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권기덕 시인 / 도마뱀 외 3편

댓글 0

◇ 시인과 시(현대)

2022. 7. 2.

권기덕 시인 / 도마뱀

 

 

 도마뱀이 도마뱀 그림 속에 들어간다 도마뱀이 그림 속 도마뱀과 만나 살구를 혀로 핥는다 살구에서 봄 햇살이 흘러나온다 봄 햇살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림이 물에 젖는다 물에 젖은 그림에서 도마뱀이 허우적거린다 그림 속 도마뱀이 그림 밖으로 기어나온다 도마뱀은 수납장, 가죽 가방을 지나 잠든 그녀 꿈속으로 들어간다 곤충을 잡아먹는다 그녀의 불안이 깊어 간다 도마뱀은 늘 번식을 꿈꾼다 그녀의 안과 밖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다 도마뱀이 꿈속 구덩이에 빠졌다 기어오르기를 반목하는 동안 화분에는 꽃이 피거나 잎사귀가 부풀어 오른다. 세상에 없는 문장들이 꿈 밖에서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세 아이를 껴안고 죽은 어느 여인의 신문 기사 주변을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그림자마다 도마뱀 꼬리를 가득하다.

 

 


 

 

<동시>

권기덕 시인 / 라면

 

 

내가 만약 라면이라면

 

운동할 땐 고릴라라면

춤추고 싶을 땐 캥거루라면

대화가 필요할 땐 앵무새라면

수영하고 싶을 땐 물개라면

협동할 땐 개미라면

여행하고 싶을 땐 제비라면

깜깜한 길 가야 할 땐 올빼미라면

친구 도와주고 싶을 땐 악어새라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라면이 되고 싶다

 

- 「동시발전소』 (2019년 여름호)

 

 


 

 

권기덕 시인 / 정글짐

 

 

바람집에 갔어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초대해 준 친구가 없어도 들어갈 수 있었죠 창문은 늘 열려 있어 무섭진 않았어요

 

단지 좁은 방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몸을 굽히거나 눕히며 거인 발소리를 들어야 했죠 방마다 바람의 목소리가 달라 과자 부

 

스러기를 흘리기도 했구요 거인 발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잡아먹힐지도 모를 불안감에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때마다

 

거꾸로 자라는 나무, 불어나는 그림자도 보였죠 바람집을 겨우 빠져나오면 늘 불이 켜지곤 했어요

 

 


 

 

권기덕 시인 / 여우비

 

 

햇볕이 쨍쨍했는데

비가 내렸어

 

책가방 어깨끈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우산이 활짝 펴졌어

 

책가방과 내 몸을

우산이 보호해 줬어

 

우산은 프로펠러가 되어

빙글빙글 돌았어

 

나는 어느새

공중을 날고 있었어

 

동네 떡볶이집을 지나

남산타워를 지나

만리장성을 지나

 

여우를 만나러 갔어

 

 


 

권기덕 시인

1975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대구교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 여름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P』 (문예중앙, 2015), 『스프링 스프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