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김규성 시인 / 법성포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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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2022. 7. 2.

김규성 시인 / 법성포

 

 

그때, 너나들이 가난에 세 들어 사는 고향은 칠산바다가 온통 술도가인 듯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술고래였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단연 왕 고래이셨다. 나는 아직도 속이 술술 풀려야 눈 질끈 감고 겨우 소주 반병쯤 마신다. 그래서 내 술은 음주가 아니라 약주라고들 놀린다 아버지는 그렇게 독약의 독은 당신이 죄 드시고 유산으로 내 속에 약만 슬쩍 담아 두셨다. 그 약을 딱 한번 치사량 직전의 독일 때까지만 마시고 싶다. 아버지가 그 속에 계실지 모른다.

 

 


 

 

김규성 시인 / 아름다운 시

 

 

게슈타포는 아우슈비츠에서 퇴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꽃병의 물을 갈고는

브람스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이네의 연시를 읊었다 그리고

다음날 더 많은 목숨을 가스실로 보냈다

 

-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달아실, 2019)

 

 


 

 

김규성 시인 / 둥근 눈물

 

 

눈물은 둥글다 눈을 감아도

둥글게 흐른다

그 한 방울 검은 호수의

일억 마리 벌레가 부화한

일억 개의 하얀 죄

그것을

둥글게 발부리에 쏟는다

 

거기서

零이라는 숫자가 태어난다

 

 


 

 

김규성 시인 / 줄탁 2

 

 

 시골 버스 안, 아기는 거푸 옹알이를 하고 엄마는 설익은 몽골반점을 북채 삼아 아이구 잘하네 아이구 잘하네 덩달은다. 아예 때묻지 않은 우주의 모국어에 입맞춰 혼신을 다하는 고수가 빚어내는 절창이 공짜라니! 그때마다 온몸이 입술로 달아오른 버스도 퇴행성관절염의 궁상각치우를 들썩들썩 한다. 나도 저 고수의 숨가쁜 장단 좋아 아무 두려움 모르고 낯선 부대의 첫발을 내딛었었지 그런데 어느새 북채도 없이 고수일 때가 있다. 형 죽고 나서 지상에서 가장 낮은 음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옹알이 하시는 어머니. 모처럼 외식이라 도 할 때면 나는 어머니의 맷돌 같은 틀니 새에 어처구니로 숨어들어 저승을 한 바퀴 돌아오듯 오랜 추임새를 하는 것이다. 오매 울 엄니,

한 그릇 다 드시네 오매 울 엄니 한 그릇 다 드셨네

 

 


 

 

김규성 시인 / 꽃잠

 

 

 꽃잠이라고 했다 꽃들의 잠? 아니 꽃처럼 고운 잠? 그러나 꽃은 온몸을 활짝 뜨고 눈부시게 살 떨려 깨어있음 아닌가 아마도 신혼의 꿀 잠 만한 한 열흘 설렘이 맞을, 국어사전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순우리말이 혀끝에서 감칠수록 달다 요새 그 꽃잠을 자주 들킨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막(幕) 중의 섬광 같은 이승을 순간 포착하려는 어여쁜 수작 같은, 아주 죽음에 이르러서야 아, 꽃잠 한 숨 잘 잤다고 잘 익은 꽃향기처럼 화들짝 깨어날 것만 같은, 그래! 누군가 너무 쉽사리 못박아놓은 고해(苦海)가 꽃잠이라면 이왕 꽃 중의 꽃으로 아름답고 알큰한 꿈이나 꾸자꾸나 사랑이여, 잠꼬대를 꽃말처럼 바지런히 받아 적는가

 

 


 

 

김규성 시인 / 선운사

 

 

 구름은 허공이 바다라는 걸 말하기 위하여 갖은 재롱을 부린다 먹구름은 바다가 간만의 차가 심한 사리 때의 파도이다. 새털구름은 잔잔한 조금 때의 파도이다. 그 바다에는 밀림보다도 빽빽한 생명의 주소록이 있다. 선운사는 그것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허공의 약도이다. 동백숲은 저 높이서도 밀물과 썰물의 눈에 쉽사리 띄도록 떼지어 청등 홍등을 번갈아 켜는 허공의 부표이다. 허공은 하루에도 몇 차례 선운사에 내려와서는 지상의 기색을 살핀다. 그 흔한 춘란 한 포기도 허공의 걸작이다.

 

 


 

김규성 시인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와 산문집 『산들내민들레』, 『뫔』 등이 있음.