 

 

 우리는 자주 동그랗게 뭉쳤네 서로 어깨를 겯고 강강술래! 그들은 날 가운데 두고 선창을 기다렸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어지는 후창 ‘오오 뭘 잘못했을까아’ 그리고 벼 타작 후두둑후두둑, 계피 껌을 샀네 쌉싸래한 맛은 볏가리에 몸을 기대게 하고 하늘에는 낮달! 쪽배는 내게 없어 단물만 빠져갔네 내일은 어떤 길로 돌아갈까 어떻게 소릴 메겨야 할까 까무룩, 꿈속에는 달아달아 밝은 달아 모두 흥에 겨웠네 어디선가 우르르 토끼떼 나타나 절구를 찧었네 쿵쿵쿵쿵, 나는 소스라쳤네 시작종은 울리고 하늘은 푸르고 아무도 찾지 않고 시발, 처음 뱉은 욕은 유용했네

 

 


 

 

배세복 시인 / 목화밭 목화밭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에게 배운 노래 흥얼거리며,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게 진짜 꽃일까 누이는 분홍색 진짜 꽃만 꽃이라 불렀지만 목화 다래 익어 벌어진 목화솜도 나는 목화꽃이라 우겼네

 

목화밭 목화밭~, 홀로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 없이,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멀리서 볼 때만 한없이 아름다운 꽃이었네 두둥실 흘러갈 것만 같은 꽃이었네 아무리 따도 바구니는 채워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멀리서만 그러하였네

 

목화를 따러갔네 목화를 따지 않았네 밭둑 사이 피어난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보았네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하늘에도 저렇게 많이 피어있다니 저 꽃으로 뭉텅뭉텅 바구니 채웠으면 좋겠다 그치? 없는 누이에게 말을 걸고 또 말 걸고, 잠이 들었네 몇 겹으로 꿈을 꾸면서

 

 


 

배세복 시인

​충남 홍성에서 출생. 201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으로 『몬드리안의 담요』, 『목화밭 목화밭』이 있음. 현재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문학동인〈Volume〉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