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성렬 시인 / 루비콘 강에 내리는 유성우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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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2022. 7. 1.

이성렬 시인 / 루비콘 강에 내리는 유성우

- 일상다반사 3

 

 

어느 흐린 일요일에 K는 보르헤스의 「갈라지는 길들의 정원」을 읽다가 용산 근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열차의 좌석을 구성하는 모반의 분자들과 그의 둔부를 지탱하는 우울한 세포들 사이 미세한 불화 때문에 K는 철로 위 공중에 떠 있었다

 

남영역을 지난 열차는 후암에 정차했다. 후암역이라니?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1호선 전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남영역과 서울역 사이에는 후암, 동자역이 확실히 놓여 있었다

 

그의 맥박은 평소의 1/3로 뛰었고, 손목시계의 초침도 1/3의 속도로 움직였다.

 

남대문역 승강장에서 백인청년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동족의 머리가죽 네 개로 저글링을 연기하였다. 가시면류관과 황금도포로 장식한 흑인 사제들이 <귀여운 바바리안녀석이군!> 이라고 외치며 환호했다

 

삼성생명역 구내 벽에는 암적색의 플래카드 <만국의 CEO들이여 단결하라!>

 

종각역에서 내려 K는 종로서적 2층 매장으로 올라갔다. 신문에서 본 광고 - 오래 짝사랑했던 배우 이은주의 후일담집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요?」 팬싸인회를 두 시간 기다려 그녀의 서명을 받았다

 

KAL의 새로운 노선 종착지인 체코공화국의 마을 노베흐라디의 위치를 찾으려 여행서적을 살펴보았으나, 국가별 분류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세계지도를 펼치니, 모든 국경이 폐지되어 지구는 주홍색 땅덩어리였다

 

단일 색상이라니... 세계는 통일된 것인가, 아니면 핏빛 픽셀들로 무한히 분열한 것인가?

 

직장을 잃은 외교부와 방위부 고위관리들의 몇 세대 가족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외계인침공대책특위 신설을 촉구하였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 안국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뒤가 무거워진 K는 화장실로 향했다. <R. Mutt 1917>이라는 상표의 변기*가 샹들리에처럼 눈앞에 흔들리는 장면에 경악하여 항의했지만, 거기는 예술가 전용이라고 안내원은 답했다.

 

안국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 K는 교외로 향했다. 차체 측면에 <루비콘>이라는 로고를 부착한 찝차들이 자유로의 바깥, 벼랑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만능줄기세포 과학자에게 신도들을 빼앗긴 교주가 독주를 마시며, 고양 벌판의 잔디밭 한 조각에 올라타 정발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긴급재난문자가 도착, 오늘밤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쏟아질 것이니, 자외선에 눈이 먼 남극 펭권을 반려동물로 키우는 생태시인들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불현듯 전화가 걸려왔다. <K작가님, 오늘이 원고 마감일임을 알려드립니다.> 작가라니? 지적 허영에 젖은 고객상담사에게 웬 기담인가? 중얼거리는 사이

 

맞은편의 검은 기관차가 차선을 바꾸어 돌진해 들어오자 그는 비명을 내질렀으나, 두 유령들은 짧은 포옹 후에 천천히 멀어져갔다.

 

돌아오는 길, K는 서울역을 지나 다음역인 남영에서 내렸다. 쓸쓸한 휴일 저녁에.

 

*마르셀 뒤샹의 작품.

 

 


 

 

이성렬 시인 / 암전 2 - 마지막 연금술사

 

 

1

기다리던 폭우가 오지 않아 한쪽 눈에 인공눈물을 뿌리니 빼어든 휴지가 흰 비둘기로 변신해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이제 쓸모없는 마술만이 남아 괴롭히는군. 그는 중얼거린다. 흐린 별빛으로 가득한 무대 위의 모략과 살인의 연대기 안개와 같은 확신이 연옥을 밝혔던 세기를 읽는다. 꿈속에 자주 나타나 한밤의 잠을 깨우는 먼 나라의 왕후 그대는 가시나무 숲 너머 색색의 대리석 기둥을 바람으로 갈며 유폐된 수녀원의 끔찍하게 지루한 생과 컴컴한 분노를 다음세상에서 펼칠 현란한 분신술로 다스려 견디었던가?

 

2

어항 속 금붕어들이 역린을 저으며 서녘으로 향한다. 그 동안 식단을 점령한 보랏빛 우울은 관상용이었던가? 창밖은 컬트무비의 세계, 세도가의 폐색된 경동맥을 대체하려 진화를 거듭한 환형동물들이 주목朱木 뿌리를 타고 오른다. 군주의 총애를 받던 미희들의 클부에서 금박으로 치장된 접선들이 중력의 밧줄에 묶여 지하실로 하강하는 시각 낭하를 지나는 누군가 음울한 음향을 휘파람에 실어 보낸다. 흰 공단을 입은 밤들은 종말에 이르지 않네*, 그는 도록을 열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포스터의 검붉은 배경을 응시한다.

 

3

침묵하는 벽, 딱딱한 대기, 성대를 잃은 서신들이 문밖에 눕는다. 전 세기의 기관차처럼 화분에 박혀 부화된 욕망의 검은 껍질들 풀리지 않는 반응식들이 쇠사슬을 쩔렁이며 세상을 떠나는 사이 양피지 위 지워진 암호로 가득한 비늘구름이 구릉 위로 떠오른다. 정금으로 변신하기를 거절하는 원소들에 작별을 고하며 묻는다. 이 밤의 기획자는 오늘도 거리에서 눈가리개를 나누어주는가? 격노하는 열차를 껴안아 산산이 부서지는 시간의 늑골을 본 자는 살아남지 못하니, 부디 잘 살기를, 늘 웃어넘기기를! 부르튼 혀에 짠맛이 내릴 때 먼 나라의 소금꽃이 벽돌 아래에 침묵하고 있다.

 

*Moody Blues,

**독일의 표현주의 호러 영화

 

 


 

 

이성렬 시인 / 블루클럽

 

 

늦은 가을 저녁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나의 텅 빈 시선 끝에, 그곳은 심해에 내려진 어항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방파제 바깥을 응시하는 밍크고래의 매끄런 뱃살을 닮은 푸른 간판에 손을 대었을 때에 - 나의 동공에는 사막에 세운 조화의 두텁고 매끈한 이파리들이 부유하였다. 그 적막한 클럽 안에서는 반짝이는 은빛 도구들이 부딪는 차가운 소리만이 간간이 흘러나올 뿐, 비스듬한 의자들의 미간에는 표정이 없었다. 맞지 않는 틀니처럼 생경한 삶과 결별하고자 낯선 빛살로 가득한 그 해연에 내려앉으니, 빛나는 머리칼을 말끔히 빗어 넘긴 그곳의 과묵한 현자는 한 달 동안 자란 나의 미망을 무심히 잘라내어 바닥에 흩뿌릴 뿐 -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고 싶다고 내가 고백하려 할 때에,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후 내 몸에 걸린 수도자 의 푸른 도포를 냉정하게 거두었다. 안경을 벗긴 채로 몇 분 사이 거울 앞의 생을 가늠하려 한 나를,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 다시 캄캄한 성간으로 돌려보내며.

 

 


 

 

이성렬 시인 / 6월의 응혈 -그림자 도시에서 12

 

 

외로운 시인의 무덤처럼 풀꽃을 흔들며 날은 저물어

이윽고 두려운 별들의 침묵이 창가에 내린다

아무도 모르게 지갑 속에 쌓이는 먼지에게 말을 걸며

무작위로 배치된 옷본들 앞의 침통한 재봉사처럼 묻는다

이 낮은 저녁에 너는 적멸을 생각하고 있는가?

굶주린 문장들이 사생결단으로 부딪는 세간을 떠나

얼음과 물과 수증기 사이의 머나던 통로들을 가늠하려는

그 열망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시 너의 방으로 날아들었다가 홀연히 가버린

날개를 다친 새의 가까운 비명을 들으며 짐짓

영원을 떠올리는 것은 아득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시간표를 뜯어보며 시시각각 만나고 헤어지는 열차들의

이마를 떠올리는 고독한 결핵환자의 몽유와 같은 것

매번 주인이 바뀐 술집과 다시 화친하려는 술꾼이나

밤의 카페에서 소녀가장 시절을 회상하는 여자처럼

사건들의 표리가 만나는 지평을 서성이다가 너의 지도는

그 잔혹한 거리로 말없이 돌아오는 것이겠지, 누군가

드나들 때마다 파안대소하는 주렴의 부서지는 손길에

죽은 새의 날개가 품은 무거운 수증기가 반짝, 너의

눈가에 내리는 이슬방울의 설렘으로 빛나는 그날에는

 

*마츠모토 세이초, 점과 선

 

 


 

 

이성렬 시인 / 새벽 네 시 반의 조율

 

 

1

 

꿈에서 퍼뜩 깨어난다. 낯선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그곳의 기후는 척박하여 폭설과 돌풍, 격한 일교차를 달래는 물의 표피에 투명한 표정으로 얼음산들이 떠 있었다. 그 거대한 냉혈의 하반신에 새겨진 흑암은 사나운 파도 아래 보이지 않았다. 휘어진 척주를 내보이며 서로의 유속에 기대는 물고기들의 빛나는 아가미로부터 짐작했을 뿐, 시공간의 전이가 운명을 바꿀 수 없으나, 심한 저체온증이 얼어붙은 눈꺼풀을 열어젖힌다.

 

2

 

거센 물살의 집요한 손목을 뿌리치고 순간이동 - 이 우울한 행성은 아직 건재하다. 손을 뻗어 단단한 바닥을 만져본다. 육중한 단절의 벽들이 지면을 떠받치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수직단 층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지진학자들의 결론에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세찬 중력이 세포벽을 짓누른다. 인력이 없는 가볍고 명랑한 공간에 머물기를 원하나, 저항에 대응하지 않는 진공 속의 동작은 무명함을 나는 알고 있다

 

3

 

탁자 위 선인장에 물을 흩뿌린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폐의 식물은 언젠가 호소하였 다 - 햇빛 한 점, 비료 한 줌 스스로 발밑에 내릴 수 없는 운명에 대하여. 도대체 왜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 탁자는 말끔하다. 며칠 전에 찾아온 친구가 어둠의 무늬를 손수건으로 찬찬 이 닦아 주었기에. 하지만 그간 쓰려고 작정했던, 신이 지상에 실수로 흘린 얼룩들에 대한 짧은 시를 미루어야 했다

 

4

 

뻐꾹시계가 두 번 뻐꾹거린다. 아니, 틀렸다 - <뻐꾹 거리지 않는다. 그것을 문자로 기록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긴 글을 쓰려 하겠지만, 그러나 뭔 대수인가? 잠을 이루지 못 할, 먹지도 못할, 비명을 내지를 정도의 간절한 사연인가? 뻐꾹시계의 울음(아니, 틀렸다. 울지 않는다)에 관해 누가 물어온다면 직접 채취한 음파를 들려주면 될 것임을

 

5

 

나는 차라리 거대한 허위와 지독한 소외, 무자비한 폭력의 검은 옷들을 감싸는 이 도시의 실 상 앞에서 심장을 오그라뜨린다. 실상이라니... 실상의 그림자,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는 고백한다 - 사랑을 잃고 만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전봇대에 한쪽 눈을 잃은 친구의 쓰라린 기억과, 결코 물러서지 않는 충격량의 법칙 - 그것이 내 시의 씨앗인 실상 들임을

 

6

 

화면에서 배우들이 물러가고 스탶의 이름들이 흐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그 상형문자들 은 십 수 년 동안 벽을 향해 중얼거린 나의 시편들을 닮았다. 힘센 그들의 가공할 무기-침묵* 에 대해 다시 곰곰 생각한다. 어지럽다. 그러니 나는 독한 외로움과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노래를 창가에 올리며 잠든다. <잠자는 하늘 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십일월의 깊은 밤에 말러를 듣다」

**한영애, 조율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밀회』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副주간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